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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에 빠진 남편을 설득>
저는 우리나라 중동부 최북단인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민통선 북방) 부녀 지도자 김영숙입니다.
평범한 가정의 1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나 가정 사정으로 여고를 중퇴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화물차 2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술과 향락을 일삼게 되어 신혼 생활을 셋방으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기꾼의 농간으로 화물차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지금 사는 서화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휴전선이 4km 전방에 가로 놓인 3·8선 이북으로 6·25 동란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던 이 마을을 국군의 탈환으로 재 수복된 마을이었습니다.
1956년 4월 25일 정부의 배려로 당시 이 고장에 연고를 가진 50세대가 처음 입주를 하여 초토화된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 그 후 점차적으로 입주 인구가 늘어 지금은 총 호수 213호에 1,153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마을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경지 면적도 총 247ha로 호당 평균 경지 면적은 1.2ha의 중동 마을입니다.
주민 구성도 원주민은 30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각 지방으로부터 모여든 외래 인으로 협동심이라곤 전혀 없고 이기적, 배타적 사고방식으로 이웃을 모르고 살아가는 실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주거환경은 수복 당시 임시로 건립한 오막살이 또는 판잣집을 그대로 쓰고 살아오고 있었으며 개선에 대한 의욕조차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철만 되면 사랑방에 술과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하기 일 수였으며, 또 접적지역이라 정착해 사는 사람보다는 유동하는 사람이 더 많아 애향심이라고는 전혀 없고 이런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이웃과의 갈등과 싸움질이 끊일 날이 없었고 낙후 마을이란 불명예는 결코 벗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마을로 이사 온 저희 집도, 남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녁 나들이 횟수가 늘어나는 남편의 거동을 살펴보니 투전판에 드나드는 것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남편이 투전판에 손을 뻗히고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문득 사흘이 멀다 하고 부부 싸움을 하는 이웃집 아주머니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 년 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 피땀 흘려 지어 놓은 곡식을 투전판에서 날리고 돌아온 남편들과 밤새워 싸우고도 숙명처럼 체념하고 받아 들여 주는 마음 착한 아주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을 생각하며 그들을 충동하여 그들과 힘을 모아 남편들의 방탕생활을 막아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을 찾아다니며 남편들의 방탕생활은 이것을 보고만 있는 우리 아내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함께 힘을 모아 막아 보자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절미저축으로 구판 사업을 시작>
1973년 10월 저와 뜻을 같이 하는 13명의 부녀자들을 모아 부녀회를 조직하고 제일 먼저 도박 소탕 작전을 벌리기 시작했습니다. 진눈개비 내리는 밤이나 눈보라치는 밤 가릴 것 없이 어린 것들을 등에 업고 밤거리를 헤매며 도박판을 찾아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밤씩 지새우며 돈을 잃은 남편들의 충혈 된 눈동자와 원망과 경멸의 눈길로 보이는 것이 없는 아내들의 만남은 서부 활극을 방불케 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의 폭력에 항복하고만 부녀들은 도리어 저를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어떤 욕설과 봉변도 감수할 각오로 남편들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나는 남자 분들마다 붙들고 지금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새마을운동과 농촌 근대화 대열에 우리 마을만 떨어져 있다고 호소하며 남자들의 일손이 필요하다고 설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끈질긴 설득과 호소로 남자 분들의 협조가 이루어지고 우리 마을도 활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녀들은 이때부터 절미 저축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옥수수나 감자를 주식으로 살아가는 처지에 절미를 뜬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한 끼에 한 수저씩”이란 표어를 붙인 항아리를 부뚜막에 올려놓고 정성껏 뜬 결과 한 달 만에 13명이 모은 절미가 8되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팔아 비누 몇 장과 미원 몇 봉을 도매상에서 사다가 아침, 저녁 시간 나는 대로 판매했습니다.
그렇게 장사를 하고 절미를 계속 뜨다 보니 2개월 뒤에는 18,000원이란 자금이 마련되었습니다.
회원들의 결의에 따라 구판 사업을 하기로 하고 마을 한 복판에 비어 있는 가게를 세내어 구판장 간판을 달고 구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3명씩 당번제로 실시하여 모내기 때나 탈곡할 때는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고,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6개월이 지난 후에는 12만 원의 자금과 회원도 30명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금전이 목적이 아니고 소비자를 위한 소비조합과 같이 교통의 불편을 이유로 물건 값을 마음대로 받는 상인들의 폭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시작한 것이므로 염가로 판매하자 예상 외로 호응이 대단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가게가 잘 되자 상인들이 농간을 부려 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비워달라는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갖 고초는 인내로 극복하며>
우리 회원들은 낙심하지 않고 합심하여 마을 한 모퉁이 회원 집 처마 밑에 사과 상자로 벽을 만들고 비닐로 지붕을 만들어 어설프게나마 구판장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렇게 극성스럽게 구판장을 운영하다 보니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고통스런 문제는 물건 구입과 함께 밤에 잠자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4km나 되는 길을 새벽 4시에 일어나 걸어가야 차를 탈 수 있고, 물건을 해 올 수 있는 마을 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밖의 일과 집안일에 시달리다 보면 피곤해 새벽 4시에 잠을 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대문을 두들겨 깨우자니 어른들이나 남편들의 핀잔이 두려워 나중에는 당번을 정해 손목에 비닐 끈을 묶고 방문 틈으로 내어놓으면 그 줄을 잡아 당겨 깨워 주던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차편도 너무 복잡해서 물건을 실으려면 두 손 모아 사정을 해야 했으며, 단돈 10원이라도 운임을 깎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또한 저녁이면 침구 보따리를 이고 판자 가게로 나오는 회원들과 남편들의 다툼으로 판자 가게가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어떤 남편들은 술에 취해서 저에게 당신 덕분에 홀아비 노릇을 하느라 병이 나겠으니 좀 봐달라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걸어 올 때는 그 자리를 피하느라 무척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운영하던 구판 사업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순조로웠던 처음과는 달리 외상이 늘어나고 물건을 구비하기 위해 끌어들인 사채 이자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가을 추수나 해야 돈 구경을 할 수 있는 농촌 실정이고 보면 외상을 사절할 수도 없었고 일반 상가와의 필요 없는 경쟁심으로 과다하게 투자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허탈감에 빠져 돌아서는 회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은 터무니없는 여론이 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희생 봉사 정신 내세우며 극성을 떨더니 모두 제 욕심 채우기 위한 짓”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했습니다.
홍역을 하느라 불덩이 같은 어린 것을 뒤집어 업고서도 절미 쌀 팔고, 장사하고, 열심히도 뛰었는데 결과가 내 욕심 채우기 위한 짓이었다는 누명을 쓰고 보니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구판장 때문에 장사에 지장이 많던 상인들의 조소와 그들의 충동질로 돌아선 회원들의 야유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나 스스로를 반성하며 차근차근히>
모든 일에 열의를 가지고 앞장서던 회원들이 너무나 쉽게 돌아서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 허점이 있었고 완전무결하게 나의 위치를 굳히지 못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다시 이를 악물었습니다.
처음부터 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웃과 마을을 위해, 내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탬이 되어 보려고, 땀 흘리며 뛰던 날을 돌이켜보며, 여기에서 손을 떼버리면 정말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리라는 생각과, 지금 당하는 고통을 지워버리는 시간까지는 보지도 듣지도 않고 노력하리라 결심하고, 몇 안 되는 임원들과 다시 일을 착수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야 하는 것을 너무 성급하게 뛰다 떨어져 버린 지난날을 되새기며 비를 들고 골목 청소부터 또 시작을 했습니다.
마을 회관 건립 때는 구판 사업 재고를 정리하여 남은 금액을 모두 희사하는 한편, 블록 제작을 위한 골재 채취와 만들어 놓은 블록에 물주기 등 몇 명 안 되는 회원들이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준공을 보게 되었고 준공식 날은 생활환경이 여의치 못해 혼례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5쌍의 불우한 이웃을 위해 부녀회 주최로 합동결혼식을 올려 주었습니다.
허례허식이 없는 간소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아빠 신랑에게는 예비군복을, 엄마 신부에게는 한복을 예복으로 정했고, 면장님이 주선해 주신 면사포와 저희들이 정성을 들여 마련한 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안고, 서화리 최초의 멋진 합동결혼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례를 서 주신 군수님께서는 금일봉과 열심히 새 가정 새마을을 가꾸라는 말씀과 함께 삽 한 자루씩을 선사해 주셨고 저희 부녀회 회원들은 한 달 동안 정성들여 떠 모은 절미로 마을금고 통장을 하나씩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장에는 쌀 몇 되 안 되는 적은 액수지만 한 끼에 한 수저씩 모은 정성이 담긴 통장을 건네주는 마음이나 받은 마음이 모두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부녀회 활동이 활기를 찾고>
모든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가자 돌아섰던 회원들도 다시 모여들게 되었고 바닥이 난 부녀회 기금을 다시 조성하기 위해 하천 변에 버려진 잡종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돌을 줍고 둑을 쌓고 자갈밭을 일구는 회원들의 손은 피로 물들고 굳은살이 박혔으나 고된 줄을 몰랐습니다.
또한 12통의 퇴비를 회원의 손으로 만들어 뿌리고 파종을 하여 가을에 적잖은 기금을 마련하게 된 우리 부녀 회원들은 더욱 단결하게 되었고 농번기에는 공동 작업반을 편성하여 모내기에 앞장서 48만여 평의 논을 어느 마을보다도 일찍 끝내고 기금 조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저희 부녀회가 활기차게 활동을 하게 되자 주민 모두가 활기를 찾게 되고 협동하게 되었으며, 새마을 사업에 착수하여 138동의 지붕 개량 및 각종 주거 환경 정비 503건, 생산 기반 시설 17건, 농업용수 시설 5건, 공동 이용 시설 2건 등을 이룩해 냄으로서 협동의 놀라운 힘을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 동안 회원들만 추진하던 절미 저축도 전 주민이 참여하게 되었고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매월 성적이 좋은 회원에게는 상품을 주는 시상제를 마련해서 요즈음은 앞을 다투어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여진 절미를 4km나 떨어진 면 소재지에 내다 팔고 마을금고에 입금시켜 각 개인에게 통장으로 돌려 줄 때는 모든 괴로움은 가시고 보람과 흐뭇함을 느끼곤 합니다.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1978년 12월 16일 광주시에서 개최된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고 3박 4일 동안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습니다.
눈물겹도록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성공한 선배 지도자들의 사례를 들으며, 성공이란 결코 공 들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어떠한 역경에 부딪혀도 좌절하지 않고, 인내와 용기로서 밀고 나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돌아와서 지난날, 마음 아프게 실패했던 구판 사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지난날의 실패를 경험한 회원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심지어 어떤 회원들은 기금이 많이 모이니까 또 욕심이 나느냐는 등 험담과 비방이 참고 듣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공의 열매를 거두어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리라 결심하고 만약 실패하면 모든 재정 문제는 제가 책임지기로 약속하고 주저하는 회원들을 잡아끌며 설득하여 사업을 착수하였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도 있듯이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짤 수 있었고 빈틈없이 구판장을 운영하여 매월 이익금은 마을금고에 입금하여 상호간 의심치 않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이 이익금을 기금으로 장학 제도를 실시하여 중학생 1명에게 등록금을 지급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도 항상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것은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 참석키 위해 여행을 하는 동안 경부 고속도로 변을 따라 늘어선 아담하게 단장된 농촌 문화 주택이었습니다.
별로 여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던 제가 TV나 사진에서나 보았던 농촌 문화 주택을 직접 보는 순간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새마을운동의 힘의 위대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을 형편으로는 꿈같은 실정이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취락 구조개선 사업>
그러던 어느 날 그 꿈이 저희 마을에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민통선 북방 마을 취락 구조개선 사업으로 77동의 주택 개량이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발은 대단했습니다.
지붕 개량, 담장 개량, 축사 개량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택 개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더구나 저희 마을은 200여 호가 한 곳에 소복이 운집한 집단 부락으로 주택 개량을 하게 되면 농토를 밀어 따로 마을을 형성해야 될 뿐 아니라 파종을 해야 하는 시기에 땅을 내놓을 리 없고 따로 대지를 마련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 엄두조차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주민들의 반발은 더욱 컸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습니다.
우선, 후진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보았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떤 주민은 4km 전방에 괴뢰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이곳에다 몇 백만 원씩 투자를 하느니 차라리 마을을 떠나겠다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몇몇 뜻있는 분들과 함께 일을 착수하기로 하고 「불도저」를 들여다 지정 대리인 논을 밀기 시작했습니다.
논 주인들과의 다툼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어떠한 괴로움을 당해도 중단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 부녀자들은 조를 편성하여 모래, 자갈 채취 등, 뼈가 부서지는 듯한 어려움을 찾아가며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극성스럽게 일을 하다 보니 한 채 두 채 아담한 주택이 세워지게 되고 주민들도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연수원 교육으로 내 신념은 더욱 굳어지고>
이렇게 주택 사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또 농번기로 벼 베기가 한창인 때에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에 입교하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이기도 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욱 큰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바쁜 일들을 멈추고 연수원에 입교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귀중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도자의 사명, 하면 된다는 신념, 나 개인이 아닌 공동 운명체, 조국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게 되었고, 더욱이 침체와 나태 속에 무기력하고 이기적이고 비 농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치는 새 마음과 전문의 자격증을 받게 되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연수 당시 느끼고 다짐한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있으며 불우이웃돕기, 일선 장병 위문, 경로잔치 등 저희 부녀 회원들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습니다.
저희 부녀회가 주축이 되어 이룩한 새마을 금고도 회원 수 243명에 400만 원의 자금이 마련되었고, 올해 목표는 700만 원으로 세우고 부녀 회원들이 하나로 뭉쳐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올 해 절미로 모은 쌀도 15가마가 되어 구판장 설립의 부푼 꿈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취락 구조개선 사업으로 아담하게 단장된 새마을에서, 외형뿐 만이 아닌, 진정으로 풍요로운 이상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