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싸우지 않는 전장 찾은 첫 사례
출발 이틀 전 최종 결정···동행 ‘최소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전쟁 발발 1주년을 앞둔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땅을 밟기까지의 과정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미군이 싸우지 않는 전장을 미국 현직 대통령이 찾은 전례가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수개월 간 극소수의 핵심 참모들에게만 공유된 우크라이나 방문 계획을 출발 이틀 전에 최종 결단했다. 백악관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따돌리고자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일정을 끝까지 함구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전사자 추모의 벽 앞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끌어안고 있다. 우크라이나대통령공보실제공/로이터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백악관 ‘거짓 일정’ 공지하며 비밀 작전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로 향한 때는 미 동부 기준 19일 새벽 4시15분. 대서양을 가로질러 독일,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까지 장장 22시간에 걸친 여정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의 출·귀국 시 백악관 풀기자단과 문답이 이뤄지는 게 통상적인 관례이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백악관이 ‘가짜 일정’을 배포하면서까지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행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19일 오후 7시에 보낸 일정 보도 참고자료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20일 오후 7시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폴란드로 출국 예정’이라고 밝혔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도 이날 오전 10시 MSNBC 방송에 출연해 우크라이나 방문 계획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 ‘매뉴얼’에서 벗어난 행보는 일정 공개만이 아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보잉 747을 개조한 에어포스원보다 크기가 작은, 보잉 757기를 개조한 공군 C-32기에 탑승했다. 항공기 콜사인도 대통령 전용기 호출부호 에어포스원이 아닌 ‘특별공중 임무’(Special Air Mission)의 줄임말인 SAM060으로 변경했다.
출장에 동행하는 참모와 취재진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백악관에선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존 파이너 국가안보부보좌관, 케이트 베딩필드 공보국장만이 동행했고, 그 외에 의료진, 전속 사진가, 소수의 경호 인력이 전부였다. 풀기자단도 통상 인원인 13명이 아닌 단 2명이었다. 이들에겐 출발 13시간 전쯤 ‘골프 토너먼트 도착 관련’이란 제목의 이메일로 공군기지 집결 안내가 이뤄졌고, 백악관은 이들의 휴대전화를 거둬갔다. 전용기는 급유를 위해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를 잠시 경유했다. 이어 폴란드 남서부 제슈프까지 비행하는 1시간여 동안에는 추적을 피하려고 송수신기(트랜스폰더) 전원도 껐다. 폴란드에 도착한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접경 프셰미실역에서 키이우행 열차에 탑승했다. 기차로는 10시간이나 걸리지만, 러시아의 공습 우려 등으로 비행기 이동이 매우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키이우 성미카엘 대성당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AP연합뉴스 키이우서 젤렌스키 만나…공습 사이렌도 20일 오전 8시 키이우에 도착한 바이든 대통령은 마린스키궁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부의 환영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를 맨 바이든 대통령과 전투복을 연상시키는 카키색 상하의를 입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키이우 중심부인 성미카엘 대성당을 함께 방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군과의 교전에서 숨진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추모의 벽에 헌화하고 묵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지속적인 군사 지원을 약속한 바이든 대통령은 미대사관 방문을 끝으로 키이우를 떠났다. 바이든 대통령이 키이우에 5시간 가량 머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굳건한 지지를 보여주는 사이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두 정상이 거리를 걷는 와중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기도 했다. 실제 공습은 없었지만 미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폴란드 영공에 정찰기를 띄워 주변 상공을 감시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러시아 측에 ‘충돌 방지(de-confliction)’ 차원에서 출발 몇 시간 전에 우크라이나 방문 계획을 알렸다고 밝혔다.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등 최근의 미국 대통령들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전투지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바이든 대통령처럼 미군이 직접 싸우지 않는 전쟁터를 찾은 적은 극히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백악관도 이날 이번 방문에 관한 브리핑에서 ‘위험’이라는 단어를 8차례나 사용하면서 방문 조율이 어려웠다는 점을 부각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 목적이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 의지를 보여주고, 서방과 국제사회가 러시아의 침공에 대항해 단결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대통령이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공습이 끊이지 않는 키이우에 나타난 것은 침공 1년에 즈음해 총공세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러시아에 사전 경고하는 의미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군사지원 계획과 함께 대러시아 추가 제재 조치를 예고했는데, 러시아에 맞서 서방의 결속과 단합을 꾀하려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키이우로 향하는 열차 안에 앉아있다. 맞은편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AP연합뉴스©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