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름 | 개벽병자 | | 제 목 | 주자가 불교를 비난하여 애꾸로 구 한말에 태어나다 | | 윤회에서 벗어 나야한다. 황로의 술이 대단하다하나,여동빈이 비록 신선이 되었다 하나 마지막 향상구를 얻지 못하고 단지 신선에 머물다가 황벽스님을 만나고서 비로서 향상구를 얻고 용이 여의주를 얻은 격이 되었다.우리가 증산도 들어와서 불법이 쇠했다고 많이 들었으나 불법이 세상 사람들에게 덜 받아 들여지고 근기가 낮아졌을지언정 진리의 깊이는 변함이 없는것이다.야산 이달이 그의 제자인 대산 김석진에게 본인의 전생이 공자이고 대산이 전생 증자임을 밝혀 주고 있다.주자의 원서를 30살쯤에 읽어보고서 -'주자어류' 주자대전'등-회의를 느끼기를 진리는 이미 정해진것이고 변함이 없는것인데 주자가 편지를 제자들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의견이 좋으면 그의견을 따르고 자신의 의견을 바꾸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이게 진리를 대각한 성인이라는 주자의 모습인가 하고 어린 나이에는 회의가 들었다.
개벽병을 치유하지 못하고 죽음이 눈앞에 오자 유교의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절감하고 불가의 서적을 찾아 계속 쌓아 나가자 비로소 안개가 약간 걷히는듯 하였다.그러나 마음이 확연대오는 하지 못하였고 자잘한 것들이 쌓아가자 어느덧 공자나 주자의 마음자리가 눈에 보엿다.
교주들의 마음자리도 측량이 가능 하였고 대략 이렇게 가면 어렵지만 윤회를 벗어나야겟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희미한 길을 놓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불가의 책을 보다보면 나 정도는 누구나 쉽게 이를 수 있고 공자나 주자의 마음 정도는 볼수가 있다.그리고 증산도인들은 이미 많은 책을 접 하였으므로 불가서를 보면 몇달안에도 나 정도에는 쉽게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비밀한 책에 도가 들어 있는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금강경 첫구절 "세존께서 공양 시간이 되어 옷입고 바리때를 들고 사위성안으로 들어가 걸식을 하셨다.성안에서 한집 한집 걸식을 하시고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 오셨다.식사를 끝내고 의발을 수습하신뒤 발 씻고 자리를 깔고 앉으셨다"하는 말을 다 알아 들을 수 있으면 도를 아는자라고 할 수 있다.
진리나 구원은 곧 내 마음을 밝히는것이고 내 마음을 구원 하는것이다. 지소선후 즉근도의가 다른 말이 아니고 천하를 경륜하고 살리는것은 후이고 先은 곧 내 마음을 밝히는것이 선이 되는것이다는 말이다.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 하는것으로 사물의 이치의 가장 근본은 음양之리 이전에 이미 마음에 있다는 말로서 이것을 주자가 先으로 의미하지 못했다면 주자의 견해가 좀더 깊지 못햇다는것이다.
역대전등 조사들은 금강경의 첫구절에 나오는 도에 철저 하므로 무착스님이 문수보살의 상을 주걱으로 치는것이 나오고 문수보살이 이를 칭찬하는 대목이 나온다.진리를 아는자는 진실로 막힘이 없이 학인을 대하고 제자를 대한다. 이들을 의심하거나 미행하거나 하지않고 천지간에 우뚝선 대장부가 된다.
증산도인은 젊은시절 다보내고 나와 같은 중년의 나이가 되 버렸다.더 이상 밖에서 진리를 구하거나 남에게서 진리를 구하지 말고 내 마음을 잘 제도하고 내 마음을 잘 밝히고 내 마음을 잘 구제하여 윤회에서 벗어 나시길 바랍니다.그것만이 진실로 개벽병을 치료하고 남에게 끌려가는 노예생활에서 벗어 납니다.
주자가 불법을 비방하여 애꾸가 되었는데 공이 있어서 한쪽이지 그렇지 않은 필부가 불법을 비방 하였으면 즉시 지옥으로 끌려 갔을겁니다.부디 이 아까운 생에 밖으로 진리를 구하지 마시고 진묵겁전에 이미 부처였던 "나"를 다시 밝혀서(재명 명덕(불성) 금생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목표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저도 금생에 어린나이에 상제님의 도를 알아서 그쪽에 몰두 하다보니 세상살이에 큰 노력을 하지 못했습니다.좋은 직업이 없다보니 돈도 없고 정말 장가 가기도 힘들고해서 어쩔 수 없이 외국인 신부도 생각해 볼 정도 였습니다.어찌하여 장가도 들고 아이들도 낳고 아이들이 있다보니 돈을 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늦은 나이에 주유소 알바 하신다는 애기 듣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신겁니다.이번 사오미 개벽도 없습니다. 이글을 보시는 분들이 모두 성불 하시길 부처님께 두손모아 기원 합니다.
다음은 주자의 후신인 석곡 선생의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이규준의 자(字)는 숙현(叔賢), 호(號)는 석곡(石谷)으로 1855년 11월10일 경북 영일군 동해면에서 출생하고 1923年 10月 10日에 69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가세가 극빈하여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여서는 큰 뜻을 품고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유학(13경)을 연구하여 심오한 경지에 달하였다. 조선말기의 혁신적 유학자이자 대사상가 석곡은 송나라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육경주소(六經注 )에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여 30세부터 육경을 바로잡아 육경26책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경서나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심오한 연구로 이치를 깨달아 경수3편(大學,中庸,禮運), 예전, 논어, 효경, 당송고시, 후천자를 정리하였다. 수학과 서양역법을 논한 구장요결과 포상기문을 저술하였고 문집으로 석곡심서(石谷心書)와 석곡산고(石谷散稿)를 남겼다. 석곡은 하늘과 인간의 참된 이치에 입각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상으로 많은 경서를 바로잡았다. 석곡의 경서에 대한 정리는 주자 등의 주석을 바로잡는 것이어서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작업이었다. 석곡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사상은 주자학을 신봉하는 영남유림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어 제자도 양성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석곡의 위대한 업적은 당대 유학자들의 견제 때문에 오늘날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석곡은 성품이 정의롭고 강직하였고 재물에 관심이 적어 가난하게 일생을 보냈고 시세에 편승하지 않는 곧은 기상을 가지고 뜻과 실행이 일치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유학자들의 병폐라 할 수 있는 권위적인 허례와 허세를 극히 싫어하고, 있는 그대로의 참된 것을 장려하였는데, 이런 모습은 석곡이 제자들에게 적어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我欲心遊黃老 行守孔子 取捨在爾
나는 마음은 黃老(황제와 노자의 도)에서 놀고 행실은 공자를 지키고자 한다. 취사선택은 너에게 있다.
의학의 도를 밝힌 천재한의학자 석곡은 경서 정리와 버금가는 업적을 의학방면에서도 남겼으니, 그것이 소문대요와 의감중마다. 석곡은 의학에 있어서도 이치를 궁구하여 의학의 기둥이 되는 황제내경을 바로잡아 황제소문절요(소문대요)를 편찬하였고, 허준의 동의보감을 이치에 맞는 것만 정리하여 발췌하고 병리가 되는 이치를 7언 절구로 요약하여 덧붙인 의감중마를 편찬하였다. 석곡은 번잡하고 혼란스럽고 이치도 없이 뒤섞여 있던 의학이론을 자연과 생명의 이치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후학들이 생명과 자연의 참모습을 파악하여 병을 바르게 치료할 수 있게 하였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석곡을 방문하여 학문을 논할 때, 석곡이 \'황제내경의 내용 중에 황제의 도가 아닌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이런 석곡의 우주자연의 이치를 드러내고 실행하는 꼿꼿한 정신이 그가 내경을 추리고 합하여 펴낸 황제내경소문대요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석곡은 본초 2책을 저술하고 약성가를 정리하여 약물의 성질과 기운을 분명히 나타냈고, 자신의 논문 5편에서는 생명력(陽氣)을 특히 강조하여 병치료에도 생명력을 바로잡아 치료할 것을 주장하였다. 석곡은 의학방면으로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서병오(石齋), 이문근, 김용석, 배을제, 조규철, 서성효, 이원세(無爲堂) 등이 명성 높은 제자들이다. 선생의 세 아들도 의업을 이어 받았으나 모두 타계했다. 석곡은 자비심이 많아 집 옆에다 움막을 짓고 나병환자를 여러 명 치료해 주었다. 또 자신이 직접 약을 먹고 시험한 연후에 확실한 약을 환자에게 투여하였다고 하니 선생의 지행일치가 얼마나 철저했었는지 알 수 있다. 석곡은 의감중마 말미에 다음과 같은 7언 절구로 생명과 의학의 요체를 말하고 의학자의 바른 마음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醫囊無底誰能括 須把陰陽細玩索 專泥古方如膠瑟 妄恃私胸奈 格 大易機緘交坎離 內經權要在從逆 能知標本斯無失 病我自明方我出
의학의 세계는 바닥이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은데, 이 모두를 누가 다 총괄하고 연구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음양을 파악하여 자세하고 익숙해지도록 찾는 것이 꼭 필요하다. 전적으로 옛사람의 처방에 얽매여 치료하는 것은 비파줄을 아교로 붙여놓고 뜯는 것처럼 단조로와 치료가 안되고, 함부로 제 생각만 옳다고 믿는 것은 道에 역행하는 것이다. 주역의 이치는 水火기운의 활동이고, 내경의 요체는 음양이다. 능히 본질과 현상을 분명히 알면 어긋남이 없으니, 병에 대해 내 스스로 환하게 안다면 처방은 그 속에서 나온다.
찬송 최기남 선생이 본 석곡 (최기남 선생은 이조말엽 사람으로 솔잎만 먹고살았기 때문에 찬송거사라 한다. 도교와 불교에 심취해 당시 사람들로부터 신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도의 경지가 높고 깊었다.) [병인년 12월 24일] 석곡자(石谷子)는 이조 말엽 유학혁명의 목탁(인도자)이다. 그의 탁월한 견해는 곤륜산에 올라 사방을 보는 것과 같고, 그의 글과 말은 용문을 비추듯 맑고 한번의 도끼질처럼 분명하다. 역사의 서적을 고찰하고 바로잡음이 고금을 통해서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정도다. 경상도 한 구석에서 태어나고, 한족 눈에 정기가 모여있고, 초야에 묻혀 늙었고, 의학에 전념했고, 옛 경전을 면밀히 살펴서 주석을 쇄신하고, 공자의 뜻을 스승으로 삼아 서술하고, 주자의 저술을 폄하고 고쳤으니 노석학(石谷)에 경탄을 금할 길 없다. 그 분별력을 들어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오직 동시대를 살았으나 직접 강론을 듣지 못한 것이 한일 따름이다. 뜻을 같이한 벗인 석재(石齋)서병오선생이 보여준 선생의 글을 보고, 황제내경소문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소매를 여미고 들었다. 그후 나는 여행을 계속할 때에도 석곡의 학설이 머리를 떠나지 않더니, 선정을 하는데 홀연히 석곡이 나타나 말하였다. 그는 주자의 후신으로 숙명적으로 태어났다. (주자가) 송나라 때 문장을 정리하고 학문에 힘써 노력했으나, 주석의 서문에서 함부로 단정하고 경전을 어지럽히고 후예의 총명함을 막아버리고 노자와 불교를 심하게 배척하여 하늘의 중벌을 짊어졌다. 그래서 말년에 주자는 눈이 멀어 버리는 업보를 받았다. 주자의 성인에 대한 죄업이 중국에서는 왕육의 학문이 성행하여 오류로 떨어지지 않았으나 조선의 유학자는 유학의 술수만 숭상하고 주자의 주석이라는 그물을 헤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에 석곡이 윤회하여 이 땅에 태어났다. 근근이 한쪽 눈만 열려서 전생의 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주석에 착수하여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정정하였다. 그러나 석곡자신도 노자나 불교에 대해 불충분한 면이 오히려 있었기 때문에 한쪽 눈은 아직 열리지 않은 것이다. 다음에는 두 눈을 가지고 남방 중국인의 태를 받아 태어나서 전생의 업을 계속하여 경전 교정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정에서 깨어나고 보니 석곡의 삼대에 걸친 윤회는 진실로 이러이러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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