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케빈에 대하여>(2011)로 한국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린 램지 감독이 6년의 침묵을 깨고 제작한 장편이다. <케빈에 대하여>를 충격적으로 접한 관객은 그녀의 작품을 피하든가 아니면 더욱 찾아서 볼 것이다. 그녀는 그만큼 호오가 분명하게 갈리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번 영화는 조나단 에임스의 동명 소설을 린 램지 감독이 각본을 쓰고 또 각색한 것인데, 비록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타임지와 IMDB에서 ‘2018년 베스트무비 TOP10’으로 선정되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제70회 칸 영화제 각본상 이외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이야기 전체를 끌어가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압도적이고 흠잡을 데가 없다. 대사가 없어 마치 음악이 있는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장면에서도 오직 표정과 제스처 만으로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It’s not your fault!
영화를 이해하기 전에 필자는 먼저 <굿 윌 헌팅>(구스 반 산트, 1997, 2016 재개봉)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영화이해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이야기 구조의 핵심에서 나타나는 유사성 때문이다.
<굿 윌 헌팅>은 과거 양부에게서 받은 폭력에 대한 기억으로 왜곡되고 얼룩진 삶을 살아가는 윌(맷 데이먼)이 인격적인 상담을 통해 정상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양부의 폭력을 받았다고 여기며 살아온 윌은 내면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수학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발휘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모습 때문에 윌 스스로도 고통스러워 해 어느 날 숀(로빈 윌리엄스)을 찾아간다. 윌을 상담하면서 숀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는 말로 그의 내면의 질서를 회복한다. 양부의 폭력이 너의 잘못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양부 자신의 폭력성에서 유래한 것일 뿐이기에 네가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또한 그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괴하는 삶을 살아도 안 된다는 말이다.
<굿 윌 헌팅>은 과거에 대한 잘못된 기억과 죄책감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시키고 인격을 파괴할 수 있는지, 그리고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라)란 말이 어떻게 죄책감을 치유하고 또 인격적인 회복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 영화이다.
You were never really here!
<너는 이곳에 없었다>는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서 <굿 윌 헌팅>을 떠올렸거나 혹은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미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영화의 주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지는 영화를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내용을 들여다보아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내러티브는 아니다. 먼저 제목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난해했던 영화의 내용에 접근해보자.
한국어 제목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는 영문제목에 있는 really(참으로)가 빠져 있다. 생략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듣는 자의 관계에 관해 진술한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지금 ‘네가 과거 이곳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단순히 너의 부재를 확인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여기’와 ‘과거’, 곧 특정 장소에 얽혀 있는 시간 속의 너를 강조한다. 네가 과거 이곳에 있지 않았다는 말은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경험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일 네가 지금 그곳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선 망상일 수 있고 정신착란 현상일 수 있다 함이다. “really”란 부사를 통해 부재의 사실을 한층 강조한다. 그러니 더는 괴로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으로 고통을 느낄 이유가 없다 함이다.
과거 이곳에서 너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너’라는 존재가 그때 이곳에서 부재했음을 확인해주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이 말이 증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증인의 자격을 부정하는 말이겠다. 보고 들은 것이 있을 수 없으니 무엇을 말한 들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증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빠른 속도로 반복적으로 보이는 한 아이와 군인의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한 청부살인업자의 과거와 연관된 것이다. 몇 번의 반복을 통해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호아킨 피닉스)의 어린 시절에 사이코 같은 아버지에 의해 폭력을 당하는 엄마의 모습이며, 그런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숨어 있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무능력한 모습이고, 중동 파견 근무에서 자신이 건네준 초콜릿을 받은 아이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현장을 경험해야 했던 군인이고, FBI 재직시절에 아시아 소녀들이 몰살당하는 끔직한 살해 현장을 보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때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경험해야 했던 충격으로 그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끊임없는 자살충동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노모 때문이다. 조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엄마를 구원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엄마를 끝까지 돌보겠다는 책임감으로 바꾸어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엄마를 일종의 ‘족쇄’로 표현했는데, 영화를 죽음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럴 수 있지만, 삶과 회복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본다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결코 구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엄마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내야 하는 이유였다.
이런 그에게 한 소녀가 등장한다. 납치되어 성매매 업소에서 지낸다는 13세살 니나(에카테리나 삼소노브)를 소개받은 것이다. 그녀를 성매매 업소에서 구해내라는 의뢰를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조는 소녀를 구해내지만, 동시에 의뢰인인 아버지의 죽음을 뉴스에서 접할 뿐 아니라 니나는 또다시 납치를 당한다. 그는 이 모든 일에 주지사가 연루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그후 조는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이 모두 사망한 채 발견되고 엄마 역시 주지사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는 현장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도 구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마음으로 더욱 큰 짐을 진 그는 엄마와 스스로에 대한 죽음의 의식(수장)을 치른 후에 니나를 구하러 나선다.
주지사 집에 도착한 조는 놀랍게도 니나가 주지사를 살해하고 스스로를 구원해 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장면에서 그는 침대에 앉아 오열을 하는데 그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추측할 수 있다면 자신이 해내지 못한 일을 13세살 소녀가 해낸 것을 보고 자신의 무능력했던 과거를 한없이 책하는 울음이 아닐지 싶다.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갔고, 지금은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의 청부를 받아 문제해결을 도와주며 일하면서 어느 정도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끊임없는 자살충동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트라우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는 자신의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살아갈 의지를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조가 오열하면서 웃옷을 벗을 때 그의 몸에 있는 각종 상처는 더는 감출 필요가 없는 자신의 솔직하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주지사를 죽임으로써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구해낸 니나를 대하는 순간 조는 그동안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새로 태어나는 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과거에 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포장하며 살아온 그는 그동안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채 살아낸 삶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삶의 가능성을 니나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실존철학적인 구원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너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는 말은 주체적이지 않은 모든 삶에서 조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환상일 뿐이다. 삶이 주체적일 때 비로소 너는 존재하며, 주체적일 때 비로소 너는 그곳에 존재한다 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는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린 램지 감독은 실존주의적인 자아발견과 구원의 의미를 영화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주체적인 삶은 구원인가?
주체적인 삶과 실존적인 구원의 의미는 실존철학의 중심 주제다. 포스트휴머니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살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의미 있는 주제로 부각되고 있다. 주체적인 삶은 인간의 자유를 전제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 일부 실존철학은 신의 간섭은 물론이고 그 존재 자체도 의심하도록 했다. 물론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주체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서 선 단독자의 모습으로 보아 주체성의 기독교적인 지평을 확보했다. 그에게 있어서 단독자로서 실존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한편, ‘던져진 존재(das geworfene Sein)’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현존재를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창조와 피조의 관계를 유비하는 표현으로 자주 회자된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함이다. 염려와 근심은 현존재로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인 상황이다. 그것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덫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은 세상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염려와 근심을 매개로 세상에서 존재자를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실존을 분석함으로써 본질에 이르고, 현존재를 분석함으로써 존재자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이 실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존의 상황에서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이로써 자칫 무신론적인 공격에 무력화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는 지평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실존철학이 창조론 혹은 합목적론을 전제하고 인간의 본질을 존재 이유와 목적에서 찾았던 근대적 인간 이해의 관행에서 벗어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실존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은 기독교에 큰 도전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 말한 사르트르이다. 이는 그가 무신론적인 실존철학의 대표자로 자리매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주체적인 삶은 구원을 의미할까?
오늘날만큼 주체적인 삶의 의미를 강조하는 시대가 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여론과 대중문화에서 주체적인 삶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때로는 인권이라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사람들은 출생과 더불어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받아들인 각종 권위(부모, 스승, 권력자 등)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삶을 중시하고 있고 또 그런 주체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으며, 비록 실천하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보장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동안 누군가의 요구에 의해 혹은 세계관적인 맥락에서 제시된 삶의 이유와 목적을 위해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겪는 절망감은 대체로 자아실종으로 나타난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주체적인 삶의 가치를 발견함과 더불어 나타나는 현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자각이다. 주체적인 삶은 자아 정체성 발견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나를 실현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함이다. 수동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주체적인 삶은 일종의 구원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적인 삶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까? 더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될까? 그렇지 않다. 영화가 비록 주체적인 삶을 구원의 의미로 제시했다 해도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건 아니다. 주체적인 삶은 다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성경은 자유에 근거한 인간의 주체적인 삶 자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