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대한민국 임시정부 ⑤⑥ / 이덕일의 事思史
이장희 추천 0 조회 12 14.05.23 22: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춘원 이광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독립운동 등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행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와 맞선 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독립운동계의 소식과 만주 및 국내 내지까지 독립군이 들어가 일본군과 교전하는 상황을 자세히 보도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프랑스 조계지가 있던 상해의 주택가 풍경. 영국은 일제의 독립운동가 체포를 방조한 반면 프랑스는 조계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협조적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⑤독립신문

1919년 12월 2일자 고경(高警:고등경찰) 제36044호 문건은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서 평안북도에 특파원 구인석(具仁錫)을 파견해 독립신문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후원금 모집 문건도 첨부해 보고했는데 “2000만 형제·자매가 각 1전씩만 베풀어도 합산하면 20만원의 거액이 된다”면서 후원금을 보내려면 국내의 조선은행에서 가명으로 ‘상해(上海) 중국우편국(中國郵便局) 신상(信箱) 백호내(百號內) 이영렬(李英烈)’에게 보내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후원금도 전달되고 비밀도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영렬은 독립신문 영업부장인데, 사장은 박은식(朴殷植), 총무는 옥관빈(玉觀彬), 편집부장은 이광수(李光洙)였다. 독립신문사는 상해 법조계(法租界: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동익리(同益里) 5호에 있었다. 상해에는 프랑스가 관리하는 법조계와 영국이 관리하는 공동조계(共同租界)가 있었다.

일제의 상해에 있어서의 독립운동(4월 29일 상해 발신)이란 문건은 “불령선인(不逞鮮人: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영사로부터 프랑스 영사에게 어떤 교섭이 있으면 즉시 프랑스 관헌으로부터 내시(內示:안으로 알려줌)되므로 조금도 우려할 것이 없다… 요컨대 프랑스 조계는 안전지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영·일동맹 관계인 영국은 공동조계 내에서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것을 용인하는 반면 프랑스는 거부했기 때문에 법조계가 상해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1 독립신문 창간호. 조선총독부의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맞선 상해 임정의 기관지였다. 2 이광수. 독립신문 초대 사장· 주필로 활약하다 애인 허영숙과 함께 귀국했다.

 

1919년 8월 21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5대 사명을 천명하고 있다.

그중 세 가지는 “①사상 고취와 민심 통일. ②우리의 사정과 사상을 우리의 입으로 말하는 것. ③여론을 환기해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지도하는 것”이다. 넷째 사명이 ‘신사상 소개’이고,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겸해서 신사상을 섭취해 개조(改造)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써 부활한 신국민을 만들려고(造) 노력함”이 다섯째 사명이었다.

이는 초대 사장 겸 주필이었던 이광수가 쓴 것인데, 다섯째 사명에서 귀국 후 민족개량주의 이론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의 맹아가 엿보이고 있다. 사장이 박은식으로 바뀐 후에도 이광수는 편집부장으로서 독립신문의 논조를 책임졌다. 이 시기가 몸은 고달팠을지 몰라도 이광수 인생의 절정기였다.

철기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기미년(1919) 직후 상해의 우리나라 사람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기대감 속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기대감 속에서 독립신문이 탄생했지만 기대와 달리 독립은 실현되지 않았고,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이 틈을 조선총독부가 파고들었다. 프랑스 조계만 벗어나면 곧바로 체포해 국내로 끌고 갔다. 밀정을 보내 회유하는 것도 주요한 방법이었다.

일제의 회유작전에 넘어간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였다. 1949년 혁신출판사에서 발간한 친일파 관련 문헌인 민족정기의 심판은 ‘이광수도 혁명대열에 참가하여 조국 광복을 위하여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의 밀정으로 상해에 온 허영숙(許英淑)에게 넘어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광수와 가까웠던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여의사 허영숙에게 상해에서 개업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광수와 허영숙은 끝내 귀국해 버렸다.

이광수가 자서전에서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에서 내가 귀순하고 돌아왔다는 기사를 낸 것을 시초로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나를 독립운동을 배반한 자라고 공격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공연한 비난이 아니라 1921년 4월 귀국 도중 평안도 선천에서 검거됐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됐으니 당연히 받게 될 비난이었다.

이광수가 떠난 독립신문은 위기를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구독료를 선불하지 않으면 신문 발송을 중지한다는 광고가 계속 실리는 형편이었다. 일본의 상해 총영사는 프랑스에 독립신문사 폐쇄를 거듭 요청했다.

독립신문이 창간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던 1921년 3월 만주에서 상해에 도착한 인물이 김승학(金承學)이었다. 김승학은 자서전 망명객 행적록(亡命客行蹟錄)에서 “독립신문사 책임자 이광수는 그 애인 허영숙의 유인으로 상해 일조계(日租界:공동조계)에 은거하여 국내로 투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문사 주간 이영렬은 이광수와 함께 투항할 생각을 가지고…”라고 쓰고 있다. 김승학은 남만주(서간도) 독립군 계열의 자금을 가지고 무기를 구입하러 상해에 왔다가 독립신문을 운영하게 된다.

“(이영렬은) ‘신문 발간할 지가(地價)가 부족하니 금(金) 500원만 대여하여 달라’고 한다. 나는 그 내막을 모르고 금 500원을 주었더니, 그 돈을 여비로 하고 국내로 투항하면서, 신문사 소재처와 삼일인쇄소 비밀처소까지 왜(倭) 영사에게 일러 주어서, 왜적(倭敵)은 프랑스 영사관에 교섭하여 독립신문사를 봉쇄하고 삼일인쇄소 기구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압수케 되었다.”(망명객 행적록)

한글 자모를 구할 수 없어 기자 조동호(趙東祜)가 성경책의 글자를 오려 한글 판형을 만들어 찍었던 독립신문은 일제의 방해 책동에 의한 경영난으로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 무렵 김승학이 안창호의 권유로 독립신문을 인수했다. 프랑스 영사관은 안창호에게 독립신문사의 인쇄 기구가 한국인 소유가 아니라면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김승학은 32세 때인 1912년 만주 봉천성의 강무당(講武堂: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김탁(金鐸)이란 중국 이름으로 입적(入籍)한 터였다. 김승학은 프랑스 영사관에서 신문사와 인쇄소의 봉쇄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내걸었다고 전하고 있다.

1. 인쇄소 기구는 중국인에게 교부하고 프랑스 조계 내에 두지 말 것.
2. 독립신문 발간소는 다른 지방으로 신문지상에 명기할 것.
3. 신문사를 혹 프랑스 조계지에 비밀리 설치할 경우에는 그 장소를 프랑스 공무국에 보고할 것.
4. 프랑스 공무국의 통지가 있을 때에는 24시간 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일본에 발견되지 않게 할 것.
5. 신문사나 인쇄소의 비밀한 장소는 다수의 한인이 알지 못하도록 할 것.

프랑스 조계지 안에 독립신문사를 두되 발간 장소는 다른 곳인 것처럼 위장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1921년 5월 31일자 109호를 끝으로 중단되었던 독립신문은 그해 8월 15일자로 속간되었다.

사장 김승학, 주필 박은식(朴殷植), 편집국장 차리석(車利錫), 기자 조동호·김문세·박영·이윤세, 인쇄소 책임자 고준택(高俊澤)이었다.

신문 좌측 상단에 발행지를 ‘중국 남경(Published in NanJing, China)’으로 표기했는데, 물론 프랑스 당국과의 합의 때문이었다. 복간호는 ‘사고(事故)로 인해 본보의 간행이 지연돼 묵은 기사가 많으니 애독자들은 량서(諒恕:너그럽게 용서)하심을 희망함’이라는 ‘사고(謝告)’도 냈다.

독립신문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의열단원 최경학(崔敬鶴)의 사형 판결 기사를 실으면서 “경성 적(敵)고등법원”이라고 명기했다. 조선총독부는 적(敵)총독부, 일본 경찰은 적경(敵警)이었다.

독립신문이 다시 발간되자 당황한 일제는 다시 방해공작에 나섰지만 1922년 7월 중순에는 중국어판 ‘獨立新聞’까지 발행했다. 중국어판 ‘獨立新聞’ 창간호는 “우리의 광복전쟁의 진상을 우리의 친애하는 4억 동지에게 소개할 길이 열리며…”라며 중국과 항일 연대 수단으로 발행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500~2000부 정도 찍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독립신문은 상해와 만주는 물론 미주와 국내로도 보내졌다.

일제의 한 공판기록은 “유갑순(柳甲順)이 1920년 5월 상해 임정의 서울 주재 교통국 주임 이원식(李元稙)으로부터 독립신문 20장을 받았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에는 임시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산하 만주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 등의 연락원들이 몸에 숨기고 반입했다.

그러나 복간한 독립신문도 곧 사정이 어려워져 1922년 6월 3일자에서는 “독립운동과 독립신문”이란 기사를 실어 ‘기자나 인쇄소 직원들이 월급 없이 일하고 있다’면서 재정적·인적 지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도 독립신문은 빈집 한 곳을 확보하고 있다가 일제가 들이닥친다는 프랑스 영사관의 통보가 오면 즉각 이전해야 했다.

사장 김승학은 6년 동안 28차례를 이전했는데 그때마다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 채가 동원되었으며, 당일 통고를 받고 한밤중에 이전한 일도 있다고 회고했다. 독립신문은 1주에 세 번씩 발행하다가 1924년부터는 사실상 월간지로 변했다가 1925년 9월 25일 일제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제189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임정 두 기둥’ 이승만·이동휘, 돈 문제로 내분 촉발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3·1운동의 결과물로 결성되었지만 상해 임시정부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독립 노선이 대립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이념 문제도 컸다. 또한 임정 수뇌부들도 임정 전체가 아니라 자파의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 임정의 대표성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가 열리고 있다. 이승만(가운데)의 곁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가 서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⑥ 임정 내분과 국민대표회의

임정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탄압이었다. 국내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경의 탄압으로 붕괴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 들어오는 자금줄이 대부분 차단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본 외무차관에게 보낸 대정(大正) 9년(1920) 3월 말 현재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의 궁상이란 보고문은 ‘상해에는 700여 명의 한인 중 70여 명이 임정에 근무하는데, 내무부에서 대정 9년(1920) 1월 이후 전 직원에게 봉급을 지급한다고 결정했지만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생활의 비참함은 전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임정의 두 수뇌인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모두 자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임된 직후인 1919년 5월 미국에 임정의 외교를 담당한다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그런데 구미위원부는 임정 외교위원부와 별도의 조직으로서 임정의 어떠한 법적 직제에도 포함되지 않은 사조직 비슷한 기구였다. 구미위원부는 미주 교포들이 내는 애국후원금을 임정에 납부하지 않고 전용하면서 논란을 빚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독립운동사(제4권 임시정부사: 1975)는 ‘구미위원부가 미주에서 정부 재정을 관장하면서 임시정부가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던 미주 동포사회로부터 재정 수입에 차질을 가져와 재정상의 타격이 컸기 때문에 임정은 항상 구미위원부의 폐지를 요구했다’고 전한다.

임정 명의로 모금한 자금을 임정 재무부로 송금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용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1920년 5월 임정 국무차장 회의에서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한 것은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이 회의는 주미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따로 주미 재무관을 두자고 제안했다. 임정 산하로 개편하자는 주장이었다.

1 상해 임시정부 청사의 옛 모습. 2 상해 임정이 있었던 애인리 전경.

 

이런 상황에서 임정은 이승만의 상해 부임을 거듭 촉구했고 드디어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은 상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1919년 4월 대통령에 선출된 후 1925년 3월 의정원에서 탄핵될 때까지 6년 임기 동안 상해에는 고작 6개월(1920년 12월~1921년 5월)만 체류했다.

이승만이 1918년 정한경(鄭翰景)과 공동명의로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두라”고 청원한 것이 뒤늦게 큰 문제가 된 이면에도 이런 자금 문제가 걸려 있었다. 심산 김창숙은 자서전 벽옹(<8E84>翁) 73년 회상기에서 “나와 백암(박은식), 단재(신채호) 등 여러 동지들은 이 박사가 조선 민족대표라 자칭하고 미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한 것은 우리 광복운동사상에 큰 치욕이기에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부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상해로 부임하자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보자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일제 고경(高警: 고등경찰)의 상해에 있어서의 이승만 환영회 상황(1921 1월 14일자)이란 보고서는 이승만 반대편이었던 박은식이 환영사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합리적인 해결책을 바랐지만 이승만은 현상유지론을 주창해 임정 인사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미주 교포들의 애국후원금을 독단적으로 사용해 문제가 되었다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레닌으로부터 지원받은 혁명자금 분배 문제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함경도 단천 출신의 이동휘는 안동 영장(營將) 등을 역임한 무관 출신이자 캐나다 전도사 그리어슨(具禮善) 밑에서 전도사 생활도 했을 정도로 한때는 기독교에 열중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해 일경에 체포되어 4년간 인천 앞바다 대무의도(大無矣島)에 갇혀 있다가 석방 후 간도를 거쳐 시베리아로 망명했다.

사회주의와는 인연이 없을 듯한 이동휘는 1918년 6월 러시아령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한다. 이동휘는 제정 러시아 모스크바대학 정치학과 출신인 한인사회당 비서부장 박진순(朴鎭淳: 미하일 박)에 의해 사회주의에 입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승만과 이동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국시(國是)가 서지 못했다’고 서술한 대로 임정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좌우 연합정부였다.

그러나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이동휘의 사회주의 인식이 낮았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군 중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홍일(金弘壹)은 “이동휘가 레닌에게 ‘2단계 방법론을 무시하고 단번에 공산혁명으로 족하다’고 답했다가 레닌으로부터 ‘한국은 노동자 조직이 없고 빈부격차도 크지 않기 때문에 공산혁명 전에 민족혁명을 먼저 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김홍일, 자유시 사변 전후, 사상계 1965년 2월호)”고 전한다.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이동휘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세계의 유력한 정치가들 중에 레닌만이 한국 혁명을 물적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르크스의 예견대로라면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이나 독일에서 일어났어야 할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론은 이론일 뿐이었다.

레닌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간한 고려공산당 및 전로(全露)공산당의 개황(高麗共産黨及全露共産黨ノ梗槪: 1923)은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 가입하고 400만 루블의 활동자금을 지원받았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는 크게 과장된 금액이다. 여러 보고서나 증언 등을 종합하면 레닌의 혁명자금은 60만 루블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8월 30일 김립(金立)과 상해에 도착한 국무총리 이동휘는 그해 10월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과 모스크바에 임정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임정은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馨權)을 외교위원으로 선임했지만 한인사회당 소속의 한형권은 혼자 모스크바로 떠났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여운형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각각 ‘이동휘가 야심을 품고 한형권 한 사람만 모스크바로 보냈다’는 취지로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임정과 가까웠던 상해 불조계(佛租界: 프랑스조계) 공무국에서 작성한 상해 한인사회의 일반 정보에 관한 건은 “김립(金立)은 그의 친구 한형권을 임시정부 특사로 보내 자금을 얻어오도록 모스크바에 파견했다”며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지목하고 있다.

한형권은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외교인민위원 치체린(Chicherin)을 만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앞의 독립운동사(제4권 임시정부사)는 “한형권이 60만 루블을 받아서 20만 루블을 모스크바에 예금해 두고 40만 루블을 상해로 가져다가 이동휘의 심복인 국무원 비서장 김립에게 수교했는데, 이동휘는 이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아 독립운동에 쓰지 않고 저희끼리 이른바 ‘고려공산당’ 조직 활동을 위해서만 사용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세칭 ‘레닌 자금’이 임정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국 보이찐스끼 동지에게(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5〔러시아편 Ⅱ〕)라는 문건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코민테른에서 이동휘와 박진순에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돈’을 주었지만 지극히 소액만이 노동자 대중에게 들어갔고 대부분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직 각료들, 온갖 종류의 직업이 없는 전도사들, 모험주의자들, 투기꾼들 그 외의 무뢰한들에게 들어갔다. 이 돈으로 죽어가는 상해 임시정부를 인위적으로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비난은 상해 임정에도 상당한 자금이 흘러갔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공식 절차가 아니라 사적 루트를 통해서 지원된 것이었다. 결국 이 때문에 자금 전용 의혹을 받은 김립은 상해 북사천로(北四川路)에서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宗均) 등에게 사살되었고 이동휘도 1922년 1월 25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노령(露領)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제의 탄압에다 내부적으로 노선 문제와 자금 문제까지 얽히면서 임정은 거의 활동 불능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 임정을 새로 만들거나(창조론) 개조하자(개조론)는 논의가 등장했다. 그래서 국민대표회의 주비회가 결성되고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내는 물론 상해, 만주, 북경, 노령, 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 단체의 대표 120여 명이 모인 회의였다. 이 회의 자금도 한형권이 가져온 레닌의 지원금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회의는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자는 창조파와 임정의 개편을 주장하는 개조파가 맞서서 약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이후 임정은 전체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라는 위상이 약해지고 일부 세력의 대표로만 인식되면서 시련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다음 호부터는 ‘만주의 삼부(三府)’가 시작됩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