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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Eduard Strauss & Erik Satie
1 Carmen-Quadrille, Op. 134 카르멘 카드리유 4:57(1991) C. Abbado
2 Gruß an Prag Polka française, Op. 144 프라하로부터의 인사 3:28 (2000)
R. Muti
3 Elektrisch, Polka schnell 전기 2:40 (2005) L. Maazel
4 Telephon Polka française, Op. 165 전화 3:49 (2006) M. Jansons
5 Helenen-Quadrille, Op. 14 헬레나 카드리유 4:57 (2010) G. Prêtre
6 Ohne Aufenthalt, Polka schnell, Op. 112 논스톱 2:50 (2011)
F. Welser-Möst
7 Wo man lacht und lebt. Polka schnell, Op. 108*
웃으며 사는 곳, 빠른 폴카 2:21(2015) Z. Mehta
8 Mit Dampf. Polka schnell, Op. 70 전력으로. 빠른 폴카 2:24 (2015)
9 Mit Chic. Polka schnell, Op. 221 품위 있게. 빠른 폴카 2:48 (2015) [30:14]
Satie and Suzanne (1994) [7.1]
Choreography by Debra Brown
Directed by Tim Southam
Produced by Rhombus Media
Music: Erik Satie
Performed by Reinbert de Leeuw
Erik Satie: Nicholas Pennell
Suzanne Valadon: Veronica Tennant
Cabaret Dancers: Isabelle Chassé, Jinny Jacinto, Nadine Binette,
Laurence Racine
Chess Player: René Bazinet
Gendarme: Fred Gérard
Waiters: Owen Montague, Jeremy Ransom
1 Opening Credits 3:15
2 Gnossienne No. 1 5:34
3 Embryons desséchés No. 3: de Podophthalma 2:17
4 Quartre Préludes: Prélude du Nazaréen No. 2 1:18
5 Gnossienne No. 3 5:32
6 Avant-dernières pensées No. 2 Aubade 2:06
7 Quartre Préludes: Prélude du Eginhard 2:01
8 Nocturne No. 1 4:41
9 Embryons desséchés No. 1 d'Holothurie 2:28
10 Embryons desséchés No. 2 d'Edriophthalma 3:40
11 Pièces froides: Danse de travers No. 1 1:44
12 Pièces froides: Danse de travers No. 2 2:08
13 Petite ouverture à danser 2:43
14 Gnossienne No. 4 3:41
15 Pièces froides: Airs à faire fuir No. 3 4:30
16 Gnossienne No. 6 2:31
17 Closing Credits · Quatre Préludes: Fête donnée par des chevaliers 2:30
Reinbert de Leeuw, piano [52:39] [1:22:53]
Quadrille: 프랑스의 스퀘어댄스[Square Dance: 여러 커플들이 사각형 형태로 개인의 집이나 마을에서 서서 추는 춤]. 각각 32마디로 이루어진 4곡과 피날레의 5개의 춤곡으로 구성된다. 6/8박자에서 3/4박자까지 다양한 박자로 이루어지며, 매우 쾌활한 음악은 대중적으로 유행한 선율이나 아리아 선율, 또는 종교적 작품에서 가져온 선율을 사용한다. 19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J. 슈트라우스나 J. 오펜바흐 등이 작곡했다.
Polka: 중부 유럽의 활기 찬 춤이며 또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친근한 무용 음악이다. 19세기 중반 보헤미아에서 유래하며 현재도 리투아니아, 체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폴란드,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아, 러시아, 슬로바키아 등의 민속음악에서 보편적인 장르를 이룬다. 한편 북유럽 국가 및 아일랜드,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다양한 버전을 찾아볼 수 있다.
폴카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1804~1849/ 1825~1899)와 B. 스메타나(1824~ 1884)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명칭은 체코어의 ‘절반’을 나타내는 půlka에서 연유하여 반 박자의 스텝이 특징이다. 체코어로 ‘폴란드 여인’을 뜻하는 polka와의 유사성 때문에 이 무곡이 폴란드에서 연유한 것으로 착각한다. 폴카는 거의 2/4 박자의 경쾌한 춤을 이룬다.
보헤미아에서 나온 폴카는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수도 빈에서 J. 란너(1801~1843), J. 슈트라우스 부자에 의해 많은 곡이 작곡되었고, 프랑스에서는 E. 발트토이펠(1837~1915)도 많은 폴카를 작곡했다. 후대에 와서 Jaromír Weinberger(1896~1967), D. Shostakovich(1906~ 1975), I. Stravinsky (1882~1971) 등도 폴카를 작곡했다.
Polka française: 여성적이고 우아하며 약간 느린 템포에 쾌활하다.
Polka-mazurka: 마주르카의 템포를 가지나 폴카와 유사하게 춤추는 형식이다.
Polka schnell: 빠른 속도감을 갖는 폴카 혹은 갤럽이다.
Erik Satie (1866. 5. 17 온푸루르 Honfleur~1925. 7. 1 파리)
본명은 Alfred Erik Leslie Satie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와 가톨릭 신자이며 해운업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870년의 모친의 사망과 기숙학교를 나온 1878년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먼저 니데르메이에르의 제자 비노 Vinot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아버지는 피아니스트 바르네체 Barnetsche와 재혼하였고, 에릭은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으며(라비냐크에게 피아노, 화성, 솔페주를 배움), 동시에 시인 콘타민 드 라 투르 Contamine de la Tour와 친교를 맺었다.
<오지브 Ogives>(1886)는 피아노를 위한 짧고 엄격한 서법의 작품으로, 틈이 없는 화성으로 인해 견고하고 수직적인 소리를 내는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할 수 있는 스타일로 작곡했는데 사티의 중세에 대한, 그것도 조잡하게 양식화된 신비로운 중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후에 단순성과 화성이 ‘점묘주의’라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칭찬받은 <3개의 사라방드 Trois Sarabandes>(1887)와 피아노곡 <세 개의 짐노페디 Trois Gymnopedies>(1888)와 같은 작품이 계속해서 작곡되었다. 이 짐노페디는 <6개의 그노시엔느 Six Gnossiennes>(1890~91)와 함께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드뷔시가 제1번과 제3번을 관현악으로 편곡). 사티는 그의 끝없는 멜랑콜리와 더불어 이런 작품들에 의해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카바레 ‘검은 고양이 Chat Noir’와 선술집 ‘클루 Clou’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는데 ‘클루’에서 드뷔시와 만나게 된다. 1889년의 만국박람회에서 접한 아시아와 중앙유럽의 음악은 <그노시엔느>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만 중점을 두고 작곡하던 제1기의 마지막 작품이다. 실제로, 그는 곧 어떤 신조 아래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아름다움을 위해서 간소하고 상당히 제한된 어법으로 작곡하는 자신의 예술을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단지 음악만으로 발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언어와 선언을 추가시키거나 친구들로 하여금 돕도록 했다. 반면에 그의 사생활은 매우 고독한 것이었다.
사회참여를 한 최초의 작품은 일종의 신부주의자로서 ‘장미십자교단 La Rose- Croix’ 운동의 개혁자였던 조세핀 팰라당 Josephin Peladan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작품으로는 펠라당의 희곡 <별의 아들들 Le Fils des étoiles>(1891)을 위한 부수음악과 그가 편애한 악기인 피아노를 위한 <장미십자교단의 3개의 종소리 Trois Sonneries de la Rose-Croix>(1891-92) 등이 있다. 피아노곡으로는 몇 곡의 전주곡과 <고딕식 무곡 Danses gothiques>(1893), 또 <천국의 영웅적인 문의 전주곡 Prélude de la porte héroique du ciel>(1894)이 있다. 이것은 후에 롤랑 마뉘엘에 의해서 관현악용으로 편곡되었다.
그 후 사티는 펠라당을 떠나 장난으로 '지도자 예수 예술의 수도교회 Église métropolitaine d'art de Jésus conducteur'를 설립했다. 그는 이 교회의 단 한 사람의 신자였고 교구기관지를 발행했다. 여기에서 이미 그는 유머작가로서의 우수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자의 미사 Messe des pauvres>(1895)는 오르간을 위한 곡으로서 타이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낡은 영화를 위한 음악처럼 '의고주의'를 연상시키는 정적이고 반기능적인 매우 검소한 화음병치에 기초한 곡인데, 이것은 그의 미니멀적인 미학선율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98년에 사티는 아르퀴유에 있는 은둔처 '상아탑'에 거처를 정하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영감이 자존심의 요구에 응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예술적 무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던 사적인 교단에 대한 실망 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아르퀴유에서 재능과 표현력이 넘치는 매우 많은 피아노곡집에 조롱이 가득 찬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패를 조직화하기 시작했다(<찬 소품 Pièces froides>[1897], 4손의 피아노곡 <배의 형태인 3개의 소품 Trois Morceau en forme de poire>(1903), <새로운 찬 소품 Nouvelles Pièces froides>[1906-10], <불쾌한 개요 Apreçus désagréables>[1908-12], <야무진 데가 없는 전주곡 Préludes flasques>과 <정말로 야무진 데가 없는 개를 위한 전주곡 Véritables préludes flasques pour un chien>[1912], <자동기록 Descriptions automatiques>[1913], <말라빠진 태아 Embryons désséchés>[1913], <낡은 금화와 왈츠 Vieu Sequins et Vieilles Cuirasses>[1913], <까다로운 귀부인의 3곡의 우아한 왈츠 Trois Balses distinguées du précieux dégoûté>[1914], <끝에서 두 번째의 사상 Avant- Dernières Pensées>[1915] 등). 이 곡들은 의도적으로 짧게 한 것들로서 거기에는 앤 레이가 잘 말했듯이 사티의 익살스러운 연주용 주석과 유머러스한 '시'라고 할 만한 짧은 시들이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폴레트 다르티 Paulette Darty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와 음성을 위한 <가곡집 Mélodies>(1900)―'당신을 원합니다 Je te veux', '엠파이어 극장의 프리마돈나 La Diva de l'Empire', '상냥하게 Tendrement', '금분 Poudre d'or'―은 패러디 정신을 가진 샤브리에의 작품만큼은 생기가 없어 2류 작품이 아닌지 가려야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세대의 드뷔시에 대해서는 경탄할 만한 우정을 유지했고 드뷔시도 그의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1905년 사티는 39세의 나이에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서 스콜라 칸토룸(특히 루셀의 클래스)에 들어갔는데, 대위법을 배우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 번째의 도전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 구성법과 어법을 풍요롭게 하려는 진지한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그는 교수들이 인정한 바와 같이 열심히 공부했다). 약간의 침묵기간 후에 태어난 <승마복을 입고 En habit de cheval>(1911)와 같은 몇 가지 곡에는 이 경험이 반영되었다. 이 작품들에는 푸가와 대위법을 사용했으나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티의 반항정신은 굳어졌고 자신의 실패를 하나의 신조로 삼고 예술이 조롱의 시대까지 왔다고 비난했다.
그는 라벨이나 알렉시스 롤랑 마뉘엘 같은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내어 그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개최하고 초기의 작품인 <사라방드>를 발굴해 준 것에 대하여 감동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창시자도 아닌 '십자군'의 기수로서, 또 그것을 구실삼아 여러 가지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반댕디주의, 반아카데미의 십자군, 그리고 콕토와 '6인조'가 이끄는 반인상파의 '십자군', 다다의 반예술의 십자군 등이 그것이다. (직접 몸을 던져서) 여러 가지 미학상의 막다른 골목에서 살았고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혁신의 길을 개척한 것이 사티의 참모습이다. 예를 들면, 백그라운드 음악(그는 가구의 음악 Musique d'ameublement이라고 불렀다)이나 데생, 그가 큰소리로 읽기를 금한 시가 있고 미적인 악보에서 볼 수 있는 그래픽하고 개념적인 음악(<스포츠와 기분전환 Sports et Divertissements>[1914]), <파라드 Parade>의 현실음과 잡음의 인용과 효과에서 볼 수 있는 콜라주의 음악, 피아노곡 <벡사시옹 Vexations>에서 볼 수 있는 연속적인 명상의 음악 등이 있다.
콕토의 대본 및 피카소의 무대장치와 의상에 의한 <파라드>(1917)에 의해서 그에게는 오해에 의한 성공의 시기가 왔다. 1914년 콕토는 앞으로 함께 일하려고 그와 우정을 맺었으며, 그것은 이 큐비즘의 발레에서 결실을 맺는다. 사티는 이 기획에 맞도록 음악을 무난히 작곡했다. 즉, 객관적이며 평면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이 되어 있고 매우 단순한 잡음의 효과(타이프라이터와 사이렌)가 들어가며 기본적인 테마가 되풀이되고, 기계적인 리듬의―기계는 계속 사티를 매혹한다―감상적인 흔적 없이, 그리고 작자의 복잡한 심리적 흔적이 없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또 그는 미국의 미니멀 뮤직처럼 아폴론적이고 객관적이지만 양식은 자조와 과장된 빈곤상태의 색채가 강한 음악으로의 길을 열었다.
사티는 <파라드>의 스캔들에 의한 성공을 결코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미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장식적 요소로서 작용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콕토는 소책자 <수탉과 아를르캥>에서 사티를 군살을 빼고 거듭 태어난 건전하고 양식화된 새로운 음악, 즉 선 음악의 모범을 후대에 물려준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티가 자기 자신의 야심과 자기가 가진 양면성을 동시에 주입한 작품은 3인의 메조소프라노와 소프라노, 그리고 실내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극작품'인 <소크라테스 Socrate>(1918)이다. 이 작품은 빅토르 쿠쟁 Victor Cousin의 번역에 의한 플라톤의 대화편의 단편을 사용해서 이 그리스 현자의 모습과 그 죽음을 환기시키려고 한 것이며, 이것은 관대한 예술애호가 폴리냐크 Polignac공 부인의 의뢰에 의한 작품으로서 부인은 원칙적으로 사티를 도발가라는 성가신 트레이드 마크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장식이 없고 엄숙하며 감정을 억제한 레치타티보로 작곡한 이 작품은 그의 결백성과 빈약한 방침에 대한 도박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마치 소크라테스를 흉내 내어 그의 음악에 제동을 걸고 독이 든 홍당무의 독이라도 마신 것처럼 가능한 한 움직임을 억제시키고 마취시킴으로써 모든 표현, 모든 채색의 길을 단호하게 폐쇄해버리는 자기억제의 수법을 볼 수 있다.
1920년 그는 또 하나의 전위적인 실험에 참여했다. 막스 자콥 Ma Jacob의 희곡 인테르메초에 사용된, 다리우스 미요와 공동 제작한 <가구의 음악>이 그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반예술적 도발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든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코안경을 끼고 염소수염을 기른 노교사의 모습을 즐겨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다 운동의 트리스탄 차라 Tristan Tzara와 프란시스 피카비아 Francis Picabia와 연관된 선구자의 취급을 당했던 그는 피카비아를 위해서 ‘순간주의 발레 ballet instantanéiste’ 음악인 <금일휴관 Relâche>(1924)을 작곡했다. 그 속에는 르네 클레르 René Clair의 무성영화 <막간 Entr'acte>을 위한 총보도 포함된다. 이것은 롤랑 마뉘엘이 정확하고 냉정하게 지적했듯이 그 엉뚱한 단순성에 의해서 거의 자살행위와도 같은 작품이다. 극히 통일감이 결여된 음악에 앞서서, 이미 파블로 피카소와 레오니드 마신 Leonide Massine이 협력한 발레 <메르퀴르 Mercure>(1924)가 견고한 형식적 통일과는 다른 것에 대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사티는 고독하지 않았다. 앙리 클리케 플레이엘, 로제 데조르미에르, 앙리 소게, 막심 자콥 등 그를 존경하는 젊은 작곡가들이 사티와 샤를르 쾨클랭과 결속하는 형태로 사티의 ‘은신처’의 지명을 따서 ‘아르퀴유 악파’를 형성한 것이다. 그는 그들의 수호신이자 ‘대부(大父)’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보다 인물을 이 악장의 문장에 사용한다는 일종의 결의에 의해서 이 운동 전체가 그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악보에 시각적인 요소와 제목, 그리고 동작에 관련된 말, 선언, 유머 등을 많이 적어 넣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없앨 수 없으며, 없애버린다면 마치 뼈만 남은 것처럼 되어 버릴 것이었다. 사티는 그의 친구들의 작품들처럼 그 자체가 생명체인 ‘자립적’ 작품을 레테르와 미학적 운동을 초월하여 자신이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다소 유감스럽게 여겼다.
말년의 사티는 그에게 심취한 사람들의 일부와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들은 사티가 앞서 세상을 떠난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상드>의 미학과 여러 가지 화음상의 혁신을 ‘도용했다’고 하면서 드뷔시와 비교했다. 사티가 원망스러운 기분을 억제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의 도발적이고 신랄한 행동은 그가 자신의 실패감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힐 수 없거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1925년 7월 1일 성 조셉 병원에서 어떤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악화일로에 있던 간경화증 때문에 거의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후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미학을 위하여 재평가 받게 되지만 작품 자체가 사랑받지는 못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존 케이지가 사티에 의해서 완성된 선구자로서의 불가결한 일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사티는 자국인들로부터는 농담 잘하는 사람 또는 속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취급당했지만 후에 국제적인 전위운동단체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프랑스의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짐노페디>와 <그노시엔느>처럼 간단한 동시에 유례가 없는 작품은 후세의 ‘전위주의’로, 모든 재평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곡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인기를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사티는 편협한 작곡가가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음악어법을 구사했고 원한다면 음악성에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별난 사람’이었던 것은 대중들에 대해서라기보다 자신에 대해서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이 ‘대음악가’가 되려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 자신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음악은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려는 필요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경우에는 조소적인 태도라고 해야 대부분 상대를 반복적으로 부정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대레퍼토리의 측면에서 볼 때, ‘사랑받는 고전주의 Classiques favoris’의 반무명성과 평안을 쟁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짐노페디>처럼 짧고 감성이 풍부한 소수의 작품에 비하면, <파라드>와 <금일휴관>에서만큼 떠들썩한 인기가 있는 것은 없었고 언어의 전투적인 싫증을 느끼게 하는 뜻으로 이만큼 ‘민중주의’적인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