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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아이들이 펴내는 전연령을 위한 바깥바람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가 출간되었습니다!
예리하지만 따뜻한 통찰력을 지닌 '최윤정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_바깥바람11
최윤정 지음
국판 (148*210mm)|300쪽|값 15,000원
바람의 아이들 펴냄|ISBN 979-11-6210-024-0
2018년 12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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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하세요, 최윤정 선생님.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2017년에 『슬픈 거인』 개정판을 펴내시고 1년 만에 출간 소식을 들려주셨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을 부탁드립니다.^^
작년에 이사를 했어요. 이사를 하면서 짐을 많이 덜어냈죠. 옷가지, 살림살이, 그리고 책까지. 덜어내도 덜어내도 필요 없는 것은 많아 보였어요. 결국 아직까지 정리를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물건들뿐만 아니라 내면에 쌓인 짐들까지요. 올해로 딱 60년을 살았는데, 돌아보니 참 어수선하게도 살았더라고요. 그렇게 살았던 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2. 1997년 초판으로 나왔던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는 약 2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어린이 문학 상황과 현재 어린이 문학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때는 뭐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열정의 시대였던 거 같아요.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이 출간 전 1-2년간 여러 매체에 실렸던 글을 모은 것이었는데, 제가 그것들을 쓸 때만 해도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어요. 저 뿐만 아니라 막 부모가 되었던 386세대가 의욕적으로 움직이던 때였죠.
당시는 외국 문학 전공자들의 노력으로 유럽의 작품들이 대거 번역 출판되면서 천사 같은 아이와 일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양분되던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이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출판의 불황이 깊어지던 때였는데 어린이 책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어린이 책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던 과도한 조명을 받았습니다. 4대 일간지에 전면으로 두 쪽씩, 컬러 인쇄가 된 어린이 책 기사가 실렸고 그 때까지 어린이 책을 경시하던 대형 출판사들이 하나 둘 어린이 책을 만들기 시작했죠.
지금은 우리가 이름을 아는 메이저 출판사 중에서 어린이 책을 내지 않는 곳이 없다시피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창비 아동문고가 거의 유일한 좋은 책들이었거든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꺼번에 어린이 책이 많이 만들어져야했습니다. 지금은 큰 출판사들이 문학상을 제정하여 신인들의 원고를 모으고 있지만 당시에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들과 계약을 하는 출판사는 없었기에 한편으로는 이름이 있는 작가들은 너무 많은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 책 수입 경쟁이 불꽃 튀었으니 그 부작용도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거품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면서 시간이 10년, 또 10년이 흘렀고 이제는 그 와중에서 그래도 책을 읽고 자라난 아이들이 부모도 되고 작가도 되고 편집자도 되었습니다. 지나온 시대에는 결핍이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었는데, 이제 그런 결핍 자체가 없는 시대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사명감이나 공공의 선을 위한 노력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일이 당연해졌지요. 개별화는 다양성을 가능하게 했고 양질의 책들도 많아졌습니다. 무엇이 옳고 좋은 것이라는 큰 목소리가 잦아들고 나자 작품들 하나하나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게 되고, 어린이 청소년 문학의 세계도 차츰 풍요로워지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 풍요가 처음 맞이하는 물결이라 전문가 집단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세대 간의 차이가 있고 책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수 없는 만큼 어린이 책 출판가는 혼란스럽습니다. 작가주의를 채택하는 출판사는 거의 없고, 책은 대체로 작품성보다는 상품성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좋은 책이라는 바탕 속에서 좋은 작가와 독자가 자연스럽게 탄생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대한민국이니만큼, 그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야한다는 부모들의 열망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책을 읽도록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3. 초등학교 및 중학교 교과서에 ‘독서 단원’이라는 챕터가 새로 생길만큼 아이들의 독서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을 따로 익히고, 교육해야하는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의문인데요. 이에 대한 선생님은 생각은 어떠실까요?
공부와 책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있는 건데 우리나라 학교 교육에서는 교과서 이외의 책은 별도로 ‘독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 학원의 공부에 시달려 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에게 독서를 시키자니 어른들이 나서서 무슨 책을 읽힐 것인가 얼마나 읽힐 것인가, 골고루 읽혀야 한다, 빨리 읽혀야한다, 아니다 적게 읽더라도 정독이 좋다 등등 우왕좌왕할 수밖에요.
책을 읽는 능력을 기르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독서’ 자체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어른들과는 다른 아이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능력이 향상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우리나라 교육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독서교육 현장을 보고 있으면 그렇잖아도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힘들어 보이는 우리나라 아이들은 ‘독서’라는 과목을 따로 하나 더 공부해야하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는 목적이 책 읽는 사람, 그러니까 독자로 키우기 위해서라고 말했던 다니엘 페낙이 자꾸 생각납니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독자는 독자 아닌 사람에 비해서 확실히 괜찮은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사는 세상은 괜찮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은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4. 책머리 글에 적힌 ‘동화 속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거기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모르고 있던 내 안의 아이였다’라는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내 안의 아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일수도 있고 미처 자라지 못한 내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아닐까 하여 여쭤보기 조심스럽지만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1988년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저는 프랑스 현대 비평가인 모리스 블랑쇼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이어서 조르주 바타이유, 필립 솔레르스 등등 프랑스 현대 문학을 놓지 못했지요. 그런 제가 왜 어린이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인지 그동안 질문을 많이도 받았습니다. 제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였지요. 어딘지 궁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적어도 의식에서 그건 분명하고 또렷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을 되짚어 보면 인상적이고 동시에 낯선 어떤 느낌이 있습니다. 책 이전에, 아이. 원래 제가 아이를 좋아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옆에 두고 보니까 아이가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말을 시작하고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걸 보면 말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피부에 전해져오는 자극이 있었어요. 난생 처음 인지하는 것도 같고, 뭔가 반가운 것도 같은. 그런 느낌과 인상들을 동화 속 인물에게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게 좋았어요. 그렇게 저는 어린이 책 속의 아이들과 동화되면서 편안해졌고, 우리 아이들과도 잘 통하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제 아이들이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될 무렵부터 저는 조금씩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일상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내면에서는 그랬답니다. 그 소외감을 천착해 들어가다 만난 것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였습니다. 나였던 그 아이가 그렇게나 힘들었다는 걸 알지 못해서 생겼던 수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야 했지요. ‘내 안의 아이’는 그렇게 생겨난 표현입니다.
5. 위 질문과 이어질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아이’라는 표현은 이번 개정판에 새로이 들어간 챕터 ‘1. 내 안의 아이, 내 앞의 아이’에도 사용되었는데요. 그럼 ‘내 앞의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이 챕터는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지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환상의 총량’과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의 청탁을 받고 썼던 글이에요. 당시 제가 한참 글을 쓰지 않고 있던 때여서 몹시 망설였었는데, 우리 사회의 약자인 어린이에 주목한다는 편집장의 말에 설득 당했습니다. 그 신문의 독자 90% 이상이 어린이 책에 관심이 없을 것이 분명해보여서,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 어른들의 내면에 대해서 썼죠. 학술적인 글들이 실리는 대학원 신문에 그림책 이야기라니. 뜬금없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청탁이 왔어요. 다시 그림책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알도』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때 미처 살펴주지 못했던 감정들에 어른인 독자들이 자극되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그 지면을 통해서 어린이 책 독자를 확장시키고 싶은 깊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어린이 책의 독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책들이 많아지기만 하다면요…
‘내 앞의 아이’라는 표현은 ‘내 안의 아이’라는 표현에 대구(對句)로 떠오른 건데, 부모로서 내가 낳고 기르는 아이, 선생으로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 그 아이들의 친구인 아이들, 내 친구의 아이들, 그렇게 이어지는 세상 모든 아이들, 내 눈앞에 실재하는 아이들, 내 안에 고착되어 있는 아이와는 달리 성장하고 변화하고 자기대로 존재하는 아이를 의미합니다.
6.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책인 만큼 당시 어린이 문학계 종사자를 비롯해 부모 등 많은 분들의 피드백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어떤 어린이 책을 골라야할지 막막했던 부모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자와의 만남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돌이켜봐도 이 책은 독자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요. 과연 제가 그 사랑에 값할만한 무언가를 해냈는가, 아직까지도 가끔 반성적으로 생각해보곤 합니다. 당시에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어린이 책을 고르는 법’을 알려달라는 거였어요. 그중에 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어느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고 나서 기사를 보니 ‘아동문학 평론가 최윤정이 말하는 어린이 책 고르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10여개 항목을 적어두었는데 낯이 화끈거리더라고요. 제가 정성들여서 말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봐요. 강연장에 오시는 학부모들의 관심은 대부분 책 안 읽는 자녀를 책 읽게 만들고, 책 읽는 자녀에게는 좋은 책을 빨리, 많이 읽히고 싶은 것이죠.
어느 도서관의 강연에서 이 문제 자체를 다루었던 적이 있어요. 우리는 왜 그렇게도 자기 자식을 책 읽게 만들려고 하는가? 요즘은 옛날과 조금은 달라져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독서를 학교 공부와 연결해서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식이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거나, 무언가 되어야한다고 말하지도 않지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도록 뒤에서 지켜보지를 못해요. 불안한 거죠. 그 불안의 뿌리는 자식을 위한 헌신이나 희생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욕망이고요. 그 날 강연 후에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겨우 “불안했어요” 한마디만 하고 가버리셨던 게 인상 깊이 남아있습니다. 손이라도 잡아드리지 못한 게 후회되었어요. 그렇죠, 부모가 된 우리는 너나없이 불안합니다.
7. ‘미투 운동’이나 ‘성(性)’에 대한 내용이 새로 수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 수면 위로 올라와야하는 일이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어린이 문학 작가들 역시 비슷한 마음일 텐데요.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작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나 당부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미투 운동에서 우리가 다 같이 지켜보고 있듯이, 피해자들은 2차 피해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미투 운동에 나서는 이유, 이런 분위기에도 어떤 피해자들은 숨어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들에 주목해주었으면 합니다. 성은 너무나 내밀한 것이므로 ‘문제’화 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성과 사랑은 하나의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점입니다. 청소년들의 사랑을 일탈로 바라보는 시각, 아직 성과 사랑을 모르는 아이들이 성을 폭력, 추행, 희롱과 같은 낱말들과 연결 지어 더 먼저 접하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오래 전, 성추행을 당한 여자아이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고 분노해서 썼다는 청소년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지요. 그 작품을 읽었을 때 저는 작가가 그 아이의 내면에 과연 접속이 되기는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다루려면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내면에 깊이 공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아픔과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깊이. 청소년 소설은 사건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주제는 사건 자체를 서사로 다루는 것보다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 한때 청소년 소설에서 금기시 되었던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출간하신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보를 보면 항상 몇 자국 앞서서 필요한 이야기를 살펴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아이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나 주제는 어떤 것으로 보실까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요… 제게는 어른이 안보입니다. 동화에도 청소년 소설에도 흔들리고 방황하고 자기 고통을 갈무리하지 못해 무너지고,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어른들을 견디느라 그렇잖아도 어려운 삶이 더 버거워지는 아이들만 보입니다.
이것은 솔직한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지나간 시대의 어른들은 윤리나 관습 혹은 종교나 도덕처럼 커다란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서, 인내하고 절제하면서 어른이 되었던 탓에 사고가 경직되고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정확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반항을 하거나 순종을 하거나 아이들의 몫도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그러한 가치관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른이 된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다가 아이처럼 되어버리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사실상 세상 모든 엄마들이 할 일은 오로지 하나, 헌신, 아기가 3살이 될 때까지의 헌신인데(오이디푸스기에 도달하는 3살까지는 절대적으로 엄마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아빠의 역할은 그 다음부터고요) 이것을 하지 못하는 엄마들이 많고, 자기 딸이 그 고생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들도 많습니다. 딸을 사랑해서 딸의 자식들을 대신 돌봄으로써 엄마 사랑을 받아야할 손주의 권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할머니들이지요. 자기 자식 사랑에만 눈이 먼 엄마들 때문에 그 딸들은 오롯이 엄마가 되지 못했고, 엄마의 품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된 부모들이 포진한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 흉내를 내다가 아기가 되었다가 하면서 갈팡질팡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 속에서나마 어른다운 어른이 한 명이라도 등장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9. 마지막으로 이 책을 만나 볼 독자 분들을 위해, 자유롭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글을 쓰는 것은 독자와 함께 하는 일이라는 점을 글을 쓰지 않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있어 행복했고, 앞으로 읽어주실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