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희의 ‘고향의 종’
저무는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감나무 잎을 흔든다.
뎅그라아 - ㅇ, 뎅그라아 – ㅇ
고향마을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수십 년 만에 들어보는 소리이다. 하얀 종탑에서 언덕으로 다가오는 종소리의 맑고 긴 여운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때도 오늘처럼 종이 울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그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방금 물감을 칠하고 완성한 그림처럼 선명한 종소리의 기억이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종소리가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대 여섯 살 때 일이다. 종소리에 끌려 교회에 가려고 했다. 번갯불이 번쩍하고 이윽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교회의 저녁 종소리가 빗속을 뚫고 희미하게 들려온다. 일 년 열 두 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시각에 초종, 제종이 두 번씩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이 소리를 듣는 이는 고단한 일을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되돌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내일을 준비하라고 종은 울렸다.
나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일어났다. 시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교회로 향했다. 비바람이 너무나 세차 우산살이 꺾이고, 웃은 흠뻑 젖었다. 여름 밤의 거센 비가 내 볼을 아프게 때렸다. 길바닥에서 미처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모여든 빗물이 내 발목 위까지 차오른다.
6. 25 전쟁이 막 끝난 때라 마을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과 촛불, 별빛, 달빛에 의지해 지냈는데 오늘은 그대로 암흑세계다. 나는 마른 편이지만 어디선지 힘이 솟았다. 번갯불로 어두운 길이 훤히 보이면 방향을 잡아 쏜살 같이 달렸다. 교회에 다 왔나 했는데 아직도 마을 어귀를 벗어나지 못햇다. 내 앞으로 두 개의 불빛이 번쩍 하며 지나간다. 꼭 여우에 홀린 것 같다. 수시로 늑대와 여우가 마을로 내려와 닭과 돼지를 물어갔다. 하느님께 지켜줄 거란 믿음 때문에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예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칠흑같은 밤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가다보면 논두렁에 한쪽 발이 빠져있기도 하고, 오일 장이 서는 장터 건물 기둥에 부딪칠 뻔했다. 용하게 다친 곳 하나 없이 유년부 예배 시간에 맞춰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타고 있는 강도 상(床) 위의,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시는 듯했다. 아무도 오지 않은 교회당 안에서 전도사님과 사모님이 기도를 하신다. 인기척을 느낀 두 분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다가와 인자하신 모습으로 나를 포옹했다. 나의 용기에 놀라면 연신 쏟아지는 빗물을 닦아 주셨다.
교회 밖은 천둥, 번개, 비바람 소리로 요란한데 내 마음은 큰 일을 한 듯 벅차고 편안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마음속 이야기를 기도하고 나자 전도사님은 칭찬을 하며 잘 익은 감을 주셨다. 교회 사택 앞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 푸른색의 풋감을주워다 익혀 둔 것이다.
교회에 일찍 오는 어린이에게 감을 주신다. 요절을 외우거나 결석을 하지 않으면 상으로 성화(聖畫)와 학용품도 주셨다. 그날 밤, 나에게 주신 서너 개의 잘 익은 감을 그 자리에서 먹었다. 무척 맛있고 달콤했다. 그날 들은 성경 얘기는 또 가슴으로 즐거웠다.
종소리는 나에게 오감을 즐겁게 하는 완전한 소리였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교회로 달렸다. 그렇게 교회당의 종소리를 기다리며 보낸 유년의 첫 기억이 어제인 듯하다.
서울로 올라 온 후에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이게 인생인가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저 심연 속에서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어느날 물 위로 떠오르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모습인가 싶은------.
칠혹같은 밤 폭우를 뚫고 앞으로 나가게 한 낮고 부드러운 소리, 종소리는 닫힌 내 마음을 열어주는 신비의 열쇠였다. 그 소리는 내 몸과 정신을 튼튼히 키우는 떡잎이었다.
해질 녁 고향의 선산 너머, 이순이 지난 내게로 맑은 빛을 머금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한 교회의 종소리는 내 가슴에 젖어들어 세상사에 얽메인 마음을 따스하고 순하게 이끈다. 낮은 음이 만들어내는 종소리의 여운이 내 귀에 좋은 느낌을 주고 마음을 편하게 한다.
날카롭고 어두운 소리를 들으면 마음까지 우울해진다. 헛소리, 흰소리, 잔소리 대부분의 소리는 안들었으면 하는 인간의 소리이다. 환경부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인간의 소리는 할아버지의 잔기침 소리와 전통놀이 소리 두 가지 뿐이라고 한다.
여러 복잡한 인공의 소리로 차츰, 이웃, 친구 가족까지도 낯설어지는 요즘,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렵다.
듣지는 못하고,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세속을 벗어나 달려가고픈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소리, 내 고향의 오래 된 교회 종소리, 그런 소리 하나쯤 가슴에 순수의 열쇠로 담아 두고 마음 씻으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따스함을 지켜 갈 것이 아니겠는가..
*이 수필도 '종소리'가 들려오자(현재의 경험), 이 경험이 과거를 불러냅니다(회상입니다.)
단순히 종소리만이 어 아닌, 고향의 모습으로 확대됩니다.
이 확대가 수필을 만드는 동력입니다. 여기에는 상상력이 작용하고, 고향 이야기를 펼치는 과정에
온갖 감정이 개입합니다.
수필은, 이처럼 현재의 경험 하나를 바탕으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거나, 회상의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수필로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려는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이런 수필 쓸수 있기를 열심히 공부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