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쓰고 싶은 주제가 여럿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못 쓸지경,
송아샘 말씀대로 한 문장이라도, 쓰자는 마음으로, 이 기회가 아니면 또 밀릴 것 같아 부랴부랴 써 보았습니다.
지금 겨우(?) 흐름, 주제, 소재만 담아 너무 초고라 부끄러우나, 이렇게라도
일단은 올려봅니다. 추후 편집할게용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의 《나쁜 교육》을 읽으며 몇년 전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집에서 600m 거리 마트에 초등학교 1학년(8세), 5세 두 아이를 마트에 심부름 보낸 적이 있다. 작은 아이가 매장에서 소변 실수를 했고, 주인댁 총각이 집까지 와 애들만 이렇게 보낼 때가 아니라고 훈계한 일이다. 마트에서의 소변 실수는 총각을 귀찮게 했을지언정 화나게 하진 않았다. 총각의 뜻은 분명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어린 아이들만 이렇게 보내느냐. 아이들 보호자로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분명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주고 싶은 선한 의지가 있었다.
그레그와 조너선은 이 책을 쓰게 된 진짜 계기가, 예전과 달리 오늘날 '학생들이 유약하다(fragile)'는 전제에 있다고 밝힌다. 오늘날 학생들은 가난이나 정신적 어려움 등 다양한 취약성을 안고 있고, 교육자라면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고 배려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학생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켜 해를 입히지는 않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용)
요즘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일들을 벌이는 게 사실이며, 어른들의 과한 욕심에서 몇몇 부정적 결과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 그런 과잉보호는 "coddle"의 사전적 정의에서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 이를테면 "극단적이거나 지나친 배려 혹은 친절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라는 뜻풀이를 보라. 그러니까 잘못은 어른들과 제도적인 관습에 있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부제를 "좋은 의도와 나쁜 생각이 만나 어떻게 한 세대를 망치고 있는가 How Good Intentions and Bad Ideas Are Setting Up a Generation for Failure"라고 붙였다. (한국어판에서는 이런 취지를 제목에 부각시키고, 부제를 달리 변경했다.-편집자).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려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선의에서 비롯된 과보호(땅콩을 금지한 초등학교의 학칙에서부터 대학 내 언어규범에 이르기까지)가 어떻게 득보다는 해가 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 <나쁜 교육> 들어가는 글 中-
올해 그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거주지를 옮겼지만 여전히 혼자서 등학교를 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 또 동네와 친해지기 연습을 충분히 했기에 혼자 다니고 있다. 하지만 매일 방과후, 돌봄 선생님은 "**이 잘 들어갔나요?" 전화를 하신다.
언제부터 우리의 인식이 이만큼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우리 는 초등학교 1학년은 혼자 하교할 수 없음이 공공연한 사회에 들어섰다. 달갑지 않음에도 "아이들 등학교는 혼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하진 못한다. 가끔 아이들이 혼자 집을 나설 때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내 탓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내 몫의 두려움이 아닌, 원치 않는 사회의 손가락질까지 얹힌 두려움말이다.
착잡한 마음에 언제 세상이 이리 변한 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니, "학교에서 그렇게 신경써 주면 좋지 않아요?" 그게 왜 걱정할 일인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교는 교육기관이자 행정기관이다. 이 두가지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나쁜 교육> 10장의 제목처럼 관료주의는 안전주의를 지향한다. 저자는 대학교수이므로 미국 대학의 사례로 설명했지만, 이는 한국의 초중고등학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사실이다. 한국 교육부의 수장인 교육부장관은 이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단 한차례도 한국의 공립 교육에 몸담았던 이였던 적이 없었다. 교육부, 또는 교육청 고위직 관리자 대다수가 교육자가 아닌 행정직 출신이다. 이들은 수십년 전부터 학생을 소비자로 대하는 시장지향적 결정을 내렸다. 학부모나 학생을 교육수요자라고 칭한 것도 그 때즘 부터이다. 무엇보다 관료제의 수장들은 나쁜 평판에 대한 우려와 소송의 위협을 포함해 많은 문제에서 압박을 느낀다. 이제 초등학생에게까지 사이버 중독은 물론 도박 중독, 마약중독 예방 교육까지 하는 이런 공격적인 안전교육이 일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학교의 행정주의와 함께 사회, 부모의 요구가 있다. <압박 부모,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 성공적인 아이를 키우면서 경쟁에 대처하기>의 공동 저자인 웬디 그롤닉은 이를 '압박 부모 현상'이라고 불렀다. 또래 부모들이 자녀의 성공을 위해 온갖 방식으로 압박하는 모습을 볼 때, 자신 또한 자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말한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부모들은 '나만 부족한 게 아닐까' 불안해지고, 이런 감정은 주변 부모와 아이들에게 빠르게 번져간다.
교사 임용 수업 시연을 준비할 때였다. 주어진 수업 주제에 대해 수업 계획안을 작성하고 5~10분씩 각자 수업을 마친 후 교수님의 코멘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미소를 띄며 일어선 교수님 말씀,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인가요?"
우린 모두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머쓱해했다.
진자 실험을 통한 주기 측정, 용수철을 이용한 탄성력의 크기 등등 과학 수업에서 실험을 통한 탐구 수업 주제는 다양하다. 같은 주제를 다른 재료로, 같은 재료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방식으로도 다른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이끌어 갈 지를 계획하고 평가하는 데 중지를 모으던 시기였다. 흥미 유발, 강의 방법, 실험과 토론 안내 등 교수 학습 설계의 빠듯한 틈 사이로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실험 안전'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매김했다. 모두가 주객전도를 느끼던 그 때 쯤 우리는 한 몸 처럼 털썩 웃고 말았다.
안전은 중요하다. 그러나 경고가 필요 이상이 되면, 즉 결과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거나 그래서 불안을 느낄 정도가 되면 주객이 전도된 상태이다. 그 때 집단은 건강하고 생산적인 담론으로 향하지 못하고, 두려움 심지어는 공포심으로 의식과 무의식여러 차원에 걸쳐 우리를 고루 위축시킨다. 유연하고 건설적인 사고를 가로막고, 두려움과 안전에 대한 이중문안에 갇힌다. 교육은 위축되고 사고는 경직된다.
(인용)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학생들이(보다 일반적으로는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문제가 하찮은 것이라거나 "사서 하는 걱정"일 뿐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런 실질적인 문제들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
<나쁜 교육> 들어가는 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