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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순례기
2016년 1월 18일(월)-22일(금)
주최 : 하부내포성지
■ ‘서짓골’에서 ‘오우라’를 향하여
지난 1월 18-22일에 윤종관 신부의 안내에 따라, 나가사키 지역에 4박5일 일정으로 순례자들께서 다녀오셨습니다. 이 순례의 여정은 특별한 목적으로 하부내포성지 측에 의하여 기획 되었습니다. 이 여정은 하부내포성지의 서짓골에서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을 잇는 목적의 순례였습니다. 이 순례는 박해시대의 서짓골과 일본 교회에 연관 된 역사를 되새기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며 기도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순례의 출발지는 서짓골입니다. 이 출발지로부터 나가사키를 향한 순례는 다음과 같은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그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순례는 그 자체로 ‘역사적 여정’입니다.
하부내포성지의 홈페이지와 대전교구 및 가톨릭굿뉴스 홈페이지에 지난 2015년 여름부터 ‘나가사키 순례 계획’을 홍보했습니다. 그걸 보시고 참가 희망을 전해오신 분들로 순례 인원이 구성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50여 분께서 희망하셨는데, 여건상 40명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신청 마감을 한 후에도 여러 교우님들께서 문의를 해오셨지만, 더 이상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순례 인원을 40명으로 마감한 후 참가비 접수를 하면서 구체적 준비를 하던 중, 출발 3일 전에 한 분께서 부득이 취소하시겠다는 연락을 해오셨습니다. 수도권에 사시는 자매님이신데, 남편께서 불의의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께서 개성공단 입주 회사의 사장님이신데, 개성에서 북한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에 의한 사고를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자동차가 폐차되다시피 망가지고 다행히 생명을 잃진 않으셨지만 중상을 입으셔서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거였습니다. 북한 사고차량과의 협의가 요원한 실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불행을 당하신 남편을 두고 성지순례에 함께 할 수가 없으신 자매님이셨습니다. 마음 아픈 일이었지요. ‘역사적 여정’에 참가하지 못하는 그 자매님의 고통스런 마음을 순례자들 모두의 한 마음으로 안고 출발하였습니다. 40명으로 출발하려던 순례자들은 그 자매님 한 분이 참가하지 못하여 39명의 마음속에 그 1명의 마음을 함께 간직하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1. 역사적 여정의 순례
■ ‘서짓골’에서 출발하는 역사적 여정
병인년(1866년) 3월 30일에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5위의 성인들 중 4위의 유해를 그해 7월 중순에 서짓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모셔 안장했습니다. 갈매못에서부터 서짓골까지의 12일간 험난한 운송 작업으로 모셔온 유해는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과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님과 루카 위앵 신부님과 요셉 장주기 회장님의 시신이었습니다. 갈매못에서 웅천 완장포구까지 거친 풍랑을 헤치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넌 후 이십 여리 산을 넘어 서짓골에 성인들의 시신을 모셔왔습니다. 그 성인들의 유해를 산자락에 안장해 드린 후, 그 안장 작업을 했던 서짓골의 주요 신자들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고, 나머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16년 지난 1882년에 그 순교 성인들의 무덤을 발굴하게 됩니다. 박해를 피해 서짓골을 떠나 살아남은 신자들의 손에 의해, 그 성인들의 유골을 수습한 당시의 조선교구 부주교 블랑(Blanc) 신부님께서 일본 나가사키 교구와 협의를 하였습니다. 그 성인들의 유골을 나가사키로 옮겨 모시고자 하는 협의였습니다. 블랑 부주교께서 그러한 협의를 하게 된 까닭은, 그 유골을 조선에서는 안전하게 모셔둘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나가사키 오우라에는 이미 1864년에 성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자기와 같은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블랑 부주교께서 그곳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옮겨 모실 계획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박해의 광풍이 잦아들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천주교 신앙이 금지되어 있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1873년에 천주교 신앙의 금교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조선을 침략하여 만행을 저지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서 일본 전국을 장악한 에도막부가 1614년에 내린 천주교 금교령이 260년 만에 해제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저지른 도요토미 역시 천주교를 혹독히 박해하여 수많은 신자들을 처형했습니다. 도요토미의 박해에 의해서 1597년에 순교한 수많은 신자들 중에는 포로로 잡혀가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조선인들도 허다했습니다. 그러한 도요토미 시대로부터 시작 된 사실상의 박해는 도쿠가와 막부로 이어지며 276년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막부시대의 말기인 1857년에 서양의 무역상들이 일본과의 교역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의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들이 일본 내 자국민들의 신앙지도를 명분으로 하여 일본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들은 당시 조선에서 박해 중에 교우들을 사목하던 선교사들의 동료들입니다.
나가사키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던 시기에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혹독한 병인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 병인(1866)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다블뤼 주교님 등 순교자들께서 서짓골에 묻히신 후 1873년에 흥선대원군이 실각했는데, 바로 그해에 일본에서는 메이지 정부가 260년간의 천주교 금교령을 해제합니다. 그리고 1876년에 일본의 강압적 요청에 의해 조선과 일본 간의 강화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됩니다. 바로 그해에 조선에는 병인박해에 의해서 처형되거나 피신하여 사제가 없던 10년 만에 다시 파리외방선교회의 사제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비밀리에 들어온 것입니다. 병인년에 중국으로 피신하였던 리델(Ridel) 신부가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 받아 동료 사제와 함께 비밀리에 입국하였다가 발각되어 다시 중국으로 추방당합니다. 그래서 1877년에 입국한 블랑(Blanc) 신부가 교구장 직무대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병인박해 이후 풍비박산 된 조선교회의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비밀리 사목하던 블랑 부주교는,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많이 왕래하는 것을 이용하여 일본 나가사키의 동료 선교사들과의 연락망을 확충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882년에 서짓골의 4위 순교성인 무덤을 발굴하고 그 유골을 수습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보냅니다. 나가사키의 교구장인 동료 선교사 프티장(Petitjean) 주교와의 협의로 이루어진 유해 이전 봉안이었습니다.
이어서 블랑 부주교는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883년에 나가사키의 오우라 주교좌 성당에서 주교서품을 받게 됩니다. 자기 선배 선교사였던 다블뤼 주교님과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장주기 성인의 유해를 옮겨 모신 그 오우라 성당에서 주교서품을 받은 블랑 주교의 감격이 어떠했을 것인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86년에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 됩니다. 그 조약에 의해서 선교사들의 조선 내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러한 조선교회의 당시 사정에 비교하여 일본에서는 어떤 정세였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 이어지는 역사의 여정
기나긴 박해의 일본에서 185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서양과의 교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역의 경로를 통하여 일본에 거주하게 된 서양인들을 위한 신앙지도의 명분으로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제들이 일본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1857년의 일입니다. 그 선교사들 중 프티장(Petitjean) 신부가 1864년에 나가사키(長崎) 항구 뒤편 오우라(大浦)의 언덕에 성당을 건립합니다. ‘오우라천주당(大浦天主堂)’이라 불리던 이 성당에 일본인 한 가족이 기웃거리며 찾아왔습니다. 1865년의 일입니다. 그 가족들과 프티장 신부의 만남은 하느님 섭리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기적 같은 순간을 프티장 신부가 기록으로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외국인이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는 그 성당 앞에서 기웃거리던 그 일본인들을 발견한 프티장 신부가 “어찌하여 여기 왔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 일본인 가족 중의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산타 마리아 상은 어디 있나요?”
프티장 신부는 성모상이 모셔진 성당 안으로 그 가족들을 안내하였습니다. 성모상을 발견한 그 가족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맞다! 정말로 산타 마리아님이시다!”
그 신자들, 270년간 대대손손 비밀리 신앙생활을 하여온 그들이 그 오우라 성당의 성모상 앞에서 감격스런 탄성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며 프티장 신부에게 실토하였습니다. “우리들은 7세대가 지나면 로마 교황님이 보낸 사람이 산타 마리아님을 모시고 올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 전해진 예언을 여기서 지금 확인합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순간입니까! 1865년 3월 17일의 일입니다. 이 감격을 일본 가톨릭교회가 작년(2015년)에 ‘신자 재발견 150주년’으로 기념하였습니다.
그러한 ‘신자 재발견’의 기적 이후, 1868년 에도막부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주고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천주교 신앙의 금교령은 계속되었습니다. 나가사키 지역의 신자들이 대거 체포되어 3,400명이 유배되고 600여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서구 교역국들의 비난에 밀려서 메이지 정부는 1873년에 금교령을 해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본 정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조선의 블랑 주교가 일본의 동료 선교사들과의 교신 가능성을 타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됨으로써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비밀리 활동하던 파리외방선교회의 블랑 신부(부주교)는 1882년에 서짓골에서 발굴 수습한 순교자들의 유골을 나가사키 교구장이던 동료 선교사 프티장 주교에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프티장 주교는 우리의 순교성인 4위의 유해를 그렇게 오우라 성당 경내의 신학교에 정중히 봉안하였고, 1883년 7월에 조선교구의 부주교 블랑 신부가 오우라 성당에 가서 조선교구장 승계의 주교성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2년 후 1894년에 조선교구장 뮈텔(Mutel) 주교의 요청에 의해서 오우라에서 서울 용산 신학교에 그 4위 순교성인 유해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 유해들은 1898년 건립된 명동 대성당 지하에 이전되었다가 1967년에 절두산 기념성당 유해실에 모셔져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 나가사키에 가는 순례자들이 가슴에 품어야 하는 역사 이야기
일본 나가사키 지역에 순례 가시는 한국의 교우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의 언론매체들과 이러저러한 관광업체들의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나가사키 지역을 찾아가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순례자들이 간과해서는 아니 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본 천주교회 신앙의 역사에 대해서 같은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당한 박해는 참으로 처절하고 참혹했습니다. 그 혹독한 박해는 우리의 한국교회 박해시대의 역사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박해시대보다 2배 이상 길었던 참혹한 박해였습니다.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 하기 위하여 당한 고난의 상황은 조선시대의 박해상황 보다도 훨씬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박해를 견디어낸 일본교회 신앙증거의 현장을 순례하는 것은 우리의 순교신앙을 더욱 돈독히 함에 있어서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그 순교성지들을 방문하는 한국의 순례자들께서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역사를 순례의 여정 중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가사키 순례 여정에서 꼭 기억하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후반기의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이 함께 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 제시한 내용과 같이, 한국의 서짓골 성지와 오우라 성당 사이에 이어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19세기의 한국교회와 일본교회는 박해를 당하던 교회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8세기 말기에서부터 19세기 후반기까지 1백여 년간 박해를 당했습니다. 일본교회는 16세기말부터 19세기 후반기까지 3백년 가까이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한 양국의 교회는 19세기 후반기에 그 막바지 박해를 넘겼습니다. 그러한 막바지 박해기간에 양국 교회의 현장에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투신했습니다. 그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 동료들 간에 신앙증거의 역사를 그들의 족적으로 기록했습니다. 프랑스에서 함께 신학교 생활을 하고 사제가 되어 누구는 조선으로 다른 누구는 일본으로 신앙 증거를 위해 투신했습니다. 이러한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공로를 감사히 기억해야 할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한 교회이며, 그럼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 신앙이 동일한 것이었음을 확인해주는 증거품이 있습니다. 서짓골 무덤의 순교성인 유해입니다. 그 증거의 역사를 확인하기 위한 여정으로 순례자들은 나가사키에 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순례는 오늘날에도 옛적과 동일한 신앙의 증거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적의 순교자들은 조선에서건 일본에서건 한 가지 신앙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가톨릭은 양적으로 오늘의 일본 가톨릭을 매우 능가한 실정입니다. 많은 한국 신자들이 일본 나가사키에 순례자로서 방문합니다. 그러나 일본 신자들이 한국의 순교성지를 방문 순례한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진단할 수가 없습니다만, 한국의 순례자들께서 나가사키에 가서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순례자는 구경꾼(관광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례자는 옛적에 목숨 바친 순교자들과 같은 신앙 증거의 행위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례자가 성지에 가서 만나는 것은 관광 상품이 아닙니다. 순례자들이 만나야할 대상은 신앙의 증표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순례자란 어차피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나그네가 만나는 대상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맞이하는 거기에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나그네를 보고서는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진심의 교감이어야 합니다. 그 진심의 교감으로 우리 신앙의 증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심의 교감, 그것이 나그네가 지나가면서 보여주는 신앙의 증표입니다. 이에 대해서 나가사키 대교구장이신 요셉 타카미 대주교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순례지 주변에서 상업하는 불교 신자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대주교님께서 전해주셨습니다. “여기 찾아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의 것을 기쁘게 사주실 때마다 너무 고마워서 교회를 위해 꼭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일본인이 말했답니다. “우리 일본에서 박해 당하고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찾아오는 분들에게 그 박해 장본인들의 후손으로서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보여주는 진실한 신앙인의 태도로써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흥을 선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양적으로 우세한 듯 많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나가사키의 대부분 미신자인 일본인들에게 보여줄 신앙 증거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한국 순교자들의 유해를 12년간이나 정중히 모셔 준 일본 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찾아와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야 할 곳이 곧 오우라 성당입니다. “자기들의 땅에서 천주교 신앙으로 목숨 바친 분들의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러 온 한국 사람들의 갸륵함은 무슨 연고일까?”하고 나가사키의 일본인들이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어야겠습니다.
나가사키에 가는 모든 한국 신자들의 여정은 위와 같은 생각을 함께 하는 순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순례여정에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하여, 하부내포의 서짓골 성지와 오우라 성당 사이의 역사를 회상할 수 있는 표지를 그곳에 세우고자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의 취지를 나가사키 대교구에 알려드리고자 하여 지난 1월 18-22일에 오우라 성당을 목적지로 하는 순례를 하였습니다. 나가사키 지역의 주요 순교성지와 오우라 성당을 찾아 기도하고, 나가사키 대교구장 요셉 타카미 대주교님을 예방하여 우리의 취지를 설명 드렸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우리의 취지를 적극 받아들이시고, ‘서짓골 무덤의 4위 순교성인 유해 봉안 기념비’를 오우라 성당 경내에 건립하려는 계획을 승인해주셨습니다. 그러한 나가사키 순례일정을 회상하여 그 순례기를 공개합니다.
2. 순례여정 첫째 날
1월 18일(월) 오후 5시에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순례 참가자들 모두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도권이나 대전에서 KTX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신 분들, 그리고 기타 지방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끼리끼리 차량 대절로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출국장 안에서 주최 측의 안내에 따라 서로 인사를 나누며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사귄 사이인양 39명은 금세 모두 정다운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뉴 카멜리아호’에 승선한 순례자들은 오후 7시에 선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배정된 선실에서 끼리끼리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부내포성지에서 작은 책으로 만들어 준비한 ‘성지순례기도서’로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성지순례기도서’의 기도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무일도서’에 의한 ‘시간기도’입니다. ‘성무일도서’에 따라 순례자들이 4박5일 여정의 시간들을 기도로써 성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저녁 시간의 기도를 바친 순례자들은 국제여객선 ‘뉴 카멜리아호’의 각 선실에서 정담을 나누면서 저녁 10시 30분의 출항으로 밤 시간 현해탄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3. 순례여정 둘째 날
그렇게 부산항을 밤에 출발한 ‘뉴 카멜리아 호’는 이튿날(1월 19일) 새벽에 일본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순례자들 중에 몇몇 분은 선실 취침 중에 뱃멀미로 잠을 설쳤다면서 몹시 피곤해 하였습니다만, 아침 7시 선실 식당에서 얼큰한 김치찌개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였습니다. 아침식사 후 하선하여 일본입국수속을 마친 순례자들은 대절버스로 본격적인 순례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 다비라 천주당
하카다 항에서 전용버스로 출발한 순례자들은 두 시간의 운행시간에 성지순례기도서의 아침성무일도를 바치고, 일본교회의 박해시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묵상하는 중에 ‘다비라 천주당’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비라 천주당’은 섬 지방인 히라도(平戶)에 건너가기 전 해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유적입니다. 260년의 박해를 견디어낸 신자들이 건립한 성당입니다. 일본의 참혹했던 260년 박해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후 ‘에도막부시대’ 동안 천주교 신앙의 씨를 뿌리 뽑던 박해입니다. 섬 지방으로 피신하여 비밀리 신앙을 유지하던 신자들이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어다가 갈아서 석회처럼 만들어 벽돌을 굽고 오로지 신자들의 노력동원으로 건립한 성당입니다. 고토(五島) 출신의 탁월한 건축가 데츠가와 요스케의 설계와 기술지도에 의해 건립된 이 성당은 현재 일본정부당국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 준비를 하는 성당입니다. 해안에서 높은 언덕 위로 오르는 비탈에 지은 성당입니다. 유서 깊은 이 성당에서 순례자들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260년의 박해를 견디어 낸 신앙의 증표를 감지하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마친 순례자들은 옛적 참혹한 박해시기에 그곳 신자들이 당했던 차가운 겨울 해안의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속에서 성지순례기도서의 낮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옛적 박해시대의 신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렇듯 자유롭다는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옛 다비라 지역 신자들이 조개껍질 모아 성당을 짓던 심정을 연상하여 바치는 순례자들의 기도음성이 조금은 더 정성스러워졌습니다.
■ 야이자 순교성지
다비라 성당을 떠난 순례자들의 버스는 바다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히라도(平戶)로 향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께서 가고시마에 상륙하셨다가 1550년에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하신 섬이 히라도입니다. 그 이후 히라도는 일본 교회사에서 천주교 신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섬입니다만 지금은 육지와 다리 하나로 연결되는 곳입니다. 이 히라도의 명소는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과 야이자 순교지입니다.
히라도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야이자 순교지 위 언덕의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호텔 뒤편 아래로 야이자 순교지를 안내하는 간판을 따라 내려갑니다. 안내간판에는 그곳을 일컬어 ‘죄를 불태운 곳’이라 씌어있습니다. ‘燒罪史跡公園(소죄사적공원)’입니다. 우리 순례자들의 기분을 씁쓸하게 하는 명칭입니다. 국법을 거슬러 범한 죄를 불태워 없앤 기념공원이라는 뜻입니다. 국사범을 처형한 자리입니다. 그 징벌을 기억하라는 경고의 자리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카밀료 콘스탄티노 신부가 1622년에 화형 당한 곳입니다. 비밀리 선교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어 마카오로 추방당하고 다시 돌아와 비밀리 선교하던 중 다시 체포된 그분이 화형으로 순교한 곳을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도합니다. 복자로 시복 된 카밀료 콘스탄티노 신부의 순교 장면을 형상화하여 조형물이 탑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 둥둥 떠서 태워지는 순교자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있습니다. 그 형상의 탑 너머 물결 위에 솟은 히라도 성은 지금도 우리 순례자들을 향하여 경고를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통치권을 거스르면 이렇게 불태워진다고! 그러나 우리의 신앙증거란 그렇게 불같은 열정으로 타올라 세상을 비추는 것이어야 한다는 감흥으로 순례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
야이자 순교지 언덕을 다시 올라와 버스로 이동하여 구불구불 해안을 따라 히라도 어항 주차장에 이릅니다. 해안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마을 골목을 지나 불교 사원이 늘어선 언덕길을 오르게 됩니다. 불교 사원들의 지붕 위로 솟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의 종탑을 바라보면서 순례자들은 돌계단을 오르게 됩니다. 그 돌계단 옆으로 세워진 가로등탑들과 어우러지는 경치는 꿈길을 걷는 기분입니다. 가로등탑들은 옛적 히라도의 등대를 본떠서 제작한 것입니다. 그 등탑들과 돌계단 옆 불교 사원들의 검은 지붕 사이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의 하얀 첨탑이 높이 솟아 어우러진 광경은 몽환의 실루엣과 같습니다. 연세 드신 순례자들께서 숨을 헐떡이며 돌계단을 오르시다가 스마트폰 사진 촬영을 부탁하곤 하셨습니다. 꿈속의 사진촬영 같습니다.
돌계단을 오른 순례자들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천주당 후면에서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촬영하게 됩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 순례자들은 압도하는 경건함에 스스로 무릎 꿇어 기도합니다. 성당 현관 우편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성상 앞에서 순례자들은 스스로 말없는 침묵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이어서 성당 전면의 돌계단을 내려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만나게 됩니다. 무릎 꿇어 기도하는 벨라뎃다 성녀성상의 자태를 보는 순례자들은 성모상을 향하여 스스로 무릎 꿇어 기도하게 됩니다. 그 앞에 마련된 성물과 기념품 판매소에 들러 묵주 등 성물을 구입한 순례자들이 동행한 사제에게 축복을 청하러 몰려듭니다. 그 성당 정면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순례자들은 떠나기가 몹시 아쉬워 자꾸만 뒤로 돌아 성당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뒤돌아보던 순례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성당의 전면 중앙첨탑과 좌우 첨탑의 비대칭에 대한 질문입니다. 중앙첨탑의 왼쪽에 세워진 첨탑에 비하여 오른쪽에 세워진 첨탑이 작은 까닭을 묻는 것입니다. 안내자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 성당을 건립할 당시에 자금 부족으로 오른쪽 탑이 작아진 것이랍니다. 그러한 좌우 불균형 첨탑은 그 자체로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한국에서 요즈음 성당을 지으면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당 건축을 하면서 건물 설계에 맞추어 교우들의 부담을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교우들의 부담 능력에 따라 성당을 지을 것인가?
■ 히라도 해변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천주당을 떠나 다른 길로 내려오면서 히라도의 역사문화 기념거리를 지나게 됩니다. 그 거리에는 히라도의 역사에 기억해야 할 인물들의 동상이 차도와 인도 사이에 늘어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역사적 인물들 동상 중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동상도 모셔져 있습니다. 그 역사문화거리를 지나 내려오면서 히라도 항구를 전망하게 됩니다. 항구의 맞은 편 산꼭대기에 히라도 성이 보입니다. 옛적 박해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도록 명령하던 영주의 치소입니다. 그 성 밑의 해안도로 앞으로 펼쳐진 바닷물 너머에 야이자 순교지가 아스라이 보입니다.
■ 구로세노츠치 순교성지, 순교복자 가스파르 니시의 무덤, ‘천국의 물’이 솟아나오는 섬
히라도 항을 떠나서 버스로 이동하면서 해안가의 시골 마을을 지납니다. 해안마을 좁은 길을 구불구불 올라서 자그마한 주차장에 이릅니다. 주차장 건너의 길가에 아담한 성당이 있습니다. 그 마을 본당입니다. 그 성당 정문 옆으로 내려가는 농로를 따라 호젓한 숲길을 한참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좁은 길은 절벽 위에 높이 세워진 순교 현양탑을 마주하게 됩니다. 쿠로세노츠치 순교성지의 현양탑입니다. 이 순교지는 이키츠키 섬에 거주하던 신자들의 지도자였던 니시겐카와 그 가족이 순교한 곳입니다.
현양탑 뒤로 나무 우거진 아주 좁은 공간에 아무런 모양새 없이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작은 무덤이 발견됩니다. 순교복자 가스파르 니시의 무덤입니다. 그 무덤을 중심으로 둘러선 순례자들의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아무런 돌봄도 없이 버려진 듯 처연한 그 무덤을 홀로 지키던 늙은 향나무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타면서 순교자의 무덤 위치를 알게 했답니다. 그 나무 가지로 십자가를 조각하여 나가사키 일원의 순교 기념지에 나뉘어 보관 되면서 그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묵은 등걸로만 남은 향나무는 지금 그 순교복자의 쓸쓸한 무덤을 처연한 자세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등걸을 어루만져보면서 순교자 가스파르의 무덤을 둘러싼 순례자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성가 ‘순교자의 믿음’을 목메듯 불렀습니다.
그 무덤 둘레의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한 가운데에 거북이 모양의 암석덩어리 섬이 떠있습니다. 나카에 섬입니다. 많은 신자들을 끌고 가서 처형한 순교의 섬입니다. 그리고 처형된 순교자들의 시신을 부활하지 못하도록 물고기 밥으로 바다에 던지던 섬입니다. 순교자들은 처형당하러 배에 실려 가면서 그 섬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여기에서 천국이 그리 멀지 않다”고 기뻐했다 합니다. 그 후로 이키츠키에 숨어 살던 신자들이 조각배를 타고 그 나카에 섬에 건너가 거기 처형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떠다 마셨답니다. ‘천국의 물’이라 했답니다.
순례자들은 이 쿠로세노츠치 순교지를 떠나면서 하루 일정의 순례를 마감하는 석양아래 어두워지는 나카에 순교의 섬을 뒤돌아보며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무 그늘 아래 내려앉는 저녁노을 위에서 석양을 반사하여 검붉은 색깔로 순례자들을 전송하는 현양탑을 뒤로하였습니다.
하루의 순례일정을 마치는 순례자들은 버스에 올라 성지순례기도서의 저녁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어두워지는 해안 길 따라 투숙할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방 배정 후에 호텔 식당의 저녁식사 중에 중국 연예단의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공연관람을 하면서 식사를 하는 다른 투숙객들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연설명은 중국어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들으면서 신기한 묘기에 박수를 치다가 식사를 마친 순례자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호텔의 대욕장에 가서 온천욕으로 하루 여정의 피로를 풀게 됩니다. 그리고 그룹별로 객실에 모여 성무일도의 끝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잠자리에 드는 순례자들은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룸메이트 끼리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이나 오늘의 우리 순례자들이나 똑같은 십자성호를 긋는 사람들이지요!”
4. 순례여정 셋째 날
다음날 호텔의 아침식사를 마친 순례자들은 바삐 전세버스에 올라 성지순례기도서의 아침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이어지는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무라 순교 유적지를 향하는 일정입니다.
오무라 시내에 도착한 우리 순례자들은 그곳 본당인 우에마츠 성당에서 순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지방도시 성당과 흡사하게 유치원이 함께 있는 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순례자들은 걸어서 오무라 시내의 순교 유적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 오무라 순교 유적
오무라(大村)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공포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끔찍하기로 유명한 ‘오무라 감옥’ 때문입니다. 일제강점시대에 우리 한국인들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고난을 당한 곳이지요. 그런 오무라는 일본의 에도막부 시대에 비밀리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한 지역입니다. 전국시대에 지방영주(다이묘)로서는 최초로 천주교 신앙인이 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의 영향 하에 한때는 천주교 중심의 지방이었던 오무라입니다. 스미타다는 총명한 소년 4명을 선발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도록 했습니다. 일컬어 ‘덴쇼 소년사절단’이라 하는 그들은 만13-15세의 어린이들서 1582년 출발하여, 남지나해와 인도양과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경유하여 2년 반 만에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여 일본의 사정을 알려드린 그들은 같은 항로를 통하여 1590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출발한 지 8년 5개월 만에 돌아온 그들에 의하여 활판인쇄기 등 서구의 선진기술과 지식을 전수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공헌하였습니다. 4명 모두 사제가 되었지만, 그 후 에도막부의 금교령에 의하여 순교하게 됩니다.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서 오무라의 천주교 신자들이 당한 박해는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박해시대의 오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역사를 기록합니다. 에도막부에 의해 씨를 말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발각된 천주교 신자들의 수가 엄청났다는 것입니다. 그 신자들을 색출하여 목을 잘라 죽이고 몸 따로 머리 따로 처치했습니다. 그들을 무수히 죽였던 호쿠바루 처형터에 세워진 기념탑 아래에는 임진왜란으로 끌려왔던 조선 출신 순교자들의 현양비가 자그맣게 세워져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고 함께 순교한 사실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그 호쿠바루 처형 터는 현재 주택가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비쳐지기론,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이란 죽더라도 부활할 거라는 무시무시한 존재들이라 했답니다. 때문에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처치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잘라 몸둥이들은 따로 묻다가 장소가 부족하여 물고기 밥으로 바다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잘린 머리들은 소금에 절여서 꼬챙이로 꿰어 길가에 전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무라 시내의 호쿠바루 처형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몸둥이들만 따로 묻은 동총(胴塚), 그리고 더 멀리 머리만 따로 묻은 수총(首塚)이 있습니다. 이렇게 몸 따로 머리 따로 묻힌 곳을 도즈카 유적지와 구비즈카 유적지라 합니다.
■ 어찌하여 그렇듯 잔인하게 박해했는가?
이러한 오무라의 순교 유적을 돌아본 순례자들은 일본의 박해시대 참상을 한국의 박해시대와 비교해보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 박해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방식은 그렇도록 잔인하진 않았잖은가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의 조선왕조는 선비 즉 문인(文人)들의 정치세력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일본의 막부시대는 무사(武士)들 즉 군벌에 의한 통치시대였습니다. 생각(합리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힘(무력)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점을 연상하게 됩니다. 문민문화와 군사문화의 본질적 차이점이 그것입니다.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을 설득하기에 앞서 힘으로 제압하는 폭압적 세력을 일컬어 이른바 ‘군사문화’라 합니다. 문득, 박정희와 전두환 등의 군부통치시절 폭압이 회상되어 섬뜩해집니다. 그 시절이 곧 군사문화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민왕조 조선시대에 군사문화지역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순교성지’라 우리가 일컫는 해미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지방의 수령(일명 사또)인 현감(縣監)은 대개 문인(文人·선비벼슬아치)들로 임명되었는데 유독 해미현(海美縣)은 무관(武官·군인벼슬아치)이 부임하던 곳이었습니다. 군사요충지였던 옛 해미에는 진영(鎭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진영장(鎭營將)이 해미현감을 겸임했습니다. 그런 지방수령이 통치하던 곳이라서 사법적 심리 절차 없이 무차별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이치로 가리지 않고 힘으로 백성을 억누르던 곳이 군사문화의 해미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해미에서 무차별로 무수히 학살을 당한 순교자들은 대부분 그 이름들마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본의 해미 같은 곳이 오무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서산 앞 바다 천수만을 끼고 있는 해미의 순교성지처럼, 오무라 역시 오무라만을 앞에 두른 바닷가의 순교성지입니다.
오무라의 순례를 마친 후,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성지순례기도서의 낮성무일도를 바치는 순례자들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가라앉는 듯 했습니다. 한국의 해미 순교성지와 이곳 일본의 오무라 순교유적지의 공기에는 아마 피비린내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은 이렇듯 처절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참혹의 역사이야기가 일렁이는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바다 너머의 한국 해미의 해안가에까지 밀려가는 듯, 해풍 소리가 들리다 말다 하는 차창 밖의 바다를 바라보며 삼종기도를 바치는 가운데 길가의 관광식당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 여정의 동반자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휴게소를 떠나기 전에 순례자 일행 중 한 분께서 길바닥 돌에 걸려 넘어져서 얼굴을 크게 다치셨습니다. 연로하신 분이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순례자들은 그분의 치료를 위해 인근 국립나가사키병원에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일정에 없던 일본 국립병원을 관람하게 되었지요. 그 까닭으로 오후 순례일정에 차질을 초래했습니다만, 일본교회의 참혹했던 순교역사현장을 순례한 마음으로 모든 분들이 형제애의 배려로써 기다림의 인내심을 발휘했습니다. 다치신 분께서 다행스럽게도 치료를 잘 받으시고, 순례자들의 버스는 두 시간을 달려서 ‘시마바라’에 도착하였습니다.
■ 시마바라
오무라에서 남동 방향으로 둥그런 고구마처럼 붙어있는 반도가 시마바라(島原)입니다. 반도(半島)지만 그 중앙에는 운젠후겐타케 산이 높이 솟아 있어서 산악의 급경사와 해안이 어우러져 있는 시마바라입니다. 1996년에는 분화한 화산 용암이 흘러내려서 시마바라 해안 급사면 아래의 시가지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때 용암 돔이 형성된 산을 지금의 일본 천황 이름을 따서 헤이세이(平成)신산이라 부릅니다. 그 헤이세이신산을 넘어가려는 저녁햇살을 받은 시바바라 성은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본래의 성은 목조였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폐성된 후 해체되었답니다. 1964년에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있는 지금의 시마바라 성은 검은 기와 아래 흰색 페인트칠해진 천수각을 중심으로 부속 전각들과 성곽으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 천수각 내부의 각 층은 역사 자료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층에는 크리스천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잠복 크리스천들(가쿠레 기리시단)의 자료와 시마바라 난의 관련 자료들입니다. 260년 동안의 박해시대에 성직자 없이 천주교신자들이 비밀리 신앙보전을 위해서 신자끼리만 알아 볼 수 있었던 성물과 암호 문자 같은 글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 영주의 폭정(暴政)에 반대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봉기했던 이른바 ‘시마바라 난’의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
1616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직할지가 된 시마바라에서 이에미츠 쇼군의 명령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이 수없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운젠 노천온천으로 끌려가서 온천열탕고문(지고쿠세메)으로 고통 받으며 순교했습니다. 이에미츠의 아들 카츠이에가 흉년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양식을 수탈하고 파리 죽이듯 천주교 신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1637년에 이른바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亂)’이 일어납니다. 시마바라 반도와 규슈 본토 서해안 사이의 바다를 아리아케 만(灣)이라 합니다. 그 건너에 구마모토(熊本縣)가 위치합니다. 그쪽 방향의 아마쿠사(天草)에 많이 살던 천주교 주민들이 봉기하게 됩니다.
신심 깊은 의혈청년 아마쿠사시로의 지휘 하에 단합하여 봉기했습니다. 시마바라의 봉기 세력과 합세한 그들은 처음에는 관군 보다 우세하였지만, 수적으로 불리하여 하라성(原城)에서 농성하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37,000명의 봉기군이 막부의 12만 관군과 대결하는 동안 관군의 지휘관이 전사하기도 합니다. 이에 후임 관군 지휘관이 봉기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네덜란드 전함이 하라성의 봉기군을 향하여 맹렬한 포격을 가하게 됩니다. 이에 하라성 안에 들어가 농성하며 버티던 봉기군이 전멸하고 아마쿠사시로의 목이 나가사키의 데지마(상관) 앞에 내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이 진압 된 1638년 후 천주교에 대한 막부의 박해는 더욱 혹독해집니다. 그 당시까지 가톨릭 선교의 루트가 되던 포르투갈 상선과의 교역은 ‘시마바라 아마쿠사 난’의 진압 후에 네덜란드 상선과의 교역으로 바뀌게 되고, 나가사키의 데지마는 네덜란드인들의 상관이 됩니다. 그 후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막부 권력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일본의 천주교는 캄캄한 잠복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본래 종교적 관심 없이 오로지 상업에 치중하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정서로써 가톨릭 선교에 냉소적이었습니다.
15년 전의 1622년에 히라도의 야이자에서 카밀료 콘스탄시오 신부의 화형이 집행 될 때 현장 앞 포구에서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은 냉소적으로 그 잔인한 사형집행을 묵인하였습니다. 그렇듯이 상업적 실리추구의 눈앞에서 신앙옹호나 정의추구는 냉소적으로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현실을 일본 박해시기 1600년대 역사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마바라 성안의 천추각 크리스천 자료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그 역사의 확인 자료입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한 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하라성의 그 천주교 봉기군 항거의 장소를 가보고 싶었지만, 오후 시간 차질로 인하여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시마바라 성을 나온 순례자들은 어두워지는 시내를 지나 해안가에 위치한 호텔로 향해야 했습니다.
호텔을 향하여 이동하는 버스의 창밖으로 어두워지는 바다 건너 멀리 반짝이는 불빛의 도시를 바라보며 성지순례기도서 저녁성무일도를 바치던 중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끝마치지 못한 성무일도의 나머지 기도는 각자 객실에 들어가 바치기로 했습니다. 호텔에 들어가 체크인 하면서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호텔 앞 밤바다 건너 불빛 보이는 도시가 어디냐고요. 앞 바다 건너의 도시는 구마모토시(熊本市)랍니다.
5. 순례여정 넷째 날
■ 하이라이트 순례의 날
다음날 아침, 서둘러 7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했습니다. 순례여정 중 하이라이트의 날이기에 일찍 출발한 것입니다. 시마바라 반도의 해안을 구불구불 지나면서 아침성무일도를 바치다보니 어느 듯 험준한 산간 도로를 오르게 됩니다. 운젠 지옥온천 계곡을 오르는 것입니다. 군데군데 조금씩 살짝 얼어붙은 빙판이 오르막 커브 길에 나타납니다. 전날 저녁에 한국으로 전화해서 친지에게 한국 날씨를 알아본즉, 서울의 기온이 섭씨 영하12도이고 충청도 서해안엔 폭설이 내렸답니다. 한국보다 위도 상 훨씬 남쪽인 규슈 지방이지만 산허리엔 간간히 눈이 쌓여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대설(大雪)입니다. 대설추위가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일본에도 그 여파가 미친 것 같습니다. 운젠 산길 울창한 숲 사이사이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조금씩 보이는 뿌연 하늘에서 겨울 해는 아무런 기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 험준한 산이 품고 있는 사연
버스로 오르는 산길, 이 산길은 끌려 올라가던 옛적의 순교자들이 산모퉁이마다에서 귀를 잘리는 고문을 당한 능욕과 고난의 길입니다. 운젠 지옥온천 계곡까지 오르는 동안 순교자들은 이미 손가락 발가락 두 개씩 잘려서 양손과 양발의 손가락 발가락 세 개씩으로 짐승 취급을 당했답니다.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니 손가락 발가락이 짐승과 같아야 한다.”면서 끌려오다가 혹시라도 도망치면 즉시 알아 볼 수 있도록 귀를 잘렸답니다. 짐승의 형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놓고 ‘절지단(切支丹)’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인두로 지져 새겼답니다. 그런 ‘절지단’을 일본말로 ‘기리시단’이라 읽는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뜻이 아니라 손과 발이 짐승의 것처럼 되었다는 뜻이랍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시기에는 그렇게까지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없는데, 여기 일본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그렇듯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과거에 어찌하여 그리 야만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괴롭혔는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신자들을 단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최대로 늘려가면서 조롱하다가 죽이던 그 야만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 순교성인들 중 우치보리 바오로 성인이 계십니다.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 후에 체포된 분입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아들을 끌어다 놓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아들 손가락을 몇 개나 잘라줄까?” 아버지로서 차라리 자신의 손가락이 잘려나가야 덜 괴롭겠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을 묶어 바다 속에 집어던지자 파도 위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치보리 성인은 아들의 수장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인의 의연함을 바라보던 군중 가운데 이미 천주교를 그만두겠다고 배교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천주교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박해자들이 격분하여 우치보리와 그 회개한 신자들을 끌고 간 곳이 운젠(雲仙)이었습니다.
■ 운젠 지옥온천
운젠의 노천온천 계곡을 일컬어 오늘날 ‘운젠 지옥온천’이라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구덩이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는 뜨거운 온천물이 계곡에 철철 흘러내리는데 그걸 많은 호텔에서 송수관으로 끌어갑니다. 호텔이 오늘날처럼 많이 생기기 전에는 큰 냇물처럼 뜨거운 물이 흐르면서 떠오르는 수증기가 구름처럼 하늘에 퍼지는 것이었지요. 가히 지옥 계곡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계곡 아래의 수많은 호텔마다 연결된 파이프로 온천수를 끌어가는 바람에 냇물 형상의 뜨거운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여기저기 큰 바위 사이의 구덩이에서 폭발소리를 내면서 물과 수증기를 뿜어내는 형상은 땅속 지옥의 구멍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지옥 구덩이 형상의 뜨거운 물 소용돌이 속에다가 천주교 신자들의 몸을 거꾸로 담그면서 배교를 강요했습니다. 그것도 풍덩 집어넣어 단번에 죽도록 하지 않고 귀가 잘린 머리를 반쯤 넣었다가 꺼냈다가 조금 더 깊숙이 넣기를 반복하며 상처투성이의 온몸이 다 익혀 죽을 때까지 오랜 시간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렇게 바오로 우치보리 성인과 또한 함께 잡혀온 신자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분들 후에도 끊임없이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와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그 신자들을 절벽 위 바위 위에서 밧줄로 묶어 거꾸로 그 지옥 구덩이에 담그면서 죽이던 곳에 나가사키 대교구가 자그마한 돌 십자가와 기념비를 세워 순교 터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곳 기념비에는 그렇게 순교한 분들 중 신원이 밝혀져 전해지는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름들의 주인공들은 시복식 시성식을 통하여 기억되는 분들입니다만, 이름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의 수는 더욱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 순례자들이 운젠의 그 지옥온천 계곡에 도착하던 시간은 이른 아침나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또는 추운 겨울이어서인지 우리의 순례자들 외에는 방문객들이 없었습니다. 낮 시간에는 많은 방문객들로 지옥온천이 소란스럽습니다만, 우리 순례자들 방문 시간에는 한가로운 분위기로 순교터 기념비 앞에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믿음’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방문객들이 많을 때에는 계곡 입구와 출구에서 아줌마들이 그 온천계곡 구덩이에서 직접 삶은 계란을 판매합니다만, 이번의 우리 순례자들은 그 아줌마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계곡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물소리가 들리지만, 순례자들이 걷는 탐방로에는 군데군데 얼음과 눈들이 쌓여있어서 조심조심 운젠지옥을 빠져 나와서 버스에 올랐습니다. 다시 내려오는 산길의 버스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옛적 순교자들은 지옥을 빠져나가 하늘에 오른 분들이건만, 오늘 우리 순례자들은 지옥을 빠져나와서 세상에 돌아가고 있다고…!
■ 지옥을 나와서 세상으로
운젠지옥을 빠져나와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면 길은 다시 해안에 이릅니다. 바닷가의 마을 집들과 상점들이 늘어선 세상의 길이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의 해안에는 해수온천으로 이름이 알려진 마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현 미국 대통령의 이름과 똑같은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오바마(Obama)라는 그 마을입니다. 그리고 구불구불 해변 길을 따라 만나는 휴게소 상점은 나가사키 카스테라를 제조 판매하는 곳입니다. 순례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선물용 카스테라를 사느라고 소란스럽습니다. 역시 세상에 다시 돌아온 우리의 모습입니다. 카스테라와 여러 가지 기념상품을 사느라고 시간이 많이 지연되는 동안 예정된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에서의 미사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오우라 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건석 신부에게 전화를 해보았습니다. 그분은 이미 벌써 오우라 성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건석(안드레아) 신부는 대전교구 소속의 젊은 사제입니다. 이 신부의 고향이 하부내포 지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홍산입니다. 홍산 성당 출신이지요. 한국에서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신학교 과정을 다시 이수한 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오이타 교구의 작은 본당을 맡아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순례 일정을 알게 되어 이건석 신부께서 함께 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우라 성당에서 봉헌할 순례자들의 미사에 함께 하려고 오이타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우리 순례자들보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170여 킬로미터를 달려온 것이지요. 순례자들을 채근하여 빨리 버스에 승차하도록 했습니다. 한 시간 가량 달려서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 아래 공영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성당 쪽으로 뛰어 올라가보니, 매표소 앞에서 이건석 신부가 서성이고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 두 시간 가량 기다린 그였습니다.
■ 오우라 성당과 천주교 신앙
이건석 신부와 함께 순례자들은 오우라의 새 성당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우라의 옛 성당인 ‘오우라 천주당’은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그 성당에서 순례자들의 미사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아래에 나가사키 대교구가 새로 건립한 새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서짓골에서 옮겨왔던 순교성인들의 유해는 우리 순례의 목적지인 구 성당에 모셔져 있었지만, 우리의 순례미사는 신 성당에서 봉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석 신부의 주례로 순례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를 집전한 이건석 신부는 강론 중에 일본 가톨릭교회의 실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일본천주교회 실정은 우리 한국에 비하여 매우 열악합니다. 교세비교에 있어서 한국교회보다 매우 열세인 실정입니다. 한국 가톨릭의 550여만 교세에 비하여 일본은 50만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역사적 비교를 하자면, 한국의 천주교회가 일본의 천주교회보다 330여년 뒤진 역사입니다. 1549년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여 일본 천주교회가 태동되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334년 뒤 조선 최초의 신자 이승훈(베드로)의 영세년도 1783년을 한국 천주교회 출범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세를 단순비교로 보자면, 한국과 일본의 천주교회는 10:1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의 양국 간 비교에 있어서 간단하게 수치적 대비로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양적(量的) 비교가 아닌 역사문화와 인간학적 및 사회학적 비교,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신앙사와 영적(靈的) 내면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즉 외형의 비교보다는 면밀한 내면의 비교로써 양국 천주교회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내면적 비교의 시각으로 순례 중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내면적 비교란 달리 말하여 질적(質的) 비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석 신부가 소개하는 일본교회의 사정을 들으면서 양국 교회간의 질적 비교에 대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건석 신부의 일본교회 실정에 대한 소개내용은 주로 양적 비교의 시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만, 그 내용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왜?’의 질문은 양적 비교에서부터 제기됩니다. 일본 천주교 신자의 숫자가 50만 정도라면 1억 명 이상의 일본 인구 대비 0.5%인 반면에, 한국 천주교 신자 500만 정도의 인구 4천만 대비는 12,5%입니다. 그렇다면 한국500백만과 일본50만의 천주교 교세비교는 단순하게 10:1이 아닙니다. 12.5%와 0.5%를 대비하면 수치적으로 보아 한국과 일본의 교세비교란 100:4가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양국 교회의 대략적 천주교신자 숫자대비를 500만:50만으로 보면서 양국 인구를 계산하지 않고 적용하여 단수비교를 하면 12.5대 0.5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현재인구대비 천주교 신자 수 12.5%를 일본과 같은 인구 1억 명으로 증가할 경우를 가정하여 적용시키면 한국의 신자수가 1,250만 명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인구 증가를 가상한 한국의 천주교 신자 1,250만 명 대비 현재의 일본 신자 50만 명을 비교하면 100:4가 됩니다. 즉 한국과 일본의 인구 상황을 동일하게 적용시킬 경우에, 한국 땅에서는 사람 1만 명이 모인 곳에서 천주교 신자 1,250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만, 일본 사람들 1만 명이 모인 곳에서 천주교 신자를 50명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교세를 한국에 적용시키면, 4천만 명 모인 곳에서 천주교신자 20만 명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양국의 동일한 인구 가운데 분포된 천주교 신자수를 찾을 경우에, 즉 한국과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을 같은 조건 속에서 함께 모이라 할 경우에, 한국 천주교 신자 1천 명 모이는 반면에 일본 천주교 신자 40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 대비가 100:4입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인구가 동일하게 1억 명이라고 가정하여, 양국 인구를 섞어서 천주교 신자들을 찾으면 한국인 신자 625명이 모일 때 일본인 신자는 고작 25명이 모일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인 천주교 신자 100명이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일본인 신자는 4명이 모여서 미사를 봉헌하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25:1의 대비가 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남한)의 인구 대략 4천만 중 천주교 신자 5백만(12.5%)의 현실과 일본의 인구 1억 중 천주교 신자 50만(0.5%)의 현실에서 양국의 천주교를 하나의 교회로 상정하여 보편교회의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톨릭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하나의 교회이므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한국과 일본의 인구를 합하여 1억4천만 명 중 천주교 신자 550만 명으로 계정하면, 양국교회 공동으로 대략 4%의 교세를 보인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한국에 천주교 밀도가 월등 높은 12.5%의 현실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일본의 복음화를 위한 공동 사명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선구자 같은 투신을 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을 일본 현지에서 이번 순례자들이 만났던 것입니다. 그가 곧 이건석 신부입니다. 일본의 오이타(大分) 교구에서 조그마한 본당을 맡아서 사목하고 있는 우리 대전교구의 젊은 사제입니다. 우리 순례의 목적지인 오우라 성당에서 한국과 일본의 교회를 위한 기도 지향으로 이건석 신부의 집전미사를 봉헌한 것은 순례여정 중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일입니다. 더욱, 우리 한국교회의 박해시기에 순교하신 성인들의 유해를 그 엄혹한 시기에 12년간 정중히 모셔주었던 일본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순례자들은 이건석 신부의 그러한 일본교회 투신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참 신앙과 우상숭배의 차이
위와 같은 가상적 숫자놀음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엄혹한 시대에 한국교회가 일본교회에 신세를 진 역사를 회고하자면, 오늘날 이건석 신부가 일본교회에 봉사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보여야 할 보은의 투신이잖은가! 이러한 생각 속에서 이건석 신부 집전의 미사는 순례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 100명이 모인 곳에서 12명 이상의 천주교신자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본에서는 천주교 교세 0.5%이므로 일본인들 100명이 모인 곳에서 천주교신자 한 명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한국에서 12명의 기도소리 들리는데, 일본에서는 한 사람의 기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진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 봉헌을 마치고 ‘오우라 천주당’에 들어갔을 때, 참으로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한국말로 기도하는 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 순례자들보다 먼저 오우라 천주당에 들어간 한국인들 수십 명이 큰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온 개신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아마 목사인 듯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기도를 하면 수십 명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소리가 오우라 천주당의 천정을 들썩일 정도였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는지 들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여기 오우라 천주당에 마리아 우상을 모셨기 때문에 잡신이 지배하는 일본의 나가사키는 예수 믿음이 뿌리내리지 않고 있어, 하루 바삐 마리아 우상과 일본 잡신들을 하나님께서 내리쳐 없애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교 사원에 가서 땅 밟기 기도를 한다면서 소리치는 개신교인들의 해괴한 작태를 TV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하나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일본 현지에서 천주교 사정을 보는 순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일본 나가사키 지역 순교성지들과 천주교 역사의 유적에서 순례자들이 얻는 감흥은 한국의 성지들에서 얻는 것과 비교하여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본의 성지들에서는 한국의 순교성지들과는 달리 그 현장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물을 훨씬 잘 보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성지들을 찾아가 보면 최근에 만들어진 구조물들로만 채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성지들을 찾아가 보면 거기서 옛적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잘 깨닫도록 관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역사를 소중히 간직할 줄 아는 일본 현지의 수준에 비하여, 그와는 달리 한국의 성지들에서는 역사의 내용보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 세우고 자랑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한 예를 아래와 같이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하부내포 지역에 성지순례를 하겠다면서 미리 사전탐방을 하신 분들이 대부분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와서 볼 것이 별로 없네요. 00성지처럼 이런저런 볼 것이 없네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간 분들의 본당에서는 하부내포성지의 순례계획을 그만 취소하고 맙니다. 순례계획에 따라 사전탐방을 한 그분들의 본당에 순례 예정일을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로 문의하면, 대답은 한 마디로 ‘하부내포에는 구경할 것이 없어서’ 취소한다는 것입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 순례란 무엇입니까?
순례란 구경거리를 찾아가는 일입니까?
나가사키 지역의 여러 순교 유적지를 순례해보면, 거기서 신앙고백의 역사를 잘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순례자들의 신앙고백이 자연스레 우러나오도록 유도하는 ‘성지’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을 유도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역사의 증거를 보전한 현지는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왜 일어났었는가 말해줍니다. 그 역사의 증거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지개발’의 성과로 거기에 멋있게 지어진 건물과 시설이라면 처절했던 신앙고백의 역사를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거기 그곳이 지닌 사연(역사)에 대한 관찰을 할 수 있도록 보전된 순례지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가능한 곳이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사연이 간직된 곳입니다. 그 역사적 사연은 거기 찾는 사람들(순례자들)의 깨달음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듯 영원히 이어질 깨달음의 장소가 옛적에 목숨 바쳐 고백한 신앙의 장소, 즉 순례지로서의 ‘성지’인 것입니다. 목숨 바쳐 고백하던 과거의 신앙이 거기 찾아온 순례자들의 오늘 고백하는 신앙과 동일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순례의 성지는 신앙고백을 이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앞으로도 후대에 지속적으로 그렇게 이어지도록 순례지 성지는 그 연결의 매개체여야 합니다. 한번 보고 말게 되는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오우라 천주당에 들어가서 성모상을 보고는 우상 섬기는 일본사람들의 모든 우상을 내리쳐 없애주시라고 하나님께 울부짖는 개신교 신자들은 거기 신앙고백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내력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지에서 구경해야 할 것을 찾기만 하는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그 또한 거기 신앙고백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내력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신앙고백의 내력을 깨닫지 못하는 그 개신교 신자들, 그리고 구경거리만을 찾는 천주교 신자들은, 매한가지로 성모상이나 순교유적들을 ‘우상’으로 대하는 것이지요.
일본교회가 보전하고 있는 신앙고백의 ‘오우라 천주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매표소에서 돈 내고 단체입장표를 구입한 우리 순례자들이 거기서 어떤 마음의 눈으로 성모상을 바라보았으며, 거기 들려오는 사연을 어떤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었을까요? 구경하기 위해서 돈 내고 들어가서 보고 들은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사의 증거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신앙고백이야 합니다. 구경거리만 보았다면 우상을 보기 위해서 육백엔(¥600)을 내고 입장권을 샀을 뿐입니다.
■ 오오우라 성당과 순례자의 기도
오우라 천주당 안에 들어가서 순례자들은 아름다운 제대와 그 지성소의 건축미술을 감상할 수 있지요.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것을 재건한 가슴 아픈 역사를 되새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멀리 한국에서부터 고단한 여행으로 어렵사리 찾아온 진짜 순례자라면, 요란한 고함소리로 울부짖어 기도하던 개신교인들이 아닌 진정 가톨릭 신자라면, 스스로의 입술로 바치는 기도 보다는 깊은 묵상으로 거기 제대 앞에 무릎 꿇고 다음과 같은 역사의 속삭임을 들어야 합니다. 멀리 한국에서부터 여기 오우라 천주당에까지 어렵게 찾아온 순례자는 다음과 같은 역사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연을 들을 수 있는 순례자여야 합니다. 역사의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사연을 듣는 묵상이 오우라 천주당 제단 앞에 무릎 꿇은 순례자의 기도입니다. 소리를 질러대는 기도가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는 마음의 귀를 기우려 거기 무릎 꿇은 순례자의 기도여야 합니다. 그 역사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줄기의 내용입니다.
역사의 첫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기 그 제단은 1883년 7월에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으로 블랑(Blanc) 주교께서 주교서품을 받으신 곳입니다. 블랑 주교님은 그 1년 전 1882년에 서짓골의 순교자 무덤에서 네 분의 조선교회 성인의 유해를 이 오우라 천주당에 옮겨 모신 분입니다. 그 순교성인들의 유골함을 모신 제단에서 조선교구장 주교로 서품되셨습니다. 그 블랑 주교님을 서품 집전하신 주교님은 조선교회의 순교성인들 유해를 오우라에 정중히 받아 모신 나가사키 교구장 프티장(Petitjean) 주교님입니다. 그 프티장 주교님의 무덤이 그 제단 아래 있습니다. 그 프티장 주교님은 1864년에 오우라 천주당을 건립한 분입니다. 그 성당을 건립하던 때는 프티장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된 해의 다다음해(1866 병인년)에 조선에서는 참혹한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 박해로 1866년 3월 30일에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 등 다섯 분이 순교하시고 그 해 7월 15일에 서짓골에 그분들 중 네 분의 시신이 서짓골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둘째 이야기로,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을 프티장 신부가 건립한 1864년의 다음해에 일어난 일본교회의 사연을 들어야 합니다. 외국인들에게만 출입 허락이 된 우우라 성당이 건립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1865년 3월 17일, 그 오우라 천주당에 조심스레 찾아온 일본인들을 프티장 신부가 맞이했습니다. 한 가족으로 뵈어지는 그 일본인들이 주위를 살피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프티장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산타 마리아가 어디 계신가요?” 프티장 신부는 그들에게 살며시 손짓하여 성모상 모신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그 일본인들은 다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혹시 로마 교황님께서 보내신 분인가요?” 그렇다고 프티장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여 함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선대로부터 7대가 지나면 로마 교황님께서 파견하신 신부님이 산타 마리아를 모시고 도착하실 것이라는 말을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이 산타 마리아가 바로 그 증거이군요!” 이 말을 듣고 감격해하는 프티장 신부에게 그들이 또 실토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라카미 지역에는 우리와 똑같이 비밀리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로써 프티장 신부는 우라카미 지역에 숨어 사는 신앙인들을 은밀히 찾아 무수히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자들의 여러 곳 움막들을 비밀리 찾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하고 신앙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260년 이상의 박해를 견디어온 잠복 신자들(가쿠레 기리시단)을 그렇게 발견한 1865년 3월 17일은 오늘날 일본 천주교회가 ‘신자 재발견’의 역사적 순간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일본 천주교회 부활의 날입니다. 작년(2015년)에 그 ‘신자 재발견 15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그렇듯 일본교회 부활의 단초를 열어준 그 ‘산타 마리아 상’이 오우라 천주당 중앙제대 앞 왼편 회랑 전면의 작은 제대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렇듯 그리스도인들의(기리시단들의) 신앙을 확인해 주는 성모상을 ‘우상’이라 비아냥거려 울부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오우라 천주당의 역사를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역사 증거를 그렇게 모독하는 게 어찌 된 행태인가요? 신앙인의 행위인가요? 무엇을 보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한국에서 멀리 찾아온 천주교 신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려 하는가요?
오우라 천주당에 입장권 사들고 들어가 구경할 수 있는 게 고작 무엇이란 말입니까? 구경거리만을 본다면 그건 육백 엔짜리 우상을 본 게 아닌가요? 신앙을 보았어야지요!
거기서 본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앞에 이야기 된 두 가지 이야기의 줄기는 한국에서 멀리 찾아온 순례자들에게 한 가지 줄기로 합하여 들려옵니다. 조선에서건 일본에서건 한 가지 사연입니다. 그건 모진 박해를 견디어 낸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 하나의 줄기로 사연이 합해지는 증거를 오우라 천주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음’이라는 한 가지 사연입니다. 7대를 비밀리 전한 믿음, 박해를 당하면서 이어온 믿음, 죽음 너머에 다다른 믿음이 그것입니다. 산타 마리아 상이 증거 하는 그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에서와 일본에서와 매한가지로 정중히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골이 증거 하는 한 가지, 그것이 동일한 ‘신앙’이었습니다.
그 ‘동일한 신앙’은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내용이 같은 거라면 또한 그 내용을 함유한 농도(濃度) 역시 같아야 합니다. 겉보기에 즉 양적인 면에서 한국에서는 12.5%이고 일본에서는 0.5%라 하지만, 내면적으로 즉 질적인 면에서 어느 쪽이 진한 농도를 지니고 있을까요? 그 농도란 한국 신자이건 일본 신자이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찌 사는가라는 질문을 자신들에게 던져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농도가 들어나는 한 가지 예를 순례자의 태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국내성지순례를 하건 일본에 가서 순례를 하건, 그 순례자 본색이 들어날 때 신앙의 농도를 비쳐내 뵈어지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의 천주교 교세라는 것은 그 숫자로 비교되는 것일 수 없습니다.
1549년을 기점으로 하는 일본 천주교회 460년 역사의 오늘날 인구대비 0.5%와 비교하여, 1783년을 기점으로 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230년이라는 반 토막 역사로 오늘날 인구대비 12.5%란 월등히 농도 짙은 신앙을 증거 하는 것일까요?
■ 나가사키 지역 순례로써 확인한 것
한국교회 230년사보다 2배 기간의 역사를 지닌 일본교회가 교세숫자에 있어서 아주 미미한 현실 속에 감추어진 실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실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오무라의 순교지에서, 구로세노츠치의 순교지에서, 히라도의 야이자 순교지에서, 그리고 오우라 천주당에서 한국의 순교성지와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 국내순교성지들에는 오늘날 자랑스레 만들어 놓은 것들(건축물과 시설들)의 볼거리로 방문객들을 유치하는 반면에, 일본의 순교성지들에서는 볼거리보다는 그곳에서 있었던 역사에 대한 증거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즉, 일본에서는 순교유적을 보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그러한 순교지 보존을 보면서 오늘날 인구대비 미미한 교세의 일본교회 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이른바 ‘성지개발 컨셉’으로 순교지 보존을 하지 않는 일본교회는 아마 한국교회만큼 경제력이 풍부하지 못하고 일본의 문화적 토착종교에 비해서 열세의 종교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 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아마 일본교회 신자들의 처지로 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해봅니다. 즉 미미한 숫자의 일본 천주교 신자들이 말없이 소리 없는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하리라 추측됩니다.
일본의 천주교회는 460년 역사 중 320년 동안 박해를 당했습니다. 지금도 사회문화적 열세의 상황 속에 놓여있는 일본교회입니다. 순교유적지를 찾아가보면 천주교회 측이 그 유적들에 대하여 직접적 관리를 하지 못합니다. 정부당국과 관변단체의 규제 속에서 교회 측이 그 유적들을 유지할 뿐입니다. 즉, 유적 관리에 있어서 어느 것도 교회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오우라 천주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규제가 일본교회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오우라 천주당에서의 미사봉헌은 1년에 딱 2회 허용된다 합니다. 크리스마스(12월 25일)와 신자 재발견 기념일(3월 17일)에만 나가사키 교구 주최의 미사가 허용됩니다. 우리 한국의 국보급 불교사찰들은 정부당국의 보존대책으로 규제와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불교 자체의 자유로운 종교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순교유적들과 오우라 천주당 등은 천주교회 측에서 자유로이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불리한 여건은 현재의 일본교회가 여전히 박해 아닌 박해를 당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일본교회는 그렇듯이 불리함 속에서지만 미미한 숫자의 신자들이 버티며 지녀온 신앙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만큼 달구어진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불리함 속에서 미미한 숫자의 신자들은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도록 달구어짐을 여전히 당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신앙인이기에 그렇듯 사회문화적 대세 속의 약세로 지키는 믿음은 오히려 더욱 강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교회보다는 훨씬 짧은 역사이면서 급성장하여 강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렇다면 내면적(질적)으로도 강세를 지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뭐라 할 것인가? 말로 하는 대답보다는 한국교회의 일면을 예로 들어 스스로에게 던지라는 질문으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성지라 하는 국내의 여러 순례지 성지들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그곳들이 “왜 ‘성지’라 하는 명칭으로 불리어지는지?” 우리 자신들에게 답하라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물리적(경제적) 실력으로 쌓아 올리는 것들을 감탄하러 오라며 순례자들을 불러오는 거냐고 물어봐야 합니다. 아니면 거기서 역사의 소리 없는 속삭임이 들리느냐고, 즉 신앙고백의 족적이 발견되느냐고 거기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멋있고 어마어마하게 이즈음 만들어진 것들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역사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는 대답이라면, 그런 대답을 하는 방문순례자들의 귀가 어두워서 그럴까요? 아니면 거기서는 보이는 것들의 물리적 실력 자랑 때문에 역사의 속삭임은 묻혀버려서 그럴까요? 그 순례지의 오늘날 형국과 거기 가서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으로 모두 함께 대답해야 할 질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나가사키 지역의 순례지에서는 거기 찾아온 사람이 참 신앙인이라면 역사의 속삭임이 귀에 들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역사의 속삭임이 들리는 곳이어야 하며, 순례지에 찾아온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그 속삭임을 신앙고백의 소리로 발설할 수 있는 곳이라야 ‘성지’입니다.
일본의 나가사키 대교구는 오우라 천주당과 관련하여 그 역사적 신앙의 발자취를 순례자들에게 소상하게 깨닫도록 역사자료관을 잘 구비하고 있습니다. 오우라 천주당 아래 오른 편에 위치한 옛 신학교 내부에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에 대한 자료들을 자세한 설명문안과 함께 잘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자료들을 관람하면서 한국인으로서 갖게 되는 감회가 색다릅니다. 우리 조선교회의 엄혹했던 시기에 선발된 신학생들이 바로 역사자료관인 이 신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나가사키 라틴신학교’라 일컬어지던 이곳에 비밀리 유학하여 공부하고 사제가 된 분이 계십니다.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입니다. 하부내포 지역의 홍산에서 병인박해시기에 태어난 강성삼 신부님께서 1881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나가사키 오우라의 이 라틴신학교에 유학한 첫 번째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분 다음으로 여러 명이 뒤이어 오우라의 라틴신학교에 유학하였습니다. 여기서 라틴어를 습득한 강성삼 신학생은 이어서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한 후 귀국하여 서울 용산에서 1896년에 다른 두 분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님이 사제품을 받으신 것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중국에서 우리 한국의 첫째사제 되신 1845년 이후 51년 만에, 그리고 최양업 신부님께서 역시 중국에서 한국의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으신 1849년 이후 47년 만에 한국인으로서 세 번째로 한국에서 사제 되신 역사를 이 오우라의 라틴 신학교가 회상하게 해줍니다. 강성삼 신부님께서 공부하신 바로 그 건물에 들어가 일본교회 역사자료를 관람하는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하부내포의 홍산에서 먼 길 찾아온 순례자로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가슴 속에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강성삼 신부님의 고향인 홍산 출신 이건석 신부와 함께 그 라틴신학교를 방문한 감격이란…!
라틴신학교를 둘러보고 나오면, 그 반대편에 위치한 기념정원에 발길이 닿게 됩니다. 오우라 천주당의 역사를 기념하는 조형물을 설치한 작은 공원입니다. 공원 입구 오른편에 1865년의 신자 재발견 기념 부조상과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원 형태의 공간 전면에는 오우라 천주당을 건립한 프티장 주교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그곳을 방문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흉상이 있습니다. 이 작은 공원은 역시 일본교회가 기억하는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 나가사키를 찾은 순례자들이 이어가는 여정
오우라 천주당 순례를 마치고 주차장에 내려가는 동안 길 양편에 늘어선 기념품 가게들과 음식점들을 지나게 됩니다. 시간이 있다면 기념품을 사고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오우라 천주당 역사의 숨결에 취해보고 싶지만 우리 순례자들은 발걸음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이지요. 버스에 승차하여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은 단체관광객들을 위해 안내되는 식당이었습니다. 그 식당에 들어가니 조금 전에 오우라 천주당에서 마리아 우상을 내려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큰 소리로 울부짖어 기도하던 한국의 개신교인 관광객들이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순례자들이 삼종기도와 식사 전 기도를 바치는 것을 바라보는 그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하나둘씩 슬금슬금 일어나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식사를 거의 마쳐갈 즈음에 우리 순례자들이 거기 도착한 것 같습니다. 우리 순례자들은 늦은 점심식사를 하게 되는 탓에 비교적 음식 섭취를 빨리 하게 되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 순례자들은 가까운 위치의 ‘나가사키 평화 공원’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9일의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낙하지점에 평화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거대한 평화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순례자들은 그 아래 원자폭탄 낙하지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지점에는 우라카미 대성당의 원폭피해 잔해의 일부가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시간이 없어서 원자폭탄 자료관을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가사키 대교구청 방문을 위해 가는 길에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뇨코도(여기당·如己堂)를 지나가게 됩니다.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의 참상을 신앙인으로서 증언한 분입니다. 의사인 그분이 병원에 출근하여 일하던 시간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근무하는 병원이 멀리 오무라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분은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았지요. 수만 명이 순식간에 시가지 전체와 함께 사라지고 참혹한 잿더미로 변한 그 참화 속에서 의사로서 그분은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응급치료 때문에 며칠 동안 자기 집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며칠 후에 위치조차 식별 되지 않는 자기 집을 찾아왔지만 남은 것이라곤 잿더미뿐이었습니다. 그 잿더미를 들추면서 아마도 부엌이 있었던 근처에서 사람 뼈가 타버린 숯덩이에 엉켜 붙어 있는 묵주 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필시 자기 아내가 일하는 중에도 항상 손에 쥐고 기도하던 묵주가 타고 남은 몇 개의 구슬이었습니다. 그것을 양동이에 담아 들고 돌아서는 나가이 박사의 귀에 기막힌 소리가 들립니다. 양동이 속에서 그 묵주 알 박혀 숯덩이 된 뼛조각이 달그락달그락 소리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자기 아내가 속삭이는 흐느낌으로 들렸습니다. “여보, 미안합니다. 당신을 두고 제가 이렇게 먼저 가다니요…”
이러한 체험을 한 나가이 박사가 남긴 글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영원한 것들’, ‘묵주알’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나가이 박사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원자폭탄의 참상을 평화로 승화시킨 분입니다. 숯덩이로 남은 아내의 뼛조각에 박힌 묵주 알에서 그는 원자폭탄피해를 신앙으로 극복하며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여기애인·如己愛人)”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치료를 위해 혼신을 다하면서 결코 어느 누구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참 용기를 그는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 참상에서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는 용기가 바로 그가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자신도 원자병에 시달리는 가운데 고통 받는 원폭피해환자들을 위한 치료에 헌신하다가 4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전 세계인을 감동시킨 ‘용서’를 실천한 나가이 다카시 박사였습니다.
■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그리고 우라카미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은 나가사키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시간입니다. 한국인들을 잔학하게 짓밟아 수십 년 반인류적 범죄를 저지른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나라를 세계의 범죄국가로 전락시키고, 그로써 제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기록되게 한 역사의 기록이 나가사키에 새겨져 있습니다.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에 이어서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어떠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일가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의 승전 기록이면서 동시에 그 원폭참상을 저주하는 패전국 일본의 증오를 기록하는 나가사키의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입니다. 그 나가사키 원폭피해의 참상에 대한 기록은 이렇습니다. “즉사 7천5백 명, 원자병자 7천여 명, 이재민 20만 명, 원자폭탄 투하지점의 반경 500미터 이내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이 숯덩이 됨”
나가사키에서 이런 참상의 중심지역이 바로 우라카미(浦上)입니다. 우라카미 지역은 1865년에 오우라 천주당을 처음으로 찾았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면서 누대에 걸쳐 비밀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곳입니다. 나가사키에서 가장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박해시기를 지난 천주교회가 나가사키 주교좌 대성당을 건립한 곳입니다. 1945년 당시 그 우라카미 지역에 1만2천 명 가량의 신자들이 살았습니다. 그 주교좌 대성당에서 8월 15일의 성모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며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와 미사를 봉헌하던 그 시간에 그 지역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였습니다. 그 순간 성당에 있던 사제들과 신자들이 모두 숯덩이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우라카미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 8천5백 명 가량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천주교 신자 밀집지역이 원자폭탄 투하의 중심지였을까요? 왜, 왜, 왜 그렇게 천주교 신자들이 피해의 중심지 사람들이었을까요? 하느님을 원망해야 할 저주가 우라카미 대성당의 상징 아니겠는가…!
이러한 우라카미 성당의 신자 나가이 박사가 피해사망자 위령미사에서 피해자들을 위한 조사(弔辭)를 낭독했습니다. 그의 조사를 경청한 사람들 모두, 그리고 보도된 그 조사를 읽은 사람들, 가해자인 미국인들도 피해자인 일본의 국민들도 함께 공감하여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게 된 나가이 박사의 조사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상 최후를 가장 잘 깨달은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십자가에서 이러한 기도로써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들이 모두 가슴을 쳤다는(루카 23, 48) 그 골고타 현장에서와 같이, 원자폭탄피해의 중심지 현장에서 읊은 나가이 박사의 조사는 모든 사람들의 깨달음을 이끌어냈습니다. 그것은 나가이 박사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신앙의 힘입니다. 그리고 수백 년간 박해를 받으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이 지녀온 신앙이 그것입니다. ‘용서’로 보여준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힘을 진정으로 실천하고 보여준 사람들이 곧, 나가사키 우라카미 성당의 나가이 박사와 그곳 신자들이었습니다.
그 신자들이 신앙의 힘으로 참상을 극복하고 일어선 역사를 증언하는 것을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원자폭탄으로 완전 파괴되었던 그들 신앙의 전당을 눈물겨운 노력으로 재건축한 오늘의 우라카미 대성당이 당시의 참상을 오늘도 그 역사의 증언 자료로 보전하고 있습니다. 모두 원자폭탄 열기로 타고 남아 그을려진 파편들로 보전되고 있습니다. 대성당 안의 소성당 제대 위에 보존하여 모신 성모상과 성당 전면 입구에 보존되고 있는 여러 성상들과 잔해 파편들, 그리고 대성당 언덕 아래 굴러 떨어져 처박혀있는 종탑 망루와 그 유명한 ‘나가사키의 종’이 그것들입니다.
이러한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순례자들은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그 조사(弔辭)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원폭피해로 희생된 이들의 추도미사에서 낭독한 그의 조사 일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 죄 없이 깨끗한 양으로서 하느님의 품에 안식하는 그 영혼의 복됨이여, 그에 비해 살아남은 우리의 비참함을 보십시오. 일본은 졌습니다. 우라카미는 온통 폐허가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재와 기왓장뿐, 집도 절도 없고 입을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며 밭은 거칠고 사람조차 드뭅니다. 멍하니 불탄 자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두셋의 무리들뿐입니다. 그날 그 시간에 이 집에서 왜 저는 죽지 못했을까요? 왜 우리만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말로 자기 죄가 크다는 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저는 죗값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죄의 더러움이 너무나 많은 자는 하느님의 제단에 바칠 자격이 없으므로 이렇게 남겨진 것입니다.
… 일본이 지금부터 걸어가야 할 패전국의 길은 고난과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야말로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죗값을 치를 기회가 되는 희망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아! 복되도다. 우는 자, 그들은 위안을 받을지어다.’ 우리는 이 배상의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비웃음을 당하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땀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되고, 굶주리고, 목이 타들어 가도 이 길을 성실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 주님께서 주시고 주님께서 거두시나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우라카미가 주님의 제단에서 번제물로 바쳐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 귀한 희생으로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으며, 일본에는 신앙의 자유가 온전히 허락되었습니다. ‘비오니, 죽은 이들의 영혼이여!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원폭으로 죽은 사람들 중에 우라카미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이렇게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죄 없는 분(예수)의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십자가의 원리를 나가이 다카시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와 우라카미 성당에 직격탄처럼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로써 세상의 죄를 사르기 위한 번제(燔祭)를 깨달은 그였습니다. 그 ‘세상의 죄’란 무엇일까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죄, 세계대전 전범국가 일본의 죄, 그리고 그 전쟁에 동조한 모든 사람들의 죄와 무고한 사람들 위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죄가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모든 죄를 흠뻑 뒤집어쓰고 희생된 사람들이 우라카미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희생으로써 이제는 세상의 평화가 도래하게 됩니다.
누굴 탓하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평화는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희생의 장본인들은 곧 300년 동안 모진 박해를 당한 가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비웃음을 당하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땀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되고, 굶주리고 끝내 목숨을 빼앗기면서 신앙을 고백해온 일본 천주교 신자들이 또 직격으로 원자폭탄을 맞았습니다. 그건 죄 없으신 분의 십자가상 희생을 따라, 세상의 죗값으로 원자폭탄의 불에 살라진 우라카미의 번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어서 세상의 죗값 치르기로 고난의 대열에 참가해야 한다고 나가이 다카시는 호소하였습니다. 무고한 희생으로 평화가 도래하게 되었다면, 그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한 고통을 감내해야 할 책임 또한 천주교 신자들의 몫이라는 깨달음으로 그는 호소한 것입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곧, 치러야 할 죗값을 신앙인들 자신 안에서 볼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이 다카시의 이러한 호소는 전범자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에 대한 응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향해 원자폭탄을 투하한 승전국가의 지도자들은 물론,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한 나가이 다카시의 호소는 어떤 깨달음에서 나온 것일까요? 300년간의 박해와 무수한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고백해온 일본교회의 신앙은, 또한 무고한 우라카미 신자들의 참혹한 원폭피해와 연관하여,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사건에 맞닿은 신앙이라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깨달음이었습니다.
■ 니시자카 순교성지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일본교회의 줄기찬 신앙역사에 대한 감흥에 젖은 우리 순례자들은 대성당의 언덕을 내려와서 나가사키 대교구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 대교구장 요셉 타카미 대주교님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윤종관 신부는 순례자들을 대표하여 한국의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님의 친서를 나가사키 타카미 대주교님께 전해드리기 위해서 미리 대교구 측에 연락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대주교님께서는 출타 중이셨고, 사무처장 신부가 우리 순례단을 맞이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전교구장 주교님의 친서를 타카미 대주교님께 올려드리도록 부탁하면서, 서짓골에 묻히셨던 조선의 순교성인 유해가 나가사키의 오우라에 모셔졌던 사연을 그곳 사무처장 신부와 관계직원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우라 천주당 경내에 그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는 계획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주교님께 보고하겠다는 사무처장 신부의 대답을 듣고 우리 순례자들은 다음의 일정을 위해서 대교구청에서 나왔습니다.
나가사키 대교구장 대주교님을 직접 뵙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순례자들은 그 유명한 ‘니시자카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니시자카’는 서쪽 언덕(西坂)이라는 뜻입니다. 그 언덕이 일본의 26성인 순교지입니다. 가톨릭 전례력의 매년 2월 6일이 바로 여기서 순교하신 순교성인들의 축일입니다.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축일’입니다. 1597년 2월 5일에 바오로 미키 등 일본인 20명과 외국인 선교사 6명이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당하여 순교했습니다. 이 순교성인들은 에도에서부터 800㎞를 두 달 동안 맨발로 끌려와서 처형당했습니다. 우리 조선을 침범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나가사키에 끌고 가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범하여 중국까지 정벌하기 위해서 서양의 대형 범선을 조달해달라고 스페인 선교사에게 부탁했는데, 그걸 들어주지 않자 천주교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복적인 박해를 명하였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완전 정복하려던 야심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는 판국이었는데, 1596년에 스페인 선박이 일본 도사(土佐) 에 표착한 것을 기화로 천주교 박해를 명했습니다.
체포된 26명을 하필이면 천주교신자가 가장 많던 나가사키에 끌고 가서 처형하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주교인을 이렇듯 참혹하게 죽인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보여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그 먼 길을 끌고 가게 했습니다. 먼 길 가는 동안 한 마을에서는 신자들의 왼쪽 귀를 자르고, 그 다음 마을에서는 오른 쪽 귀를 자르고, 그 다음으로는 코를, 그 다음으로는 손가락 하나를, 그 다음 손가락 또는 발가락을 잘라가면서 온 몸의 뼈가 들어나고 피투성이와 고름으로 범벅되어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나가사키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참혹한 죽음의 본보기를 보이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한 분들 중에는 루도비코 이바라키라는 나이 어린 소년이 있습니다. 참혹한 몰골로 함께 끌려온 분들이 막상 십자가에 매달아 불로 태워 죽이려는 현장에 도착하여 어쩔 줄 모르며 떨고 있을 때 어린 루도비코 이바라키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제가 질 십자가는 어떤 겁니까?” 가장 나이어린 소년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순교자들은 눈물 흘리며 모두 십자가를 지고 니시자카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순교한 니시자카 언덕에는 성 필립보 성당이 있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세워진 그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종탑모양을 닮은 그 성당은 26위 순교자 중 필립보 데 헤수스 성인의 이름을 딴 자그마한 성당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탑을 본 딴 두 개의 탑으로 그 아름다운 외형을 갖추고 있는 성 필립보 성당에는 26위 중 바오로 미키 등 세 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 왼편 공원 같은 광장에는 26위 순교성인 한분 한분의 동상을 모신 대형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 기념비 앞 층계를 오르는 전면 바닥에는 ‘1597년 2월 5일’을 대리석에 새긴 판석이 있습니다. 그 판석을 순례자들이 차마 발로 밟을 수 없어 주저주저 하면서 층계를 올라 기념비 앞에서 묵념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한국의 성지 조성에 있어서 참고로 본받아야 니시자카 순교기념비입니다. 저절로 기도를 하도록 이렇게 세워진 기념비의 뒤로 돌아가 보면 순교자들이 그 머나먼 길 고초와 수모를 당하면서 여기 도착하여 목숨을 바친 경로를 형상화한 석벽을 만나게 됩니다. 순교자들이 맨발로 걸었던 고난의 멀고먼 길을 상징하여 거친 돌들을 쌓아 올린 석벽입니다. 고난의 길에서 오로지 마음은 하늘로 향했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표현하여 이 석벽 상단면의 돌에는 ‘Sursum Corda’라는 글이 새겨있습니다. 라틴어의 이 글은 미사 때 성찬기도의 감사송을 바치기 시작하며 사제가 외치는 문구인 것입니다. “마음을 드높이!”라는 문구입니다. 사제가 그렇게 외치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올립니다!” 하지요. 라틴어로 하자면, ‘Habemus ad Dominum!’ … 그렇듯이 오로지 주님을 향하여 마음 드높이 그 고난의 길을 거쳐서 순교자들은 이 니시자카 언덕에서 번제물로 태워져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렇듯 혹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순교한 현장에서 기도하고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조선의 병인박해를 연상하였습니다. 1866년에 천주교의 혹독한 박해를 명령한 흥선 대원군을 연상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흡사하게 대원군도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선교사들에게 부탁을 했지요.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께 프랑스 정부와 협의하여 러시아에게 정치적 역할을 하도록 요청했다가 사실상의 거절을 당하고는 돌변하여 천주교 박해를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대원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상하여 박해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니시자카의 언덕이었습니다. 이렇듯 박해의 역사란, 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는 권력에 의해서 점철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던 골고타가 상징하는 것처럼, 300년 동안 순교의 역사를 기록한 로마 제국 시대의 천주교 박해와 일본의 300년 박해와 조선의 100년 박해, 그리고 현대에도 공산권에서와 북한 독재체제에서의 박해, 또한 이른바 자유민주국가라는 세계 도처에서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듯이 정치적 오해로 신앙인이 당하는 불이익과 오해 등등… 그러나 꿋꿋하게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지켜 고백해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
니시자카 순교지 언덕을 내려온 우리 순례자들은 성모의 기사 수도원 본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께서 세우셨습니다. 콜베 신부님께서는 1930년에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오우라 천주당에 올라가 성모상 앞에서 큰 감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길고긴 박해기간 숨어서 신앙을 간직해온 신자들이 오우라 천주당의 산타 마리아상을 발견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던 그 사연을 콜베 신부님이 확인한 것입니다. 그 성모상을 오우라 천주당 문 앞에서 보게 되는 순간, 함께 온 동료 수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성모님께서 우리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콜베 신부님은 성당 아래의 한 가옥에 거주하면서 나가사키 선교를 시작합니다. 그분이 거주하던 집이 지금도 오우라 천주당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 집에서 그래서 콜베 신부님은 선교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발행하여 선교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오우라에 도착한 우리를 성모님께서 몸소 맞이하셨으니, 우리가 하는 일이 분명 잘 될 것입니다.”라며 동료수사들을 독려하고 함께 오우라 천주당을 중심으로 나가사키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그 잡지를 나누어 주고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월간 잡지를 콜베 신부님께서 발간하던 인쇄기가 성모기사 수도원 본부에 보존되어 있고, 지금도 ‘성모기사’라는 제호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선교하던 콜베 신부님은 소속 수도회(콘벤투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명에 따라 고국 폴란드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체포됩니다. 유태인을 숨겨주고 도와주었다 해서 체포된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아사형(餓死刑)을 선고 받고 끝내 독극물 주사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하는 순교를 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하시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옥 같은 그 수용소는 아주 잔학한 방법으로 수감자들을 억압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수용소 담에는 3천 볼트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촘촘하게 둘러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감자 중에 도망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다른 수감자 1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는 콜베 신부님과 한 막사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이 탈주하다가 수용소 울타리의 3천 볼트 철조망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수용소의 나치군이 콜베 신부님 막사의 수감자들을 불러내어 집합시켰습니다. 그리고 줄 세워 서있는 그 사람들 중에 열 명을 무작위로 불러내어 굶어 죽이는 막사로 보내려 할 때, 그 불려나온 사람들 중에 한 남자가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살아 돌아가야 하는데요.”하면서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뒷줄에 서있던 콜베 신부님이 불쑥 나치군인 앞에 나서면서 말했습니다. “저 사람 대신 내가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콜베 신부님은 그 사람 대신 굶겨 죽이는 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열 명이 함께 갇혀서 일주일 그리고 열흘을 넘기면서 물도 먹을 것도 없이 신음하다가 죽어갑니다. 하나둘씩 아홉 명이 차례로 죽어 가는데, 콜베 신부님의 목숨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치군은 독극물 주사기를 가져다가 팔뚝 혈관에 꽂아서 그분을 절명시킵니다. 그렇게 콜베 신부님은 다른 사람 대신 그 지옥 같은 아사실(餓死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그렇듯 무수히 사람들을 죽인 나치 독일이 패전한 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폐쇄되고, 거기서 콜베 신부님 때문에 죽지 않게 된 그 사람은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후에 돈을 벌고 삶의 여유를 누리게 된 그 사람이 방송에 출연하여 콜베 신부님의 덕으로 살아남게 된 사연을 알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의 문학가 미우라 아야코가 찾아갔습니다. 소설 ‘빙점’의 작가로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여류작가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으로 대신 살아난 그 사람이 가족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찾아가 확인하여 글을 써서 발표하고 싶었던 미우라 아야코였습니다. 작가가 그 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 장본인 가장은 출타 중이었습니다. 작가가 그의 부인에게 자녀들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부엌으로 들어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그 부인을 등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제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때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콜베 신부님이 죽임을 당하기 이틀 전에 우리 집이 폭격을 당하여 그 아이들은 죽었습니다.”
그 부인의 말을 듣게 된 미우라 아야코 작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집니다. 작가는 3년 동안 준비한 원고를 들고 그 가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콜베 신부님의 목숨 값으로 살아남은 삶에 대하여 그 가정의 증언으로 작품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준비했던 원고를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이미 세상에 있지 않은 목숨을 위해서도 대신 죽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단 말인가! 무려 3년 동안 준비했던 원고를 내버리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귀국길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마음이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아무런 값을 되찾을 수 없는 희생을 하느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갚아주시는지…!
콜베 신부님의 희생은 무위(無爲)였단 말인가? 이렇듯 혼란스런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 신자들이 당한 300년 박해의 역사에 대해서, 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직격으로 맞은 우라카미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 어찌하여 그럴 수 있는가 하는 혼란스런 질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일까요? 우리 신앙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대답해 주실 말씀은 무엇일까요? 아마 하느님께서는 당신 홀로 대답을 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과 함께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의 입으로 대답하라 하실 것입니다. 참 신앙인의 대답은 이 세상의 현실에서 찾아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닐 것입니다.
■ 나가사키 대주교님 예방
성모의 기사회 수도원 성당에서 한 동안 말 없는 기도로써 우리 순례자들은 모두 무릎 꿇고 콜베 신부님의 희생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가사키 대교구의 전갈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낮에 출타하셨던 타카미 대주교님께서 돌아오셔서 윤종관 신부를 찾으신다는 전갈입니다. 서둘러 순례자들의 버스를 되돌려 나가사키 대교구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대교구장 집무실에 올라간 윤종관 신부는 타카미 대주교님의 따뜻한 미소를 접하면서 긴장되었던 가슴에 이내 평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남이 아닌 듯 늘 함께 살아온 사이의 교감처럼, 대주교님께서 맞잡아주시는 손에서 방문자 손으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부내포에서 전해드렸던 자료에 대해서 이미 상세하게 공감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전달 받으신 대전교구장 주교님의 친서에 대한 감사의 말씀과 더불어 한국인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대전교구의 하부내포에서 나가사키에 온 이번 순례로써 얻은 느낌에 대해서 대주교님께 소상히 말씀드릴 수 있는 편안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번 순례 목적을 설명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우라 천주당에 조선교회 순교성인 유해를 정중히 모셨던 역사에 대해서 거기 순례하는 후대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기념비를 세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대주교님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고맙다고 화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부내포성지의 윤종관 신부와 오우라 천주당의 모로오카 신부 사이의 구체적인 실무협력으로 현양비 건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대주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은 하나의 교회라는 증거가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윤종관 신부가 타카미 대주교님을 예방하는 30여 분 동안, 우리 순례자들은 대교구청 주차장의 버스 안에서 순례자의 기도서로 저녁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오우라 천주당의 한국순교성인 현양비 건립계획 성취를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대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물러나온 윤종관 신부가 순례자들의 버스에 돌아와서 예방의 성공적 결과를 알리자 모두 기쁨의 환성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때마침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나가사키 거리의 가로등 불빛들은 빗방울에 반사하여 폭죽 갈래처럼 차창에 부딪치며 순례자들의 가슴에 축복의 메시지인양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가사키의 야경이 펼쳐진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위의 호텔에 순례자들의 버스가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모두들 풍성한 일식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례여정의 마지막 밤이 되었습니다. 룸메이트 끼리 성무일도 끝기도를 마치고 자유롭게 온천욕과 회포 풀이의 시간으로 피로를 푸는 밤이었습니다.
6. 순례여정 다섯째 날
■ 귀국 항로
4박5일 순례의 마지막 여정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여덟 시에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른 순례자들은 나가사키 시내를 관통하여 후쿠오카(福岡)로 향했습니다. 낮 열두 시에는 하카다 항의 귀국선에 승선해야 합니다. 버스 이동과 동시에 순례기도서 아침성무일도를 바치는 동안 나가사키 시내를 벗어났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린 후 중도에 면세점(Duty Free Shop)에 정차하였습니다. 귀국하여 가족친지들에게 줄 기념선물을 마련할 기회인 것입니다. 귀국해서 다시 만나게 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미리 살피는 각자 나름의 자유쇼핑시간입니다. Duty Free입니다. ‘세금면제’라는 명칭을 글자 그대로해서 ‘본분 자유’라 할까요. 순례의 마지막 여정에 본분을 잊어도 된다 할까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여정도 ‘순례’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챙기는 것 또한 순례자의 본분행위입니다. 챙길 물건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면세점의 짧은 쇼핑시간을 서둘러 마치고 버스에 올라 순례기도서 낮 성무일도를 바치는 동안 하카다 항의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승선하여 선실 배정을 받은 후에 선내 식당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며칠간 한식 맛을 잊었던 순례자들이 얼큰한 김치찌개를 즐기며 이미 한국 땅에 돌아온 기분이 됩니다.
점식심사를 하고 있는 중에 벌써 뉴카멜리아호는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겨울바다의 파도가 창밖으로 보입니다. 식사를 마친 순례자들이 일어나 나가면서 기우뚱거리는 여객선 통로에서 몸을 가누다가 서로 부딪칩니다. 갑판으로 나가서 멀어지는 일본 땅을 바라보고 싶지만, 밖으로 나가는 문은 모두 잠겨 있습니다.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외부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순례여정의 출발에는 야간항해였기에 잠을 자면서 현해탄을 건넜습니다만, 마지막 여정인 귀국선 항해로는 현해탄을 낮에 건너게 되었습니다.
■ 현해탄!
현해탄(玄海灘)!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입니다. 해류가 거칠고 짙은 색깔의 바다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현해탄’이라 부른답니다. ‘검은 바다’라는 뜻이랍니다. 한국인들이 대한해협(大韓海峽)이라 부르는 이 ‘현해탄’은 일제강점기의 우리 한국인들에게 눈물의 바다였습니다. 우리가 순례여정의 출국과 귀국 노선으로 부산과 후쿠오카 사이의 항해를 하는 이 바다, 즉 현해탄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슬픈 과거를 회상하게 합니다. 일제강점기의 과거에 국권을 빼앗긴 원한을 삼키면서 지식인들이 공부하기 위해 또는 장사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던 바닷길이었는데, 강제징용으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면서 이 바다위에서 비통해 하였던가! 이 바다를 건너 머나먼 타지 일본 땅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얼어죽고 굶어죽고 지쳐죽고 병들어죽고 맞아죽고 강간당해죽고 탄광에 묻혀죽고, 그리고 그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으로 죽었는가! 우리가 이번에 순례 다녀온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으로 즉사하거나 원자병으로 신음하다가 죽어간 조선인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추정에 의하면 3천 명 이상일 것이랍니다. 그렇듯 이 바다를 건너간 조선인들 중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숫자는 마저 파악되지도 않는답니다. 이 모든 비극의 통로였던 이 바다를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그렇게 건너갔는지 거친 파도는 말해주지 않고 오늘 우리 순례자들의 여객선을 기우뚱기우뚱 흔들기만 합니다.
그 슬픈 과거를 거친 파도로 삼켜버린 바다이기 때문에 아마 조선인들에게도 ‘검은 바다’라 일컬어지는 현해탄인가 싶습니다. 순례의 마지막 여정으로 건너는 이 겨울바다를 창밖으로 바라보는 순례자들의 눈에는, 마주쳐오다가 우리의 배를 스쳐 뒤쪽으로 또 뒤쪽으로 달아나기만 하는 검은 파도들이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우울해지는 마음들입니다. 그래서 선실에 모여 순례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를 집전한 사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한일국경의 바다를 건너 귀국하는 우리는 과거의 검은 파도와 미래 희망의 햇빛 빛나는 파도를 함께 건너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무수히 이 바다 건너에 끌려갔던 그 슬픈 조선인들에게, 그리고 박해 속에서 성인들의 유해를 타국으로 옮겨 모셔야만 했던 우리 신앙선조들과 비밀리에 신학생으로서 유학 갔던 강성삼 신부에게, 또 그리고 국권을 빼앗기고 눈물로 건너가던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에게 이 바다는 검은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의 이유로 순례의 여정에서 건너는 이 바다와는 달리, 불신의 안개 속에서 증오의 파도가 위협하여 건널 수 없는 남북분단의 우리 현실이 또한 검은 바다입니다. 그러나 빛으로 다가와야 할 미래를 향하여 우리는 희망의 바다를 항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귀국선의 바다위에서 기도합시다! 순례로써 얻은 깨달음으로 간구합시다!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형제들입니다. 국가민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가톨릭 정신으로 서로를 도울 줄 알게 되기를 간구합시다! 남북한의 국민들은 하나의 민족입니다. 불신과 증오를 떨쳐내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게 되기를 간구합시다! 이역만리 서양으로부터 조선시대의 박해 속으로 목숨을 바치러 왔던 외국인 사제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옛이야기는 들었지만, 한 땅에서 한 동족으로 살아가면서도 오늘날 70년 동안이나 남녘에서 목숨 걸고 북녘의 신자들을 찾아간 동족의 사제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북녘의 동포를 위해서 무언가 한 가지라도 실제로 할 수 있는 남녘의 교회가 되기를 간구합시다! 우리의 이 순례여정에 함께 하고자 했던 한 자매가 남편이 개성에서 당한 교통사고 때문에 우리의 이 은혜로운 기회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 자매와 남편의 고통을 기억하여 주님의 돌보심을 간구합시다! 우리의 순례여정에서 몸을 다친 형제를 위해서도 주님의 위로를 간구합시다! 우리의 이 여정 중에 무사안위를 위해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기억하여 간구합시다! 우리 순례자들 모두 가족들의 품속에 무사히 돌아가도록 각자의 집 현관 문턱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합시다!”
이러한 기도의 미사봉헌 후에 순례기도서의 저녁성무일도를 마쳐갈 즈음에서 멀리 부산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첫댓글 신부님 감동의 순례기 정말 잘 봤습니다. 정말 일본 성지를 기회되면
꼭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순례기를 읽는동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얕은 신앙에 부끄럽기도 합니다.예수님과의 처음 만남을 떠올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