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윤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누워 있는 것도 벽이었다. 출근길 서둘러 밟고 온
보도블록에도 무늬가 있었다. 단색세포처럼 또박또박
놓여 있었다. 밟히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기우뚱
거리며 빗물을 토해 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을 만들며 스스로 자라야 했다.
한번쯤 앞서고 싶은 길
바람을 견딘 만큼 몸으로 주름이 잡혔다.
지워지는 혈관을 찾아 나는 불안하게
흔들려야 했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만 쏟아졌고 아이들은 티눈처럼
자라 있었다. 엉킨 뿌리를 들고 일어났다.
태풍이 겹겹으로 껴입은 주름을 더듬고 갔다.
그리고 바람이 통 없는 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이들은 조금씩 흔들릴 때 아름다웠다.
껴안은 모든 것들 속에서 너희들은 동티처럼
부활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소문 없이 떨어질
나를 위해 남아 있어야 했다. 깨끗한 너희들,
밟히는 족족 주름을 벗고 탄생하는 은행알들.
짝사랑 / 이윤학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길 / 이윤학
리어카 위에 꽃상여를 올려놓고
밀고 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비상등을 켜고
중앙선을 넘어
그들을 앞지른다
평생을 열매 만드는 공장,
과수원이 옆으로 펼쳐진다
물 속처럼 드러나는 하늘을
룸미러를 통해 쳐다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밀려가고 있는가
뒷좌석 뒷유리 밑에서
바람이,
책장을 찢어발기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길에서 혼자 죽을 수 있는
독단도 남지 않았다
내가 달리는 속력을 앞질러 가는
내 생의 무지한 조급함과 언제나
협상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을까
급브레이크를 밟은 타이어 자국이
내 흐릿한 의식 속에 휘어진,
두 줄의 검은 혓바닥을 처넣는다
기침/ 이윤학
주먹을 불끈 쥐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
금 캐러 광산에 다닌 아버지.
돌가루 쌓아놓고 사는 아버지.
새벽 4시를 알리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뭉텅이별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너희 아버지는 금 캐러 가기 전에
금 캐러 갔다와서
네 눈을 바라보곤 했다.
삼십 후반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얘기를 흘려놓고
어머니
비닐집 속으로 사라진다.
뿌옇게 물방울 열린 비닐집.
갈빗대 튀어나온 비닐집.
경운기 몰고 풀 깎으러 가는
넥타이 허리띠 졸라맨 아버지.
여름의 한낮 / 이윤학
ㅡ 오동나무 아래
오동나무 밑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평상 옆에는 지팡이가
여럿 기대져 있다, 노인들이
입을 벌리고 자고 있다
털 난 벌레가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평상 위에는 부채가 놓여 있다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쩍
갈라진 수박 반 쪼가리
저 수백 장의 오동나무 이파리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푸른 부채, 너무 큰 부채들 위에
꽃이 피어 있다
노인들, 가끔 입맛을 다신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겹쳐
지나간 것인가, 그리고
꽃이 시든다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가
더 높은 곳으로
저 꽃들은 바쳐진다!
오오, 입을 다물어
씨를 만들어내는
지독한 순간들, 만난다
햇빛이 잠깐 입 속을 스쳐간다
입 속의 금이 번쩍 빛난다, 저
평상 위의 그늘은 끝없이 물결친다
해바라기 / 이윤학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원하지 않는 해바라기여
죽는 날까지
뱃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도
누군가를 부르지 않는 해바라기여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해바라기여
너 말라 죽은 뒤에
누군가 잘못 알고
허리를 끊어 가리라
너는 머리로 살지 않았으니
네 머리는 땅 속에 있었으니
뱃속을 가득 채운 씨앗들이
너의 전철을 밟더라도
너의 고통을 답습하더라도
너는 평생 동안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먼 곳에
통증을 모셔 놓고 살았으니
사금(砂金) / 이윤학
이제 그 눈물 속에서 보낸 밤들을 돌려보낸다
흐르는 강물아, 썩어 흐르는 강물아 그 깊은 밤들은 이제
끝이다 나는 지금 흰 모래에 섞여 빛나는 너의 눈빛을
갖고 있지만, 너를 만날 수는 없다 흐른 뒤 무거운 강물아
말 못 하는 너의 손을 잡고 바다까지 따라갔던 일을 잊는다
이제는 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 어느 한 순간을 지배하던 아픔도
정들었다 어디로 갔느냐 나는 지금 겨울이다 강둑에 앉아 마른
풀을 만지며 흘러가지 않는 구름들을 본다, 전할 말 없느냐
이미지 / 이윤학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을 통과할 때 / 이윤학
정들었던 지상에서 발을 떼는 순간부터 문제이다
잠자리 한 마리가 꿈틀거리기를 멈추었을 때
문이 열리듯, 거미줄이 팽팽해지고, 햇살이
거미줄을 통과해 간다 하늘은 언제나 한계를 보이는
유혹일 뿐이다 우리는, 그 유혹을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날아오르며 땅을 두드릴 수는 있어도
수많은 벽을 일일이 두드리고 지나갈 수는 없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남기고 간 것은
거추장스러운 빈 껍질뿐이다
투명한 잠자리의 영혼은 얼마나 고독할까!
하루살이 / 이윤학
얼마나 열심히 죽어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태어났던가
불빛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 하루살이떼는
줄어들지 않는다
타 죽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목숨들에게
날개란 무엇인지......
삶이 한없이,
황홀해 보인다
버려진 다리 위에 /이윤학
버려진 다리 위에 쭈그리고 앉은 노파가
붉고 매운 고추를 헤쳐 말리고 있다.
한 부대즘 될까, 군데군데 허옇게 말라버린
고추도 있다. 다리는 축 늘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검은 물 위로,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것처럼
잔뜩 휘어져 있다.
떨어져 나간 난간.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근들이
앙상한 뼈들이, 낡은 골조 속에서 터져나와
녹슬어 있다. 굳은살처럼 여기저기
구멍을 때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튀어나온 돌들이 매끄럽게
닳아 있다. 바닥엔 아직도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아득한 구멍 속에서, 거품을 몰고
깊이도 없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굽은 허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노파가
실눈을 뜨고 일어선다. 가을 해가
버려진 다리 위에 떠 있다.
휘어진 길 / 이윤학
내 마음은
거기까지밖에 보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거기까지밖에 걷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거기서부터 진공상태입니다
휘어진 길을 따라
내 마음도 휘어져
튕겨집니다
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가고
커브에 오동나무가 서 있습니다
지금은 베어진 오동나무
보도 블럭에 덮인 오동나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보랏빛 종들
수백 개 스피커에서
알지 못할 향기가 흐릅니다
질식할 것 같아
눈을 뜨고 맙니다
망둥어 /이윤학
망둥어들이 말라간다. 햇빛 속으로 마른 입
벌리고 있다. 대나무 꼬챙이에 끼어 일렬횡대로
줄을 맞추고 있다. 가을 햇빛 뜨겁고
슬레이트 지붕 위, 푸른 페인트 칠 말려온다.
속이 타고 자꾸 입을 벌려도,
물이 없다, 물살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첫 눈 / 이윤학
여자는 털신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고
스테인리스 대야에
파김치를 버무린다.
스테인리스 대야에 꽃소금
간이 맞게 내려앉는다.
일일이 감아서
묶이는 파김치.
척척 얹어
햅쌀밥 한 공기
배 터지게 먹이고픈 사람아.
내 마음속 歡呼는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정지된 표면 / 이윤학
책꽂이를 정리하다,
잘못 뽑아 든 1994 가계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나온
매일행복해지는가계부.
난로 위에는
은색 주전자가 올려져 있다.
찻잔에서 세 줄의 김이
가늘게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다.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여자의 구김없는 얼굴.
저 여자는 누구일까? 사람일까?
식탁 위에 펴진 가계부, 살진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창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공중에 떠 있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표지는 표면이고,
그것은 대개 거짓이다.
제비집 / 이윤학
-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제비가 떠난 다음 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상처를 생각하겠지.
전기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 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 /이윤학
가을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는데
벌 한 마리
좁아터진 방,
유리창을 떠돌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날갯소리
그 터는 소리, 유리창을 잔뜩 물들인 햇볕,
보다 넓은 감옥을 보기 위해, 가끔
열곤 하는 저 유리 창문
열어주고 싶지 않다
저러다, 언젠가, 창틀에서
우연히 발견되겠지 하면서,
날갯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다
벌은 악착같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있다
항문을, 침을, 안으로 오무리고
무수한 날개로 유리창을 치고 있다
혓바늘 /이윤학
혓바닥 위에 잘못 떨어진
우박 하나를 녹이기 위해
밤을 새운다
이 세상에서
같은 부위를 같이
앓는 사람은 몇 안된다
같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오랫동안 설치기만 했다
이게 설친 대가다, 아픈 곳에
자주 면회가던 혀끝이여,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