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예술, 과학 등 전반에 걸쳐 획을 그은 선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업적 또는 작품에 대한 조명은 쉽게 접할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의 삶을 짐작케 하는 현장은 생소하다. 고택을 찾자. 선조의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한 풍경, 잠 못 이루는 밤 호롱불이 켜져 있던 방,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한마디를 기다리던 모습 등 호젓한 고택에서 선조의 숨결이 느껴지는가.
추사 고택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사 고택은 266.11m²으로 솟을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뤄진 가옥이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이 밖에도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 홍문이 있다. ☞ 상세보기
윤증 선생 고택
조선 숙종대에 윤증 선생이 지었다고 전하나 그 세부기법으로 미루어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산(尼山)의 산자락에 기대어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하여 놓여 있다. ㄷ자형의 안채가 날개를 펴서 뒤에 배치되었는데 그 앞을 막아 중문간(中門間)의 출입에 방해가 안 되도록 비끼면서 동쪽으로 축을 옮겨 가로로 배치됐다. 사랑채 앞은 행랑채 없이 전면이 개방되며 안채 축의 정면에 정갈한 조선식 우물이 축조되었고 그 남서쪽에도 조그만 연못이 조성되었다. ☞ 상세보기
신재효 고택
판소리를 집대성, 국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다. 판소리박물관 바로 뒤편으로, 뒤뜰은 동리국악당(동리는 신재효의 호)과 모양성(왜구침입에 대비, 1453년 세운 자연석 성곽. 일명 고창읍성)에 대고 있다. 중요 민속자료 제 39호로 지정된 신재효의 고택은 1850년경에 지어졌으며, 현재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진 사랑채와 오동나무, 우물 등이 남아 있다. ☞ 상세보기
아산맹씨행단(맹사성 고택)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수백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사적 109호로 지정된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이라 한다. ☞ 상세보기
정온 선생 고택
정온(1569~1632)선생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안채도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 상세보기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이 한옥 민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서 한 채로 건립한 것으로 형태는 곱은자형에 1고주 5량 집이다. 사랑채 뒤에는 2칸 사당이 있고, 본래의 사랑채는 없어졌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약 2백 년 전까지로 올라갈 수 있으나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안채만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이 집은 중종 5년(1510)에 처음 세운 이후 정무공 오정방(1588~1634) 천파고오상에서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인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 전해 내려온다. ☞ 상세보기
최함월 고택 (최응성의 생가)
최함월 고택은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고가로 충북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됐다. 조선 숙종 때 문장가인 최응성의 생가이며 원래 살미면 무릉리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놓이게 되자 지금의 용천리로 이전됐다. 건물 배치는 r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에 일자형의 행랑채가 있고, 좌측으로는 함월이 서재로 사용하던 염선재가 있으며 우측으로는 ㄱ자형의 창고가 사괴석 담장으로 일곽을 만들어 함께 배치되어 있다. 고택 앞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어 상류층 양반가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 상세보기
함양일두 고택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 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됐다. 대문간을 들어서 직행하면 안채의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ㄱ형 평면에 내루가 앞쪽으로 달린 전출 구조이며, 내루는 구조가 간결 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고 가늘고 긴 석주(石柱)를 초석으로 삼았다. 특히 본 가옥은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상세보기
선교장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 쪽으로 약 4km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문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 상세보기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1969년에는 사적 제170호로 지정됐다. ☞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