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교회는 어디 있을까?
교회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교황들은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려고 온갖 편법을 모두 동원했다. 새로운 성직을 임명하면서 세금을 걷었고, 교구를 방문할 때는 주교에게 지출되던 자금까지 착복했다. 그로 인한 재정 부족으로 주교들과 수도회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 아비뇽 교황들은 그렇게 마련한 자금을 이탈리아에 있는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는 전쟁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때 잉글랜드에서 위클립이 평신도 중심의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지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했고, 대륙에서는 후스가 그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리고 공동생활형제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한 헌신과 수준 높은 학문을 결합해서 당시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고,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문헌들에 집중했다.
성서에 근거한 교회
존 위클립(John Wycliffe, 1320년대 중반-1384)은 교회만이 성서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교황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위클립은 교회가 예전을 확립하고 부를 축적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교부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제나 계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교회였다.
위클립은 교회의 최고의 권위이며 신앙과 인간의 완전한 표준이 바로 성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에 순종해야 하고, 성서 이외의 것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미신에 불과했다. 특히 교황제도는 성서 어디에도 근거가 없으니 신뢰하거나 복종할 필요가 없었다. 위클립은 반문했다.
“교황들이여, 그대들을 가장 귀한 아버지로 불러 달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위클립은 첫 번째 ‘성서의 사람들’(Bible-men)’이었다. 성서의 사람들은 위클립의 사상을 전파한 소박한 옷차림의 가난한 설교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자 공포와 모욕의 상징이었다. 성서의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난 시장에 갑자기 나타나서 위클립의 성서신학을 전파하고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들은 고해성사나 순례, 성인들에게 바치는 기도, 면죄부의 판매, 성물숭배 등은 비성서적이며 무익하다고 비판했다.
그것들은 “비싼 안장과 말굴레와 종을 매단 말을 타고 사치스런 털외투를 입고 으스대면서도 이웃의 아낙들과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즐겁게 구경만”하는 사제들의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성서의 사람들은 성찬식 때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역시 배격했다. 위클립은 “성체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한 부분도 아니고 유효한 상징”에 불과하고 “파리 다리만큼의 가치도 없는 교황이 만든 율법은 모두 털어내야”한다고 가르친 바 있었다.
위클립은 교회의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성서를 힘써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은 특정 언어(라틴어)를 다른 언어보다 더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라틴어가 성직자들의 신앙교육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성서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한 성서는 성직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위클립 이전에도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려는 시도가 일부 있었지만, 성서 전체에 도전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위클립은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그런 시도에 분노했다. 당시 교회 역사가는 성서가 “이전에는 가장 학식 높은 성직자에게만 열려 있었지만 이제는 평신도들, 심지어 글을 읽을 수 있는 아낙들에게 더 많이 열리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서 짓밟히게 하고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것으로서 성직자의 보화가 평신도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위클립을 영웅이라 불렀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이단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위클립을 두 차례나 재판정에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와 자연재해로 그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위클립은 1384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위클립 사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성서를 완역해냈다. 그들은 영국 전역에 위클립의 개혁 사상을 전파했다.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들을 ‘가난한 설교자들’이라고 불렀으나, 적들은 ‘롤라드파(Lollards)’라고 불렀다. 네덜란드어로는 ‘중얼거리는 자들’ 그리고 라틴어로는 ‘독보리’라는 뜻이었다.
위클립의 사상은 영국 해협을 건너 대륙에까지 급속히 번져나갔다. 1400년 경에는 그의 사상이 프라하와 보헤미아(현재 체코 공화국)에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주교들은 서둘러서 위클립의 저서들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뛰어난 교수이며 사제였던 얀 후스(Jan Hus, 1369?-1415)가 위클립의 저서들을 모두 읽은 다음이었다. 후스에게는 위클립의 사상과의 만남이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후스는 프라하의 강단에서 위클립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전파했다. 1407년에 교회가 그의 설교권을 박탈해버렸다. 하지만 후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스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성서와 일치할 때에만 복종하는 게 마땅하다고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성찬식에서 평신도들에게 잔을 돌리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처음에 보헤미아의 국왕은 후스를 옹호했으나 교황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자 등을 돌렸고, 결국 후스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1415년 황제의 사신이 후스를 찾아내여 콘스탄츠 공회에 참석해서 자신을 변론하라고 요구했다. 후스는 신변을 보장한 황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추기경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후스는 이단판결을 받고서 감금되었다.
죄목은 이랬다. “화체설을 믿지 않고...교황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모독했으며...고백 성사를 받고 죄 사함을 선언하는 사제의 권능에 이의를 제기했으며...세상의 권세자들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거절했으며...사제들의 금혼 원칙을 거부했고...면죄부 판매를 성직에 이용한 매매 행위라 칭했고,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호소한다. 그분은 그릇된 증언이나 잘못된 공회가 아닌 진리와 정의를 기초로 판결하실 터이기 때문이다.”
1415년 7월 6일 추기경들은 악마가 그려진 종이 모자를 만들어서 후스의 머리에 씌웠다. 교회는 아무리 이단자라고 해도 마음대로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후스를 국왕의 군대에게 넘겼다. 후스는 대성당에서 끌려나와서 자신의 저작들이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공동묘지를 지나쳐서 라인 강변의 화형대로 끌려갔다. 병사들이 후스를 기둥에 묶고 산채로 화형을 집행할 준비를 하자 후스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 예수님이시여, 제발 나의 원수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공회는 존 위클립을 파문하고 난 뒤에 무덤을 파고 유골까지 꺼내어 불사르도록 결의했다. 위클립과 후스의 적들은 화형 후에 남은 재를 강에 부어서 흔적까지 없애려고 했지만, 그 잿빛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서 결국 온 세계가 위클립과 후스의 묘소가 되었다.
경건한 삶에 근거한 교회
유럽의 곳곳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이 진행될 무렵 데벤터와 캄펜(현재의 네덜란드)처럼 작고 습한 유럽 북부의 낮은 해양 도시들은 비교적 조용했다. 14세기 말까지 프란체스코회 같은 탁발 수도회들이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구걸 방식만 가지고서는 유럽의 강력한 도시들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해서 ‘신중한 독립과 조용한 기회주의’의 정략을 따르는, 상업을 중시하는 냉철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곳에서도 중세 말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교모의 채찍질 고행자들이 그곳에 찾아왔다가 재정적인 도움을 받거나 혹은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추종자를 확보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해프닝 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히, 그러면서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작은 음성을 가진 한 사내가 등장했다.
헤라르트 흐로테(Gerhard Groote, 1340-1384)는 프란체스코처럼 부유한 의류상인의 아들이었다. 파리에서 신학과 법학을 전공했지만 원하는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1372년에 병에 걸리고 말았다. 몇 주간 치료를 받고서 회복한 흐로테는 프란체스코를 본받아서 재산을 정리하고 추종자들을 모아서 형제회를 조직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수도회의 회칙이나 서약을 요구하지 않았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고 설립했다가 환멸밖에 남기지 않는 수도회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회원들은 일상의 업무를 계속하면서 성직자들과 섞여서 성직자처럼 살았다. 흐로테 역시 베네딕투스처럼 노동을 중시했는데, 관점은 사뭇 달랐다. 베네딕투스는 오로지 게으름을 쫓기 위해서 노동을 강조한 반면에 흐로테는 노동을 신앙생활의 필수 도구로 간주했다. 성직 역시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니 별로 소용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형제회가 다른 수도회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네딕투스회는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시토회는 변두리로 나갔다가 강력한 경제력을 소유했다. 프란체스코회는 가난에 헌신하고 스스로 걸인을 자처하다가 대도시에 편하게 자리 잡았다. 중세 말기 수도회들의 실상이었다.
형제회는 수준 높은 학문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적인 헌신을 결합했다. 그러면서도 소박했다. 서책을 필사하고 교육하는 일에 힘쓰며 큰 활동을 벌이지 않을 만큼만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굳이 한적한 곳을 찾아가거나 은둔할 필요가 없었다. 형제회는 일상의 신앙생활을 꼼꼼히 기록하고 함께 읽었다. 그들의 내면적인 메시지는 중세시대를 넘어서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저서는 1471년부터 1500년까지 30년 동안 무려 99판을 거듭했다. 개인적 헌신을 강조한 형제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헌신’(Devotio Moderna)으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