分析心理學
신성혼(神聖婚, hiers gamos)은 샤머니즘(shamanism)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종교현상에서 볼 수 있는
상징이다,
그러나 한국 샤머니즘에서는 무녀의 삶 속에 깊이
함입되어 있다.
흔히 무당은 몸주라 불리는 수호신을 남편처럼 모신다.
몸주가 내릴 때 무당은 현실의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
몸주신이 무당을 부르고 싶을 때 무당은 병을 앓으며
이끌리는 듯한 심정으로 몸주신을 모신 山의 신당으로
가고 거기서 굿을 하면 몸이 낫는다는 보고가 있다.
몸주를 불러 이에 빙의되는 것을 신내림이라 하며
대개 엑스터시(ecstasy, Ekstase)에서 이루어진다.
몸주가 내린 증거 가운데 하나는 말문이 열리는 것,
즉 신의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몸주의 내림은 추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험이다.
이것을 두고 분석심리학은 그가 무의식의 자율적
콤플렉스(autonomous complexes, autonome
komplexe), 혹은 원형상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무당은 몸주에 사로잡히지만 다른 일반사람들도
각기 이름을 달리하는 몸주를 지니고 있다.
돈, 체면, 명예, 지식, 사랑, 이념, 물질이라는
민속적 용어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현대인의 몸주 구실을 하고 사람들이 이에 사로잡혀
거의 종교적 열광을 보일 때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심리학적
연구의 기본전제는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마음 안에서도 일어난다" 는 사실이다.
무의식은 어떤 특정한 심리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의 에니그마(enigma,
수수께끼)로 남는다.
남김없이 해석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분석심리학이 하나의 가설이듯이
분석심리학적 해석 또한 하나의 가설이다.
융의 수제자인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Marie Louise
von Franz)는 사석에서 융이야말로 위대한
샤먼(shaman)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융은 틀림없이 비범한 직관력을 지닌 치료자로서
가히 위대한 샤먼이라고 불러도 좋을 인물이다.
기독교의 방언과 축사의식은 일종의 빙의현상이라고
할 수 있고 무속의 축귀술과 공통점이 있다.
무당이 하늘로 올라가든 올라가지 않든
신이 들었을 때는 자기와 초인적인 어떤 요소가
접촉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초인적 요소를 무당은 귀신이라 부르고
귀신은 자기 밖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분석심리학에서는 귀신을 무의식의 심적 요소로
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본다.
자살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는
따듯한 위로보다는 자살한 사람의 추한 모습을
냉혹할 만큼 생생하게 묘사해주는 것이
자살예방에 효과적인 경우가 있다.
1965년 융학파 분석가 피어츠(K. H. Fierz)의
논평이다.
현대문명사회에 원시신앙이 살아 있어 그 한구석에서
진지하게 믿음을 키워간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고 높이 평가하는 강신적 입무의
고통의 역정을 겪지 않은 채 자칭 무당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서 길거리에 가게를 차려
사람들에게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 모를
조언을 한다면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남을 치료하겠다는 사람은 많으나,
치료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피나는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엑스터시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쉽게 엑스터시를 흉내내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문제이다.
샤머니즘의 외형뿐 아니라,
그 본질과 정신이 보존되고 계승되어야 한다.
귀신은 그들에게는 상징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믿는 귀령들의 세계를
전적으로 부인할 만한 증거가 없다."
굿이든 어떤 종류의 대중 집회든 광적 흥분을 일으키는
집단적 운동이 "신경증적' 장애나 심인성장애를
치유할 수도 있지만, 참여자의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특히 종교집회에서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상들과의
접촉이 일어날 때 약한 자아의 소유자나 잠재성 정신병의
위험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원형의 엄청난 에너지에
휩쓸려 의식의 해리 도는 분열을 일으킨다.
정치적 집단행동에서는 선동자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원형상을 자극하여 집단적 흥분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한 집단 성원은 획일적인 이념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을 적으로
삼는다.
"개인의 다양한 이성적 판단은 용납되지 않는다.
집단적 획일주의는 마음이 약한 개인에게 일종의
보장감을 부여하고 그것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밖에서 위협하는 커다란 적대세력>
을 전제로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단적 그림자의 투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평화와 결속이다.
그러므로 스피로가 말했듯이 편집증 환자는 집단 속에서
집단적 투사로 자기를 방어할 때 편집증적 증상을
나타내지 않고 잘 적응하며 산다.
왜냐하면 집단이 개인을 대신하여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를 하기 때문이다.
융(Jung)은 정신 내계(內界)의 사건과 외부의 물리적
세계의사건의 의미상 일치될 수 있고 무의식은 능히
시공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먼 곳에 있는 친구의 죽음과 같은 시각에
자기의 정신계에 이와 의미상 일치되는 느낌이나 꿈,
또는 환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세계와 외계 사이의 의미상의 일치를
융은 동시성현상(synchronicity Phenomena)이라
하였다.
또 정신현상은 인과율에 의해서 진행될 뿐 아니라
비인과적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하였다.
역(易)도 동시성현상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융학파에서도 모든 우연의 일치가 동시성현상이
아닌 것처럼 이를 너무 맹신하는 것은 바른 심리학적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점복(占卜,점을 치는 일)은 인류의 오랜 관습이다.
인간은 어려운 일에 부딪쳐서 의식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미지의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점복에 대한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라서
일률적으로 단언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저 재밋거리나
장난에 불과하고 점의 결과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매사에 점을 치고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사업, 결혼, 정치적 데뷔 등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점복을 한다.
판단 불가능한 곤경에 빠지면 점복의 수단에 매달리는
습성은 미지의 운명을 기다리고 견디며 살아가는
인내심의 부족, 무조건 점괘에 매달리는 의존심의 조장,
피암시성의 항진, 자기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용기의 부족 등 인격의 성숙이라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대개 자아가 발달되고 의식이 확장되어 있는 사람은
쉽게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반면 자아의식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곧 의식의 한계에
도달하여 매달릴 곳을 찾는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점복의 심리를 완전히 추방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미지의 세계가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인간은 인간 자신의 정신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완전히 의식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복의 심리는 의식 너머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기에
무의식이 존속하는 한 그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첫댓글 엑스터시란 심리학적으로 자아의식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세계로 몰입하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희구의 표현이다.
엑스터시에서 이승과 저승, 즉 의식과 무의식은 하나가 된다. 대극갈등도 사라진다, 혹은 사라지는 느낌을 갖는다.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을 공감을 해 봅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무언가 두려울 때
넘 마음이 답답할 때...
자신도 모르게..발길이..
김위현님 ! 안녕하셔요?
잘 지내시고 계시나요?
날씨가 엄청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