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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에 대한 논쟁은?
신라의 첨성대 천체를 관측한 곳이 맞는가?
무엇이 문제인지 저명한 논자들에게 들어 봅시다.
첨성대라는 것이 경주에 있다. 신라가 독자적으로 천체를 관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 당시의 과학은 상당한 정도 발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첨성대가 지금 경주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벌판에 초라하게 서 있는 첨성대.. 그것이 역사속에 자취를 남긴 그 첨성대인가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세계적인 천문대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소백산맥위에 설치되어 있고, 미국등 다른 나라의 유명한 천문대는 모두 산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우주에 접근하여 자세한 관찰을 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과 산꼭대기에 가서 올려다 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공해와 각종 불빛이 별빛을 가로막아 평지에서보다 산 정상에서 더 관측이 용이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천문의 움직임과 자연현상을 모두 정치와 관련하였던 시기였던 만큼, 이런 신성한 시설을 민가에 설치했을 리도 없습니다.
신라의 첨성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평지에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시설도 없이, 우두커니... 아마 당시에는 그곳이 산꼭대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대변동이 있다는 기록은 없으니, 천문대를 평지에 설치한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경주에 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토함산이라고 있는데, 폼으로 있는 산은 아닙니다. 물론, 아주 높은 산이라고는 없지만, 평지에 설치한 것도 의문입니다..
또한, 지금 첨성대라고 남아 있는 것에 돌맹이를 세어보고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첨성대는 그런 의미보다는 실제로 천체를 관측한 시설입니다. 첨성대위에 올라가 그냥 눈으로 봤을리는 없고, 분명 무슨 장비를 설치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시설은 보이지 않습니다...만일 첨성대위에 올라가 그냥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지금의 토함산에 올라가 관측하는 것이 더 잘보였을테니까요..단지 돌맹이 숫자에 연연하는 것은 첨성대라는 것의 위치도 이상하고, 설치도 기구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사람이 들어가 관측할 만한 공간도 되지 못하고 하니, 갑자기 누군가 돌맹이 숫자를 세어보고 뜻밖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첨성대라는 것은 사람이 올라가기가 아주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구멍이라고 뚫려 있는 것은 사다리나 놓아야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곳에 설치되어 과연 정말로 사람이 그 위체서 작업을 하였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또한, 내부에도 사람이 거주할 만한 시설이 있을 공간도 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장비와 사람이 모두 있기에는 너무 좁아 보입니다..
그리고, 첨성대 어느 곳에도 첨성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첨성대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발견된 것도 없습니다.. 다만, 밭 가운데에 범상치 않은 시설이 있는데, 이것이 첨성대인 것 같다는 식입니다.. 물론, 얼마 있다가는 왠 기와장 한 장, 그것도 여러 장도 아니고.. 그것이 갑자기 발견되어 첨성대인 것을 증명해 줄지는 모르겠습니다..우리의 고고학이나 일본의 고고학이나 같은 선생으로부터 배워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지금 그것을 신라의 첨성대라고 하는 것일까요?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시대에 관측된 천문현상등을 봐도 신라가 천문을 관측했다는 증거는
있는데, 그 시설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과연 지금 남아 있는 그것은 봉화대나, 곡식저장고가 아니고, 천체를 관측한 곳이
맞는가요?
첨성대의 실체
요즘 일본에서 역사교과서가 국수주의적이라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삼국시대사의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金富軾)이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서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썼다는 점,
둘째는 일본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빙자해 신라를
식민지로 다스렸다고 확대 해석한 점,
셋째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남한은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고 북한은 신라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 결과 문화쪽에도 많은 왜곡이 유발됐다. 이를테면
국보 31호로 지정된 첨성대를 가리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기록한 것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첨성대는 제천의식 지내던
제단"▼
첨성대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첨성대의 실상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 위치를 보면, 첨성대는 경주의 중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반월성(半月城)을 끼고 있다. 석재는 화강암으로 높이는 9m17cm이며, 바탕의 지름은 5m17cm이고, 상층부의 지름은
2m50cm이다. 세워진 연대는 신라 27대 선덕(善德)여왕 16년(서기 647년)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제까지의 우리 국정교과서는 한결같이 첨성대를 천문대로
풀이했고, 우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은 채 ‘동양 최고(最古)’의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는 입장이 정설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풀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첫째,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기에는 그 위치가 적합하지
않다.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경주의 평지에,
게다가 반월성을 끼고 있다. 별을 관측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낮은 지대에다, 성 아래 관측소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내부 석재는 다듬지
않아▼
둘째, 돌의 다듬질에 문제가 있다. 햇빛이 잘 비치는
날, 첨성대의 남쪽으로 뚫린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안쪽의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았다. 이 건축물이 안에서 사람들이 활동(관측)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면 바깥 표면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안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위쪽으로 올라 갈수록 직경이 좁아져서 사람이
운신하기조차 협소한데 돌에 부딪쳐 생기는 부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안을 다듬었어야 했다. 안을 다듬지 않고 밖을 다듬었다고 하는 것은 이 건물을
밖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셋째,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첨성대의 정상에서 별을 관측할 요량이었다면 처음부터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일이지, 중간에 사람이 드나들기에 너무도 비좁은 문을 뚫어놓고
그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 입구의 문지방이 마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문을 통해 사람들이 드나든 것은 분명하다.
넷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첨성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 첨성대가 진실로 위대했고 의미있는 것이었다면 김부식이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
신라사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일연(一然)
스님도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웠다는 말만 남긴 채 일체의 부연 설명이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섯째, 첨성대의 용도를 최초로 설명한 사람은 아마도
조선시대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일 것이다.
그는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사실과 그것은 ‘천문을 살피고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候天文察뺼칒)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후대의
학자들이 안정복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천문을 살피고’라는 대목만 주목했지 정작 중요한 대목인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라는 구절을
누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고대
부족 국가 시대의 제천 의식을 위한 제단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안정복의 설명 중에서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라는
대목을 주목하고 있다. 그것이 제단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위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반증하는 방법을 따르고자 한다.
▼"요망스런 기운 살피는 곳"▼
첫째, 첨성대는 왜 평지의 성 밑에 위치했나. 어느
고대 국가든 당시에는 군사들이 전쟁터로 떠나기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반드시 치렀다. 그 장소는 쉽게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성과 가까운
곳일수록 좋았다. 원시 국가에서 고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종교적이고 축제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거기에는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요인이
필수적으로 가미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왜 김부식은 첨성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일연도 설명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유학을 믿는 김부식이나 스님의 신분인 일연의 눈으로 볼 때 그 같은 제천 의식은 ‘음란한 짓’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첨성대를 불교와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다.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층의 적석(積石)이 점성술의 28수(宿)와 관련이 있다거나, 첨성대의 전체 층수인 31층인 것이 33천과 관련이
있다거나, 그 모양이 수미산(須彌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정말 관련이 있다면 28이나 33의 숫자에 딱 떨어지게 맞춰야지,
왜 27이나 31로 했을까. 이처럼 엇비슷한 숫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첨성대가 진실로 불교적 사고에서 축조되었다면 그 문은
서방 정토(淨土)가 있는 서쪽을 향했어야지 남쪽을 향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 첨성대가 불교의 성지였다면 일연 스님이 외면했을리 없다.
넷째, 그렇다면 문은 왜 남쪽으로 났는가? 그것은
제주(祭主)와 부락민들이 그 앞에서 북쪽을 향해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한다. 북쪽의 무엇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는 말인가? 그것은 북두칠성이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북두칠성은 영원과 장생(長生)을 기원하는 노장(老莊)
사상의 상징이었으며, 첨성(瞻星)이라는 말도 ‘별을 관측한다’는 뜻이 아니라 ‘별을 우러러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첨(瞻)은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그들은 별을 우러러 보았지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
▼瞻星=별을 우러러
본다▼
넷째, 그러면 첨성대 맨 위에 있는 우물 정(井) 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우물로서, 비를 기원하는 기우(祈雨)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관개가 발달하지 않고 천수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농경 사회인 신라로서는 기우제야말로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역사학이란 결국 풀이(解釋)의 학문이다. 따라서 이
풀이가 잘못되면 역사는 그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첨성대가 별을 신앙적으로 우러러보던 곳이었는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관측하던 곳이었는가의 해석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신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과학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첨성대는 신라인들의 천문대...
첨성대라면 경주
첨성대만 연상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도 첨성대는 있었다. 고구려 첨성대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개 사당과 9개의 못(池)이 있는데
9개 사당은 바로 9가지 별이 날아 들어간 곳이며 이 못옆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주 첨성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열띤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언론은 '첨성대 : 천문대인가, 제단인가'라는 표제까지 달았다. 해방 이후 첨성대는 줄곧
천문대로 알려졌으나 높이가 10여미터에 불과한데다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지 않아 천문대 역할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첨성대 내부는
자연석 상태로 있고 내부가 좁아 관측자가 출입하기에도 불편하다. 더구나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가 도심지인 경주 한복판에 있는 것 때문에
천문관측시설이 아닐지 모른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 논란의 결론은
신라역사과학관(구 동악미술관)에 있는 신라 밤하늘을 재현한 천문도(天文圖)와 혼상(천구의)이 해결해 주었다. 혼상은 하늘의 별들이 보이는 위치에
따라 천구면에 표시한 것으로 별의 제작법은 천문도와 동일하지만 천장에 평면적으로 그린 천문도와는 달리 일주운동에 따라 회전하면서 별들이 지평선에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혼상이 놓여 있는
나무 판자의 가장자리에 첨성대를 중심으로 첨성대에서 보이는 산들을 배치했는데 그 결과 북쪽 부분에 산이 없이 뚫린 부분이 생겼다.
이것은 첨성대의
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관측하기에 적합한 자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북두칠성을 잘 관측할 수 있는 첨성대는 북쪽 부분이
산에 가리지 않고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천문도에 표시되어 있는 5등성의 희미한 별에 북극이라고 적혀있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이 별은 현재 하늘에서는 북극에서 약 6도 이상 떨어져
있는 기린자리에 속해 있지만, 약 2000년전 전 중국에서 별자리를 정하던 당시에는 북극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시대에는 이
별이 북극에서 불과 1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신라시대 사람들이 그 별을 북극이라고 부른 것이 결코 오류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결국 첨성대가
경주시내에 있었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천문관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뜻한다. 첨성대의 뿌리는 고려 천문학으로 이어져 한 단계 더 높이
발전한다. 고려는 서운관(태사국과 태복감의 후신)이라는 전문 천문기상 관측기관을 설치했다. 이후 조선말기까지 천문기상 관측과 연구는 서운관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제 첨성대에 깃든 과학정신을 계승, 우리나라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라
하겠다.
첨성대는 높이 9.108미터, 밑지름이 4.93미터, 윗지름이
2.85미터이며, 밑에서 4.16미터디ㅗ는 곳에 정남쪽으로 한변의 길이가 1미터인 정사각형의 창문을 낸 병 모양의 구조이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13세기 후반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이다. 여기서는 "선덕여왕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일연이 보았다는 그 기록이 어떤 것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보다 먼저 씌어진 [삼국사기]에 첨성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전해진 신라시대의 다른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럼 과연
첨성대는?
첨성대는 그럼 뭐여? 현재 남아있는 첨성대의 구조와 그에 관한 기록만으로는 실제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상징적인 구조물이었는지, 또는 제사를 지내던 재단이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첨성대라는 이름이 고려,
조선시대 모두 천문대를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대 일본에서도 점성대(占星臺)라는 비슷한 건물을 세운 기록이 전한다. 이렇게 볼 때 첨성대
자체는 천문대와 관계된 건축물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첨성대는 7세기에 세워진 넓은 의미에서의 천문대이고, 이 근처 일대가
당시 신라의 천문관측 시설이 있던 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첨성대는 1,500여 년 동안 본래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시설의 일부였다는 것에서 우리는 과거에도 천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의 농경사회에서는 더구나 많은 영향을 미치며, 기후는 왕권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혜성은
급격한 정변이나 병란을 불러올 조짐으로, 일식이 일어나거나 또는 금성이 낮에 보이는 것은 태양빛이 제대로 밝지 못한 것을 뜻하므로 국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세력이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첨성대가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신라임의
지혜와 천문관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농본위 국가에서 기후는 사회의 안녕과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동양 최고라는 수식어가 멋있기는 하지만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주장은 그리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첨성대에서 실제로 천문을 관측하였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첨성대의 구조가 천문관측을 행한 곳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결함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선덕여왕때 쌓은 건물의 명칭을 '첨성대(瞻星臺)' 즉 별을 관측하는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 명칭 때문에 고려말이나 조선초에도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더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선덕여왕 2녀(633)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고 조선말기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선덕여왕 16년(647)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구체적인 연도까지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들 책들이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 연도를 표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사람이 이 창문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오르내릴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출입구였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사다리를 놓고 매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동 아닌가..오히려 돌계단등을 미리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이 더욱 편리했을 것이다. 별을 관측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그런 불편함을
고치기 못했을까?
또 지금 2.85미터의 정상부는 혼천의를 놓고 몇
사람이 관측과 기록을 하였다고 보기에는 너무 좁으며, 악천후를 대비한 어떠한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땅에서 겨우 10미터 가령 올라갔다고
해서 별이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 위에서 별을 보겠다고 좁은 입구로 들어가서 고생고생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 아닐까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첨성대는 천문대'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유인 것이다.
먼저 첨성대는 27단으로 쌓았다.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이다. 그리고 이 27단과 정상부의 정자석까지 합하면 28단인데, 이는 28수(宿)라는 기본 별자리를
의미한다. 여기에다 맨 밑의 기단을 합하면 29인데, 이것은 음력한달에 해당한다. 중앙의 창문가지가 12단이고 다시 창문에서 윗부분까지도 역시
12단인데, 이것은 일년 열두달과 24절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숫자는 거의 365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1년의 길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있으며, 맨 위의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고 있다. 또 창문은 정남인데, 태양이
비칠 때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측정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첨성대를 하나의 상징물로 보려는 이들의 근거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