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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째 인생을 보내면서 이제는 실패하는 삷은 그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아니야, 더 많은 실패가 더 일찍 필요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딸과 같은 케데헌 이재의 고난 얘기를 들으며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서 지난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왜 살아 있는 것일까? 두살 위 누님도, 두살 아래 아우도 하늘로 돌아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가까운 친구들도 하나둘 자꾸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45년째 의업을 아직도 보람으로 일하다가도 이것만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는 생각들이 스쳐갑니다. 하늘은 소생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지금도 건강하게 같은 일을 하고 있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두번째 큰 실패는 신축하여 운영하던 정신과 입원실을 접고, 큰 돈을 벌어서 장학금을 만들고 환우들을 위한 더 커다란 정신과의사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투자했던 금융투자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전문의 직업만 아니었으면 노숙자로 전락할 정도로 정신없이 빨려들어 갔었던 지난날도 창조주의 입장에서 실패로는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6년전 길거리의 거지 같았던 자칭 선지자의 고함소리에 놀라 동참했지만 실패인지, 승리를 위한 전주곡인지 모를 시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 패배의 결과로 수백만명이 학살당하는 꼴은 목격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소생도 돌아가고 싶고 그럴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일하도록 만들어 놓은 창조주는 소생이 고교시절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채로 살아가도록 만든 이유가 이땅이 공산국가로 변모한다면 항거세력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남기기 위하여 이런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주 윤동주의 시를 읊조리게 됩니다. 그러나 조용히 이 세상에서 생명의 불꽃이 사라지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기 않기를 기도합니다.
21세기에 서울에서 뭔 레지스탕스니 망명정부니 묘상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인지? 그러나 지금도 지구촌에는 탐욕과 이념을 앞세운 전쟁과 학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패는 그만이면 좋겠습니다. 주변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상은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경고하여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리들이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뒤돌아서서 욕까지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침묵도 모자라 악의 세계로 동참하고 있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좌편에는 창조주가 없습니다. 좌편의 목사나 신부들은 모두 가짜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들에게 신은 없습니다. 진실과 평화를 얘기하지만 거짓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며 위장까지 합니다. 이의 판결은 하늘이 내린다며 이 세상을 혼돈 속에 계속 내버려둠은 너무 잔인합니다. 2025.12.15. 새벽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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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실패 1부 靑春 禮讚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도서출판 나단, 1993 (나이 만 40세에 출판했던 자전적 수필집)
1965년 나는 대구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담임선생님들에게서 곧잘 철이 들었다. 속에 영감이 하나 들었다. 경북중학교로 진학할 애는 권영탁이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변두리 학교에서 공부 잘하던 애들이 내가 다니던 중앙국민학교로 전학해 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학교에서 나는 줄곧 반에서 1,2등을 했기 때문이다. 중앙초등학교는 우리 6남매 모두가 졸업했고 내가 태어난 공평동 집과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학교에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 학년이 끝나는 종업식날 담임선생님들을 집에 모셔다 식사대접을 하던 기억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5학년 초 어느 날 나는 집에 와서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학업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이들 학교생활에 너무 소홀히 했나 하는 자책으로라도 그 이유를 아셔야 했다. 1,2등으로 같은 반에 배정된 두 어린 학생을 담임이 불러 놓고 반장선거에 출마하지 말라는 강요를 했기 때문이다. 치맛바람으로 좀 성적이 떨어진 특정 학생을 반장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같은 권유를 받았던 아이의 어머니가 온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담임은 쫓겨날 뻔하다가 겨우 일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대소변도 안 보고 사실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선생님의 모습은 여지없이 구겨졌고 그래도 어린 나이라 곧 잊혀졌다.
경북중학교 불합격으로 대구중학교에 진학했고 6학년 담임의 실수(?)로 잘못 가르친 것이 제법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른 반에서는 대여섯 명씩 합격했는데 6학년 4반에서는 한 명만 경북중학에 진학했었다. 어린 마음에 많이 울다가 2차인 대구중학교에 억지로 시험을 봤고 그저 중간 성적으로 합격했었다. 시내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경북중학이 있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더라도 그 앞을 지나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써 외면했다. 경북중학 앞을 지날 때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버스 안에서 마주친 하얀 세 줄의 교모는 늘 부럽기만 했다. 3월 월말고사에서 중간 성적으로 배정된 내가 1등을 하자 담임이 불러다가 이것저것 물어보시며 기분 좋아하셨다. 4월에 9등으로 미끌어지자 역시 하시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5월 중간고사 전 과목 시험에서 다시 1등을 했다. 수학 선생님인 담임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호감을 많이 주는 젊은 분이셨다. 나중에 중3이 되었을 때는 전교 480명 중 혼자 100점을 받자 수학박사라는 칭호를 주셨었다.
그러나 등교할 때, 집에 갈 때마다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경북중학교 학생들은 괜한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거기에다 2년 아래 동생이 대구 시내 전체에서 항상 1등을 해서 이름을 날렸다. 나와는 달리 성적이 월등했고 2등과의 격차도 많았다. 사업으로 바쁘시던 어머니까지 자주 학교로 불려 가셨다. 국립인 경북대 사대부국 학생들까지 완전히 다 제쳐버리는 천재로 소문이 났다. 학교에서 경기중학교 진학을 권유받았고, 동생까지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사대부국 애들도 경기중학교 간다는데 서울 안 보내주면 앞으로 공부 안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서울로 유학시켜 준다는 약속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동생이 자랑스럽기도 했으나 형인 내 꼴은 너무 초라했고 한심하기만 했다. 그 무렵, 딸을 데리고 유모처럼 우리를 길러 주시던 먼 친척 되시는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분의 죽음은 누이동생의 죽음까지 다시 생각나게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종업식날 일곱 살이던 3년 아래 여동생이 새벽부터 갑자기 경련을 시작하더니 병원으로 실려가서 원인도 모른 채 저녁에 죽었었다. 누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나도 네 곁에 가고 싶다. 뼈가루를 뿌렸다는 금호강 팔달교로 갔다. 무언가를 쓰면서 울었다. 중2초 몽정을 처음으로 경험하자 모든 건 더욱 무섭기만 했다. 세상 전부가 때가 묻는 느낌을 받았다. 하교 길에는 버스에 효성여대생들이 가득 타고 있어서 몸을 아무리 비키려 해도 딱딱해지는 자신의 성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형편없는 놈이란 생각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만원 버스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자위행위를 하면서 미스코리아 출신 생물선생님의 종아리를 떠올렸다. 미친 놈, 웃기는 놈, 지저분한 놈, 좌절, 열등감 그리고 죽음 --- 결국 그 나이에 유서를 썼다.
자전거를 타고 졸업한 초등학교 교정을 둘러보았다. 대구 시내를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팔달교로 향했다. 누이의 이름을 자꾸만 자꾸만 불렀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부르는 그 소리가 강변의 메아리는 아닐 텐데 어머니의 통곡하시던 울음소리로 되들려 왔다. 아니야! 아니야! 어머니를 또다시 통곡하시게 할 수는 없어. 나는 너무 나쁜 놈이야. 어머니는 어떡하라고 나 혼자 이기적인 무의 세계에 가 있겠다니 나는 나쁜 놈이야. 한없이 울다가 부리나케 집으로 오자마자 유서를 찾아서 불살라 버렸다. 이 세상이 아무리 지저분하고 살 가치가 없더라도 다시는 어머니를 통곡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더구나 나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드릴 수는 없어. 나는 어머니의 반만큼만 살아도 돼! 남은 생은 어머니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사는 더부살이의 삶을 살 거야.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나는 어디서 왔으며 죽은 누이는 어디에 가 있을까? 조물주가 그렇게 형편없는 짓거리만 하고 있을까! 왜? 왜? 왜? 혹시 조물주가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조물주야! 있으면 가르쳐 다오.
좋아! 지금부터 공부하겠어. 죽음을 생각하면 3선에 대한 열등감은 너무 웃기는 유치한 짓이야. 동생도 경기중학 간다니까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3선에 대한 도전보다는 1선인 경기고에 진학해 버릴 거야. 그래서 어머니에게 통곡대신 기쁨을 드릴거야. 자식을 낳은 보람을 느끼게 해드릴 거야. 조물주야! 있거든 날 한번만 도와줘! 경기고등학교만 들어가면 틀림없이 너를 찾고 너를 공부할거야. 공자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하나님이어도 좋아. 날 한번만 봐주면 조물주가 있다고 믿고 그 앞에 엎드려 죽는 날까지 찾아다니며 경배할거요.
열심히 공부했다. 자위행위도 자제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동생이 경기중학에 합격하자 못난 이 형도 경기고로 오게 하려고 경기중3 모의고사 문제를 구해서 부지런히 대구로 부쳐 주었다. 너무 어려웠고 중학교 범위가 아닌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좀 모자라는 머리로 모든 목표를 고교 입시에 맞추어 생활했다. 심지어 중3 때는 조회 시간과 체육시간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교실에 혼자 남아서 공부하기도 했다. 상업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주산 3급 자격증을 받은 걸 아시고 번번이 내 공부를 방해했다.
당시 서울서는 주산 실기시험이 없었는데 경북지방에는 주산 이론과 실기시험이 다 있었다. 나는 나의 목표를 향해 공부만 하고 싶은데 상업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나를 앞에 나와서 가르치게 하고 뒤에서 왔다 갔다 하시며 잘 가르친다고 웃고 계셨다. 속이 상하고 시간이 아까워도 별 도리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시험만 보면 나를 불러 통계를 내게 하셨다. 계산기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에 담임이 직접 하시는 것보다 서너 배는 빨리 정확한 평균과 석차를 만들어 냈으니 시킬 만했겠으나 정말 싫었다. 못마땅해도 하는 수 없다 싶었는데 사건이 하나 생겼다. 집안이 부유해서 비싼 과외를 하던 급우였는데 어느 날 내가 통계를 내려고 전체과목 점수가 적힌 걸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을 알고 기다렸다가 나를 따라왔다. 이번에 성적이 미끄러지면 집에 면목이 너무 없으니 몇 과목만 성적을 고쳐달라는 부탁이었다. 다음에는 꼭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사정조의 부탁이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집에 오니 그 친구가 너무 안되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여간 부아가 치미는 게 아니었다. 정말 하기 싫던 - 나의 고교진학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 차에 잘되었다 싶어서 다음날 그대로 가져가 담임께 이런 일이 있었고 다시는 학생에게 이런 고통스런 일을 시키지 말아달라고 했다가 보기 좋게 따귀를 한 대 얻어맞았다. 그 놈의 이름을 대라고 난리였다. 묵묵히 입 다물고 버티다가 한 대 더 얻어맞고 울면서 교실로 돌아왔다. 나도 나쁜 놈이야! 담임도 바쁘고 빨리 통계를 내야 하실 텐데 그렇다고 그냥 갖다 디밀었으니 화가 나셨을 거야. 그렇지만 다시는 안 시키실 테니까 잘됐지 뭐! 뺨따귀가 얼얼했지만 그런대로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종례시간에 다들 눈을 감게 하더니 어제 권영탁이 따라간 녀석 조용히 손을 들라고 명령하셨다.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책가방도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뛰쳐나와 버스를 탔다. 나쁜 놈! 날 못 믿어서 끝까지 친구에게 고자질하는 놈으로 만들려고 해! 날 때렸으면 되었지 나쁜 놈! 지가 뭔데 나를 때려? 부모님께도 한 번 안 맞아보고 컸는데……. 너 같은 놈에게 안 배워도 돼! 너 같은 놈이 무슨 국사를 가르쳐! 자퇴할거야. 혼자 공부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갈 거야. 욕지거리를 해대며 팔달교에 가서 누이가 떠내려간 강물에 세수를 하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울 필요도 없었고 남을 비난할 필요도 없었다. 누이에게 약속을 했다. 꼭 좋은 학교 가서 네 몫까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왔다. 영어사전을 처음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저녁 늦게 귀가하신 부모님께 내일부터 학교는 그만 다니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렸다가 야단만 맞았다. 초등학교 때도 학교 안 간다고 속 썩이더니 또 그러느냐고 난리시다. 완강히 버티었다. 그런 사람에게 배울 게 없으니 학교 그냥 다니라고 강요하시면 집을 나가 고학을 하겠다고 버티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울면서 하소연하시자 마음이 흔들렸다. 어머니를 위해 덤으로 이 세상을 살겠다고 해놓고 또 어머니를 울리다니……. 내일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사죄할 테니 넌 아무 말 말고 그냥 학교 다니라 하셨고 그 이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부만 했다. 상업선생님은 12월 말 입시를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계속 내게 가르치게 했지만 담임선생님은 다시는 나에게 아무 부탁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원서를 쓸 때 중간에 별 요동 없이 공부했으면 경기고도 합격할 것 같은데 서울고로 응시하는 게 어떠냐 하셨지만 또 떨어지면 2차 고등학교 갈 테니 동생과 같은 학교 시험을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1967년 12월 24일 생전 처음 서울역에 도착했다. 몹시 추웠다. 살을 에이 듯 서울의 겨울은 매섭기만 했다. 입시 준비를 위해 동생이 가리켜준 가회동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경기중3 학생들에게 많이 물어보았다. 삼청공원에 몇 차례나 올라 새벽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걸 보았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하며 하늘을 보았다. 독서실서 본 이화여중생은 왜 그리 멋있는지…… 진명여고생은 왜 그리 예쁜지…… 다 미루고 공부만 했다. 경기고등학교 담벼락 높이 합격자 명단이 붙던 날 나의 수험번호를 보고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너무도 기뻐했다. 경북중학교에 떨어졌던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도 동생만큼 부모님께 큰 선물을 드렸다고 생각했다.
조물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을 꼭 찾아서 경배하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해 살겠습니다.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겠습니다.
혼자서 다짐했던 수많은 약속을 하나도 잊지 않고 되새기었다. 그리고 참으로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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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는 내내 조금은 답답했지만 몇 문장이 내 마음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챗gpt를 참고해 자소서 쓰던 모습을 반성하며 누군가는 (람보르기니를 타며 피자를 배달하는 것)으로 비유 하더라고요.ㅎ 지원동기쯤은 솔직하게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ㅎ 꼭 그러하기를.ㅎ
바르고 올곧은 권영탁 선생님의 성품이 어릴때부터 비루한 인품을 가진 분들 덕분에 많은 상처를 입었네요. 그 시절엔 관행처럼 그런 안좋은 풍토들이 당연한 일인듯이 버젓이 자행되어 왔었지요. 지금은 그런 분들이 많이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일들을 겪으며, 결국 한 평생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삶의 위기에 처한 어려운 조현인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는 위대한 의사선생님으로 준비되어 가신 것 같아요. 권영탁 선생님 한평생을 조현인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 권영탁 선생님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저 또한 선생님 덕분에 딸이 그래도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힘드시더라도 계속 우리 곁에 힘차게 계셔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