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형권 법사—하와이 올드 타이머
하와이에서 한국불교의 목탁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1975년 7월 대원스님에 의해 하와이 영사관에서 가진 법회때이다.
차형권 법사는 서울이 고향이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1965년에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창설한 <아시아 반공연맹 Asian People anti Communist>에서 5년동안 일을 하였다. 이 단체는 후에 <세계반공연맹>으로 확대되었다. 차 법사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고 공부를 더하여 행정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지금이야 왠만한 민간단체도 국제회의를 자주 하지만 40년 전의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단체는 매년 국제회의를 가졌다. 1972년에 곽상훈, 백낙준, 손원일씨등을 모시고 멕시코로 회의를 하러 가는 중에 미국을 잠시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시 친구들은 차형권씨를 만나면 '반공, 반공'하고 별명처럼 불렀다. 이런 분위기에 싫증을 느낀 차 씨는 새로운 이미지를 준비할 겸 한번 태어난 인생길에서 뭔가 큰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그 실천을 위해 미국유학을 선택했다. 직장을 정리하고 미국 유학 준비를 거쳐 L.A.에 있는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차 법사는 서울에 부인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 L.A.로 가는 길에 친구가 있는 하와이에 먼저 들렸는데 이 방문이 차 법사의 운명을 바꾸고 차 법사가 하와이를 제 2의 고향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차법사를 만난 친구는 돈 없이 공부하는 것은 고행이라고 말하면서 영주권을 받으면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다고 설득하며 자기가 하는 동양식품 가게를 운영하라고 했다. 곰곰히 생각한 차 법사는 영주권을 받으면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끌려 이 친구의 말대로 하였다. 이때가 차 법사 나이 32살로 1973년 4월이었다.
차 법사는 전혀 뜻하지 않게 경험도 없는 사람이 그 가게의 영업성과 시장성 등을 조사하지도 못한 채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동양식품점은 한국사람들 반찬도 만들어 팔고, 좋은 찬거리를 많이 가져다 놔야 하는데 젊은 남자가 운영하는 동양식품점은 이 점에서 다른 가게에 경쟁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였던 차 법사는 혼자서 많은 고민을 하면서 교회를 다녔다.
차 법사가 부도가 나기 바로 직전에 부인이 딸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1975년도 초로 차 법사가 하와이에서 생활한지 1년 6개월이 지난 후였다. 부인 김보현심 보살은 오자 마자 김치도 만들고 반찬도 만들기 시작하였다. 부도직전의 이 가게는 보살의 가세로 살아나기 시작하여 결국은 정상화되었다. 정상화되기까지 1년여가 걸렸다. 은행에서 받은 융자도 갚게 되니까 크레딧이 생겼다.
차 법사는 너무 어려운 생활을 하고 나서 인생을 보는 눈을 달라졌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75년 연세대학교 선배로 하와이 주정부에서 국장급으로 일하던 이관희 박사를 회장으로 모시고 <한인경제인협회> 결성을 주도하여 초대 총무를 지냈다. 이후 하와이 여러 한인단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부인 보현심 보살이 하와이에 온 후 둘 사이에 종교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교회에 가자는 차 법사의 권유에 보현심 보살은 안된다고 하였다. 종교문제를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내던 중에 대원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차 법사가 펀치볼 국립묘지에서 가진 행사에 가보니 대원스님이 페이지 교수와 함께 있었다. "스님을 만나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운영하는 가게에도 자주 오시게 되었지요”라고 차 법사는 당시를 회고하였다.
여기에서 차 법사를 만난 대원스님은 차 법사의 가게를 방문하게 된다. 대원사에서 발행한 대원신문의 <대원사 10년>에 의하면 대원스님은 “유학생 심재룡씨의 안내로 동양식품을 경영하고있는 차형권씨를 가게로 방문했다. 차형권씨 내외분은 스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는데 마침 부인은 간밤의 꿈에 스님이 가게에 들리는 꿈을 꾸었는데 오늘 스님을 만나게 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차형권씨 부부의 호의에 찬 반응은 스님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마치 지금까지는 하와이의 기류만 조사하다가 이제 비로서 든든한 초석을 발견한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사실상 불교인의 모임은 시작되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차형권씨가 주선을 하여 불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몇 사람을 연락해서 칼라카와에 있는 뉴코리아 한국식당에서 6월 29일 만났다.”라고 차형권씨와의 만남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고 기술하였다. 첫 번째 법회를 가질 때까지 차 법사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고 대원스님은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대원스님은 당시 교회신도였던 차 법사에게 하와이에 절을 짓기 위해 왔다고 하였다. 차 법사는 당시까지는 불교에는 전혀 무지하였고 절은 복이나 비는 장소 정도로 생각하였다. 후에 절이 건립되고 현오스님, 숭산스님, 고암스님, 비구니 광우스님 등 여러 스님들을 만나면서 불교에 대하여 이해가 생기면서 불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차 법사는 불교를 몰랐지만 하와이에 절을 건립하고자 하는 대원스님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하와이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면서 한국사람들에게 대원사 첫 번째 법회에 대하여 알리는 일을 하면서 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차 법사는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차 법사를 비롯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원스님은 1975년 7월 20일 호룰루루 총영사관 뒷 뜰에서 약 9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원사(현 무량사) 첫 번째 법회를 성공적으로 가졌다.
그리고 신도회를 조직하였는데 초대 신도회장에 박인규 거사였고 차 법사는 재무를 맡았다. 그리고 1년 후 박인규씨가 별세하여 회장에 영화배우였던 조미령 보살, 부회장에 차형권 법사였다. 조미령 회장시절에 차 법사는 조 회장, 대원스님등과 함께 성지순례차 한국에 가기도 했다. 이때 서울 정각사에서 고암스님에게 계를 받고 윤진(輪進)이라는 불명을 받았다. 차 법사는 이외에도 무량사 건립기금 모금 파티 때문에 3번이나 서울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차 법사는 이렇게 불교에 대한 이해와 인연이 깊어짐에 따라 대원스님이 추진하는 대원사 불사에 점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대원스님의 서원은 차 법사 자신의 서원이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던 중 우연히 이민국에 가게 되었는데 투자 이민이 열려있어서 직접 신청서를 작성하여 영주권을 신청하여 5년 후에는 영주권을 받았다.
차법사는 가게가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니까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들어올 때 L.A.에 있는 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았고 L.A.에는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에 공부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가족과 함께 L.A.를 방문하였다. 차 법사는 하와이에 살면서도 항상 L.A.가 가야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L.A. 에 도착하는 날 비가 많이 왔다. 여러 가지로 알아봤지만 두 명의 딸과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공부에 전념한다는 것이 쉽지않아 결국은 L.A.를 포기하고 하와이에서 사업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식품가게는 부인 김민혜여사에게 맡기고 차 법사는 부동산 라이센스를 따서 부동산 브로커를 하다가 1981년부터 보험을 하게 되었다. 보험은 가입자에게 평생 봉사하여야 하기 때문에 본토에 가려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조미령 회장 다음으로 대원사 3대 신도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차 법사는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성실하여 보험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났다. 차 법사는 실적이 우수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인 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을 10년 이상 받았다. 때문에 이 상을 10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에커터블 본사에 새기는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차 법사는 이렇게 보험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무량사에서 개설한 불교대학도 마치는 등 불교신앙도 깊어갔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무량사 신도회장 등으로 활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와이불교협회와 하와이 종교모임인 FACE 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세계불교도우회(W.F.B.) 창립때 활동하던 분이 무량사와 인연이 되어 몇 년 전에는 방콕에서 열린 W.F.B.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무량사 창립 2001년 25주년 기념행사때는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장을 받았고 작년 11월에 열반한 청화큰스님에게서 법사 품수를 받은 후에는 설법을 하면서 법사로서 활동을 하고있다.
사회활동으로는 <한인경제인협회> 창설에 앞장을 섰고 <한인회> 사무총장과 이사, <라이온스 클럽>의 하와이 조직을 하였다.
부인 보현심 보살과의 사이에 두명의 딸을 두었다. 이 딸들은 하와이 홍간지에서 설립한 불교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차 법사 부부는 이 딸들에게 불심을 심어주기 위해 아침에 딸들과 함께 예불을 하였다. 이중 큰 딸은 현재 뉴져지에서 살고 있는데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차 법사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탐.진.치를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내지 말아야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탐. 진. 치를 버릴 것을 강조한 후 "미국인들을 보면 불교적인 소양이 풍부하다. 이 사람들에 불교를 잘 포교하면 불국토를 이룰 소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일타스님 경우 이런 가능성 때문에 미국에 다시 태어나고자 하신 것 같다. 일타스님 열반하였을 때 장례식 뒷바라지 하면서 내가 하와이에 존재하는 의미를 느꼈다. 내가 아니면 하와이에서 누가 하겠느냐하는 사명감이 하와이에서 나의 존재 이유라고 스스로 자위하였다.
한 동안 본토에 못간것에 대해 많은 갈등을 느꼈지만, 하와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고암스님, 구산스님, 일타스님, 청화스님, 숭산스님 등 많은 대덕스님들을 만난 것으로 위안을 삼고 앞으로 하와이 불교 발전을 위해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고 앞으로 하와이 불교발전을 위해 온 몸을 소진 공양할 뜻을 밝혔다.
2004년 2월호 1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