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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
自古受命帝王, 曷嘗不封禪? 蓋有無其應而用事者矣, 未有睹符瑞見而不臻乎泰山者也. 雖受命而功不至, 至梁父矣而德不洽, 洽矣而日有不暇給, 是以卽事用希. 傳曰:「三年不爲禮, 禮必廢;三年不爲樂, 樂必壞.」每世之隆, 則封禪答焉, 及衰而息. 厥曠遠者千有餘載, 近者數百載, 故其儀闕然堙滅, 其詳不可得而記聞云.
자고로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자가 어찌 봉선(封禪)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감응과 길조가 없으면 서둘러 봉선대전을 행했으며, 하늘의 감응과 길조가 나타났음을 보고도 태산(泰山)에 가지 않은 천자는 여지껏 없었다. 그러나 어떤 자는 비록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되었으나 치세의 업적을 이루지 못했고, 어떤 자는 몸은 비록 양보산(梁父山)에 갔으나 도덕과 봉선의 성대한 제례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어떤 자는 도덕은 갖추어졌으되 봉선을 행할 틈이 없었다. 이 때문에 봉선대전이 극히 드물게 되었다.
「전(傳)」에 “3년간 예를 행치 아니하면, 반드시 사라지며, 3년간 음악을 행치 아니하면, 그 교화는 반드시 부서진다.”라고 쓰여 있다. 매번 성세(盛世)를 맞이하면 봉선으로 보답하고, 성세가 쇠퇴하면 봉선은 사라진다. 멀리는 천여 년, 가까이는 수백 년이 되나, 그 봉선대전의 양식이 모두 매몰되어 그 상세한 내용을 얻을 수는 없으나, 다행히 기재되어 전해온다.
尙書曰, 舜在璇璣玉衡, 以齊七政. 遂類于上帝, 禋于六宗, 望山川, 遍群神. 輯五瑞, 擇吉月日, 見四嶽諸牧, 還瑞.1) 歲二月, 東巡狩, 至于岱宗. 岱宗, 泰山也.2) 柴, 望秩于山川. 遂覲東后. 東后者, 諸侯也. 合時月正日, 同律度量衡, 修五禮, 五玉三帛二生一死贄. 五月, 巡狩至南嶽. 南嶽, 衡山也.3) 八月, 巡狩至西嶽. 西嶽, 華山也.4) 十一月, 巡狩至北嶽. 北嶽, 恆山也.5) 皆如岱宗之禮. 中嶽, 嵩高也.6) 五載一巡狩.
『상서(尙書)』에 “순(舜)은 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써 천체를 관찰해, 칠정(七政)을 살폈다. 나아가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육종(六宗)에게 연기를 피워 제사 지내고, 명산대천을 돌며 여러 신령들에게 두루 제사 지냈다. 또 5서(五瑞)를 수집하며 길일을 선택해, 4악(四嶽)의 관리들을 회견하고 서옥(瑞玉)을 하사했다. 매년 2월에는 동방의 제후를 순시하며, 대종(岱宗)에 올랐다. 대종은 태산을 가리킨다. 시제사(柴祭祀)는 순차대로 명산대천을 돌며 행하며, 이어서 동후(東后)를 만났다. 동후는 바로 제후이다.
사시(四時), 12월, 365일을 조정하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5례(五禮)를 정비하고, 5옥(五玉), 3백(三帛), 2생(二生), 1사(一死)를 조현(朝見)의 예물로 정했다. 8월에는 서악(西嶽)에까지 순시하는데, 서악은 화산(華山)을 가리킨다. 11월에는 북악(北嶽)까지 순시하는데, 북악은 항산(恒山)을 가리킨다. 모두 대종(岱宗)의 제례와 같다. 중악(中嶽)은 숭고(嵩高)를 말하는데, 5년마다 한 번 순시했다”라고 전해온다.
禹遵之. 後十四世, 至帝孔甲, 淫德好神, 神瀆, 二龍去之.7) 其後三世, 湯伐桀, 欲遷夏社, 不可, 作夏社. 後八世, 至帝太戊, 有桑谷生於廷, 一暮大拱, 懼. 伊陟曰:8)「妖不勝德.」太戊修德, 桑谷死. 伊陟贊巫咸, 巫咸之興自此始.9) 後十四世, 帝武丁得傅說爲相, 殷復興焉, 稱高宗. 有雉10)登鼎耳雊, 武丁懼. 祖己曰:「修德.」武丁從之, 位以永寧. 後五世, 帝武乙慢神而震死.11) 後三世, 帝紂淫亂, 武王伐之. 由此觀之, 始未嘗不肅祗, 後稍怠慢也.
하우(夏禹)가 순(舜)의 제도를 이은 이후, 14대 공갑제(孔甲帝)에 이르러 도덕이 사악해 귀신을 섬기자, 천신은 그의 경거망동을 증오해 두 마리의 용을 빼앗아갔다. 그러자 그 후 3대에 이르러, 탕(湯)이 걸(桀)을 멸했다. 탕은 하사(夏社)를 옮기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하사」편을 썼다.
그 후 8대 태무제(太戊帝)에 이르러, 뽕나무와 닥나무가 조정에서 공생하고 있었는데, 하룻밤 새 두 팔로 껴안을 만큼이나 크게 자라, 태무는 이를 크게 두려워했다. 이에 이척(伊陟)이 “요사스런 기운이 덕을 이기지 못하옵니다.”라고 말하자, 태무가 덕을 쌓아 뽕나무와 닥나무가 모조리 고사했다.
이척이 무함(巫咸)을 칭찬하니, 무함(巫咸)이 이때부터 성했다. 그 후 14대에 이르러, 무정제(武丁帝)는 부열(傅說)을 발탁해 재상에 기용하니, 은(殷)나라는 다시 흥해 고종(高宗)이라고 칭했다.
한번은 꿩이 구정(九鼎)의 귀에 날아와 앉으니, 무정은 이를 두려워했다. 이에 조기(祖己)가 “덕을 함양하시옵소서.”라고 말하자, 무정이 이에 순응해 그의 재위기간 내내 오래도록 안녕했다. 이후 3대 주(紂)는 포악하고 음탕해, 무왕(武王)에게 토벌당했다. 이로 볼 때 개국군주는 신중하며 근면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이후로 갈수록 점차 태만해졌다.
周官曰, 冬日至, 祀天於南郊, 迎長日之至;夏日至, 祭地祗. 皆用樂舞, 而神乃可得而禮也. 天子祭天下名山大川, 五嶽視三公, 四瀆視諸侯, 諸侯祭其疆內名山大川. 四瀆者, 江、河、淮、濟也. 天子曰明堂、辟雍,12) 諸侯曰泮宮.13)
『주관(周官)』에 “동지가 되면, 남쪽 교외에서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장일(長日)의 도래를 맞았으며, 하지가 되면 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모두 음악과 무도를 사용해야만 신령이 흠향(歆饗)할 수 있었다. 천자는 천하의 명산대천에서 제사 지냈는데, 5악(五嶽)은 3공(三公)의 예우로써 제사 지내고, 4독(四瀆)은 제후의 예우로써 제사 지냈으며, 제후들은 각자 영토의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 4독이란 장강(長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말한다. 천자가 제사 지내는 곳을 명당(明堂) 또는 벽옹(辟雍)이라고 말하며, 제후가 제사 지내는 곳을 반궁(泮宮)이라고 말한다.”라고 전해온다.
周公旣相成王, 郊祀后稷以配天,14) 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15) 自禹興而修社祀, 后稷稼穡, 故有稷祠, 郊社所從來尙矣.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게 되자, 교외제사 때에는 후직(后稷)을 천신과 배향(配享)하게 하고, 종묘제사 때에는 명당에서 문왕(文王)을 상제(上帝)와 배향하게 했다.
하(夏)나라가 흥기하자 토신(土神)의 제사가 제정되었고, 후직이 농사를 일으킨 이후부터 곡신(穀神)의 제사가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천신제사와 토신제사는 모두 유구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각주
1 集解徐廣曰:「還, 一作『班』.」
2 正義括地志云:「泰山, 一曰岱宗, 東岳也, 在兗州博城縣西北三十里. 周禮云兗州鎭曰岱宗.」
3 正義括地志云:「衡山, 一名岣嶁山, 在衡州湘潭縣西四十里.」
4 正義括地志云:「華山在華州華陰縣南八里, 古文以爲敦物. 周禮云豫州鎭曰華山.」
5 正義括地志云:「恆山在定州恆陽縣西北百四十里. 周禮云幷州鎭曰恆山.」
6 索隱獨不言「至」者, 蓋以天子所都也. 正義括地志云:「嵩山, 亦名曰太室, 亦名曰外方也. 在洛州陽城縣西北二十三里.」
7 索隱如淳按:國語「二龍漦于夏庭」是也.
8 集解徐廣曰:「陟, 古作『敕』.」
9 索隱案尙書, 巫咸殷臣名, 伊陟贊告巫咸. 今此云「巫咸之興自此始」, 則以巫咸爲巫覡. 然楚詞亦以巫咸主神. 蓋太史公以巫咸是殷臣, 以巫接神事, 太戊使禳桑谷之災, 所以伊陟贊巫咸, 故云巫咸之興自此始也.
10 集解徐廣曰:「一作『鷮』, 音嬌.」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 시황제(始皇帝) 이전의 진(秦)나라 제사
自周克殷後十四世, 世益衰, 禮樂廢, 諸侯恣行, 而幽王爲犬戎所敗,1) 周東徙雒邑. 秦襄公攻戎救周, 始列爲諸侯.2) 秦襄公旣侯, 居西垂,3) 自以爲主少皞之神, 作西畤, 祠白帝, 其牲用騮駒4)黃牛羝羊各一云.5) 其後十六年, 秦文公東獵汧渭之閒, 卜居之而吉.6) 文公夢黃蛇自天下屬地, 其口止於鄜衍.7) 文公問史敦, 敦曰:「此上帝之徵, 君其祠之.」於是作鄜畤, 用三牲郊祭白帝焉.
주(周)나라가 은나라를 멸한 지 14대에 이르자, 세도(世道)는 점차 쇠약해지고, 예악은 폐기되고, 제후들의 행동은 방자하게 되어, 유왕(幽王)은 견융(犬戎)에게 패해 주나라는 낙읍(雒邑)으로 천도했다.
진 양공(秦襄公)이 견융을 공격해 주나라를 구하자, 그 공로로 그는 제후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진 양공은 제후가 되었음에도 거처를 서쪽 변경에 두고, 스스로 소호신(小皞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해야 한다고 여겨, 서치(西畤)를 만들어 백제(白帝)에게 제사했다. 그 희생(犧牲)으로 유구(騮駒), 황소, 저양(羝羊)을 각각 한 마리씩 바쳤다.
16년 후, 진 문공(秦文公) 동방으로 가서 사냥하다가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까지 오게 되어, 정도(定都)의 점괘를 치니 길했다. 문공은 꿈에서 누런 뱀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것의 몸은 하늘로부터 땅까지 이어졌으며, 입은 부(鄜)와 연(衍) 일대까지 뻗어있었다. 문공은 이 일을 태사(太史) 돈(敦)에게 자문하니, 그는 “이는 상제의 상징이니, 이를 제사 드리기를 청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부치(鄜畤)를 건립해 소, 양, 돼지를 희생으로써 백제(白帝)에게 제사 드렸다.
自未作鄜畤也, 而雍旁故有吳陽武畤,8) 雍東有好畤, 皆廢無祠. 或曰:「自古以雍州積高, 神明之隩, 故立畤郊上帝, 諸神祠皆聚云. 蓋黃帝時嘗用事, 雖晩周亦郊焉.」其語不經見, 縉紳者9)不道.
아직 부치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옹읍(雍邑) 근처에 오양(吳陽)의 무치(武畤)가 있었으며, 옹읍 동쪽에는 호치(好畤)가 있었으나, 모두 황폐해 제사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는 “자고로 옹주(雍州)는 지세가 높아 신명(神明)의 거처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제단을 세워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냈으며, 기타 여러 신령의 사당도 모두 이곳에 모아놓았었다. 대략 황제(黃帝) 때부터 이곳에서 제사를 거행했으니, 주나라 말엽에 이르기까지도 제사를 거행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경전에도 보이지 않으며, 대신들도 말한 바 없다.
作鄜畤後九年, 文公獲若石云,10) 于陳倉北阪城祠之.11) 其神或歲不至, 或歲數來, 來也常以夜, 光輝若流星, 從東南來集于祠城, 則若雄雞, 其聲殷云, 野雞夜雊.12) 以一牢祠, 命曰陳寶.13)
부치가 세워진 지 9년 후, 진 문공은 하나의 옥석을 얻게 되어 진창산(陳倉山) 북쪽의 산비탈에 성을 축조하고 그 옥석을 제사 지냈다. 그것의 신령은 어떤 때는 해가 지나도 한 번도 오지 않았다가, 어떤 때는 일 년에 몇 번이나 왔다. 내려올 때는 항상 밤이었으며, 유성처럼 광채를 발했다. 동남쪽에서 사성(祠城)으로 들어왔는데, 그 형상은 수탉 같았으며, 간절한 듯한 울음소리를 내어, 들꿩들도 밤에는 울었다. 소, 양, 돼지, 각기 한 마리씩을 희생으로써 제사 지냈는데, 이를 ‘진보(陳寶)’라고 불렀다.
作鄜畤後七十八年, 秦德公旣立, 卜居雍, 「後子孫飮馬於河」, 遂都雍. 雍之諸祠自此興. 用三百牢於鄜畤.14) 作伏祠.15) 磔狗邑四門, 以禦蠱菑.16)
부치가 세워진 지 78년 후, 진 덕공(秦德公)이 즉위해 옹(雍)에 정도(定都)할 것을 점치니, 후대의 자손이 국경을 황하 유역까지 넓힌다고 말해서, 마침내 옹에 정도했다. 옹의 제사는 이때부터 흥기했다. 제사 때마다 매번 세 마리의 횐 털 짐승으로 제사 지냈다. 또한 복사(伏祠)를 지었으며, 4곳의 성문에 개의 사지를 찢어 걸어놓고, 독충의 재앙을 방지했다.
德公立二年卒. 其後(六)[四]年, 秦宣公作密畤於渭南, 祭靑帝.
덕공은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4년 후에 진 선공(秦宣公)은 위남(渭南)에 밀치(密畤)를 세워 청제(靑帝)에게 제사 지냈다.
其後十四年, 秦繆公立, 病臥五日不寤;寤, 乃言夢見上帝, 上帝命繆公平晉亂. 史書而記藏之府. 而後世皆曰秦繆公上天.
그 14년 뒤에 진 목공(秦繆公)이 재위에 올랐는데 병이 들어 5일 동안 혼미하다가 깨어나서 말하기를, 꿈속에서 상제를 보았는데 목공에게 ‘진(晉)나라의 난리를 평정하라.’고 명했다고 했다. 사관은 이 말을 기록해 내부(內府)에 수장했으며, 후세 사람들은 모두 ‘진 목공이 하늘로 올랐다.’고 말한다.
秦繆公卽位九年, 齊桓公旣霸, 會諸侯於葵丘,17) 而欲封禪. 管仲曰:18)「古者封泰山禪梁父者19)七十二家,20) 而夷吾所記者十有二焉. 昔無懷氏21)封泰山, 禪云云;22)虙羲封泰山, 禪云云;神農封泰山, 禪云云;炎帝23)封泰山, 禪云云;黃帝封泰山, 禪亭亭;24)顓頊封泰山, 禪云云;帝嚳封泰山, 禪云云;堯封泰山, 禪云云;舜封泰山, 禪云云;禹封泰山, 禪會稽;25)湯封泰山, 禪云云;周成王封泰山, 禪社首:26)皆受命然後得封禪.」桓公曰:「寡人北伐山戎,27) 過孤竹;28)西伐大夏, 涉流沙, 束馬懸車, 上卑耳之山;29)南伐至召陵,30) 登熊耳山31)以望江漢. 兵車之會三,32) 而乘車之會六,33) 九合諸侯, 一匡天下, 諸侯莫違我. 昔三代受命, 亦何以異乎?」於是管仲睹桓公不可窮以辭, 因設之以事, 曰:「古之封禪, 鄗上之黍, 北里之禾,34) 所以爲盛;江淮之閒, 一茅三脊,35) 所以爲藉也. 東海致比目之魚,36) 西海致比翼之鳥,37) 然后物有不召而自至者十有五焉. 今鳳皇麒麟不來, 嘉谷不生, 而蓬蒿藜莠茂, 鴟梟數至, 而欲封禪, 毋乃不可乎?」於是桓公乃止. 是歲, 秦繆公內晉君夷吾. 其後三置晉國之君,38) 平其亂. 繆公立三十九年而卒.
진 목공 9년, 제 환공(齊桓公)은 패주가 되어 규구(葵丘)에 제후들을 모아놓고 봉선의 일을 의논했다.
관중(管仲)이 “고대에 태산(泰山)과 양보산(梁父山)에서 봉선하던 제후는 72명이나 되나, 신이 기억하는 사람은 12명뿐이옵니다. 옛날 무회씨(無懷氏)가 태산과 운운산(云云山)에서 봉선했으며, 복희씨(伏羲氏)가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신농(神農)은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염제(炎帝)는 태산과 정정산(亭亭山) 봉선했으며, 황제(黃帝)는 태산과 정정산에서 봉선했으며, 전욱(顓頊)은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제곡(帝嚳)도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요(堯)도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우(虞)의 순(舜)도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하(夏)나라의 우(禹)는 태산과 회계산(會稽山)에서 봉선했으며, 상(商)나라의 탕(湯)은 태산과 운운산에서 봉선했으며, 주(周)나라의 성왕(成王)은 태산과 두수산(杜首山)에서 봉선했는데, 이들은 모두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후에서야 비로소 봉선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환공이 “과인은 북쪽으로는 산융(山戎)을 정벌해 고죽(孤竹)을 통과했고, 서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정벌해 유사(流沙)를 건넜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비이산(卑耳山)을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소릉(召陵)까지 정벌해 웅이산(熊耳山)에 올라 장강(長江)과 한강(漢江)을 바라볼 수 있었소. 세 번의 군사회의와 여섯 번의 평화회의 등 모두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소집해, 천하를 구제했소. 이때 제후들은 나를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소. 이것이 3대가 천명을 받았다는 것과 어찌 다를 바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관중은 말로써는 환공을 설복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제단을 설치하려 함을 구체적 사실로써 간언했다.
“옛날에 봉선할 때는 호상(鄗上)의 기장과 북리(北里)의 벼로써 제품(祭品)으로 삼았으며, 장강과 회수 유역의 세 모서리 띠[茅]로써 신령의 자리로 삼았습니다. 서해에서 바쳐온 넙치, 동해에서 바쳐온 비익조(比翼鳥)가 있었으며, 또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바쳐온 희귀한 물건이 15가지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봉황과 기린(麒麟)이 오지 않으며, 좋은 곡식도 생산되지 않고 들녘에는 쑥과 명아주만이 무성하며, 올빼미들만이 수차례 날아들 뿐입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봉선하시려는 것은 부적합한 줄로 압니다.”
이에 환공은 봉선을 그만두었다. 이해에 진 목공(秦繆公)은 진 혜공(晉惠公)을 돌려보내 진(晉)나라의 군주로 세웠으며, 그 후 세 차례 진(晉)나라의 군주를 안배하며 진나라의 난리를 평정했다. 목공은 즉위한 지 39년 후에 죽었다.
其後百有餘年, 而孔子論述六蓺, 傳略言易姓而王, 封泰山禪乎梁父者七十餘王矣, 其俎豆之禮不章, 蓋難言之. 或問禘之說, 孔子曰:「不知. 知禘之說, 其於天下也視其掌.」39)詩云紂在位, 文王受命, 政不及泰山. 武王克殷二年, 天下未寧而崩. 爰周德之洽維成王, 成王之封禪則近之矣. 及後陪臣執政, 季氏旅於泰山, 仲尼譏之.40)
그 1백여 년 후, 공자(孔子)는 육경(六經)을 논술했다. 경서에는 성을 고치고 출현한 새로운 왕들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태산과 양보산에서 봉선한 제왕들이 70여 명이라고 쓰여 있으나, 그들의 제례 물품에 대한 기술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확하게 기술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어떤 사람이 ‘체’라는 제사(禘祭)의 일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가 “모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체제의 일을 안다면, 그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손바닥의 물건 보듯이 쉬울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경(詩經)』에 “주나라의 문왕(文王)은 천명을 받았는데도 정사중(政事中)에 태산에 봉선하는 일이 없었다. 주무왕(周武王)은 은나라를 멸한 지 2년 만에, 천하가 채 평온하기도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주나라의 덕치 융합은 성왕(成王)에 이르러서야 이룩되었는데, 바로 성왕의 봉선대전이 그 도리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후 제후 각국의 대부들이 정권을 잡았으며, 노(魯)나라의 이씨(李氏)는 월권해 태산에서 제사를 거행했는데, 공자는 이를 비웃었다.”라고 쓰여 있다.
是時萇弘以方事周靈王, 諸侯莫朝周, 周力少, 萇弘乃明鬼神事, 設射貍首. 貍首者, 諸侯之不來者.41) 依物怪欲以致諸侯. 諸侯不從, 而晉人執殺萇弘.42) 周人之言方怪者自萇弘.
이때 장홍(萇弘)은 법술로써 주 영왕(周靈王)을 섬겼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주 영왕에게 조현하려고 하지 않아, 주 왕조는 쇠약해져서 장홍의 죄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홍은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귀신활동을 행해, ‘이수(狸首)’를 쏘는 의식을 제정했다.
‘이수’란 조혈에 참석하지 않는 제후의 대표이다. 신괴(神怪)의 힘에 의존해 조현에 참석하게끔 제후들을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제후들은 이에 불복하였고, 진(晉)나라 사람이 장홍을 잡아 죽였다. 주나라 사람들이 법술과 신괴를 말한 것은 장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其後百餘年, 秦靈公作吳陽上畤,43) 祭黃帝;44)作下畤, 祭炎帝.
백여 년 후, 진 영공(秦靈公)은 오양(吳陽)에 상치(上畤)를 설치해 황제(黃帝)에게 제사 지냈으며, 하치(下畤)를 설치해 염제(炎帝)에게 제사 지냈다.
後四十八年, 周太史儋45)見秦獻公曰:「秦始與周合, 合而離, 五百歲當復合,46) 合十七年而霸王出焉.」47)櫟陽雨金, 秦獻公自以爲得金瑞, 故作畦畤櫟陽而祀白帝.48)
48년 후,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은 진 헌공(秦獻公)을 알현하고 “진나라와 주나라는 처음에는 하나였다가 이후 분리된 것이니, 5백년 후에는 당연히 다시 합쳐져야 하며, 합쳐진 지 17년 뒤에는 진나라에 패왕(覇王)이 출현할 것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역양(櫟陽)에서 황금이 떨어지니, 진 헌공은 스스로 5행(五行) 중 금(金)에 속하는 길조를 얻었다고 여기고, 휴치(畦畤)를 설치하고 백제(白帝)에게 제사 지냈다.
其後百二十歲而秦滅周,49) 周之九鼎入于秦. 或曰宋太丘社亡,50) 而鼎沒于泗水彭城下.
120년 후, 진나라가 주나라를 멸하니,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진나라에 귀속되었다. 어떤 사람은 송(宋)나라의 태구(太丘)의 사단(社壇)이 부수어질 때, 구정이 팽성(彭城)의 사수(泗水) 속으로 침몰되었다고 말한다.
각주
1 集解徐廣曰:「犬, 一作『畎』.」
2 正義秦襄公, 周平王元年封也.
3 正義漢隴西郡西縣也. 今在秦州上邽縣西南九十里也.
4 索隱赤馬黑鬣曰騮也.
5 索隱詩傳云:「羝, 牡羊.」
6 索隱按:地理志汧水出汧縣西北入渭. 皇甫謐云「文公徙都汧」者也. 正義括地志云:「郿縣故城在岐州郿縣東北十五里, 卽此城也.」
7 集解李奇曰:「鄜音孚. 山阪曰衍.」索隱鄜, 地名, 後爲縣, 屬馮翊. 衍者, 鄭衆注周禮云「下平曰衍」;又李奇三輔記云「三輔謂山阪閒爲衍」也.
8 集解李奇曰:「於旁有吳陽地.」
9 集解李奇曰:「縉, 揷也, 揷笏於紳. 紳, 大帶.」索隱姚氏云「縉, 當作『搢』」. 鄭衆注周禮云「縉讀爲『薦』, 謂薦之於紳帶之閒」. 今按:鄭意以縉爲薦, 則薦亦是進, 進而置於紳帶之閒, 故史記亦多作「薦」字也.
10 集解蘇林曰:「質如石也.」服虔曰:「在北, 或曰在陳倉北.」索隱蘇林云:「質如石, 似肺.」
11 正義三秦記云:「太白山西有陳倉山, 山有石雞, 與山雞不別. 趙高燒山, 山雞飛去, 而石雞不去, 晨鳴山頭, 聲聞三里. 或言是玉雞.」括地志云:「陳倉山在今岐州陳倉縣南.」又云:「寶雞神祠在漢陳倉縣故城中, 今陳倉縣東. 石雞在陳倉山上.」祠在陳倉城, 故言獲若石于陳倉北阪城祠之.
12 集解如淳曰:「野雞, 雉也. 呂后名雉, 故曰野雞.」瓚曰:「殷, 聲也. 云, 足句之詞.」
13 集解瓚曰:「陳倉縣有寶夫人祠, 或一歲二歲與葉君合. 葉君神來時, 天爲之殷殷雷鳴, 雉爲之雊也. 在長安正西五百里.」韋昭曰:「在陳倉縣. 寶而祠之, 故曰陳寶.」索隱案:列異傳云「陳倉人得異物以獻之, 道遇二童子, 云:『此名爲媦, 在地下食死人腦.』媦乃言云:『彼二童子名陳寶, 得雄者王, 得雌者伯.』乃逐童子, 化爲雉. 秦穆公大獵, 果獲其雌, 爲立祠. 祭, 有光, 雷電之聲. 雄止南陽, 有赤光長十餘丈, 來入陳倉祠中」. 所以代俗謂之寶夫人祠, 抑有由也. 葉, 縣名, 在南陽. 葉君卽雄雉之神, 故時與寶夫人神合也.
14 索隱案秦本紀, 德公元年以犠三百祠鄜畤. 今案:「百」當爲「白」, 秦君西祀少昊時牲尙白. 秦, 諸侯也, 雖奢侈, 祭郊本特牲, 不可用三百牢以祭天, 蓋字誤耳.
15 索隱案:服虔云「周時無伏, 磔犬以禦災, 秦始作之」. 漢舊儀云「伏者, 萬鬼行日, 故閉不干求也」, 故東觀漢記「和帝初令伏閉晝日」是也. 又曆忌釋曰「伏者何? 金氣伏藏之名. 四時代謝, 皆以相生. 而春木代水, 水生木也. 夏火代木, 木生火也. 冬水代金, 金生水也. 至秋, 則以金代火, 金畏於火, 故至庚日必伏. 庚者, 金日也」.
16 索隱案:左傳云「皿蟲爲蠱」, 梟磔之鬼亦爲蠱. 故月令云「大儺, 旁磔」, 注云「磔, 禳也. 厲鬼爲蠱, 將出害人, 旁磔於四方之門」. 故此亦磔狗邑四門也. 風俗通云「殺犬磔禳也」.
17 正義括地志云:「葵丘在曹州考城縣東南一里五十步郭內, 卽桓公所會處也.」
18 索隱案:今管子書其封禪篇亡.
19 正義括地志云:「梁父山在兗州泗水縣北八十里.」
20 正義韓詩外傳云:「孔子升泰山, 觀易姓而王可得而數者七十餘人, 不得而數者萬數也.」案:管仲所記自無懷氏以下十二家, 其六十家無紀錄也.
21 集解服虔曰:「古之王者, 在伏羲前, 見莊子.」
22 集解李奇曰:「云云山在梁父東.」索隱晉灼云:「山在蒙陰縣故城東北, 下有云云亭也.」正義括地志云:「云云山在兗州博城縣西南三十里也.」
23 索隱鄧展云「神農後子孫亦稱炎帝而登封者」, 律曆志「黃帝與炎帝戰於阪泉」, 豈黃帝與神農身戰乎? 皇甫謐云炎帝傳位八代也.
24 集解徐廣曰:「在鉅平.」駰案:服虔曰「亭亭山在牟陰」. 索隱應劭云「在鉅平北十餘里」. 服虔云「在牟陰」, 非也. 正義括地志云:「亭亭山在兗州博城縣西南三十里也.」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 진시황(秦始皇)의 봉선과 제사
其後百一十五年而秦幷天下.
115년 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
秦始皇旣幷天下而帝, 或曰:「黃帝得土德, 黃龍地螾見.1) 夏得木德, 靑龍止於郊, 草木暢茂. 殷得金德, 銀自山溢.2) 周得火德, 有赤烏之符.3) 今秦變周, 水德之時. 昔秦文公出獵, 獲黑龍, 此其水德之瑞.」於是秦更命河曰「德水」, 以冬十月爲年首, 色上黑, 度以六爲名,4) 音上大呂, 事統上法.5)
진시황(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皇帝)라고 지칭했는데, 어떤 사람이 “황제(黃帝)는 토덕(土德)을 얻어 황룡과 큰 지렁이가 출현했으며, 하나라는 목덕(木德)을 얻어 청룡이 교외에 서식해 초목이 울창하게 자랐다. 은나라는 금덕(金德)을 얻어 산 속에 은(銀)이 넘쳤으며, 주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어 적마(赤馬)의 길조가 있었다. 지금 진나라가 주나라를 개변시켰으니, 이는 수덕(水德)을 얻을 시대이다. 이전에 진 문공(秦文公)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한 마리의 흑룡을 얻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수덕의 길상물(吉祥物)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겨울의 10월을 매년의 시작으로 하고, 색은 흑색을 숭상하며, 길이는 6척을 단위로 하고, 음률은 대려(大呂)를 숭상하며, 정사(政事)는 법치를 숭상했다.
卽帝位三年, 東巡郡縣, 祠騶嶧山,6) 頌秦功業. 於是徵從齊魯之儒生博士七十人, 至乎泰山下. 諸儒生或議曰:「古者封禪爲蒲車,7) 惡傷山之土石草木;埽地而祭, 席用葅■,8) 言其易遵也.」始皇聞此議各乖異, 難施用, 由此絀儒生. 而遂除車道, 上自泰山陽至巓, 立石頌秦始皇帝德, 明其得封也. 從陰道下, 禪於梁父. 其禮頗采太祝之祀雍上帝所用, 而封藏皆袐之, 世不得而記也.
진시황은 제위 3년째에 동쪽으로 군현을 시찰하고, 추역산(騶嶧山)에서 제사 지내며 진나라의 공업을 칭송했다. 그리하여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유생과 박사 70명을 선발해 태산 아래로 데려왔다.
유생 중 어떤 사람이 “옛날의 봉선은 포거(蒲車)를 이용했는데 이는 산의 토석과 초목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땅은 청소하고서 그 장소로 삼았으며 깔개는 벼의 줄기를 사용했는데, 이로써 고례(古禮)란 좇아 행하기가 아주 쉬움을 말해줍니다.”라고 아뢰었다. 시황은 이들의 견해가 각기 다르고 사리에 맞지 않아서 시행하기가 어렵자, 유생들을 배척했다. 그리하여 태산 남쪽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차도를 건립했으며, 또한 비석을 세워서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고 봉선해야만 하는 도리를 밝혔다. 북쪽 길로 내려와 양보산에서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냈다. 봉선의 의식에는 옹현에서 상제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의식을 많이 채용했다. 봉선의 기록은 모두 은밀하게 보관되었으므로, 세인들은 이를 기록할 수 없었다.
始皇之上泰山, 中阪遇暴風雨, 休於大樹下. 諸儒生旣絀, 不得與用於封事之禮, 聞始皇遇風雨, 則譏之.
한번은 진시황이 태산에 올랐다가, 산중턱에서 폭풍우를 만나, 큰 나무 아래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생들은 배척을 받아 봉선 의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진시황이 폭풍우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다.
於是始皇遂東遊海上, 行禮祠名山大川及八神, 求僊人羨門之屬. 八神將自古而有之, 或曰太公以來作之. 齊所以爲齊, 以天齊也.9) 其祀絶莫知起時. 八神:一曰天主,10) 祠天齊. 天齊淵11)水, 居臨菑南郊山下者.12) 二曰地主, 祠泰山梁父. 蓋天好陰, 祠之必於高山之下, 小山之上, 命曰「畤」;13)地貴陽, 祭之必於澤中圜丘云. 三曰兵主, 祠蚩尤. 蚩尤在東平陸監鄕,14) 齊之西境也. 四曰陰主, 祠三山.15) 五曰陽主, 祠之罘.16) 六曰月主, 祠之萊山.17) 皆在齊北, 並勃海. 七曰日主, 祠成山. 成山斗入海,18) 最居齊東北隅, 以迎日出云. 八曰四時主, 祠琅邪.19) 琅邪在齊東方, 蓋歲之所始. 皆各用一牢具祠, 而巫祝所損益, 珪幣雜異焉.
봉선을 끝내고 시황제는 계속 동쪽의 발해까지 유람하며 명산대천과 8신(八神)에게 제사 드리고, 선문(羨文)과 같은 신선들에게 복을 기원했다.
8신은 이미 옛날부터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제 태공(齊太公)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제나라를 제(齊)라고 부른 까닭은 바로 8신의 하나인 천제신(天齊神)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천제에 대한 제사는 이미 단절되었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8신이란 다음을 말한다. 그 첫째는 천주(天主)로 천제천(天齊泉)에게 제사지낸다. 천제연수(天齊淵水)는 임치(臨菑) 남쪽 근교의 산 아래에 있다. 그 둘째는 지주(地主)로, 태산과 양보산에서 제사 지낸다. 천신은 음기를 좋아하므로,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 혹은 작은 산의 높은 곳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그 제단을 ‘치(畤)’라고 부른다. 지신은 양기를 좋아하므로, 반드시 늪지 중 원형의 언덕 위에서 제사 지내야 한다.
그 셋째는 병주(兵主)로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낸다. 치우는 동평륙(東平陸)의 감향(監鄕)에 있으며, 제나라의 서쪽 경계이다. 그 넷째는 음주(陰主)로 삼산(三山)에서 제사 지낸다. 그 다섯째는 양주(陽主)로 지부산(之罘山)에서 제사 지낸다. 그 여섯째는 월주(月主)로 채산(菜山)에서 제사 지낸다. 모두 제북(齊北)에 있으며 발해에 접해 있다. 그 일곱째는 일주(日主)로 성산(成山)에서 제사 지낸다. 성산은 가파르게 굽어 바다로 들어가며, 제나라의 가장 동북쪽 모퉁이에 위치해 일출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여덟째는 4시주(四時主)로 낭야(琅邪)에서 제사 지낸다. 낭야는 제나라의 동쪽에 있으며 1년 운행의 시작을 기원한다.
8신에 대한 제사는 모두 한 마리의 가축을 사용하며, 제사를 맡은 관리(司祭人)와 옥, 비단 등의 제품은 약간씩 증감할 수 있다.
自齊威、宣20)之時, 騶子之徒21)論著終始五德之運,22) 及秦帝而齊人奏之, 故始皇采用之. 而宋毋忌、23)正伯僑、24)充尙、25)羨門高26)最後皆燕人,27) 爲方僊道,28) 形解銷化,29) 依於鬼神之事. 騶衍以陰陽主運30)顯於諸侯, 而燕齊海上之方士傳其術不能通, 然則怪迂阿諛苟合之徒自此興, 不可勝數也.
제나라의 위왕(威王), 선왕(宣王) 때부터 추연(鄒衍)의 부류들은 종시오덕(終始五德)의 운행을 논했는데, 진(秦)나라가 황제라고 칭한 이후, 제나라 사람이 이 이론을 진시황에게 상주하자,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였다. 송무기(宋毋忌), 정백교(正伯僑), 충상(充尙)에서부터 시작해 마지막의 선문고(羨門高)까지 모두 연(燕)나라 사람으로, 육체에서 해탈해 영혼을 귀신 부류에 의탁하는 등 선도가(仙道家)의 법술을 실행했다. 추연은 음양주운이론(陰陽主運理論)으로써 제후들 간에 유명했으며, 또한 연나라와 제나라 해상의 방사(方士)들이 그의 이론을 계승했으나 통달할 수 없어 이때부터 황당 기괴하며 아부 영합하는 자가 흥기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自威、宣、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 此三神山者, 其傅在勃海中,31) 去人不遠;患且至, 則船風引而去. 蓋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銀爲宮闕. 未至, 望之如雲;及到, 三神山反居水下. 臨之, 風輒引去, 終莫能至云. 世主莫不甘心焉.32) 及至秦始皇幷天下, 至海上, 則方士言之不可勝數. 始皇自以爲至海上而恐不及矣, 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 船交海中, 皆以風爲解,33) 曰未能至, 望見之焉. 其明年, 始皇復游海上, 至琅邪, 過恆山, 從上黨歸. 後三年, 游碣石, 考入海方士,34) 從上郡歸. 後五年, 始皇南至湘山, 遂登會稽, 並海上, 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 不得, 還至沙丘崩.35)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연나라의 소왕(昭王) 이래로 사람을 바다로 파견해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찾도록 하는 일이 잦아졌다.
전설에 의하면, 이 3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길이 멀지 않았으나, 선인(仙人)들은 배가 도착하는 것을 걱정해 곧 바람을 일으켜 배를 멀리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미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선인들과 장생불사의 약이 모두 거기에 있으며, 산 위의 물체, 새, 짐승 등의 색깔은 모두 흰색이며, 궁전은 모두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멀리서 바라다보면, 3신산은 천상의 백운과 같으며, 거기에 도달해 보면 3신산은 오히려 수면 아래에 처해 있는 듯하다. 배가 막 다다르려고 하면 바람이 배를 밀쳐내어 시종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속세의 제왕 중 그곳을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방사들이 해상의 신선전설에 관해 말하는 횟수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진시황은 친히 해상으로 나아갔다가 3신산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워,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해상으로 나아가 이 3신산을 찾도록 사람들을 파견했다. 배가 해상에서 돌아와서는 바람을 만나 도달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서, 비록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3신산을 확실히 보았다고 말했다. 2년째, 진시황은 다시 해상을 순유하며 낭야산(琅邪山)에 도달하고, 항산(恒山)을 거쳐 상당(上黨)으로부터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5년 후, 진시황은 남쪽으로는 상산(湘山)까지 순유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해상으로 가서 3신산의 장생불사약을 얻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얻지 못하고 귀경하는 도중에 사구(沙丘)에서 죽었다.
각주
1 集解應劭曰:「螾, 丘蚓也. 黃帝土德, 故地見其神. 蚓大五六圍, 長十餘丈.」韋昭曰:「黃者地色, 螾亦地物, 故以爲瑞.」索隱出呂氏春秋. 音引.
2 集解蘇林曰:「流出也.」
3 索隱中候及呂氏春秋皆云「有火自天止于王屋, 流爲赤烏, 五至, 以谷俱來」.
4 正義張晏云:「水, 北方, 黑. 水終數六, 故以方六寸爲符, 六尺爲步.」
5 集解服虔曰:「政尙法令也.」瓚曰:「水陰, 陰主刑殺, 故尙法.」
6 索隱騶縣之嶧山. 騶縣本邾國, 魯穆公改作「鄒」. 從征記北巖有秦始皇所勒銘.
7 索隱謂蒲裹車輪, 惡傷草木.
8 集解應劭曰:「■, 禾稿也. 去其皮以爲席.」如淳曰:「葅讀曰租. ■讀曰戛.」晉灼曰:「葅, 藉也.」索隱上音租, 下音戛. 周禮「祭祀供茅葅」. 說文云:「葅, 茅藉也. ■, 禾稿去其皮, 祭天以此.」
9 集解蘇林曰:「當天中央齊.」
10 索隱謂主祠天.
11 索隱顧氏案:解道彪齊記云「臨菑城南有天齊泉, 五泉並出, 有異於常, 言如天之腹齊也」.
12 索隱下下者. 小顔云:「下下謂最下也.」
13 集解徐廣曰:「一云『之下(上)畤命曰畤』.」索隱此之「一云」, 與漢書郊祀志文同也.
14 集解徐廣曰:「屬東平郡.」索隱監音闞. 韋昭云:「縣名, 屬東平.」皇覽云:「蚩尤冢在東平郡壽張縣闞鄕城中.」
15 索隱小顔以爲下所謂三神山. 顧氏案:地理志東萊曲成有參山, 卽此三山也, 非海中三神山也.
16 正義括地志云:「之罘山在萊州文登縣西北九十里.」
17 集解韋昭曰:「在夷萊長廣縣.」
18 集解韋昭曰:「成山在東萊不夜, 斗入海. 不夜, 古縣名.」索隱不夜, 縣名, 屬東萊. 案:解道彪齊記云「不夜城蓋古有日夜出見於境, 故萊子立城以不夜爲名」. 斗入海, 謂斗絶曲入海也.
19 索隱案:山海經云「琅邪臺在勃海閒」. 案:是山如臺. 地理志琅邪縣有四時祠也.
20 索隱威王、宣王也.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 진(秦) 2세 황제의 제사
二世元年, 東巡碣石, 並海南, 歷泰山, 至會稽, 皆禮祠之, 而刻勒始皇所立石書旁, 以章始皇之功德.1) 其秋, 諸侯畔秦. 三年而二世弑死.
2세(二世)는 원년에 동쪽으로 갈석(碣石)을 순유하고, 해상의 남쪽을 따라 내려와, 태산을 지나 회계산에 도달해, 의례에 의거해 신령에게 제사 지냈다. 또한 진시황이 세운 비석 옆에 문사(文辭)를 조각해, 진시황의 공덕을 표양(表揚)했다. 이해 가을,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해, 3년에 2세가 피살되었다.
始皇封禪之後十二歲, 秦亡. 諸儒生疾秦焚詩書, 誅僇文學, 百姓怨其法, 天下畔之, 皆訛曰:「始皇上泰山, 爲暴風雨所擊, 不得封禪.」此豈所謂無其德而用事者邪?2)
진시황이 봉선을 행한 지 12년 후 진나라는 멸망했다. 당시 유생들은 진시황이 『시(詩)』와 『서(書)』를 불태우고, 문학사인(文學士人)들을 모욕하고 살육한 것에 대해 증오했으며, 백성들은 진나라의 법률을 증오했으며,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진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에, 모두 “진시황이 태산에 올랐으나, 폭풍우의 저지를 받아 봉선의 예를 행할 수 없었다.”라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바로 소위 그 덕행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봉선의 예를 억지로 행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昔三代之(君)[居]皆在河洛之閒,3) 故嵩高爲中嶽, 而四嶽各如其方, 四瀆咸在山東. 至秦稱帝, 都咸陽, 則五嶽、四瀆皆幷在東方. 自五帝以至秦, 軼興軼衰, 名山大川或在諸侯, 或在天子, 其禮損益世殊, 不可勝記. 及秦幷天下, 令祠官所常奉天地名山大川鬼神可得而序也.
옛날의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수도가 모두 황하와 낙하(洛河)의 사이에 있었으므로, 숭고(嵩高)를 중악(中嶽)으로 정하고 기타 4악(四嶽)이 각자의 방향에 의거해 명명되었으며, 4독(四瀆)은 모두 산동(山東) 지역에 있었다. 진나라가 황제라고 지칭한 후, 함양(咸陽)에 건도하자, 5악과 4독은 모두 수도의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5제(五帝)로부터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흥망이 상호 교체되면서, 명산대천이 제후의 경내에 있기도 했으며, 혹은 천자의 영토 안에 있기도 해, 그 제사의례의 손익이 대대로 달라 일일이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서야 사관(祠官)에게 명해 일상적으로 제사 지내던 천지와 명산대천들의 귀신들을 차례대로 기술할 수 있었다.
於是自殽以東,4) 名山五, 大川祠二. 曰太室. 太室, 嵩高也. 恆山, 泰山, 會稽, 湘山.5) 水曰濟, 曰淮.6) 春以脯酒爲歲7)祠, 因泮凍,8) 秋涸凍,9) 冬塞10)禱祠. 其牲用牛犢各一, 牢具珪幣各異.
당시 효산(殽山) 이동에서 제사 지내는 곳이 명산은 5개, 대천은 2개가 있었다. 태실(太室)이라고 칭하는 산이 있었는데, 태실은 바로 숭산(嵩山)을 말한다. 또한 항산(恒山), 태산(泰山), 회계산(會稽山), 상산(湘山)이 있다. 2개의 대천에는 제수(濟水)와 회수(淮水)가 있다.
봄에는 고기와 술로써 그해의 제사를 거행했으며, 또한 날이 따뜻해 강물이 녹을 때, 가을에 일찍 강물이 얼 때, 겨울에 빙설로 인해 길이 막힐 때 제사를 거행했다. 제사의 제물로는 각기 송아지 한 마리를 사용했으며, 옥과 비단 등의 제물은 각기 달랐다.
自華以西, 名山七, 名川四. 曰華山,11) 薄山. 薄山者, 衰山也.12) 岳山,13) 岐山,14) 吳岳,15) 鴻冢,16) 瀆山. 瀆山, 蜀之汶山.17) 水曰河, 祠臨晉;18)沔, 祠漢中;19)湫淵, 祠朝■;20)江水, 祠蜀.21) 亦春秋泮涸禱塞, 如東方名山川;而牲牛犢牢具珪幣各異. 而四大冢22)鴻、岐、吳、岳, 皆有嘗禾.23)
화현(華縣)을 서쪽으로 해 제사 지내는 곳은 명산은 7개, 대천은 4개가 있었다. 화산(華山), 박산(薄山)이라는 산이 있다. 박산은 쇠산(衰山)을 말한다. 또한 악산(嶽山), 기산(岐山), 오악(吳嶽), 홍총(鴻冢), 독산(瀆山)이 있다.
독산은 독(蜀)의 민산(汶山)을 말한다. 4대 강물 중, 황하(黃河)는 임진(臨晉)에서 제사지내며, 면수(沔水)는 한중(漢中)에서 제사지내며, 추연(湫淵)은 조나(朝那)에서 제사지내며, 강수(江水)는 촉군(蜀郡)에서 제사지냈다. 또한 봄에 얼음이 녹을 때와 가을에 강물이 얼 때 제사를 지냈는데, 동방의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으나, 제사에 사용한 송아지, 옥, 비단 등 제품은 달랐다. 4대 명산의 산봉우리 홍(鴻), 기(岐), 오(吳), 악(嶽)에 모두 상화(嘗禾)가 있었다.
陳寶節來祠.24) 其河加有嘗醪. 此皆在雍州之域, 近天子之都, 故加車一乘, 騮駒四.
진보신(陳寶神)이 계절에 응해 와서는 제사를 향수(享受)했다. 황하의 제사에서는 탁주를 추가했다. 이 산하들은 모두 옹주(雍州) 지역 내에 있고 또한 천자의 도성에서 가까웠으므로, 제사에는 수레 한 대와 월따말[騮駒] 네 필을 추가했다.
霸、産、25)長水、26)灃、27)澇、28)涇、渭皆非大川, 以近咸陽, 盡得比山川祠, 而無諸加.29)
패수(覇水), 산수(産水), 장수(長水), 풍수(澧水), 노수(澇水), 경수(涇水), 위수(渭水)는 모두 대천은 아니었다. 허나 함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명산대천의 제사와 규모가 비슷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가된 제품은 없었다.
汧、洛30)二淵,31) 鳴澤、32)蒲山、嶽■山之屬,33) 爲小山川, 亦皆歲禱塞泮涸祠, 禮不必同.
견수(汧水), 낙수(洛水), 명택(鳴澤), 포산(蒲山), 악서산(嶽壻山)의 부류들은 모두 작은 산천들로서, 매년 빙설로 길이 막힐 때, 해빙될 때, 하천이 고갈될 때 축복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의례가 꼭 일정하지는 않았다.
而雍有日、月、參、辰、34)南北斗、熒惑、太白、歲星、塡星、[辰星]、二十八宿、風伯、雨師、四海、九臣、十四臣、35)諸布、36)諸嚴、諸逑37)之屬, 百有餘廟. 西亦有數十祠.38) 於湖39)有周天子祠. 於下邽有天神. 灃、滈有昭明、40)天子辟池.41) 於(社)[杜]、亳42)有三社主之祠、壽星祠;43)而雍菅廟亦有杜主.44) 杜主, 故周之右將軍,45) 其在秦中, 最小鬼之神者.46) 各以歲時奉祠.
옹현에는 일신(日神), 월신(月神), 삼(參), 진(辰), 남북두(南北斗), 형혹(熒惑), 태백(太白), 세성(歲星), 전성(塡星), 진성(辰星), 28수(二十八宿), 풍백(風伯), 우사(雨師), 사해(四海), 9신(九臣), 14신(十四臣), 제포(諸布), 제엄(諸嚴), 제구(諸逑) 등의 신령이 있으며, 백여 개의 사당이 있었다.
서(西)에는 몇 십 개의 사당이 있고, 호(湖)에는 주 천자의 사당이 있으며, 하규(下邽)에는 천신이 있다. 풍수(澧水), 호수(滈水)에는 소명(昭明) 사당과 천자벽지(天子辟池) 사당이 있고, 두(杜)의 박(毫)에는 3개의 두주(杜主) 사당과 수성(壽星) 사당이 있으며, 옹현의 간묘(菅廟) 중에도 두주 사당이 있었다.
두주는 원래 주나라의 우장군(右將軍)으로, 진중(秦中)의 소묘(小廟) 중 가장 영험이 있는 사당이다. 이들 여러 성수(星宿)와 신령에 대해 매년 계절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唯雍四畤47)上帝爲尊, 其光景動人民唯陳寶. 故雍四畤, 春以爲歲禱, 因泮凍, 秋涸凍, 冬塞祠, 五月嘗駒, 及四仲之月(祠若)月祠, [若]陳寶節來一祠. 春夏用騂, 秋冬用騮. 畤駒四匹, 木禺龍48)欒車49)一駟, 木禺車馬一駟, 各如其帝色. 黃犢羔各四, 珪幣各有數, 皆生瘞埋, 無俎豆之具.50) 三年一郊. 秦以冬十月爲歲首, 故常以十月上宿郊見,51) 通權火,52) 拜於咸陽之旁, 而衣上白, 其用如經祠云.53) 西畤、畦畤, 祠如其故, 上不親往.
옹현에 있는 4개 제단의 상제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며, 제사장면이 가장 감동적인 제사는 진보신에 대한 제사이다.
옹현의 4개 제단에서는 봄에 그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거행하며, 그 외에 얼음이 풀리거나 가을에 물이 마르고 일찍 추워져서 얼음이 얼거나 겨울에 폭설로 길이 막힐 때 제사 지내며, 5월의 상구(嘗駒) 제사와 4계절 중간 달에 거행하는 월사(月祀)가 있다.
진보신 제사는 진보신이 강림하는 계절에 맞추어 한번 제사 지낸다. 봄과 여름에는 적색 말을 사용하며, 가을과 겨울에는 유(騮)를 사용한다. 제사에서는 네 필의 망아지를 사용하며, 하나의 목형 방울 달린 수레는 네 필의 나무로 만든 용이 끌며, 하나의 목형 마차는 네 필의 목형 말이 끈다. 그 색깔은 각기 그 황제의 얼굴색에 따른다.
어린 황색 소와 어린 양은 각기 네 마리이고, 옥과 비단은 각기 일정한 수량이 있으며, 소와 양은 산 채로 매장하며, 조(俎)와 두(豆) 등의 예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교외 제사는 3년에 한 번 있다. 진나라는 겨울 10월을 그해의 시작으로 여기므로, 천자는 매년 10월에 재계하고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 지낸 후, 봉화를 궁전까지 이르게 하고 함양궁 부근에서 절을 올리는데,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기타 용구는 일반의 제사와 같다. 서치(西畤), 휴치(畦畤)는 진나라의 통일 이전과 같으며, 천자가 친히 가지 않는다.
諸此祠皆太祝常主, 以歲時奉祠之. 至如他名山川諸鬼及八神之屬, 上過則祠, 去則已. 郡縣遠方神祠者, 民各自奉祠, 不領於天子之祝官. 祝官有袐祝, 卽有菑祥, 輒祝祠移過於下.54)
이 모든 제사들은 태축(太祝)이 주관해, 매년 기일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그 외 명산대천, 모든 귀신, 8신 부류에 대해서는, 천자가 그것들의 제단을 지날 때 제사 지내며 떠나면 그만둔다. 군현 및 멀리 떨어진 곳의 사당에 대해서는 천자가 명한 제사 주관 관원의 관리대상에서 제외되어, 그곳의 백성 스스로가 제사 지낸다. 주관 관원 중 비축(袐祝)이 있는데, 만약 재앙을 당하게 되면 그는 제사를 거행해 축복을 기원하며, 그 재앙을 관원과 백성에게 전가한다.
각주
1 索隱小顔云:「今諸山皆有始皇所刻石及胡亥重刻, 其文具存也.」
2 索隱卽封禪書序云「蓋有無其應而用事者矣」. 此當有所本, 太史公再引以爲說.
3 正義世本云:「夏禹都陽城, 避商均也. 又都平陽, 或在安邑, 或在晉陽.」帝王世紀云:「殷湯都亳, 在梁, 又都偃師, 至盤庚徙河北, 又徙偃師也. 周文、武都酆、鄗, 至平王徙都河南.」案:三代之居皆在河洛之閒也.
4 索隱案:殽卽崤山. 杜預云「崤在弘農澠池縣西南」, 卽今之崤山是也. 亦音豪.
5 索隱相山. 地理志在長沙.
6 索隱案:風俗通云「濟廟在臨邑, 淮廟在平氏也」.
7 索隱爲, 于僞反.
8 集解服虔曰:「解凍.」
9 索引案:字林「涸, 竭也, 下各反」. 小顔云「涸, 讀與『沍』同. 沍, 凝也, 下故反. 春則解, 秋則凝」.
10 索隱先代反, 與「賽」同. 賽, 今報神福也.
권28. 봉선서(封禪書)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제사
漢興, 高祖之微時, 嘗殺大蛇. 有物曰:「蛇, 白帝子也, 而殺者赤帝子.」高祖初起, 禱豐枌楡社.1) 徇沛, 爲沛公, 則祠蚩尤, 釁鼓旗. 遂以十月至灞上, 與諸侯平咸陽, 立爲漢王. 因以十月爲年首, 而色上赤.
한(漢)나라가 흥기했다. 한 고조(漢高祖)가 빈천할 때 큰 뱀을 죽인 적이 있다. 어떤 귀신이 “이 뱀은 백제(白帝)의 아들로, 그 뱀을 죽인 자는 적제(赤帝)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고조가 처음 병사를 일으켰을 때, 풍현(豐縣)의 분유(枌楡)사당에서 제사 지냈다.
패(沛)를 점령한 후 패공(沛公)이라고 칭하고서, 곧바로 치우(蚩尤)에게 제사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 마침내 10월 파상(灞上)에 도달해 제후들과 함께 함양을 평정하고, 스스로 한왕(漢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10월을 1년의 처음으로 여겼으며, 붉은 색을 숭상했다.
二年, 東擊項籍而還入關, 問:「故秦時上帝祠何帝也?」對曰:「四帝, 有白、靑、黃、赤帝之祠.」高祖曰:「吾聞天有五帝, 而有四, 何也?」莫知其說. 於是高祖曰:「吾知之矣, 乃待我而具五也.」乃立黑帝祠, 命曰北畤. 有司進祠, 上不親往. 悉召故秦祝官, 復置太祝、太宰, 如其故儀禮. 因令縣爲公社.2) 下詔曰:「吾甚重祠而敬祭. 今上帝之祭及山川諸神當祠者, 各以其時禮祠之如故.」3)
2년째 되던 해에 동쪽으로 항적(項籍)을 침공해 병사들이 관중(關中)에까지 돌입하게 한 후, “옛날 진나라 때 제사 지냈던 상제들은 누구들인가?”라고 묻자, 좌우에서 “모두 4명의 상제들로서, 백제(白帝), 청제(靑帝), 황제(黃帝), 적제(赤帝)의 사당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조가 “나는 하늘에 5제(五帝)가 있다고 들었는데, 4제(四帝)만 있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고조가 “나는 안다. 이는 5제의 수를 채우려고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또한 흑제(黑帝)의 사당을 건립해, 이를 북치(北畤)라고 칭했다. 주관 관원이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천자는 친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진나라의 옛 축관(祝官)들을 불러 모아 태축(太祝), 태재(太宰)를 다시 두었으며, 의례도 전과 같이 했다. 또한 각 현에 관부(官府)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을 설치하게 명했다. 조서로써 “나는 사당을 중시하며 제사를 공경하고 중히 여긴다(敬重). 지금 상제 및 산천의 신령에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각기 규정된 시절에 의해 이전처럼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명했다.
後四歲, 天下已定, 詔御史, 令豐謹治枌楡社, 常以四時春以羊彘祠之. 令祝官立蚩尤之祠於長安. 長安置祠祝官、女巫. 其梁巫, 祠天、地、天社、天水、房中、堂上4)之屬;晉巫, 祠五帝、東君、雲中[君]、5)司命、巫社、巫祠、族人、先炊之屬;6)秦巫, 祠社主、7)巫保、族纍8)之屬;荊巫, 祠堂下、巫先、9)司命、10)施糜11)之屬;九天巫, 祠九天:12)皆以歲時祠宮中. 其河巫祠河於臨晉, 而南山巫祠南山秦中. 秦中者, 二世皇帝.13) 各有時(月)[日].
4년 후,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조서로써 어사에게 ‘지금의 풍현에 있는 분유 사당을 신중히 보수하고, 사계절에 따라 제사를 거행하며, 봄에는 양과 돼지로써 제사 지낼 것’을 명했다.
축관에게는 장안(長安)에 치우의 사당을 건립하라고 명했다. 장안에 사축관(祠祝官), 여무(女巫)의 제도를 설치했다. 그중 양무(梁巫)는 천, 지, 천사(天社), 천수(天水), 방중(房中), 당상(堂上)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진무(晉巫)는 오제(五帝), 동군(東君), 운중군(雲中君), 사명(司命), 무사(巫社), 무사(巫祠), 족인(族人), 선취(先炊)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진무(秦巫)는 사주(社主), 무보(巫保), 족루(族累)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형무(荊巫)는 당하(堂下), 무선(巫先), 사명(司命), 시미(施糜) 부류의 신령 제사를 담당하며, 구천무(九天巫)는 구천(九天) 신령의 제사를 담당하게 했는데, 모두 매년 시기에 맞추어 궁중에서 제사지냈다.
그중 하무(河巫)는 임진에 내려가서 황하의 신령에게 제사지내며, 남산무(南山巫)는 남산에서 진중(秦中)의 악귀에게 제사 지냈다. 진중의 악귀는 진(秦) 2세를 가리킨다. 이상의 모든 제사들은 모두 각기 규정된 시일이 있다.
其後二歲, 或曰周興而邑邰, 立后稷之祠, 至今血食天下.14) 於是高祖制詔御史:「其令郡國縣立靈星祠,15) 常以歲時祠以牛.」
2년 후, 어떤 사람이 ‘주나라가 흥기하자 태읍(邰邑)을 건립하고 후직(后稷)의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천하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조는 어사에게 조서로써 “각 군과 제후국, 그리고 현에 영성(靈星) 사당을 세우고, 항시 시기에 맞추어 소를 제물로써 제사를 거행하라.”라고 명했다.
高祖十年春, 有司請令縣常以春(三)[二]月及(時)臘祠社稷以羊豕, 民里社各自財以祠. 制曰:「可.」
고조 10년 봄, 주관 관원들이 천자에게 ‘각 현은 매년 봄 2월과 12월에 양과 돼지로써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지내며, 민간의 토지신에게는 각자 제물을 징수해 제사 지낼 수 있도록 명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허락한다.”고 말했다.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 한(漢) 효문제(孝文帝)의 제사
其後十八年, 孝文帝卽位. 卽位十三年, 下詔曰:「今袐祝移過于下, 朕甚不取. 自今除之.」
18년 후,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했다. 즉위한 지 13년 되던 해에 조서로써 “현재의 비축관(袐祝官)이 재앙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전가하는데, 짐은 이런 방법을 아주 반대하니, 지금부터 이 제도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始名山大川在諸侯, 諸侯祝各自奉祠, 天子官不領. 及齊、淮南國廢,1) 令太祝盡以歲時致禮如故.
당초, 어떤 명산대천은 제후국과 떨어져 있어서 제후국의 축관에게 각기 제사를 거행하게 하고, 천자의 축관은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제(齊)나라와 회남국(淮南國)이 아예 제사를 없애자, 태축에게 모두 옛날처럼 매년의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거행하라고 명했다.
是歲, 制曰:「朕卽位十三年于今, 賴宗廟之靈, 社稷之福, 方內艾安, 民人靡疾. 閒者比年登, 朕之不德, 何以饗此? 皆上帝諸神之賜也. 蓋聞古者饗其德必報其功, 欲有增諸神祠. 有司議增雍五畤路車各一乘, 駕被具;2)西畤畦畤禺車各一乘, 禺馬四匹, 駕被具;其河、湫、漢水3)加玉各二;4)及諸祠, 各增廣壇場, 珪幣俎豆以差加之. 而祝釐者歸福於朕, 百姓不與焉. 自今祝致敬, 毋有所祈.」
이해, 효문제가 제서(制書)를 반포해 “짐이 황제에 즉위한 지 금년으로 13년째 되었다. 그동안 종묘의 신령과 사직의 축복에 의지해, 국가는 안정이 지속되었고 백성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았으며, 또한 매년 풍년을 맞이했다. 짐이 부덕함에도, 어찌 이러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모두 상제와 여러 신들이 내린 은덕 탓이도다. 짐은 고대로부터 신령의 은덕을 입으면, 반드시 그 공로에 보답해야 한다고 들은 바 있어, 여러 신들에게 제사의례를 확대하고 싶다. 주관 관원들은 옹현의 5치(雍 五畤)에는 각기 수레 한 대 및 수레의 장식품을 추가하고, 서치(西畤), 휴치(畦畤)에는 우차 한 대, 우마 네 필 및 수레의 장식품을 추가하고, 황하(黃河), 추수(湫水), 한수(漢水)에는 각기 옥 2개씩을 증가하라. 또한 여러 사당들의 제사장소를 넓히고, 옥, 비단, 제기 등을 차등해 지급하게 하라. 지금까지 축관들이 모두 짐의 축복만 빌어 백성들은 축복을 받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는 축관들이 신령에게 제사를 거행할 때, 짐을 위해 기원하지 말라.”고 명했다.
魯人公孫臣上書曰:「始秦得水德, 今漢受之, 推終始傳, 則漢當土德, 土德之應黃龍見. 宜改正朔, 易服色, 色上黃.」是時丞相張蒼好律曆, 以爲漢乃水德之始, 故河決金隄,5) 其符也.6) 年始冬十月, 色外黑內赤,7) 與德相應. 如公孫臣言, 非也. 罷之. 後三歲, 黃龍見成紀.8) 文帝乃召公孫臣, 拜爲博士, 與諸生草改曆服色事. 其夏, 下詔曰:「異物之神見于成紀, 無害於民, 歲以有年. 朕祈郊上帝諸神, 禮官議, 無諱以勞朕.」有司皆曰「古者天子夏親郊, 祀上帝於郊, 故曰郊」. 於是夏四月, 文帝始郊見雍五畤祠, 衣皆上赤.
노(魯)나라의 방사 공손신(公孫臣)은 “원래 진나라는 수덕(水德)을 받았고, 지금의 한나라는 이를 계승했는데, 5덕(五德)의 순환에 의거해 추산해보면, 한나라는 마땅히 토덕(土德)을 받았으며, 토덕을 받은 감화로 바로 황룡이 출현할 것이옵니다. 마땅히 역법을 개정하고, 복식의 색깔을 바꾸며, 황색을 숭상해야 할 줄로 아룁니다.”라고 상소했다.
이때 승상 장창(張蒼)은 율력을 좋아해, 한나라가 바로 수덕의 시초이며, 황하의 제방이 터진 것이 그 징조라고 여겼다. 또한 매년 겨울 10월을 그해의 시작으로 하고, 색깔은 밖은 검은색, 안은 붉은 색을 숭상해야 수덕과 부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장창의 의견은 공손신이 말한 바와는 달라서 그의 견해는 묵살되었다. 그 3년 후, 황룡이 성기(成紀)에서 출현했다. 문제는 곧 공손신을 불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여러 유생들과 함께 역법을 개정하고 복식의 색깔을 개정하는 일의 초안을 세우라고 명했다.
그해 여름, 조서를 내려 “기이한 신물이 성기(成紀)에서 출현했으니, 백성들에게는 피해가 없으며, 매년 수확이 좋도록 할 것이다. 짐은 교외에서 상제와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니, 예관(禮官)들은 방안을 상의해, 허심탄회하게 짐에게 말하게 해라.”라고 말하니, 주관 관원들은 “옛날의 천자는 여름에 친히 교외제사를 거행했는데,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 지냈기 때문에, 이를 교사(郊祠)라고 칭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이해 여름 4월중에 문제는 수차례 친히 옹성의 5치 사당에서 제사를 거행했으며, 예복은 적색을 숭상했다.
其明年, 趙人新垣平以望氣見上, 言「長安東北有神氣, 成五采, 若人冠絻焉. 或曰東北神明之舍, 西方神明之墓也.9) 天瑞下, 宜立祠上帝, 以合符應」. 於是作渭陽五帝廟, 同宇,10) 帝一殿, 面各五門, 各如其帝色. 祠所用及儀亦如雍五畤.
그 다음해, 조(趙)나라 사람 신원평(新垣平)은 구름의 기운을 보고서, 황제에게 “장안의 동북쪽에 신기(神氣)가 나타났는데, 5채(五采)를 이루어, 마치 관면(冠冕)을 쓴 관리의 형상이옵니다. 어떤 사람은 동북쪽은 신명(神明)이 거주하는 곳이며, 서쪽은 신명의 묘지라고 말합니다. 지금 북쪽에서 신기가 나타났음은 하늘이 내린 길조이니, 마땅히 사당을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거행해야만 하늘에서 내린 그 길조에 부응하는 것이 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위양(渭陽)에 5제 사당을 건립했는데, 5제는 한 사당에 함께 있으며, 각각의 상제는 하나의 전당에 거하게 했다. 마주 보고 각기 5개의 대문이 있는데, 그 색깔들은 전내(殿內)의 상제와 일치하게 했다. 제사에 사용하는 것 및 모든 의례는 옹성의 5치와 같았다.
夏四月, 文帝親拜霸渭之會,11) 以郊見渭陽五帝. 五帝廟南臨渭, 北穿蒲池溝水,12) 權火擧而祠, 若光煇然屬天焉. 於是貴平上大夫, 賜累千金. 而使博士諸生刺六經中作王制,13) 謀議巡狩封禪事.
여름 4월, 문제는 친히 패수(覇水)와 위수(渭水)가 만나는 곳에 가서 참배하고, 위양의 5제를 찾아가 제사를 거행했다. 5제 사당의 남쪽은 위수에 접해 있고, 북쪽은 포지(蒲池)를 가로지르는 도랑이 있다. 봉화에 점화하고서 제사를 시작하는데, 그 불빛이 휘황찬란해 하늘에 비치었다. 그리하여 신원평을 상대부(上大夫)에 봉하고, 상으로 천금(千金)을 하사했다. 그리고 박사와 많은 유생들로 하여금 육경(六經) 중에서 채취해 「왕제(王制)」를 편찬하고, 순수와 봉선의 일을 상의하라고 명했다.
文帝出長門,14) 若見五人於道北, 遂因其直北立五帝壇,15) 祠以五牢具.
문제가 장문(長門)에 나갔다가, 마치 다섯 사람이 도로 북쪽에 서있는 듯해, 그 자리에 5제의 단을 세우고, 다섯 마리의 송아지를 제품으로 제사 지냈다.
其明年, 新垣平使人持玉杯, 上書闕下獻之. 平言上曰:「闕下有寶玉氣來者.」已視之, 果有獻玉杯者, 刻曰「人主延壽」. 平又言「臣候日再中」.16) 居頃之, 日卻復中. 於是始更以十七年爲元年, 令天下大酺.
그 다음해, 신원평은 사람에게 옥잔을 휴대하고 천자의 궁전에 가서 글을 올리고 진헌하라고 시켰다. 신원평은 그자가 진헌하기 전에 천자에게 “보옥의 기운이 천자의 궁궐 안에 퍼져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각처에서 천자에게 보내온 진헌품들을 살펴보니, 과연 옥잔을 바친 자가 있었으며, 그 상면에 ‘인주연수(人主延壽)’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원평은 또 “신이 추측하기로, 태양이 하루에 두 번 나타나 두 번의 정오를 맞이할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서 태양이 정오를 지나다가 동쪽으로 역행해, 다시 한 번의 정오가 출현했다. 그리하여 문제 17년을 원년으로 바꾸고, 천하에 성대한 축하연회를 행하게 명했다.
平言曰:「周鼎亡在泗水中, 今河溢通泗, 臣望東北汾陰直有金寶氣, 意周鼎其出乎? 兆見不迎則不至.」於是上使使治廟汾陰南, 臨河, 欲祠出周鼎.17)
신원평이 천자에게 “주나라의 정(鼎)이 사수(泗水)에 빠진 후, 오늘에 이르러 사수의 강물이 넘치고 있는데, 신이 동북쪽의 분음(汾陰)을 바라보니 금보(金寶)의 기운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그 주나라의 정이 나오려는 징조입니다. 징조가 보이는데도 이를 찾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스스로 세상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천자는 분음의 남쪽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제사를 통해 주나라 정의 출현을 기원했다.
人有上書告新垣平所言氣神事皆詐也. 下平吏治, 誅夷新垣平. 自是之後, 文帝怠於改正朔服色神明之事, 而渭陽、長門五帝使祠官領, 以時致禮, 不往焉.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신원평이 말한 여러 가지 운기(雲氣)와 신령의 일은 모두 사기’라고 아뢰었다. 이에 신원평을 사법 관원에게 심사하게 해, 그를 죽이고 그 종족을 모두 멸했다. 이후, 문제는 역법, 복색, 신령의 일을 개정하는 데에 태만했으며, 위양과 장문의 5제 제사는 사관에게 기일에 맞추어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는, 다시는 친히 가지 않았다.
明年, 匈奴數入邊, 興兵守禦. 後歲少不登.
다음해, 흉노(匈奴)가 수차례 변경을 침입해, 병사를 일으켜 방어하게 되자, 그 후 몇 년 간 약간은 흉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