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묘길

[느티나무]

어머님이 병원에 계신 동안 집이 비어 있으니 자연 고향을 찾게 되지 않는다.

산소 벌초는 친척분이 매해 맡아하고 차례는 서울 시숙이 지내니까 더욱 고향에 갈 기회도 없게 되었다.

이번에 남편이 추석 전에 성묘를 다녀오고 싶다는 거다.

그 동안 산 사람 챙기기에도 바빠 돌아가신 조상한테까지 신경을 쓰지 못한 건 사실이다.

아버님 살아 계실 적엔 부산에서 고향까지 꼬박 네 다섯 시간을 운전해 일주일에 한번씩 가기도 했다.

초보 운전인 남편은 고속도로에서도 시속 80으로 밟아가며 휴게소마다 들려 쉬는 통에 그건 여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그 덕분에 시골길 구석구석 구경을 할 수 있었고 나의 네비게이션 능력도 많이 배양되어 한때는 길의 여신이라 불렸다.

처음 가는 낯선 곳에서도 길을 잘 찾아내는 식스센스가 생겨 일본에 배낭 여행을 갔을 때도 나가사끼에서 실력 발휘를 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고향까지 새로운 고속도로도 생겨 경주에서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는데도 부모님이 안 계신 고향은 마음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며칠 전 강호동이 나오는 '1박2일' 에 고향 동네가 소개되었다.

더구나 시조부가 세운 양조장이 나오는 통에 남편 친구들한테서 전화까지 받았다.

예전엔 장날마다 돈을 푸대로 담아 다락에 던져놓고 세지도 않았다는 전설같은 얘기도 있었지만  사향길에 들어서면서 시댁 지분도 많이 줄어 지금은 우리 양조장이라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매스컴이 얼마나 대단한지 방송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여기 저기 '1박2일' 촬영지라는 현수막이 나붙어져 있었다.

고향엔 조상 산소 뿐 아니라 찾아뵈어야 할 친척 어른들이 많다. 일일이 다 찾지 못하더라도 아버님의 사촌형인 큰아버지와 읍내에 사시는 숙모에게는 꼭 인사를 드려야한다길래 미리 용돈 봉투를 준비했는데도 남편은 다시 빵집에 들려 롤케익을 몇 상자나 들고 나온다. 벌초해 준 분이랑 친구 일용씨도 퇴원해 집에 와 있다니 거기도 찾아봐야 한단다.

"여보, 우리 돈 많이 벌어야겠다."  나오려는 잔소리를 그냥 한숨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먼저 아버님 산소가 있는 뒷산에 올랐다. 깨끗이 벌초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벌이라던가 뱀이 출몰할까 걱정했던게 기우에 불과했다. 뒷산을 영모대라 부르는데 고조부의 산소도 그곳에 있다. 남편은 먼저 산신에게 술을 올려야 한다며 산소 한쪽 구석에 만들어 놓은 제단 위에 포랑 술잔을 올린다. 하느님 믿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는 게 못마땅하긴 해도 그건 성묘 예법으로 그 집안에서 지켜오는 것이니 뭐랄 수도 없어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랑 할머니에게도 한잔 올리고 절을 올렸다. 원래 할머니 산소는 지관이 정해준 대로 멀리다 썼는데 아버님이 찾아다니기 귀찮다고 이장을 하셨다나보다. 살아 생전에 서로 의가 좋지 않아 죽어서는 만나지 말자고 했던 모양이지.  함부로 산소를 옮기는 게 아니라는데 그래 그런지 이장 후에 집안에 우환이 많아졌다고들 한다.

다음은 밤산. 그 산엔 증조부와 몇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시동생묘가 있다.

시동생은 오랫동안 당뇨를 앓았는데 죽음 임박해서 묘자리를 보러 다닐 때 나도 따라갔었다.

지관 말로는 그 산엔 산신을 모신 자리 밖에 명당이 없다나. 그런데 내 눈에 키 큰 오동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거기서 내려다 보니

앞 냇가가 보이고 전망이 그만이었다. 남편에게 여긴 내 자리니까 잘 봐두라고 말해주었다.

시동생의 장례식때 그 산 아래 사람들이 길을 막아 서며 운구를 못한다고 난리를 피웠다. 까닭인즉 증조부때 그 산에 산소를 만들고나서 그 마을 여자 하나가 애기를 낳다 죽었다나. 말도 안되는 억지지만 그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결국 시동생 묘터로 잡아놓은 곳에 가지 못하고  내 자리라고 잡아놓은 오동나무를 뽑고 그 자리에 산소를 정했다는 걸 나중에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어떻게해서 하필 그 큰 산에서 내가 맡아놓은 자리로 간 걸까?

살아 생전에도 내게 모든 걸 의탁하더니 죽어서도 형수가 정해준 자리로 가고 싶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그 집에 좋은 일이 자꾸 생긴 걸 보면 그곳이 명당은 명당이었나보다. 좀 아깝긴해도 고생만 하고 간 시동생이 이제 편히 쉴 수 있다면 나도 좋다.

마지막으로 물건너 산에 갔다. 그 산엔 조부와 조모의 합장묘가 있다.

그 할머니는 유별나게 내 남편을 좋아하셔서 돌아가실 때 유언도 "성수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되었으니 찰밥 해주라"는 거였단다.

결혼 후 처음 산소에 인사갔을 때 자기 할머니에겐 두배로 절을 시켰던 기억이 난다.

그 땐 집에서 일하던 애가 제수를 싸들고 따라 왔는데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건넜었다. 물이 많이 불어나면 건널 수 없어 개천 건너편 모래 사장에서 절을 하기도 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멋진 돌다리가 생기고 산 바로 밑에 도로가 잘 닦여져 차량 통행도 제법 많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정말 많이도 변했다.

짧은 시간에 여러 군데를 돌다보니 벼락치기로 해치웠지만 묵은 숙제를 한듯해 기분이 홀가분했다.

돌아오는 길엔 병산서원에 들려 높은 누각에 올라 잠시 피곤한 몸을 쉴 기회도 있었다.

조상님들이 수고했다고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주신 것만 같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나이인데 가끔씩은 조상님들을 찾아뵙고 그분들이 가 계신 곳 얘기도 좀 들어보고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루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

[소구미인]

꼭 드라마 보는것 같아요..."토지"?.ㅎㅎ

[와봐라]

얼마 후 느티나무 아래 란 책 발간할 것입니다.

[김미경]

언제나 멋진글~~~~~~~~~감사해요^^* 수필가로 등단 하심도 괜챦을듯 합니다. 아님... 수필집 한번 내 보시죠?

[느티나무]

어려서부터 일기를 썼는데 최근엔 매일 카페에서 노느라고 일기를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기 대신 끄적여 보았어요. 수필집이라... 제 환갑때 김미경님이 한권 내주실래요? ㅎㅎㅎ

[엉또]

고향얘긴 늘, 풍요로운거 같애요.. 느티나무님 글 재밌으면서, 가슴 짠하게 하는 여운이 있어 좋아요... 감사

[belly진]

추석이 곧 다가옵니다. 늘 이맘때면 각 집안마다 선산이나 부모님 묘소에 찾아 가서 벌초를 하고 사정에 따라 벌초해주는 대행업을 통해서도 하게 되는 일들을 주위에서 보고 듣게 됩니다. 성묘길 다녀 오시는 길에는 병산서원에 들려 잠시 쉬기도 하시고 좋으시네요. 일을 여행처럼~!!! 말이 되나 모르겠습니다요 ㅎㅎ

[전광석화]

항상 즐독 하고 있어요~~ 다음주제는 주식에 대하여 적는것은 어때요? 지도 주식이 취미거든요~~

[느티나무]

저같은 개미한테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신가요? 차라리 전광석화님이 주식 강의를 한번 올려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