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경제대 교수, 네타냐후 우파 정권에 '제재' 제안
이-팔 양측의 평화세력 지원하고, 전쟁세력 벌 줘야
"하마스 폭력 문제지만 갈등의 핵은 유대인 정착촌"
EU,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 묵인하며 사실상 조장
이스라엘 수출 35% 받는 유럽…무역 무기화해야
기실, 서구 문명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도구를 갖고 있다.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해결을 위한 정치적 과정을 시작하게 할 수 있는 도구다. 동시에 지난 7일 하마스의 선제공격을 야기한 이스라엘의 75년 폭력을 제한할 수단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북부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 100만 명에게 소개령을 내린 1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서 한 여성이 '팔레스타인에서 손 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2023.10.15. AFP 연합뉴스
유엔 안보리에서 하마스 비난 결의 채택을 시도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인도적 지원 제공 정도로 만족하는 것은 국제사회 차원의 직무 유기다. 조 바이든을 비롯해 역대 미국 행정부가 해온 작태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도 주요국 정상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마스를 규탄하고 팔레스타인 주민 학살에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참극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걸 세계는 이미 알고 있다. <21세기 자본>을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유럽이 손에 쥐고 있지만, 쓰지 않는 '무기'의 존재를 일깨웠다.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는 14일 르몽드 기고문에서 "지금이야말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 진영을 지지하고, 전쟁 진영을 징벌해야 할 때"라면서 유럽연합(EU)이 타락한 이스라엘 정권을 상대로 행동에 나설 것을 역설했다. 하마스의 잔인한 테러와 이후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탓에 오랜 분쟁의 정치적 해결이 기로에 처했다는 진단을 토대로 제시한 해법이다. 피케티는 EU가 그동안 이스라엘 정부와 타협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조장했다면서, "이제는 유럽이 '무역 무기'를 동원할 때"라고 강조했다.
폭력의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면서 많은 세계인이 분노하는 지금, 경제학자다운 분석에서 도출한 해법이다.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세계는 이스라엘 편과 팔레스타인 편으로 분열돼 서로 비난하지만, 딱히 해법을 찾지 못해온 터이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진입이 임박한 가운데 1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의 하버드대 교정에서 학생들이 팔레스타인들의 안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3.10.23. AFP 연합뉴스
때론 양비론이 정확한 현실 진단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중이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우파가 모두 상대를 절멸시키려 하지만, 비중이 다르다. 피케티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하마스가 지난 7일 펼친 공격을 테러로 규정하고 그 야만성과 폭력성을 비난했다. 하지만 이를 초래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극우 정권을 거악(巨惡)으로 지목했다. 그가 이스라엘 우파 정권에 대한 무역 제재를 대안으로 제시한 까닭이다.
피케티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정치적 해결과 이를 위해 유럽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논점에서 시작했다. 이를 위해 많은 이들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생각이라고 백안시하는 '두 국가의 공존' 해법을 다시 소환했다.
'모두를 위한 땅(A Land for All)'으로 상징되는 두 국가 해법은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이 각각 독립국가를 유지하면서 평화로이 어울려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 독-불 화해를 통해 유럽통합의 동력을 마련한 유럽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제안이었다. 마침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및 아랍인 인구는 각각 700만 명 정도이니 1400만 명이 조화롭게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마스와 폭력과 이스라엘의 더 큰 폭력이 부딪히는 지금, 아무도 두 국가 해법을 말하지 않는다. 피케티는 모두가 잊고 있던 두 국가 해법을 다시 검토하고 정치적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 특히 유럽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강조했다.
15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가자지구 중심부. 2023.10.15. 로이터 연합뉴스
피케티가 간파한 것처럼 '재앙의 핵'은 끝 간 데 없이 확대되는 유대인 정착촌이고, 이를 우악스럽게 관철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일상적으로 퍼붓는 폭력이다. 걸핏하면 가자지구에 수도와 전기를 끊고 통행을 제한, 모든 인권선언이 규정한 기본권을 억압하고 있다. 테러 용의자를 잡는다는 구실로 드론을 띄우거나 총과 대포를 발사한다. 하마스를 비롯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저항은 거의 끝난 것으로 평가됐다. 네타냐후 정부가 만족했을 시점에 발생한 것이 하마스의 선제공격이었다.
유럽연합(EU)은 좌파건, 우파건 이스라엘 정부와 타협하면서 결과적으로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조장했다. 피케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내에서 특히 젊은 층에서 생기 있고, 혁신적인 좌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렇다고 좌·우파 갈등으로 몰아간 것은 아니다. 이·팔 모두에서 평화를 지향하며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는 세력과 끝없이 전쟁을 획책하는 세력으로 구분했다. 평화 세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EU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과 폭력을 묵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피케티 칼럼 전문.
이스라엘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이제 평화 진영에 힘을 실어주고 전쟁 진영을 징벌해야 할 시점이다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교수
하마스 테러 작전의 잔혹성과 이후 진행 중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정치적 해결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건설적인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이 할 수 있는 역할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한쪽은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고 있고, 다른 쪽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시민을 제거하려고 한다. 최근 며칠 동안의 살인과 인질 억류를 통해 가장 야만적인 형태를 보인 것처럼. 많은 사람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두 국가 해법'을 여전히 믿을 수 있을까. 이중 국가를 여전히 꿈꿀 수 있을까. 이제는 두 주권국이 언젠가 조화롭게 살아갈 영속적인 연방 구조를 상상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러한 해법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민운동에 의해 갈수록 자주 소환된다. 두 개의 국가, 하나의 국토를 의미하는 '모두를 위한 땅(A Land for All)'의 이미지로. 외국에서 너무 자주 무시되는 이러한 논의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 영토에는 요르단강 서안의 330만 명과 가자지구의 220만 명 등 대략 5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 인구는 얼추 900만 명이다. 유대인 700만 명과 아랍인 200만 명이다. 모두 합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에는 1,400만여 명이 살고 있다. 절반은 유대인이고, 절반은 무슬림이다. 소수의 기독교도(약 20만 명)도 있다.
바로 '모두를 위한 땅'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두 공동체는 규모가 거의 비슷하다. 과거의 군사적 상처로 남겨진 자의적이고 얽힐 대로 얽힌, 국경 너머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각각 생각할 역사적, 가족적, 정서적 근거가 충분하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언젠가 1400만 명의 주민이 모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모두 누리며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이중 국가와 보편적 국가를 즐겨 상상할 것이다. (두 공동체의 특히 청년층에게 현실과 그 지속성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테러리스트들의 비열한 전략이 그 가능성을 절멸시키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신뢰 재건의 먼 길을 가야 한다.
지난 9월 13일 레바논 시돈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쫓겨난 한 소녀가 다른 캠프로 이송을 기다리며 길가에 앉아 있다.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표정이 해맑다. 2023.9.13. AP 연합뉴스
유럽의 영감
'모두를 위한 땅' 운동은 처음부터 두 국가의 공존을 제안했다. 기존 유대 국가와 1994년 설립된 '팔레스타인 당국(자치정부, PA)'을 대체할 팔레스타인 국가의 공존을 말한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2012년 이후 유엔 기구 2곳에서 옵서버 지위를 획득해 이미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궁극적으론 (독립국으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전면적이고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두 국가가 연방 구조로 묶여 유럽연합(EU)처럼 이동 및 거주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게 새로운 점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 정착촌의 이스라엘인들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의 법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계속 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시행되어 온 팔레스타인 토지에 대한 강제수용이 중단돼야 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일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하고, 이스라엘의 법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이스라엘 땅에도 거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대 쪽 나라에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지방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제안의 작성자들은 어려움을 감추지 않으면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법과 민주주의를 통해 프랑스와 독일 간 전쟁과 대량 학살로 점철된 한 세기를 끝낸 유럽연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또 1995년 설립된 보스니아 연방의 복잡한 사례도 거론한다. '모두를 위한 땅' 제안은 사회, 경제적 발전의 역할과 영토에 따른 차별도 강조한다. 평균 월급을 보면 가자지구는 500유로(약 71만 원)이지만 이스라엘은 3000유로(약 426만 원)이다. 두 국가의 연방은 공동의 노동법과 물 공유 및 공공·교육·보건 인프라를 위한 재정을 마련해야 한다.
14일 가자지구 북부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건물들 위로 연기가 치솟고 있다. 2023. 10.14 [AFP=연합뉴스]
정치적 해결
이 모든 변화의 기회가 있기는 한 건가? 과거 팔레스타인인들을 분열시키고 불신을 조장하기 위해 하마스를 활용했던 이스라엘 우파는 이제 그 테러리스트 조직을 파괴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다. 파괴한 뒤에도 팔레스타인 영토의 뚜껑과 망루를 폐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우파가 정교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형태의 윤리적, 영토적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를 향해 더욱더 깊이 들어갈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중재자를 찾아 정치적 과정을 재개해야 할 것이다.
바로 나머지 세계, 특히 이스라엘 수출의 35%를 받아들이는 유럽이 역할을 수행해야 할 지점이다. (미국은 30%를 수입한다) 유럽연합(EU)이 무역 무기를 동원, 타락한 짓거리를 하는 정권보다 정치적 해법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에 더 우호적인 규칙을 제공하겠다고 분명히 말해야 할 시점이다. 유럽연합은 이스라엘 우파에게 같은 무역 규칙을 보장하는 것으로 사실상 유대인 정착촌을 격려해 온 꼴이다. 숱한 국제법 위반에 눈을 감고, 단기 금융 이익의 특혜를 줌으로써 유럽 연합은 이스라엘 좌파를 약화하는데 공헌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활기차고 혁신적인 좌파가 있다. 그들은 갈수록 민족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이스라엘 우파와 타협하는 북쪽, 남쪽 정부들의 무관심을 마주하면서 스스로 외로이 서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지금이 바로, 평화 진영에 힘을 실어주고, 전쟁 진영을 징벌해야 할 시점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020년 2월 6일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열린 자신의 저서 '자본과 이데올로기' 영문판 출간 기념 강연에서 청중의 질문을 듣고 있다. 2020.2.6.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