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백산정상..
돌아본 함백산..
주목 잎은 상록성의 선형으로 붉규칙하게 배열되며 앞 뒷면에 두 줄의 연한 황색의 기공조선이 있고 잎은 2~3년간 가지에 달려있다. 꽃은 자웅일가화로 4월에 피어 암꽃은 녹색이고 수꽃은 갈색이다. 9월에 붉은 열매가 컵 모양으로 달리며 갈색의 종자가 들어있다. 과실에 독이 있어 먹으면 설사를 한다. 가지의 심재가 유달리 붉다. 강한 음수로 전정시에 외관상의 부드럽게 나오는 새순이 아름답다. 원산지는 한국, 일본, 만주, 아시아 동북부다.
정암사 입구.. 산행도.. 정암사(淨岩寺)
태백산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정암사 유래
석가세존의 정골사리, 치아, 불가사, 패엽경 등을 전수하시어 동왕 12년에 귀국하여 14년(을사년)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쌓고 부처님의 사리와 유물을 봉안하였다.
서해용왕이 용궁으로 모시고 가서 주신 마노석으로 탑을 쌓은 것이라 하여 수마노탑이라 한다. 금탑과 은탑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귀한 보물에 탐심을 낼까 염려하여 영구히 보존키 위해 비장(秘藏)하셨다 한다. 이러한 성지를 보궁이라 일컫는다.
일주문(一柱門) 둥글게 다듬은 정평주초위에 배흘림이 간한 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좌우 측면을 풍판으로 마감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현판의 글씨는 탄허스님이 썼고, 재질은 느릅나무하고 한다. 1977년 중창되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먼저 넉넉한 웃음을 짓고있는 포대화상이 중생들을 맞이하고 산 중턱에 수마노탑이 보인다..
포대화상.. 늘어진 배에 길상의 모습을 한 포대화상은 지팡이에 자루를 매달고 다니면서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자루에 담고 포대에서 웃음과 기쁨을 내주시는 스님이다.
목우당(牧牛堂) 템플스테이 수련관이다.. 최근에 새로 지은 듯
삼성각과 자장각이 나란히... 삼성각(三聖閣) 금대봉 자락에 자리잡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자그마한 맞배지붕 집이다. 1978년 중창당시 계류에 돌다리를 놓으면서 이전의 나무다리를 해체할 때 나온 나무를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그 기둥이 모두 박달나무라 한다. 안에는 칠성, 독성,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모두 1964년 석정(石鼎), 수안(殊眼) 두 금어( 金魚)에 의해 그려졌다. 자장각(慈藏閣) 삼성각과 나란히 자리잡은 사방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현재 정암사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전각이며, 안에 모셔진 자장스님 진영은 1978년 金魚로 이름있던 일섭(日燮)스님의 마지막 제자 조정우씨가 그렸다. 통도사에 전해지던 자장스님의 진영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눈이 컸다는 구전에 따라 눈을 약간 크게 그렸다고 한다. 이때 두 점을 그려 하나는 여기 모시고 다른 하나는 월정사에 모셨다 한다.
관음전(觀音殿) 금대봉 자락의 정면 아래 정남향으로 앉아있는 정면 6칸, 측면 4칸 총 44평되는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며 어느 때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큰방에는 높이 약 47cm 되는 관음보살 좌상을 안치하였다. 다른 전각들에 비해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비밀은 5월초까지 골짜기의 눈과 계류의 얼을이 채 녹지 않을 정도의 드센 추위를 조금이나마 쉬이 건너려는 선배들의 지혜가 집의 구조에 반영된 것이다.
육화정사(六和精舍) 정면 7칸, 측면 4칸 총 62평되는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중창 당시 함께 올린 단청이 차분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건물과 잘 조화되어 있어 상당히 큰 건물임에도 거슬림이 없다. 현재 사무실과 공양간으로 사용중이며 1977년 중창되었다.
일심교.. 일심교를 건너 수마노탑까지 10분이 소요된다고 되어있는데 서두르면 5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수마노탑... 정암사 경내에서 약 100m쯤 위에 떨어진 적멸궁 뒤편,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위에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부처님 진신사리 탑이다. 이 탑은 거대한 편은 아니나 형태가 정제되고 수법이 정교하다. 옥개 우각 추녀 밑의 상향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잃지 않은 것이고, 청동제 상륜의 투각수법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화문이나 안상문 등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오래 전부터 각층의 모전석이 결실되거나 파손되어 보물로 지정할 때부터 보수 문제로 논의되어 오다가 1972년 전면 해체 복원되었다. 해체수리 과정에서 3층 옥신부터 기단부까지의 사이에서 5개의 탑지석이 발견되고, 기단부 최하단석 밑의 적심부에서 청동합, 은제외합, 금제외합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탑지석에 의하면, 이 탑의 현재 모습은 1653년의 중건 때 갖추어진 것이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 본 정암사 전경.. 열목어 서식지인 정암사계곡 (천연기념물 제73호) 열목어는 극지송어과에 속하는 종으로 담수어 중에서는 대형종이어서 몸 길이가 70~100cm에 달한다. 입은 작고 머리, 몸의 옆면, 등지느러미, 기름지느러미 등에는 눈동자보다 작은 자갈색의 반점이 흩어져 있다. 물이 맑고 오염되지 않고, 수온이 한 여름에도 20°C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성어가 숨을 수 있고 월동할 수 있는 심연부가 있으며, 물이 완만하게 흐르고 자갈이 깔려 있어서 산란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고, 물에 풀려있는 산소의 함량이 10ppm안팎이 되는 환경 조건을 갖춘 곳이 아니면 열목어는 살 수 없다. 열목어는 한국 특산종은 아니나 희귀종이다. 이 정암사 계곡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함께 열목어 분포상 세계 최남단 즉 남한지(南限地)이다. 이 때문에 본종의 절멸을 막기 위하여 계류 주변의 삼림과 함께 서식지를 보호하게 된 것이다.
범종루(梵鍾樓) 종각에 걸린 범종은 1977년 주조하였으며 종 표면에는 시주자의 이름대신 아래와 같은 짤막한 종명을 새겼을 뿐이다. 隨叩隨鳴 치면 치는대로 울리지만
극락교.. 극락교를 건너면 먼저 자장율사 주장자가 서있고 안쪽에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 주장자(慈藏律師 拄杖子) 이 주목은 약 1300년전 자장율사가 정암사를 창건하시고 평소 사용하시던 주장자를 꽂아 신표로 남기신 나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가지 일부가 회생 성장되고 있어 자장율사의 옛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적멸궁(寂滅宮) 적멸궁은 정암사 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불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불상대신 적멸보궁의 뒤 산중턱에 석존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수마노탑이 있다. 건물의 양식은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진 전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흔히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정암사에서는 적멸궁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번뇌가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경계의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의미다. ◈◈◈ 정암사 창건설화 ◈◈◈
세연(世緣)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 자장율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 곳에 주석하면서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을 한번 더 친견하길 서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스님은 중국 오대산 북대에서 범오로 게송을 읊던 스님을 꿈에 만났다.
놀라 잠에서 깬 자장 스님은 날이 밝자마자 대송정으로 달려가 문수보살을 염했다. 『자장 스님, 잘 찾아오셨군요. 소승은 문수보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스님은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이 어느 결엔가 사라졌다. 이튿날 자장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태백산을 헤매던 스님은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사흘간 산 속을 헤맨 스님은 드디어 칡넝쿨이 엉켜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날 밤 자장 스님의 꿈에 뱀이 나타나 울면서 말했다.
경을 독송하기 7일째 되는 날, 구렁이들은 해탈하여 죽었다. 구렁이들을 화장하여 천도한 후 그 자리를 파보니 과연 금은 보화가 가득 묻혀 있었다. 그 후 스님은 산정에 탑을 세우려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세우면 쓰러지고 또 세우면 쓰러졌다. 스님은 백일기도에 들었다. 기도가 끝나는 날 밤, 눈 덮인 산 위로 칡 세줄기가 뻗어 내려와 지금의 수마노탑(보물 제410호), 적멸보궁, 법당자리에 멈추니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하여 정암사를 속칭 갈래사라 불렀고 갈래란 지명도 생겼다.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스님은 정안사 불사에 전력을 다하면서 문수보살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방포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절 앞에 와서 자장율사를 만나기를 청했다. 괘씸하게 생각한 시봉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시자는 늙은 거사가 하도 강경하게 말하므로 하는 수 없이 자장 스님에게 사실을 전했다.
자장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거사가 사라진 남쪽 산으로 올라갔으나 아무 흔적도 없었다.
참회할 것이니 3개월간 내 몸을 잘 보관토록 해라.』 말을 마친 자장은 조용히 바위에 앉아 입정에 들어갔다. 그 후 3개월이 되어도 신체와 안색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데 자장은 깨어나질 않았다. 대중들은 이제 그만 다비식을 하자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백일이 되는 날,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스승이 열반에 들었는데 왜 다비를 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쳐 제자들은 자장이 입정에 든 바위에서 다비식을 가졌다. 식이 끝나자 공중에서 자장율사의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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