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의 개념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란 말의 본래적 개념은 다양한 문화의 모자이크 현상을 이루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지금은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이 그 의미가 많은 변천과정을 거쳐 복음과 삶의 자리인 전체 상황과의 관계로 포괄하는 용어가 되었다. 기독교의 상황화는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곳, 기독교 역사가 오랜 서구 사회에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문화와 자연환경이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으므로 변동한 상황에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상황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타문화권 복음 전도에 관련된 것으로 보고 논의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전도 방법, 성경번역,교회 정치,교회당 건축 양식,예배형태,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관습의 수용문제,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토착적 신학의 형성, 신학교육과 지도자 육성 방법,교회와 선교회와의 관계정립 등 문제들과 관계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토착화를 주로 신학의 토착화와 관련된 것이다.
II.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문제는 복음과 문화와의 만남, 곧 복음과 그것을 수용할 사람들의 문화 전반과의 관계성 정립의 문제라 말할 수 있다. 토착화란 복음이 문화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복음을 감정적 차원과,평가적 차원에서 정확하고도 쉽게 전달되어져 기대한 결과를 효과적으로 산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토착화라 말한다. 모든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누구든지 자신의 문화를 바꾸지 않고는 그 안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다. 타문화권 전도자들은 그 문화를 적절히 사용하여 복음 진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용적이고 보다 더 저항적인 문화가 있긴 하지만,그것으로 문화와 우열을 말할 수는 없다. 복음의 수용성과 저항성도 늘 변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문화들 가운데는 완전한 문화도 없으며,저주 받아야 할 아주 못쓸 문화도 없다.
인간은 주어진 사회적 및 자연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문화로 만든다. 그리하여 그 문화러 공유하며,전달하고, 변화시킨다. 모든 문화는 타락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이 반영된다. 그러나 문화 가운데는 긍정적인 것들도 많이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삶을 가능하게 하고 가치 체계와 어느 정도의 질서로 제공한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모든 문화에는 인간의 이기성이 만든 악한 구조와 관습들이 있다. 노예 제도,인종차별,일부 다처,억압과 착취,매음,마약,전쟁 등이 바로 모든 문화가 지닌 병적 요소이다. 복음은 이런 악습들을 정죄하며 배격한다. 그러나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복음적인 방법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의 토착화는 문화의 긍정적인 면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활용할 뿐만 아니라, 비인간화 시키는 악한 구조와 폐습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예언적 기능은 복음 진리를 대항하는 신념과 가치체계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복음이 비성경적인 원리와 가치를 수용할 때, 복음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비판적인 복음의 토착화를 시도했던 아프리카에서는 이교주의와 혼합된 독립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이교주의 (Christopa- ganism)라 부른다. 토착교회가 되는 것은 이교의 원리와 가치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복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양자간의 관계 정립을 위해 씨름해야 한다.
III. 선교란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진전될 때 복음의 씨를 지구상의 모든 문화 토양에 심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새로운 교회가 형체를 갖게 되며,갓난 아이처럼 의존적인 존재가 출생하게 된다. 선교에 의해 탄생된 새로운 교회는 그 문화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되며, 그 문화의 순수한 부분으로 여거지게 된다. 동시에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살며,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충분히 자립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토착 교회이면서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선교 사역의 열매로써 이런 토착교회들이 이 지구상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토착 교회를 통해 그들의 민족이 복음화되며, 그 교회는 다른 문화권에 그들의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원하신다. 토착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문화 안에 뿌리를 내려 문화 상황에 적절한 독특한 형체를 이루면서 선교 사역으로 세워지게 되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그리고 성령의 조명안에서 그들의 문화 상황에 적절한 성경 번역,교회 정치,예배 형태,지도자 양육,전도 방법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토착화 교회가 말할 때 그것을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과로 자치 자급,자전의 능력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백여년 전에 헨리 벤(Henry Venn,영국교회 선교회 총무)은 선교의 목표로 자급(Self-supporting),자치 (Self-governing),자전(Self-propagation)의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토양(문화,종족)에 복음의 씨를 심어 토착 교회로 세우는 것이다.
맥가브란(Danald A.Mcgavran)박사의 "교회성장"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선교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는 모든 문화권에 교회를 세우며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도바울이 보여준 선교 사역의 모본드 가능한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여러 곳으로 찾아가서 자급,자치,자전하는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바나바 또는 실라와 함께 때로는 두세 사람과 함께 선교 팀을 이루어 선교여행을 했다. 그는 지중해 연안지역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한다.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한 곳에서 2년 이상 머문적이 없다.때로는 몇 주간 밖에는 머물지 못했다. 그러나 각처에서 그가 떠날 때는 언제나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역 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3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자치하는 교회로 세울 수 있었다. 그의 선교 사역에서 새로워진 교회들을 위하여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에 사역자나 제정적인 지원을 요청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여러 곳에서 수행되고 있는 선교 사역의 양상은 신약 성경적 방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이 10년,20년,또는 50년 이상 일을 해왔지만 여전히 교회가 자립하지 못하고있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파송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 요청과, 사역자들의 증원을 요청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착교회를 세우는데 실패한 요인으리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착 교회를 세운다는 선교 목표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Melvin I.Hodges는 그의 책[The Indigenious Church]에서 선교사들이 토착교회로 세우는데 실패한 원인은 여섯가지로 꼽았다. 첫째로,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둘째로, 토착교회 설립 대신에 선교 센타를 세우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세째,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너무 많이 파송되어 일자리를 다 차지하므로써 선교지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위치와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네째, 선교지 주민들의 심리학과 방법을 선교사들이 수용하는데 실패하고 모든 일을 자기 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다섯째,과다한 선교 자금이 들어와 그것을 의존케 하므로 영적인 약화를 초래하여 새로운 회심자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섯째, 회심자들을 너무 어리게 보았으며, 무책임한 자들로, 신뢰할 수 없는 자들로 보고 과잉보호한 나머지 그들의 활기찬 믿음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헌금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였으며, 그들도 전도지들을 활용하지 못했다.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가 선교사들을 의존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선교사들과 선교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그 결과는 토착교회 발전을 크게 저해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선교지 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사나 선교비로 의존하기 보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므로 그들의 교회를 자립하는 교회로 발전시킬 수 있게 해야한다. 전도방법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전도에 있어서 토착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했으며 시도했다. 서구 선교사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전도할 때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다년간의 연구경험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형성되어진 복잡한 철학적 신학적 표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학적 진리를 쌓으려면 그들의 언어와 생활방식으로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맥가브란 교수는 하나의 재미있는 예화를 소개한다. 20세기 초엽에 어느 선교사는 불신자들이 흔히 "그리스도인이 될 때 얻게 되는 10가지 이익"이라는 전도지를 그 지방어로 만든적이 있었다. 그 10가지 요점을 모든 마을의 회중들에게 암기하게 했다. 그것은 효과적인 전도의 무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얻게 되는 10가지 이익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불신자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전도 방법의 토착화이다. 그곳의 모든 농부들은 많은 자녀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의 성적 타락이 매독과 임질 등의 성병을 창궐시켰으며,그것이 높은 육아 사망율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이잇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얻게 되는 이익에 관해 전통적 신학에는 이런 진술이 없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지역 상황에서는 그것이 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 방법의 토착화이다.
IV. 신학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토착화된 신학이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 문화 상황에 적절하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만 한다. 만일 토착화된 신학이 세속적이며 다신교적인 사상과 너무 밀착하게 되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인 혼합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토착화된 신학은 그것이 기독교 신학이 되려면 먼저 성경적으로 건전해야 하며, 동시에 문화 상황에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수용할 수 있는 신학의 토착화는 모든 신학의 원천이 성경에 합치되며, 동시에 수용자의 생활형태와 언어로 교리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신학의 토착화는 토착화 자체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토착화를 통해 계시된 진리가 의미의 굴절없이 바르게 전달되고 쉽게 이해되며 학습과 실천에 있어서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토착화 과업은복음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수용자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지,복음의 본질적 의미로 굴절 내지 포기하면서까지 문화화할 때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신학의 토착화(또는 상황화)의 필요성은 요청되고 있다. 신학의 토착화는 필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성경적 진리를 가리울 수도 있다. 초대 교회 시대 이래로 유럽, 아세아,아프리카,기타 모든 대륙의 모든 문화권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고백해 왔다. 이 교리는 명백한 성경적 교리이며 모든 세기마다 고백되어온 전통적 교리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의 종교적 상황에 알맞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을 순전히 인간들의 저작물로만 본다. 요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귀절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헬라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지, 예수님은 그같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세계의 종교 상황에 알맞게,오늘의 세속화된 지적인 구조와 사고 형태에 맞추기 위해서 유니테리안적인 용어로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는 신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나버린 것이다. 그것이 상항에는 적절한 것으로 보일런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간 상황에도 맞지 않음)성경적인 신학은 아니다.
닫는 글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과업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신학의 토착화 논의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토착화 과업은 아직도 모색단계에 있긴 하지만 기독교 선교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며 복음의 본질을 변화시켜 혼합주의를 따르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과업은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육신 사건을 토착화의 모델로 삼아 효과적인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바람직한 토착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토착화 과업에서 유의해야할 사항은 토착화된 그것이 성경적이어야 하고,문화 상황에 적절한 것이어야 하며,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동화와 효율성만 생각하고 성경적 진리로부터 이탈할 때 그것은 선교에 적절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이단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 상황에는 적절한 것이지만 효과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상황에는 적절하지 못하나 성경적 진리를 그대로 전했으 ㄹ때 효과가 나타난 경우도 선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언제나 의지해야 할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바람직한 토착화는 성경적으로 참되어야 하며, 선교에 효과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문화 상황에 적절한 것으로 보여지고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본질을 상실했으면 그것은 토착화가 아닌 토양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