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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영심이
☆장요나 선교사님 '정글에 천국을 짓는 사람'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인간이 된 사람
우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
“너는 베트남의 요나가 되라”
그 후, 21년간 베트남의 요나가 되어 천국을 짓는 사람…
장요나 선교사의 순종과 열정의 선교 여정에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간증을 쓴다는 것은 여간 감동을 받지 않고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쓴 이건숙 사모는 평소 선교에 관심이 많은 남편 신성종 목사를 따라 수많은 선교지를 방문하던 중, 장요나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께 그 마음과 몸을 완전히 바친, 복음의 용광로 같은 장요나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은 이건숙 사모는, 이 사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대기업의 비서실장, 잘나가던 회사의 대표, 예쁜 아내와 사랑스런 두 아이의 아빠였던 남자.
세상 즐거움에 한껏 취해 술과 여자를 낙으로 삼았던 남자.
그런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하나님….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남자.
속수무책으로 흘러간 10개월.
온몸의 살과 물이 쭉 빠져나가 쪼글쪼글 오그라들어 원숭이 만해 졌을 때,
세상에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
그리고 그에게 “서원을 갚으라”, “베트남의 요나가 되라” 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식물인간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명대로 베트남의 요나가 되어
공산국가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188개의 병원과 교회를 지으며,
복음의 열사로 살아가고 있는 장요나 선교사.
남편이 선교에 관심이 많아서 상당히 많은 선교지를 돌면서 현장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만나 저들의 사역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2년 전에 만나 본 베트남 장요나 선교사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충격을 주는 사역을 펼치는 선교사였다.
그의 일대기를 쓰면서 베트남에 두 번이나 갔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더운 캄보디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씨름하며 글을 쓰기도 했다. 특히 베트남에 머물면서 자료 수집을 하는 동안 그의 수고와 아픔이 내 일처럼 다가와서 많이 울기도 했다.
장요나 선교사는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손에 강권적으로 붙들린 사람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그가 그 많은 사역을 하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를 따라 현장에 동참하면서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강하게 느꼈고 정말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 4P <책머리에>
요나 선교사는 베트남 선교를 위해 우선 공산화되기 전에 있었던 기존 교회들을 찾아 나섰다. 명목상 존재하는 총회를 찾아가서 호찌민에 버려진 기존 교회 명단을 받았다. 시내 중심가부터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목사와 성도들은 모두 숨어 있어서 찾아내기도 힘들었다.
호찌민의 벤찌동에 이르니 주위의 큰 빌딩에 눌린 공터가 잡초만 우거진 채 버려져 있었다. 도심지의 요지에 이런 장소가 있나 싶어서 요나 선교사는 공터 안을 기웃거렸다. 주위의 빌딩 숲에 가려 공터는 더욱 작고 납작하게 보였다. 놀랍게도 공터의 잡풀 더미 속에 낡고 썩어서 찌부러진 교회 건물이 남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의 기척이 전혀 없다. 교회는 폐가처럼 버려진 건물이 되었다. 교회의 입구에는 나무 막대기로 엇비슷하게 십자가형으로 못질을 했고 그 옆에 붉은 글씨의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하나님의 집이 이렇게 후락하여 구질하게 버려진 것에 가슴이 아픈 요나 선교사는 잡풀을 헤집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뒷간에서 얼씬거리는 것이 아닌가. 무섬증이 확 일어나서 여차하면 도망칠 태세로 소리 나는 쪽으로 등을 돌렸다.
“기도를 하셨지요?”
요나 선교사는 엉거주춤 상대방의 정체를 알려고 머무적거리면서 어눌한 몸짓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따이한이군요.”
여기서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여전히 의심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고 머리만 끄덕였다.
“목사지요? 선교사? 그런 냄새가 나는군요.”
낯선 남자가 바짝 마른 손을 요나 선교사에게 내민다.
“전 이 교회의 람(Ram) 목사입니다. 공산화되기 전에 이 교회 담임목사였는데 성도들이 모두 잡혀가고 흩어져서 저 혼자 남았습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요나 선교사는 람 목사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고 끌어안았다.
“이 풀숲에 버려진 교회에서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러자 람 목사는 피식 웃으면서 턱으로 담 구석에 허름하게 지어진 뒷간을 가리킨다.
“거기서 무얼 하세요?”
요나 선교사는 람 목사가 폐허인 화장실까지 와서 볼일을 보는 것이 우스워서 물었다. 그러자 람 목사는 검지를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겁에 질린 듯 주위를 둘러본다. 공포심에 잔뜩 질린 얼굴이다. 아아! 아직도 이곳은 기독교를 믿으면 핍박을 받는 나라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전 매일 이곳에 와서 성경을 읽습니다. 화장실 바닥 땅을 깊이 파고 성경을 비닐에 둘둘 싸서 묻어 놓고 말입니다. 요즘엔 비닐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비닐에 성경을 싸서 묻어 놓고 매일 뒷간에 들어앉아 성경을 읽고 난 뒤 다시 땅속에 묻어 놓습니다. 어떤 때는 깜깜한 밤에 성경이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면 손전등을 들고 와서 그 빛에 의지하여 보고픈 성경 구절들을 찾아 읽기도 합니다.”
이런 람 목사와의 만남은 요나 선교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두 사람은 시간을 정해 놓고 이 교회가 수축되는 날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매일 공터의 찌부러진 교회에 들러 잡풀 더미의 한 귀퉁이에 숨어서 기도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람 목사는 나트랑신학교 출신이었다. 공산화된 호찌민에서 그는 요나 선교사와 함께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나란히 서게 된 셈이다. 40대 중반인 람 목사에게는 다섯 살과 여섯 살의 두 딸이 있었다. 아주 젊은 일꾼이 공산화된 호찌민에서 손발이 묶여 활동을 못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이 리듬을 타고 대로를 흘러간다. 저녁 퇴근시간을 꽉 메운 길이 어느 정도 한산해지자 요나 선교사는 기도하기 위해 버려진 벤찌동교회로 향했다. 석양을 등지고 있는 교회는 그야말로 찌그러지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고가로 귀신이 나올 것처럼 처량하게 방치되어 황막하기까지 했다. 먼지만 잔뜩 내려앉은 교회를 볼 적마다 요나 선교사의 가슴이 알알하게 아파 온다.
허름하게 둘러친 울타리에 서는 순간 요나 선교사는 발을 멈추고 뒷걸음질 했다. 화장실에 숨어서 손전등으로 성경을 읽고 있던 람 목사가 공안에 잡혀서 끌려 나오고 있었다. 람 목사는 끌려가면서 모른 척하라고 눈짓을 한다. 그의 옆을 스치는 순간 람 목사가 재빨리 속삭였다.
“제 두 딸과 아내를 부탁합니다.”
그토록 사랑하여 뒷간의 땅속에 묻어 놓고 읽던 성경도 공안의 손에 증거물로 들려 있었다.
“아무 걱정 마요. 내가 남은 가족을 돌볼 터이니.”
끌려가는 람 목사의 등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요나 선교사는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람 가족을 찾아 나섰다. 두 딸과 그의 아내는 그날부터 센터의 식구가 되었다.
람 목사는 감옥에서 5년을 갇혀 있었다. 그동안 호찌민은 차차 기독교 탄압을 완화하며 외국의 눈치를 보더니 기존 교회 건물을 수축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어떻게 이 무너진 제단을 세워야 한단 말인가. 큰 산이 요나 선교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삐딱한 울타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속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두 여인이 다가왔다.
“한국인이지요? 기도하시는 걸 보고 알았어요. 저희도 예수를 믿어요. 저희 두 자매는 여기 호찌민에 관광을 나왔어요. 마침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저희들을 좀 안내해 주세요.”
요나 선교사는 두 자매를 이끌고 호찌민 시내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인구가 천만 명이 넘는 호찌민 시는 공산화되기 전에 동양의 진주요 파리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1975년 베트남 사회주의 정권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이공이라는 이름이 호찌민으로 바뀐 도시다.
도시를 함께 둘러본 뒤에 한국 식당으로 인도했다. 두 자매는 도시 관광을 하면서 서로 익숙해지자 자신들을 소개했다. 의사의 딸들이었고 그중 한 자매는 의사 남편을 둔 부자였다.
“목사님과 만난 공터는 왜 그렇게 후락했지요. 꼭 귀신이 나올 것같더군요. 도심지에 버려져서 마치 마른버짐이 퍼진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어요.”
“거기가 바로 교회였습니다. 벤찌동교회인데 수축해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 선교사로 와 있는데 그 교회를 반드시 다시 세울 것입니다. 공산화된 뒤에 폐쇄된 교회지요.”
그러자 언니인 자매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흐느껴 운다. 갑작스러운 자매의 울음에 당황한 요나 선교사는 어리둥절하여 두 자매의 눈치를 보았다.
“실은 의사 남편이 간호사하고 바람이 나서 속이 상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해서 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상처 받은 마음이 위로 받을 기회를 잡았네요. 제가 그 교회를 아주 웅장하고 아름답게 수축하고 싶군요.”
그 말을 들은 요나 선교사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자매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부정한 남편으로 인해 마음이 상했으나 이런 좋은 일을 위해 하나님이 저희 두 자매를 베트남에 보내셨군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남편을 용서하고 싶어요.”
요나 선교사는 그들의 영혼의 평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차가웠던 두 자매의 손에 온기가 돌면서 죽을상을 하던 얼굴에 평화와 기쁨이 임하기 시작했다. 돌처럼 굳었던 얼굴에 화기가 돌면서 마치 생명이 소생하는 듯 보였다.
“친정아버지가 의사이자 장로님이니 우리 가족이 이 교회를 수축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벤찌동영락교회가 탄생했다. 중층에 람 목사를 위한 사택을 마련하기로 설계하면서 요나 선교사는 이런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36-41p
산족 출신인 오이와 함께 달랏(Da Lat)으로 가는 중이었다. ‘랏(Lat)족의 강’이란 뜻인 달랏은 해발 1,475m의 산 위에 흐르는 랏 사람들의 강이다. 1912년 프랑스 코친차이나 총독부가 달랏에 도시를 건설하기 전까지 이 고산지대에는 랏족이 살고 있었다. 도시가 건설된 뒤에는 베트남의 주축을 이루는 족속인 비엣족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달랏의 원주민들은 소수민족이 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제 산족이 되어 버린 랏족을 찾아 나선 요나 선교사는 고산지대를 향해 1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아침밥을 굶은 터라 목이 마를 리가 없는데 미칠 듯이 물을 마셔야겠다는 욕구로 인해 참을 수가 없었다. 둘러보니 물을 사 먹을 만한 조그마한 가게조차 없었다. 목은 자꾸 말라서 나중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숙소로 되돌아가야만 물을 마실 수 있을 지경으로 사방은 적막했다.
자꾸 앞으로만 전진할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말라 차를 멈춰 세웠다. 문득 이 지역 어딘가에서 우물을 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촘조촘 우물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길가에 조그마한 사각 울타리를
두른 우물이 눈에 띄었다. 도르래와 바가지까지 준비된 우물이었다. 우물가가 어찌나 더러운지 이런 물을 마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더러운 부유물과 얼룩진 먼지가 잔뜩 끼어 있고 침전물도 많아서 도저히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목이 말라서 우물물을 길어 올려 입술만 축였으나 여전히 목이 말랐다. 물을 찾아 우물 뒤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 집에 가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오두막 가까이에 이르자 안에서 간장을 녹일 듯 숨넘어가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을 앞둔 단말마의 비명처럼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둑한 방 안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깥의 밝음에 익은 눈이 안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약간의 망설임을 누르면서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데 열병에라도 걸렸는지 땀투성이였다. 순간 머리에 번쩍 이런 생각이 스쳤다.
‘목이 마를 이유가 없는데 왜 엉뚱하게 목이 말랐을까. 하나님이 뭔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여기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할머니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얼마나 열병이 심한지 이마 위에 얹은 손바닥이 할머니의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덮고 있는 이불도 땀에 젖어서 물이 뚝뚝 흐를 지경이었다. 머리맡에 있는 물을 할머니의 입에 대주어 마시게 하고 오두막을 벗어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할머니 입에 물을 대주는 순간 못 견디게 괴롭던 목마름이 싹 가시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희한한 체험을 한 것이다. 달랏을 향하면서도 마음은 아픈 할머니 곁에 있었다. 좀 더 거기 머물면서 돌봤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역이 바빠서 계속 앞으로 나갈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 할머니의 오두막을 찾았으나 밤도 깊었고 외등도 없어서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우물 주변을 맴돌았을 뿐 할머니 오두막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쉬웠지만 포기하고 호찌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그 길을 다시 지나가다가 도르래가 달린 우물이 퍼뜩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 할머니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돌아가셨을까? 요나 선교사를 강제로 목마르게 해서 인도하신 것을 보면 죽지 않고 살아났을 것이란 확신도 왔다. 차를 우물가에 세워 놓고 깊숙이 자리 잡은 오두막으로 향했다.
요나 선교사의 목소리를 듣고 열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갔던 할머니가 뛰어나왔다. 그리고 소릴 질렀다.
“바로 이분이다. 나한테 기도를 해주신 분이다. 이분이 기도해서 나를 고쳐 주셨다.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하신 분이다.”
할머니는 요나 선교사를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저 뒤로 들어가면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그 안에 나처럼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제발 그분들을 버리지 마시고 가서 기도해 주세요. 제게 손을 얹었을 적에 빛이 번쩍하면서 전신에 전기가 통했어요. 그러면서 열이 싹 내렸다니까요.”
할머니는 흥분해서 말이 많았다. 제일 먼저 할머니 가족이 모두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들을 따라서 마을 사람들이 줄줄이 성도가 되었다.
그 지역이 바로 여우야이 마을이다. 그 할머니의 강권적인 권유로 세 번이나 이 지역에서 의료선교를 펼쳤다. 이상한 일은 손을 얹고 기도할 적마다 치유가 일어나서 그 작은 마을 전체가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있었다. 알고 보니 공산화되기 전에 예수를 믿던 마을이었다. 재 속에 불씨로 남았던 복음은 바짝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대나무와 야자수를 엮어 집을 만들어 그 안에서 성경 공부도 하고 의료사역도 했다. 마침 베트남의 토지법이 개혁되었다. 권리증을 가진 토지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고 39%의 세금을 징수해 간다는 내용이었다. 우물이 달린 과수원을 소유하던 할머니가 토지를 내놓아 그곳에 교회를 크게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건축할 돈이 없었다.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의료사역에 동참하여 치료해 주던 경북 군위교회 후원으로 여우야이군위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들은 여우야이 마을에 와서 환자들에게 침을 놓고 부황을 뜨는 치료를 해주었는데 치료하는 사람들이나 치료를 받는 주민들이나 모두 기쁨과 평화를 맛보고 피차에 아픈 마음도 치료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비라카미신학교가 세워졌다. 비라카미(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의 준말)신학교는 이렇게 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요나 선교사의 꿈은 무르익어 갔다. 베트남 산속의 소수부족인 산족들을 전도하여 교회를 세워 주고 이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에게 전도사 안수를 줘서 사역자로 배치해야겠다는 꿈이 두루마리를 펼치듯 앞에 나타났다.
열병을 앓던 할머니와 그의 목마름은 교회를 세우게 했고, 그곳에서 신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신학생들 밥을 해주었다. 그의 사역에 가장 힘을 많이 보태는 여우야이군위교회는 베트남 선교의 주축이 되었다.
여우야이군위교회에 세워진 비라카미신학교는 3년제로, 베트남 정부의 매서운 눈초리 때문에 졸업식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다. 졸업식 당일 몇 시간 전에 번개처럼 학생들에게 가운을 입히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목숨을 건 행사였다. 한국에서 목사들을 비롯해 많은 내빈 축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식이 한창 진행되는데, 공안들이 나타났다. 단상에서 설교하던 목사가 문간에 서 있는 공안을 제일 먼저 보았다. 단상에서 내려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졸업식 설교를 끝까지 해야 되는 것일까.
그는 잠시 멈칫거렸으나 담대하게 설교를 이어 갔다. 그러나 얼마나 무섭고 놀랐는지 오줌을 싸서 바지가 흥건히 젖었고 서 있는 강대상 밑도 오줌으로 젖었다. 끝까지 당황하지 않고 설교를 하고는 뒤쪽 문을 빠져나와 도망가기 시작했다. 대개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도망갈 길을 미리 알아 두었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설교를 한 목사는 뒤란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볼일을 보듯 쪼그리고 앉았다.
재래식 변소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구나 구더기가 득시글거리고 파리들이 콧속까지 파고들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지만 이 나라의 복음화에 이런 일쯤이야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리가 저려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 존경받는 목사가 오줌을 싸고 구더기와 파리 떼 속에 묻혀 이게 무언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환경에서 선교를 하는 요나 선교사를 향한 존경심이 넘쳐흘렀다.
역시 선교란 목숨을 건 사역임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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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나 선교사님 간증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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