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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다짐
김원대
애국가는 사실상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이다. 애국가에는 무궁화가 새겨있다. 무궁화는 태극기와 더불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양 날개이다. 애국가는 안익태 작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사자는 미상이다. 애국가는 길다. 가장조, 4/4박자에 간결한 가사로 구성되어 있긴 하나, 장중한 분위기에 비교적 악상이 느리고, 4절에다가 겨레의 간절한 소망과 다짐을 담은 후렴이 네 번씩이나 이어지다보니 긴 느낌이 든다. 시간에 쫒기는 각종행사에는 성급한 국민성이 보태지면서 어지간한 행사의식에서는 1절만 부르는 것이 상례화 되고 있다.
가사에 후렴이 과반을 차지하고 후렴의 중심에 청명 밤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 덩이처럼 무궁화가 얼굴을 내비친다. 애국가는 그만큼 후렴이 돋보이는 노래이다.『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유달리 꽃을 좋아하는 민족이라서가 아니라 무궁화가 갖는 전통과 역사의식의 작용에서인지 애국가 가사의 백미는 무궁화이다. 애국가 완창에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을 거푸 네 번씩이나 불러야한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애국가를 무궁화가(無窮花歌)라 이른 적도 있다고 한다. 애국가의 중심에 무궁화가 있다. 무궁화는 그만큼 절실한 겨레의 꽃 이다.
근년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때 이른 더위로 무궁화가 평년보다 열흘 가까이나 개화를 앞당기기도 한다. 중부지방의 무궁화는 7월에 피기 시작하여 여름을 장식하며 9월로 이어지면서 가을초입까지 오래도록 피는 꽃이다. 무궁화는 유난히도 빛을 좋아하고 빛에 사는 지혜로운 꽃이다. 벌, 나비, 찾지 않고 사람의 시선도 사라진 밤이 깃들면 아예 꽃을 접어버린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 않고 절제의 미덕에 사는 꽃이다. 개화기간 내내 신선한 새 꽃으로 장식하는 밝고 투명한 꽃이다.
새벽 5~6시경 일출과 더불어 활짝 피어났다가 일몰이면 꽃잎을 접고 떨어지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는 항상 피어있는 꽃으로 보이는 신비를 간직한다. 꽃송이 하나만보면 하루도 아닌 고작 10~12시간을 피어있는 셈이지만 낙화 못지않게 새롭게 솟아나는 꽃송이가 많다보니, 무궁화는 지지 않고 계속 피어있는 꽃처럼 보인다. 그래서 「피고지고 또 피어 수를 놓나니」라는 노랫말이 있을 정도로 한 송이로는 하루살이 꽃이지만 한 나무로는 백일을 피어있는 꽃이다. 화목(花木)으로서는 매우 특수한 경우라 하겠다.
무궁화는 하얀색이기도 보라색이기도 한, 해맑은 꽃잎이 더없이 순결해 보이지만 저녁이면 다섯 꽃잎이 돌돌 말려 흐트러짐 없이 쏙 빠져 떨어지는 낙화의 모습이 더없이 정겹다. 통꽃도 아니면서 목련이나 벚꽃처럼 꽃잎이 제 멋대로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날리지 않고, 꽃송이를 만든 그 나무 그 발치에 단정하게 떨어지는, 참으로 뒤끝이 깨끗한 꽃이다.
문자 그대로 끝없이 피어나,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이 담긴 무궁화는 꽃 이름 자체가 애국가의 끝 소절 『길이보전하세』와 맥을 같이한다. 맥의 핵심은 끈기이다. 무궁화는 민족혼의 상징, 줄기차게 이어 피는 불굴의 꽃이다. 피고 지는 꽃송이도 그렇지만 무궁화는 줄기며 꽃가지의 끈기 또한 만만치 않다.
『나도 모르게 꽃가지에 손이 갔는데, 혹시나 경비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이냐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나 한번 꽃에 손이 간 나는 쉽게 포기 할 수 없었다. 꽃가지는 생각보다 너무도 야무지고 질겼다. 꺾기를 중단하기에는 꽃가지가 이미 반쯤은 꺾인 상태였다. 어차피 내친 김 이라 이번에는 입으로 가지를 물어뜯어 끝내 한 송이를 꺾어내고야 말았다. 주위를 경계하며 숨겨온 꽃을 식탁위에 꽂아 놓고서야 두근거리는 가슴은 겨우 진정되는 듯 했지만 부러진 나뭇가지가 잇몸에 박혀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여류 작가의 수필 『꽃 이야기』의 한 구절이다. 먼 소년의 어느 날, 내가 겪은 비슷한 체험기의 한 대목이기도 했다.
무궁화나무의 껍질은 섬유질이 유난히 많아서 맨손으로는 쉽게 꺾을 수 없다. 직접 꺾어보지 않고서는 잘 모를 일이다. 이런 정황을 잘 알지 못했던 정숙한 주부님께서 무심코 꽃 한 송이를 탐하다가 오죽하면 다급한 마음에 가지를 물어뜯느라 잇몸에 상처까지 입었겠는가?
반만년 역사 속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오늘의 번영을 이룩한 민족의 저력은 바로 무궁화가 지닌 질긴 속성과 같다하겠다. 더구나 무궁화 자체가 일제의 박해와 수모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끊임없이 꽃을 피워왔다는 생각을 하면 숙연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며 고금주(古今注)등의 문헌이나,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 까지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치던 최치원의 문집에 실린 기록으로 볼 때, 우리는 고대 신라시대부터 한반도를 무궁화의 나라(槿域)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무궁화가 어떤 경로로 나라꽃이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애국가 가사로 비추어 볼 때 애국가의 제정연대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짐작이 될 뿐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국민의 무궁화에 대한 애착은 별로 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관공서에서도 무궁화 식재를 외면하더니 다행이도 근자에 산림청에서는 무궁화 진흥계획 및 연차별 시행계획을 수립,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장은 무궁화에 대한 애호정신과 국민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토지에 무궁화를 확대 식재하고 이를 관리하도록 노력하여야한다」라는 관련 법 조항도 생겨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애국가 가사나 경찰 계급장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된 문양, 통신용 인공위성 시리즈의 이름, 무궁화호 열차 호칭 등 상징물은 그런대로 눈에 띄기는 해도 전국토의 무궁화 현장은 의외로 너무도 빈약한 느낌이다. 무궁화 삼천리까지는 이해한다 해도 화려강산까지는 아님이다. 우리강산에 피어있는 무궁화가 애국가에 실린 무궁화에 한참 못 미치는 현실이 너무도 아쉽고 안타깝다.
어느덧 여름이다. 다시 무궁화의 계절이다. 삶의 미덕은 솔선수범이다. 명실상부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위하여 「나부터 무궁화 사랑!」 계절의 다짐을 가져본다.
1992 「수필문학」
강원문학상
수필집 「오십천의 사계」
한국문인협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