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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알림방 스크랩 서산대사가 남쪽 대흥사로 온 까닭은? [해남신문 김원자 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
27회박 생수 추천 0 조회 35 12.07.30 23: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표충사는 유교식 사당으로 서산대사와 제자 사명당, 처영대사를 함께 모신 곳이다. 1789년 정조 임금이 표충사 편액을 금물로 직접 써서 하사할 만큼 국가적 예우가 컸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관행을 없애버린 후 현재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표충사를 이순신사당에 버금가는 국가 기관으로 성역화해서 문화재청 직속 기관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다.  
 

서산대사 휴정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본관은 완산(完山), 안주(安州) 출생으로 속명은 최현응(崔玄應), 법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이다. 1534년(중종 29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우고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552년(명종 7년)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 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명종 11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하여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지만 1594년(선조27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불(佛)·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표충사(表忠 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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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의 호국정신이 담겨 있는 천년가람 대흥사(옛 이름 대둔사), 다성 초의선사의 일지암으로도 잘 알려진 대흥사는 우리나라의 맨 남단, 땅 끝 두륜산에 있다. 두륜산은 삼산·현산·북일·북평면에 걸쳐 호남정맥 바람재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월출산으로 솟구친 뒤 남쪽으로 더 내려가 바닷가에 우뚝 솟은 산. 산줄기는 달마산으로 이어져 땅끝에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고계봉(638m)·노승봉(688m)·가련봉(迦蓮峰,703m)·두륜봉(630m)·도솔봉(兜率峰, 672m)·혈망봉(穴望峰, 379m)·향로봉(香爐峰, 469m)·연화봉(蓮花峰, 613m) 등의 여덟 묏 봉오리가 빙 둘러 솟아 있고 그 안에 대흥사·일지암·북미륵암·만일암(挽日庵·輓日庵)터 등의 사찰·암자(터)등을 품고 있다. 산이 먼저였는지 절이 먼저였는지 이름 한 번 절묘하게 불교적이다. 대흥사 창건에 대해서는 창건주조차 '알 수 없음'으로 되어 있는데, 대흥사의 중흥이 조선 후기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면서부터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조선의 승려는 사실상 모두 서산대사 제자

임진왜란 때 승군의 최고지도자로 전 의승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서산대사는 입적에 앞서 제자들에게 유언을 한다. "내가 죽은 뒤 의발을 호남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로 옮겨 기일에 제사를 지내라"고. 두륜산은 후미진 구석에 있어 이름 있는 산은 아니나 세 가지 뛰어난 것이 있다며,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긍장(亘長)의 구역이며, 삼재가 들어오지 않을 곳이며, 부처님의 법이 일어날(興) 곳이라고 말했다.

의발을 전하라함은 법을 전수하겠다는 뜻, 평생을 주석한 묘향산을 두고 왜 하필 대둔사였는지, 유학하던 시절 대둔사에 잠시 주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기에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스승의 부탁이니 어쩌랴. 제자들은 대사가 열반한 3년 후에 의발을 짊어지고 두륜산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때 절 이름도 싹이 돋아나올 둔(芚)에서 흥할 흥 자로 바꾸어 대흥사로 불리게 됐다. 정조는 어명으로 대흥사에 표충사란 사당을 지어 국가 주도로 제향을 거행케 함으로써 그 때부터 대흥사는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사찰로 성장하게 된다. 이름처럼 법이 흥해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가 배출됐으니 대종사는 국사와 다름없는 최고의 승려로 조선의 승려가 사실상 모두 서산대사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불교는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사는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여기에 대처했던 것. 즉 선조의 부탁이었다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하고 자신 역시 법흥사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하고,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호국불교의 위상강화를 꽤하였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는데 그를 따른 제자가 무려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는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된다.

   
 
  대흥사 부도 숲.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포함되어 있다. 대흥사가 수많은 고승 대덕들을 배출한 굴지의 사찰이었음을 말해 주는 곳이다.  
 
'생야일편부운기' 노대통령 유서에도 인용

대흥사는 골짜기의 동백꽃 숲이 아름답고 광활한 남해를 조망할 수 있는 명찰로도 유명하며 대사의 말대로 "만고 불파지지요. 삼재불입지처"이거니와, 임진왜란이나 6·25전쟁 때도 전혀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절에는 또한 탑산사 동종(보물 88)·응진전전 3층석탑(보물 320)이 있고, 북미륵암에는 3층석탑(보물 301)과 부근에 마애여래좌상(보물 48)이 있어 불자들은 물론 전국적으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대흥사는 이처럼 많은 문화재 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연담 유일(蓮潭有一)이라든가 초의 의순(草衣意恂) 등 저명한 스님들이 머물렀던 절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오늘날 유행하는 다도(茶道)의 고향으로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사가 남긴 임종게송이 또 한 번 유명세를 탄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때문이었다. 유서에서 언급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표현은 서산대사가 입적 전에 남긴 게송을 떠올리게 한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삶도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도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다)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시(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묘향산 원적암에서 85세에 입적하시기 전에 남긴 이 게송은 세상만사를 해탈한 고승의 생사관을 엿보게 한다. 85세의 나이로 운명하기 직전 이 게송을 읊고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앉아 잠든 듯 입적(入寂)했다고 한다.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절대 진리를 향한 고승의 높은 경지를 부러워하며 대흥사에 들어선다. 어찌하여 서산대사는 내로라하는 명승고찰 다 두고 이 곳 남쪽 끝 해남 땅, 두륜산 자락에 누워 사람들로 하여금 무욕의 다리를 건너라 하시는가? 서산대사의 도의 경지뿐 아니라 문학성까지도 엿보게 하는 청허가(淸虛歌) 한 수를 더 읊어 보자.


그대 거문고 안고 늙은 소나무에 기대었으니
늙은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로다
나는 긴 노래 부르며 푸른 물가에 앉았으니
푸른 물은 빈 마음이로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오직 나와 그대 뿐이로다


일주문을 지나 절의 입구에는 부도와 탑비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 모여 있어서 하나의 부도 숲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비롯한 역대 대둔사 고승 대덕들의 부도와 탑비가 포함되어 있다. 대흥사가 수많은 고승 대덕들을 배출한 굴지의 사찰이었음을 말해 주는 곳이다. 오직 혼백으로 찾아와 이처럼 거대한 사상과 종교의 뿌리를 내린 이가 일찍이 서산대사 말고 또 있을까?

서산대사 부도는 전체 높이 260㎝로서 보물1347호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된 기단부와 팔각 탑신부 및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대석의 연꽃무늬 사이사이에 거북이·게·개구리 등의 동물을 조각한 것이 특색이다. 또 9세기 중반에 건립되기 시작한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부에 표현된 다양한 장식이 다른 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일면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인근 달마산 미황사에 있는 부도탑의 물고기 조각과 함께 연구해 볼 가치가 큰 문화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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