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함과 자연됨을 목적으로-영농일기(19)
"눈이 왔나봐"
"안왔는데......"
"저기 봐. 불빛에 타이어 자국들이 놔있잖아"
"그러네..."
남양주에서 달려온 동료의 차를 세워둔 교회앞 건널목을 지나면서 불빛에 비치는 눈가루를 가리키며 나눈 대화이다. 그의 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오뎅을 한 두개 길바닥 노점에서 사 먹고, 다음 집에서 순대 1000원어치 달라고 해서 집에 돌아온 시각은 9시가 다 되었다.
농장 컨테이너 한 켠에서 평택에서 달려온 이, 남양주에서 달려온 이와 함께 갑작스럽게 마련된 회의를 한답시고 앉아 있고, 다른 한 켠에는 우리 팀원들이 모여 쉬고 있다. 얘기를 하기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그녀들이 준비해 준 떡볶기와 음료수가 들여보내졌다. 손님 접대에 언제나 소홀히 하지 않는 팀원들이 고마왔다.
"...세가지 경향이 있다고 봐. 농의 가치를 무시한 채 시장자본주의 방식으로, 실적중심의 사업으로만 전개하려는 경향과 농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냥 시키니까 하는 경향, 그리고 농의 가치 속에서 비젼을 가져보려는 경향을 가지는 세부류이지. 따라서 평가 뒤에 과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곧 팀장들의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지. 팀장들이 제대로 박혀있지 않은데 팀원들이 어찌 따라가겠나?"
2005년도 회의나 워크샵의 평가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편이주의 아냐? 그것은 동의하지 못해."
"당연하지. 경기지역도 제대로 못 만나는데 전국이야 당연하지 않니?"
"하지만 굳이 그렇게 빨리 할 필요가 있어?"
"누가 빨리 그렇게 만든다고 했나? 시작한 일이기에 정리가 필요하니까.
어떻게서든지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봐"
전국단위의 문제를 거론하다가 잠시 의견이 엇갈리면서 정리의 필요성에 어필을 하였다. 두 사람의 엇갈린 의견에 한 이가 나서서 내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 부가설명을 한다. 그 녀석이 있어서 얘기를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천만원의 예산안도 뚝딱뚝딱 만들고, 평가도 뚝딱뚝딱 해치우고 난 뒤 한 녀석이 저녁회의가 있다고 나간다. 그 녀석은 곧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것이다. 거기에 난 전폭적으로 지지를 하고 나섰다. 그이가 하는 일에 그이의 비젼은 암울하다. 난 그이가 어떤 일을 하든 그이의 경험의 소중함을 그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그의 자질이 있음을 믿는다. 그냥 그이는 그렇다. 깔끔한 녀석이다. 부러질 줄 알고 휘어질 줄도 안다. 난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것만 잘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부러지기만 하고 휘어지지 않는 녀석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이는 아직 30대이다. 젊은데 말이다. 중학교 배운 청춘예찬. 그것을 그이한테도 적용한다. 내가 사십대이니 삼십대까지는 적용할 만하다. 아니 사십이 되어도 그러하다. 어쩌면 평생 그러할 지도 모른다. 자유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워 질게다. 자연함이 곧 자유함을 만날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이 그러한 것처럼.
그이가 가는 것을 배웅하지 않았다. 곧 만날 것 같았다. 그래서 컨테이너 방 안에서 '잘 가'라고만 했다. 그이가 가고 남양주에서 온 동료랑 얘기를 이어나갔다.
"...5년 계획이 필요하다고 봐요"
"음...5년 로드맵?"
"그것이 있어야 부족한 쪽에는 그것으로 설득시킬 수 있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젼을 만들어져야 ..."
".......하루 아침에 뚝딱 나오지 않겠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야........"
".......그래. 내 지역에는 대충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일반화하여서 시도를 해보지. 일자리 넷워크 사업에도 그것이 필요하여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어차피 연동되는 일이니 작업을 해볼께"
"특히 사람에 대한 교육도 넣어줘. 정말 사람농사가 중요한 것 같아..."
"응...사람 농사가 잘 되면 물질적인 것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물질적인 것이 있어도 사람농사가 제대로 안되면 더이상 나아갈 수 없어...그래서 사람에 대한 것이 일차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지"
"중요한 것은 아는데...그렇다고 사업도 중요해"
"물론 사업의 결과가 사람들을 더욱 추동해낼 수 있겠지.사람이 되어지면 그런 것도 만들어지겠지.아무튼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집에 돌아오면서 달력이 눈 앞에 선하다. '5개년 개발계획' 훗... 집에 돌아와 순대 천원어치 사온 것을 김장김치와 함께 버무려 먹고 컴을 연다. '이 죽일 놈의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컴을 통해서 본다. 드라마에 빠져든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자신의 사랑을 절제하는 주인공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얼마나 가슴이 무너질까? 무너지는 가슴을 수습하려는 그의 몸놀림이 나도 가슴이 저리다. 보고 나니 11시 30분. 여전히 가슴이 아리다. '마가리에 살고 싶다' 불현듯 가슴에서 내어 나온다.
'2046년' 왕가위감독의 영화 음악을 듣는다. 빠져든다. 그리고 가방에서 서류철을 끄집어 낸다. 서류철에는 3개의 계획서가 있다. 매일 서류철은 가방을 들락달락인다.
기형도 시인의 '큰 사무실에서 서류를 쌓아놓고 홀로 울고있는...' 어쩌구 하는 시가 생각난다. 서류를 쌓아놓고 울고 있는 도시의 샐러리맨의 설움을 너무나 젊은 기형도 시인은 잘 알고 있었나보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것은 아닌데 ...왜 그 생각이 났을까?
"김장배추가 다 끝났다...이제 이번 농사도 끝났다.신난다. 그런데...교육이 기다리고 있다....." 팀원의 비명 섞인 한줄 메모장이다.
농한기.
겨울 농사를 안한 것이 다행이다....쉬어야지. 농번기가 있으면 농한기가 있어야 하는 법' 이렇게 얘기해 놓고, '상시학습 일정을 다음 주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해놓고 커리큘럼을 대략 짜 놓았다.
'아침에 제가 교육하고 오후에 자율학습 4시경에 학습평가입니다.'
우리 팀원들이 비명들이 오간다.
'난 싫어. 난 못해.'
'싫으면 그만 둬'
'일 그만 둬야겠네'
'그래라. 일 그만 둬라'
강행이다.
"팀장님은 불독이야. 불도저"
농번기에 난 주경야독을 한 셈이다.
나도 일일이 연구하면서 1년 농사를 치뤘다.
그녀들은 내가 지시한 일을 해나갔다.
농한기.
그녀들이 퇴근한 뒤에 직업과 관련하여 연구나 학습을 하라고 하면 미친 짓이다. 그들은 가족을 돌봐야 한다. 그렇다면 농한기이다. 농한기 때 1년을 되짚어 보고 직업교육을 하나하나 해나가야 한다. 농장에 출근해서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농한기에는 토양을 쉬게 해주면서 동시에 농사꾼은 쉼과 동시에 내년을 준비해야 한다. 토양이 쉬는 것이 내년을 위한 것처럼. 아직 익숙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쉬면서 내년을 준비해야 한다. 주경야독이 안되면 하경동독이 되어야 한다.
나도 공부를 해야 한다. 나만 공부하고 그것을 지시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스스로 공부할 줄 알아야 하며 이제 지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한다 것을 알려줘야 하며 가르쳐야 한다.
'대안생리대,천연화장품 만드는 법 등 선생을 섭외해야겠군.' 자급자족에 대한 프로그램 준비 농의 가치 일반에 대한 교육,작물재배력에 대한 연구, 일반 직업상식 세금에 대한 것.시장조사하여 사업구상하는 법...3개 영역으로 나누어서 커리큘럼을 짜서 진행해야 한다.
나도 좆난다.
서류철에 3가지가 더 들어가야 한다. 연구해서 써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그리고 쓰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실행해야지.
'우리 엄마이고 아빠예요' 우리 팀원들이 나에게 이르는 말이다. 어떤 때는 벗어나고픈 말이다.
"막막해"
남양주의 그 동료가 한 말이 생각난다. 3년을 해 온 그의 말 뜻을 이해한다. 그는 더구나 농사꾼 출신이다. 그런 그의 말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울림이다.
"난 그렇지 않는데...난 꿈을 꾸고 있나?"
서투른 농사꾼이 뭘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이유에 대해 처음부터 잘 알고 시작했던 일이기 때문일까?
농한기...
나에게 농한기는 또다른 농번기로 가고 있다.
'2046' OST - Main Theme (with purcu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