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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몸부림칠 때]
1. 오프닝. 마을외곽 어딘가의 도로. 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개구리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시골길.
홀로 서 있는 보안등만 도로의 귀퉁이를 밝히고 있다.
선행되는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스쿠터.
헬멧도 쓰지 않은 노년의 홍찬경이 먼지를 일으키며 스쿠터를 달리고 있다.
갑자기 멀리서 ‘탕’하는 총성소리가 들리면 홍찬경은 놀라서 스쿠터를 세우고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길 위는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하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홍찬경은 다시 스쿠터를 출발시킨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홍찬경의 옆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며 보여준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홍찬경의 옆모습 뒤로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접근해오고
그것은 서서히 홍찬경의 스쿠터를 추월한다.
홍찬경, 이상한 낌새에 자신을 추월하는 물체를 돌아다보면,
타조 한 마리가 기다란 목을 세우고 달리고 있다.
타조는 홍찬경을 추월하는 순간
고개를 돌려 스쿠터 위의 홍찬경을 비웃듯이 한번 내려다본다.
마주치는 둘의 시선.
갑작스런 타조의 등장에 놀라 중심을 잃은 홍찬경의 스쿠터가 비명소리와 함께
길 옆 도랑에 쳐 박힌다.
스쿠터와 함께 수풀 속으로 나동그라지는 홍찬경.
타조는 빠른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스쿠터의 엔진 음이 꺼지고 잠깐 동안의 고요가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개구리 소리만 다시 시끄럽게 울려퍼진다.
메인 타이틀 <파도여 슬퍼말아라>
2. 마을 풍경 / 이른 아침
수평선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선착장에 계류 중인 몇 척의 고깃배들.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들.
옅은 안개가 감싸고 있는 어촌의 모습. 보다 정확히는 반농반어의 마을이다.
초등학교와 마을 풍경이 소개되며 타이틀 이어진다.
3. 철수의 집 마당
화사한 꽃나무 한 그루. 그 옆에 있는 개 집.
웅크리고 있는 늙은 똥개 먹구, 앞다리를 길게 뻗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은, 나른하고도 무기력한 모습이다.
씻기 싫어하는 철수는 고양이세수를 하고 철수 엄마는 그런 철수를 구박한다.
철수 엄마가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걷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철수엄마 : 이상하네, 내 빤스가 어딜 갔노?
철수, 근심스러운 얼굴로 먹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먹구는 코앞에 놓인 개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철수 : (먹구를 쓰다듬으며) 먹구야! 와 밥을 안 먹노?
철수엄마, 마당 여기저기를 살핀다. (타이틀 끝)
4. 필국의 집 / 아침
영희의 머리를 정성스레 빗겨주고 땋아주는 필국.
영희 : 할배!
필국 : 와?
영희 : 벌써 세 번째재?
필국 : 뭐가?
영희 : 중달이 할배 타조 도망 간 거 말이다.
필국 : 네번째 아이가?
영희 : 중달이 할배 타조는 왜 자꾸 도망을 갈까?
필국 : 그러게 말이다..... 찬경이 할배가 많이 안다쳤나 모르겠다.
사이
영희 : 할배.
필국 : 와?
영희 : 근데 중달이 할배 타조는 왜 알을 못 낳아?
필국 : 글쎄...중달이 할배 타조들은 숫놈하고 암놈하고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지 뭐.
영희 : 할배, 내 생각에는 중달이 할배 타조들은 중달이 할배하고 연애하고 싶어하는 것 같애.
필국 : 설마....니 같으면 중달이 할배하고 연애하고 싶겠더나?
영희 : 할배!
필국 : 어, 내가 지금 머라카노. 미안하다.....
영희 : ....할배, 중달이 할배 타조들은 병아리때부터 중달이 할배만 보고 살았재?
필국 : 그렇지.
영희 : 그러니까 중달이 할배 타조들은 암놈이나 수놈이나 다 중달이 할배가 자기 짝인 줄만 알고, 저거들끼리는 연애를 안 하는게 틀림없다.
필국 : 그런가....
영희 : 맞다. 뉴질랜드에 어느 박사님이 그런 논문 썼다 카더라.
필국 : 그래? 중달이 할배는 빙신같이 그것도 모르고 속만 태웠네.
영희 : 할배. 눈 앞에 없다고 친구 욕하면 안된다.
필국 : ...맞다.
사이.
영희 : 아야! 할배, 살살 좀 해라.
필국 : 미안하다. 니가 잔머리가 많아서 안 그렇나.
영희 : ......할배.
필국 : 와?
영희 : 시간 나면 목욕 좀 해라. 냄새 난다.
필국, 자신의 어깨에 코를 묻고 킁킁거린다.
5. 타조농장. 오전
망치소리와 함께 농장 울타리를 손보는 배중달과 옆에서 일을 거드는 배중범의 모습.
뒤편, 타조우리 안으로 머리에 양말을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문제의 타조가 보인다. 타조는 이따금 중심을 못잡고 비틀거린다.
중범의 일 거드는 모습이 영 서툴러 보인다.
중달, 그런 중범에게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중달 : 아, 좀 똑바로 잡지 못해!
중범 : ...
중달 :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있어야지. 이거하나 제대로 못하냐?
그러니 여직 장가를 못가지...
중범 : 에이,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중달 : 뭐 임마? 그러니 장가를 가란 말야, 장가를. 대체 니 나이가 몇인 줄은 아냐?
중범 : 울타리 고치다 말고 왜 또 그 얘기예요.
이때 타조농장 윗집에서 누군가 끼어든다. 조진봉이다.
진봉 : 이놈아, 울타리나 제대로 고치지 왜 동생은 잡아먹지 못해 지랄이냐, 지랄이. 니 등쌀에 중범이든 타조 새끼든 베겨내겠냐?
중달 : 아니 저놈이, 아침부터 시비네. (진봉에게로 몇걸음 옮기며) 야, 이 미친놈아! 니 놈이 울타리 부수고 내 타조한테 총 쏴 댄 거 내 다 알고 있어. 너 한번 걸리기만 해봐.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중범 : 아, 그만하세요.
진봉 : 아니 저놈이 아침에 쳐먹은 밥풀이 곤두섰나 왜 핏대를 올리고 지랄이래. 니가 봤어? 울타리 부수는거 니가 봤냐고.
중달 : 안봐도 뻔하지, 꼭 봐야 알아. 니놈이 안부셨으면 그럼 타조가 부셨겠냐? 우리 동네서 너 말고 미친놈이 또 있대?
진봉 : 말다했어? 너 정말 무고죄로 콩밥 먹고 싶냐? 내가 우리 아들놈한테 얘기하면 이놈의 타조농장 내일이라도 당장 철거할 수 있어.
중범 : (진봉을 말리며) 에이, 형님도 그만하세요.
중달 : (엉뚱하게 중범에게) 이놈이 누구더러 형님이래. 니 형은 나야 임마. 개나 소나 형님이야?
진봉 : 아쭈! 인젠 집안싸움까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네.
중달 : 어따대구 콩가루래, 이놈이. 그 잘난 아들놈한테 내 쫒겨서 내려온 놈이 누구보고 콩가루래.
진봉, 아들에게 쫒겨내려왔다는 말에 갑자기 꼭지가 돌아버린다.
진봉 : (완전히 열받아서) 언놈이 그래? 언놈이 내가 내 쫒겼다구 그래?
중달 : 언놈이 그러긴 임마,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이놈아 명절날 떡국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심보를 곱게 써.
중범 : 아 제발 그만하세요.
진봉 : 너.... 너 이놈. 거... 거기서 기다려
울그락 불그락해진 진봉, 갑자기 집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중범 : 아, 그 집 아들 얘기는 왜 꺼내고 그러세요.
중달 : (많이 누그러져서) 지가 까불어봤자지... 얼마든지 기다린다, 이놈아.
잠시후, 진봉이 공기총을 들고 뛰어나온다.
진봉의 공기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달형제.
6. 필국의 집.
머리손질이 다 끝나고 영희가 가방을 둘러메면,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는 총소리
소리(철수의) : 할배! 영희 할배!
철수가 마당으로 황급히 뛰어든다.
철수 : 중달이 할배하고 진봉이 할배하고 쌈 났어요.
7. 타조농장
영희와 철수가 뒤쫒고 필국이 헐레벌떡 뛰어오면,
이미 찬경과 찬경처는 진봉을 말리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 중범이 중달을 말리고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뜯어말리는 이들에게 양팔과 허리를 잡힌 채로 여전히 서로에게 온갖 유치한 욕설을 퍼붓는다. 난무하는 욕설...
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네 길을 가로막은 채 싸우는 두 사람과 이를 말리는 네 사람이 한데 엉겨붙은 모습이 가관이다.
이때 마을길로 들어서던 택시가 잠시 멈춰서서, 이들이 길을 막고 싸우는 형국을 지켜본다.
택시안으로 단아한 모습의 송인주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택시안
택시기사 : 이 동넨 꼭두새벽부터 왠 난리야. (뒷손님을 바라보며) 아주머니, 찾는 동네가 이 동네 맞아요?
인주 : (놀란 눈으로) 여기, 물건리 맞죠?
택시기사 : 동네 한번 살벌하네요.
잠시 싸움을 지켜보던 택시기사, 크랙션을 울려대지만 도로를 점거한 일행 중 누구도 택시를 신경 쓰는 이가 없다.
영희와 철수만 택시에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
다시 크랙션을 누르려는 기사를 만류하고 택시에서 내리는 인주. 짐이 제법이다.
그제서야 싸움을 말리던 찬경이 인주를 발견하곤 진봉의 왼팔을 잡은채 동작을 멈춘다. 갑작스레 만류를 포기한 찬경으로 인해 진봉의 시선도 찬경의 시선을 따라가고, 갑자기 사그라든 진봉의 위세가 궁금해 중달 편에 섯던 인물들의 시선도 인주에게 옮겨간다.
한편엔 싸우랴 싸움 말리랴 행색이 엉망이 된 여섯 사람과 이쪽 편엔 짐을 잔뜩 든 그러나 여전히 단아한 모습의 인주와 인주를 도와 가방을 든 어린 두 아이가 마주 선 모습이다.
순간의 어색한 적막을 깨며,
인주 :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저, 잠시 지나갈 수 있을까요.
엉거주춤 비켜서는 사람들.
그들 사이로 앞서 걷는 인주. 만만한 짐들을 하나씩 들고 따라가는 아이들.
찬경 처 : (철수를 붙잡으며) 누구냐?
철수 : 몰라요. 순아 아줌마네 찾으신대요.
8. 순아네 횟집
순아네 횟집은 바닷가에 인접한 작고 허름한 독립된 건물이다. 입구엔 횟집간판 옆으로 ‘민박’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횟집 내부는 한편에 홀이 있고 한켠에 내실로 통하는 문이 있다.
순아는 무엇이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정성껏 찬합에 음식을 담고 있다.
철수 : 아줌마, 손님 오셨어요
순아, 이 아침부터 무슨 손님, 하는 얼굴로 돌아보면 짐을 가득 든 인주가 가게로 들어선다.
순아는 뜨아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고
인주 : (힘겨운듯) 어휴, 더워라. 물 한잔만 마실 수 있어요?
그제서야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찬물을 가지러 주방으로 가는 순아.
영희와 철수, 호기심어린 눈길로 인주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시선을 의식한 인주.
인주 : (영희에게) 고맙구나...이름이 뭐니?
철수 : (끼어든다.) 영희요. 저는 철수고요.
영희 : (철수한테) 머시마야, 니한테 물어봤나?
철수 : (움찔하며) 미안하다 영희야.
인주 : (귀엽다.) 응. 영희하고 철수....이름도 예쁘구나.
철수 : 할매는 어디서 오셨는데요?
인주 : 나?
사이, 순아가 물을 가져오며
순아 : 니들, 학교 안가?
9. 중달의 집 마당.
마당 평상 위에 앉은 중달과 필국, 찬경, 그리고 중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 듯 물 사발을 꿀꺽꿀꺽 들이켜는 중달.
찬경처가 빈 사발을 받아 부엌 쪽으로 가면서 혼잣말처럼 한마디 한다.
찬경처 : 나이만 쳐 먹으면 뭐하노...하는 짓은 꼭 얼라들인데.
중달은 물을 마셔도 분이 안 가시나보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한 듯,
중달 : 그 미친놈이 인자는 총질까지 해? 너거들, 그 자석 그거 나대는 거 봤재, 응 봤재? 그거 미친 개자석 아이냐, 응?
필국 : 니도 그 성질 좀 죽여라.
중달 : 이놈을 그냥 두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내가 타조 아들놈이다.
찬경은 중달과 필국의 대화보다는 방금 전에 본 송인주의 고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혼자 딴소리다.
찬경 : 그 할마시 곱네...우째 그리 고울꼬....
중범 : (찬경에게) 아저씨, 어제 다친 다리는 괜찮으세요?
찬경 : 응, 다리? 근데 지금은 이상스럽게 가슴이 아릿하다...
하, 그 할마시 참....
중달 : (여전히 진봉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탄다.) 그 놈을 어떻게 요절을 내야 분이 풀릴꼬...(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에잇, 열불 나서 못살겠다! (당장 다시 달려갈 것 같다.)
필국 : (중달의 팔을 잡아 앉히며) 고마해라. 이러다가 큰일 내겠다.
찬경은 여전히 아랑곳 않고 인주의 영상에 사로잡혀 있다.
찬경 : 아까 그 목소리 들었재?
(인주의 음성을 흉내내며) 저...잠시 지나갈 수 있을까요?...하, 참..
그제서야 찬경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
중달, 괜히 찬경한테 분풀이다.
중달 : (찬경의 뒷통수를 갈기며) 일마 이기 지금 뭐라카노?
찬경 : 아야! (꿈 깬다.)
저쪽에서, 기가 막혀 말도 안나온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째려보는 찬경처.
10. 순아네 횟집
애들은 가고 인주와 순아만 남았다.
순아 : ...어디서 오셨어요?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인주 : 예. 그렇게 됐어요. 근데 마을에 뭔 일 있어요?
조 위에서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던데?
순아 : 그 아저씨들 또 싸웠어요? 하여튼...
(다시 인주의 행색을 살피며) 그런데 놀러 오신 분 같지는 않고...
인주 : 여기서 며칠 묵을까 하구요...읍내 여관에서 여길 알려주던데....
순아 : 방이야 있죠.. 그런데...
인주 : ...좀 이상해 보이죠?
순아 : 아뇨...이상한 건 아니고...
인주 : 나....집 나왔어요.
순아, 그런 인주가 좀 별나 보이지만 내색 않고 받아준다.
순아 : 네....오신 김에 편히 쉬다 가세요.
인주 : 근데 혹시 조도라고 알아요?
순아 : 조도요?
인주 : 조도라는 섬 몰라요? 이 마을에서 배타고 들어가면 된다던데...
순아 : 조도...이 근처에 그런 섬도 있나? 첨 들어보는데...
인주 : (서류를 보여주며) 아니, 틀림없는데.
여기 00면 조도라고 분명히 나와 있잖아요.
순아 : 이상하네. 난 도통 못 들어봤는데... 이따 필국 아재한테 물어봐야겠네.
근데 그 섬은 왜요?
인주 : 사실은 내가 그 섬 주인이예요.
순아 : 그러세요? 근데 섬이 어딨는지도 몰라요?
인주 : 글쎄 그게.... 섬 주인이 된지가 얼마 안됐거든.
순아 : 네...
인주 : 배를 좀 빌려야겠는데....
순아 : 배야 필국아재 한테 부탁하면 되지만...
(그제서야 생각난듯)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배 떠났겠네.
순아, 주방으로 달려가 부리나케 찬합을 챙긴다.
11. 선착장
배 두 세척이 전부인 조그만 선착장에서 필국과 중범이 막 출어준비를 끝내고 출항하려 하고 있다.
중범이 선착장 기둥의 닻줄을 풀려는 순간 순아가 찬합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온다.
순아 : 중범씨!
중범, 닻줄을 풀던 손을 멈추고 뛰어오는 순아를 바라본다. 수줍은 듯 찬합을 내미는 순아.
중범 : 뭐 자꾸 이런 걸 줘요.
순아 : 아저씨랑 드세요.
필국이 배 위에 선 채, 순아에게 인사한다.
필국 : 내가 중범이 덕에 호강하네.
순아 : 두 분이 같이 드시라고 가져온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배가 출발하면, 마치 출어 나가는 시아비와 낭군 배웅하는 아낙이라도 되는 듯 정겹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순아.
12. 초등학교 운동장.
교정 한쪽에 서 있는 이승복 동상.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진봉이 걸레로 정성껏 동상을 닦고 있다.
13. 교실
수업 중이던 40대 초반의 남자 선생이 진봉의 모습을 열린 창문을 통해 바라본다.
선생, 시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선생 : 이상한 일이네, 저 아저씨가 늦는 일도 다 있고..
철수 : 이승복 할배는 아침에 타조 할배랑 싸우느라 바빴습니다.
선생 : 그랬어? 하여간 대단한 할배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철수 : 저는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 : 누가? 이승복 할배가?
철수 : 아입니다. 반공소년 이승복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 : 와?
철수 : 선생님 같으면 저 할배가 맨날 씻겨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선생과 아이들, 와르르 웃는다.
14. 운동장
이승복 동상을 정성껏 닦고 있는 진봉이 연신 걸레질을 하며 중얼거린다.
진봉 : 이 죽일 놈, 염병할 놈, 오라질 놈...
카메라, 진봉의 왼쪽 눈을 처음으로 보여주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다.
15. 중달의 집
벽에 걸려 있는 늙은 여인의 사진. 중달 형제의 작고한 모친이다.
장난끼와 괴퍅함으로 가득한 얼굴이다(이후 사진 속의 모친 얼굴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변한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달의 집 내부가 보여진다.
대충 밥상을 차려 들어오는 중달.
중달은 밥상을 마주하고도 바로 밥을 먹지 못하고 허리가 결린 듯 짧은 신음소리를 토해낸다.
중달 : 아이고 허리야. 그 빌어먹을 놈 땜에.....
갑자기 생각난 듯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중달.
신호음이 이어지다 상대편이 전화를 받아든다.
중달 : 나 애비다.
소리(딸의) :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중달 : ... 왜? 전화하면 안되냐.
소리(딸의) : 왜 또 화가 나셨어요. 절대 먼저 전화 안주시니까 하는 소리죠.
중달 : 니들 명절 때 내려올 수 있지
소리(딸의) : 명절이요? 추석말씀이세요? 추석은 아직 세 달도 더 남았는데 그 얘길 하시려고 전화한거예요.
중달 : 세 달이 남았든 열 달이 남았든 내려올 수 있느냐는데 뭔 사족이 많아. 내려올 수 있는 거지? 아니 무조건 내려와. 둘째, 셋째 죄다 데리고 무조건 내려와.
소리(딸의) : ...
중달 : 아- 아- 듣고 있냐
소리(딸의) : (걱정스러운듯) 아빠, 요즘 외로우세요?
혹시... 재혼할 생각이세요.
중달 : 이년이... 아직 중범이도 못 보냈는데... 그래 니들 말 잘했다. 니들이 삼촌 생각을 눈꼽만큼이나 하는 년들이냐, 하나 밖에 없는 삼촌이 불쌍하지도 않아?
소리(딸의) : 아우- 또 그 소리. 삼촌이 안가겠다는 걸 어떡하라구요.
중달 : 중이 제 머리 깎는거 봤냐? 뭐, 봤다고? 이년이!
하여간 기집애들이 인정머리라곤 없어!
16. 배 위. 오후
중달의 전화소리 이어지며,
배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필국과 중범의 모습이 보인다.
작업 중간중간 대화가 이어진다.
필국 : 선 본다며?
중범 : 형님이 그래요? 아, 정말 미치겠네. 우리 형님 왜 그러시지 정말...
필국 :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오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가니 오죽 하겠냐...
중범 :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예요.
필국 : 말은 다 그렇게 하더라. 이번에는 잘 좀 해봐. 너거 형 소원 아이가?
사이
필국 : 중범아!
중범, 필국을 쳐다본다.
필국 : 순아는 어떻노?
중범 : (씩 웃으며) 순아씨야 착하고 좋죠. 동네 어른들한테도 잘하고..고등어조림도 잘 만들고...
필국 : 그런데?
중범 : 에이 순아 씨는 안돼요. 우린 그냥 친구예요...
사이
필국 : 한번 결혼 실패했었어도 순아 같은 여자 없다. 너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거 문제 될 거 없다.
중범 : 그래서가 아니라요...
필국 : 그럼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잖어. 순아도 너 좋아하겠다 그냥 혼인신고나 하고 조촐하게 국수나 삶으면 되는 거지.
사이
중범 : 이 나이 먹고 무슨 장가는 장가예요. 전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편해요.
필국 : 하여간 너도 참 별난 놈이다.
중범 : 우리 형님이나 더 나이 드시기 전에 재혼하면 좋겠어요. 형님도 그렇고요.
필국 : 자석...지 걱정이나 하지....
중범 : 아까 그 아주머니같이 참한 분이면 좋을텐데....그죠?
필국 : 됐다. 나는 우리 영희 밖에 없다.
필국, 말 돌리면, 중범, 그런 필국을 보곤 빙긋 웃는다.
17. 찬경의 점방 앞. 오후
다리를 조금 절룩이며, 스쿠터에 올라타는 찬경. 스쿠터 한쪽 라이트가 깨져있다.
찬경 처 뛰어나오며 찬경의 옷자락을 잡는다.
찬경 처 : 가게 안 보고 또 어디 가는데?
찬경, 어처구니 없다는 듯 처의 얼굴만 바라본다.
찬경 처 : 어젯밤에 사고나 죽을 뻔 했다며, 또 어딜 쏘다닐라구?
찬경 :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오늘 중에 읍내 우체국 댕겨 오라며? 니 그 얘기 한지 한시간이 됐나, 30분이 됐나?
찬경 처 : !!! (눈만 껌벅거리다가,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다는듯) 그러면 그렇게 얘기하면 되지, 와 소리를 지르고 난리고, 날도 더운데...(들어간다.) 와 이래 덥노...
18. 번듯한 도로.
신나게 스쿠터를 달리는 찬경. 합류도로에서 만나는 경찰 오토바이.
경찰은 찬경의 스쿠터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멈춰세우려 하지만 무시하고 지나치는 찬경.
자존심 팍 상하는 경찰. ‘아니, 저 양반이..’
찬경의 스쿠터를 쫒는 경찰의 오토바이. 추격전.
마치 첫 장면처럼 달리는 찬경의 스쿠터를 카메라 측면에서 따라가며 보여주고,
어느 순간 프레임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며 찬경의 스쿠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찰의 오토바이.
경찰의 오토바이, 찬경의 스쿠터를 추월하며 정차 신호를 보낸다.
어쩔 수 없이 도로 갓길에 스쿠터를 멈춰세우는 찬경.
경찰 : 아저씨! 거기서 도망을 가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찬경 : (시치미 뚝 떼고) 누가 도망갔나? 나 너 못 봤어.
경찰 : 아저씨 하여간 잡아떼는 데는 선수야 선수. 면허증 주세요.
찬경 : 마 엇다 대고 소리를 질러? 날도 더워 죽겠는데.
경찰 : 빨리 면허증 주세요.
찬경 : 마, 없는 거 다 알잖아.
경찰 : 내리세요.
찬경 : 왜?
경찰 : 이 스쿠터 압숩니다. 나중에 찾아가세요.
찬경 : 왜 임마?
경찰 : 공무집행중인 경관한테 임마임마 하시면 안되죠.
빨리 내리세요.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앞으로 무면허 운전 절대 안된다고.
찬경 : 나 면허 없어도 잘타. 방금 봤잖아?
경찰 : (비웃으며) 아저씨, 어제 사고 냈다면서요. 면허증 없이 타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찬경 : 아니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체 언놈이 그런 주둥아릴 놀려.
경찰 : 아주머니가 그러시던데요. 사고나서 다리까지 다쳤다면서요. 밤새 아저씨 허리 주무느라고 아주머니 손이 다 부르텄다던데요.
(스쿠터의 깨진 라이트를 발견하고는) 이거네. 여기 증거도 다 있네, 뭐. 이거 어제 사고로 부서진거죠, 맞죠?
찬경 : 어제 사고는 면허증하고 상관없어. 타조가 뛰어드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거라니까. 마누라가 그 얘긴 안해?
경찰 : 안 하시던데요.
19. 찬경의 점방 안.
찬경 처가 꾸벅대며 졸고 있다.
철수 엄마 : 하이고 완전히 한밤중이네...
찬경처, 그 소리에 깬다.
철수 엄마 : 밤새 잠 안자고 뭐 하셨길래 그러세요?
찬경 처 : 영감 주무르느라 밤새 한 숨도 못자서 그래.
철수 엄마 : 아이고, 영감님이 늦둥이라도 보실라카나, 별일이네.
찬경 처 : (멀뚱멀뚱 바라보며) 뭐라카노 지금?
철수 엄마 : 아입니다. 영감님은 안에서 주무시는 모양이지예.
찬경 처 : 아니.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또 어디로 내뺀 모양이네. 밖에 오토바이도 없잖아.
철수 엄마 : 영감님 힘도 좋으시지.
찬경 처 : 철수 엄마는 그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늙은 여우 봤어?
철수 엄마 : 그 섬 주인이라카는 할매요?
찬경 처 : 섬 주인? 무슨 섬?
철수 엄마 : 글쎄요. 무슨 엄청나게 큰 섬을 샀는데 거기다 무신 카페를 만들거라카던데. 젊어서부터 소원이라나.....
찬경 처 : 내 그럴줄 알았다. 카페? 하이고 카페는 무신...술집이겠지. 딱 그래 생겼더라.
철수 엄마 : 근데 그 아주머니가 와 여운데요? 그래 안보이던데...
찬경 처 : 뭔소리야, 철수엄마가 직접보질 못해서 그렇지. 아침에 내가 직접 봤잖아.
만장같이 넓은 길 놔두고 굳이 사내들 틈을 비집고 지나가면서 이러는거야.
찬경처, 오전에 자신이 직접봤다는 상황을 재연한다.
찬경 처, 자리에서 일어나 저만치 걸어갔다 다시 철수 엄마 앞으로 과장되게 걸어오며,
찬경 처 : (과장된 목소리로) 저, 잠시 지나갈 수 있을까요
철수 엄마 : 오마나, 정말로요?
찬경 처 : 그럼, 내가 거짓말 하겠어?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20. 배 위
배 바닥에 앉아 순아가 정성껏 마련한 식사를 마친 두사람.
필국 : 니 덕에 잘 먹었다.
중범 : 자꾸 왜 놀리구 그러세요. (사이) 힘들지 않으세요.
필국 : 뭐가?
중범 : 요즘 부쩍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필국 : 내가 그랬나. 그래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넌 어떠냐? 할 만해.
중범 : 할 만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전 그냥 우리 형님한테서 벗어난 것만으로 좋아요. 사방을 둘러봐도 뭐라고 참견하는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좋잖아요.
조용한 바다. 필국의 시선이 바다 저편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필국 : 영희 애미도 이 바다를 좋아했는데... 중범이 너, 생각나냐? 영희 애미 어렸을 적 그렇게 울다가도 너만 보면 방긋거리고 웃던거. 커서 중범이 아재한테 시집간다고 얼마나 때를 썼는지.
중범 : 그럼요... 기억나죠.
중범, 오늘따라 필국에게서 특별한 느낌이 든다. 물끄러미 필국을 쳐다보는 중범.
21. 우체국
읍내 우체국. 우체국에서 찾은 짐을 들고 나오는 찬경. 짐이 제법 무거워 보인다.
짐을 들고 택시를 부르는 찬경.
찬경 : 물건리까지 얼마나 하나?
택시기사 : 6천원 주세요.
찬경 : 6천원? 6천원어치 기름 넣으면 내 스쿠터로 물건리까정 왕복 12번은 할낀데.
택시기사 : 에? 아 그럼 스쿠터 타면 되지 택시는 왜 부른대요.
찬경 : 부르는데 돈 들어?
짐을 들고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는 찬경.
22. 타조농장
중달이 타조들을 돌보고 있다. 먹이도 주고 털도 문질러주고....
중달 : 많이많이 먹고 알 좀 쑥쑥 낳아라...
하면서 털을 문질러주는 순간, 한마리가 쉬를 한다. 오줌방울이 중달의 얼굴로 튄다. 중달, 신음을 삼키면서 침착하게,
화내지 않고, 조용히 닦는다.
23. 타조농장 사무실
중달, 수의사하고 전화중이다.
중달 : 우리 타조 말이야. 지난번에 거 산란촉진제 주사도 맞았잖아.
그러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여태 알을 안 낳네? 도대체 뭐가 문젤까?
사료는 엄청 잘 먹어. 너무 먹어서 탈이지. 응? 스트레스?
중달, 묵묵히 듣고 있다. 건성으로 인사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중달 : (다짐하듯) 그래, 스트레스! 엄청난 스트레스가....있지.
결연한 자세로 벌떡 일어서는 중달, 허리가 엄청 결리다. 허리춤을 잡고 고통스런 비명을 지른다.
24. 진봉의 집
타조농장을 가로질러 진봉의 집으로 향하는 중달
가는 길에 울타리 옆의 몽둥이를 집어든다.
진봉의 집.
중달 : (대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며) 조진봉! 당장 나와.
부서져라 두드리는 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중달 : 이 자식아, 빨리 안나와. 니가 안나오고 숨으면 내가 그냥 갈거 같애? 빨랑 나와. 니가 죽든 내가 살든 오늘 아예 결단을 내잔말이다.
조용.
중달 : 이 자식이 뒤졌나?
집안을 살피는 중달. 현관도 잠긴 채 아무도 없다.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는 중달의 눈이 반짝인다.
25. 진봉의 집안
창문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중달.
진봉의 집안 마루엔 조류 박제와 수석이 자랑스럽게 진열 되있다.
박제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진열장의 수석하나를 골라 박제를 향해 떨어뜨리는 중달.
박제된 새의 목이 부서진다. 중달은 재미를 붙인 듯 다른 박제를 가져다 이내 부셔버린다.
점점 흐믓한 표정의 중달.
이번엔 박제를 하나 들고 주방 냉장고를 향해 걸어간다.
냉동실의 음식들과 냉장실의 음식들을 죄다 꺼내 마루 햇볕이 드는 바닥에 펼쳐놓는다.
빈 냉동실에 박제를 집어넣는 중달.
냉장실의 계란에 시선이 간다. 알이다! 알 못 낳는 타조 생각에 더 분이 치민다.
생 계란을 죄다 깨버린다. 냉장고에 흘러내리는 계란.
26. 순아네 횟집
인주는 내실에 들어갔는지 안보이고 순아만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창밖으로 사냥복을 격식있게 차려입은 진봉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한 손에는 여전히 공기총이 들려있고 한쪽 눈엔 안대를 하고 있다.
진봉이 횟집으로 들어선다.
순아 : 어머, 이번엔 크게 싸우셨나보네. 많이 다치셨어요?
진봉 : 다치긴... 그깟 놈한테...
순아 : 어디 가시나 봐요. 아주 쫙 빼입으셨네
진봉 : 빼입긴 뭘... (내실쪽을 살피며) 근데 손님이 통 없네
순아 : 지금 몇 신데 벌써 손님이 와요.
진봉 : 그런가? 아니 민박 손님이라도 와야 할텐데.
진봉, 인주가 있음직한 내실쪽으로 연신 눈길을 준다.
순아, 그제서야 눈치를 챈 듯 진봉을 보면, 진봉은 애써 순아의 시선을 외면한다.
진봉 : 장사가 잘 돼야 할텐데... 흠흠
순아, 작정한 듯 진봉 앞에 다가가 슬슬 놀린다.
순아 : (진봉을 빤히 보며) 어쩐지... 통 걸음 안하시던 분이 왠일인가 했네요. 게다가 이렇게 쫘 빼입으시고...
이때 내실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인주가 나온다.
인주 : 손님이 계셨네
순아 : 아니예요, 이리오세요. 이 아저씨가 아주머니 만나뵈러 오셨네요.
진봉 : 흠..
인주 : 누구신데... 아, 아침에...
순아 : 많이 다치셨나봐요.
진봉 : 어허, 아니라니깐. 내가 그깟 놈한테 한대라도 맞을 사람이야? 문에 부딛친거지. (인주에게 명함을 내밀며) 저 이런 사람입니다.
순아 : 명함도 있으시네. 저도 한 장 주세요.
진봉, 순아에게 눈을 흘기며 마지못해 순아에게도 명함을 건넨다. 순아가 낚아챈다.
순아 : 아저씨가 ‘유해조류 박멸협회’이사예요. 반공소년 이승복 정신계승 범민족운동본부 경남 지부장은 또 뭐예요?
진봉 : (순아를 무시하고 인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조이사라고 합니다.
27. 마을버스 안. 도로
마을버스를 탄 찬경이 보인다. 도로를 달리던 버스 언덕 길에서 멈춰선다.
버스기사 다시 시동을 걸려하지만 겔겔겔겔 소리만 낼 뿐이다.
짐을 들고 기사에게 다가가는 찬경.
기사 : 죄송해요. 내리시게요? 아직 8km는 더 가야 하는데...
찬경 : 그럼 어떡하라구?
기사 : 조금 기다리면 뒷 차 올텐데 그늘에서 기다리시죠.
28. 철수네 집
철수와 영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먹구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철수가 쏘세지를 들고 먹구의 주둥이 앞에다 갖다댄다.
철수 : 먹구야, 이거라도 좀 먹어라...
먹구, 먹지 않는다.
철수, 쏘세지를 억지로 먹구의 주둥이에 밀어 넣는다.
먹구, 그래도 먹지 않는다.
철수, 개 침이 묻어있는 쏘세지를 먹는다.
철수 : 맛있는데 왜 안 먹지...?
사이
영희 : 먹구... 이러다 죽겠다...
철수, 놀란 눈으로 영희를 쳐다본다.
29. 도로
도로 한 편에 고장 난 버스가 세워져 있고,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버스기사와 승객들인 촌부, 촌로들의 모습이 보인다.
버스기사와 승객들 모두 한쪽 방면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기사 : 참나, 그 6백원 아끼겠다고...
30. 다른 도로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찬경
찬경 : 망할 놈의 여편네....
31. 순아네 횟집
중범이 빈 찬합을 들고 횟집으로 들어선다. 횟집 안엔 아무도 없다.
중범 : 어디갔나?
중범은 찬합을 두고 나가려다 카운터 위의 영수증 뭉치와 볼펜을 집어든다.
영수증에 무언가를 쓰는 중범
순아 : 언제 오셨어요?
순아가 언제 들어왔는지 중범 바로 뒤에 서 있다.
놀라서 재빨리 영수증을 꾸겨버리는 중범.
순아의 시선이 꾸겨진 영수증을 든 중범의 손으로 간다.
중범 : (찬합을 내밀며) 덕분에 맛있게 먹었어요.
필국이 형님이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순아, 빈 찬합을 받아들고 주방으로 가져간다.
순아 :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마요. 우리 사이에 고맙긴... 거기 좀 앉으세요. 시원한 냉커피 한잔 타 드릴께요.
순아가 등을 돌린 틈을 타 구긴 영수증을 휴지통에 버리는 중범
중범 : 아니 괜찮아요. 빨리 형님 농장에 가봐야해요.
순아 : 잠깐만요. 혹시 내일 배 좀 빌릴 수 있어요. 민박 묵으신 손님이 조도를 다녀와야 한다던데.
중범 : 조도? 어디서 들어봤는데.
순아 : 중범씨도 몰라요?
중범 : 들어본거 같기도 하고... 나야 배 탄지 얼마 안돼서... 필국이 형님이야 아시겠죠. 이따 얘기해볼께요.
문까지 쫒아나와 배웅하는 순아.
순아 : 중범씨, 잘 가요.
중범을 배웅하고 들어오던 순아, 휴지통 앞에 멈춰서서 휴지통을 바라본다.
31. 철수네 집
마루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면서 키득거리는 철수. 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영희.
철수 : 영희야, 이거 너무 재밌다. 니도 한번 읽어봐라. 키득키득...
영희 : 니는 글도 못 읽으면서 만화는 우째 보는데?
철수 : 그림만 봐도 다 안다. 키득키득...
다 죽어가던 먹구가 갑자기 반갑게 짖기 시작한다. 놀라서 쳐다보는 영희와 철수. 부엌에서 저녁 준비하던 철수 엄마도 내다본다. 먹구,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문간으로 걸어간다. 먹구의 마중을 받으며 들어오는 필국.
먹구를 쓰다듬는 필국.
철수 : 어, 먹구 일어섰다.
철수엄마 : 희안하게 먹구가 아저씨만 보면 그래 좋아하네요.
필국 : 이 놈이 비린내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뭐.
먹구는 필국의 발밑에서 재롱을 부리며 뒹군다.
32. 동네 길.
집을 향해 걷는 필국과 영희. 영희가 필국의 등에 업혀있다.
영희 : 할배, 먹구는 할배가 억수로 좋은가봐.
필국 : 그래 말이다. 먹구도 할배라서 그런가...
영희 : 오늘도 중범이 아재하고 배탔어?
필국 : 그럼.
영희 : 중범이 아재도 할배가 좋은가봐.
필국 : 그런가....영희야, 저녁 먹고 바둑 둘까?
영희 : 뭐 내기할까, 할배?
33. 찬경의 가게. 저녁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짐을 들고 가게로 들어서는 찬경.
찬경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계속 TV만 보는 찬경 처.
그런 모습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는 찬경, 짐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찬경 처 : (잠시 찬경을 바라보며) 어? 언제 왔는데?
찬경은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화내는 것조차 포기한 표정으로 찬경 처를 바라볼 뿐이다.
찬경 처 : (여전히 TV에 몰두하며) 당신은 하루종일 어델 그렇게 쏘다니는데?
찬경 : 니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수다 좀 그만 떨어라. 미주알고주알 뭔 얘기를 그리 옮기고 다니냐말이다.
찬경 처 : 내가? 하이고 세상 사람들이 나만 같으라 캐라. 우리 엄마가 그랬다, 자식 일곱이나 키웠지만 내만큼 말없는 아도 없었다고. (혼잣말처럼) 내가 무신 수다를 떤다고.
찬경 : 관두자. 얘기해 봤자 내만 모지란 놈이지.
찬경, 만사 귀찮다는 듯 자리에 앉는다.
찬경 : 저녁 안주나?
찬경 처 : (TV를 보며) 요것만 보고.
찬경 : 배고프다.
찬경 처: 그러면 차려 먹든지.
찬경,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찬경 처 : 또 어딜 가는데?
듣지도 않고 가게를 나서는 찬경 뒤로,
찬경 처 : 제발 내일은 잊지 말고 우체국 좀 갖다 온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노.
그 소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서는 찬경, 괴물 쳐다보듯 휙 뒤돌아보면,
찬경 처 : 와 보는데?
34. 중달의 집
저녁 상을 마주한 형제.
벽에 걸린 중달 모친의 사진.
중범 : 저 맞선 본다면서요.
중달 : 낼 모래 3시에 읍내 세시봉 다방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잘 해!
중범 : ...
중달 : 왜 대답이 없어?
중범 : ...알았어요.
중달 : 또 한번 중매쟁이 바람맞추면 알아서 해라.
중범,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선다.
중달 : 밥 안 먹어?
중범 : 다 먹었어요.
중달 : 아직 한 술도 안 떴는데 뭘 다 먹어. 빨리 안 앉아.
안 앉고 개기는 중범.
중달 : 너 정말 눈물 젖은 밥 먹어볼래?
중범 : 엄마 보는데서 날 때리겠다고요.
중달, 모친의 사진을 바라보면,
모친, 마치 “너 동생 때리면 죽어”하고 윽박지르는 듯한 표정이다.
중달 :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알았으니까 앉아.
중범, 다시 밥상 앞에 앉는다. 약간 기가 살아난 분위기다.
중범 : 약속하세요, 이젠 온 동네에 중매 부탁하고 다니지 않겠다고. 제가 챙피해 죽겠어요.
중달 : 니가 챙피해? 나이 오십에 장가도 못 간 동생 둔 내가 더 챙피해 임마.
중범 : 마흔아홉이예요.
중달 : ... 잘 났다.
중범, 다시 일어서려하고 중달은 황급히 중범을 주저앉힌다.
중달 : 그래, 그래. 우리 차분히 얘기하자.
중범 : 얘기하세요.
중달 : 내 슬하에 자식이 어떻게 되냐?
중범,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만 멀뚱멀뚱 뜬다.
중달 : 정혜, 정자, 정숙이 이렇게 딸만 셋이야.
중범 : 누가 그걸 몰라요. 하려던 얘기나 어서 하세요.
중달 : (화를 내며) 임마 지금 얘기하고 있는거야. 중요한 얘기니까 잘 들어.
중범 : ...
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빼어문다.
중범 : (눈치를 살피며) 형님 혹시 숨겨둔 자식 있는 거예요?
마침내 중달의 손이 날아가 중범의 머리를 후려친다.
중달 : 이 자식이 생각하는거 하고는. 임마, 내가 딸만 있으니 너라도 장가가서 아들을 낳아야 대를 이을거 아냐. 그 얘길 하는데 뭐가 어쩌구 어째.
이때 찬경이 방으로 들어선다.
찬경 : 너 왜 아침저녁으로 쌈질이냐?
중달 : 미친놈, 니 눈엔 이게 쌈질로 보이냐?
중범 : 아저씨 오셨어요?
찬경 : 응 그래. 니가 형 등쌀에 제명에 못 죽겠다.
중달 : (느닷없이 중범에게) 그리고 너, 난 형인데 얘가 왜 아저씨냐?
중범 : 그럼 형도 아저씨라 불러드려요
찬경 : 아, 그렇게 부르는게 편한가 보지. 별 것 갖고 다 시비네.
35. 필국의 집
바둑을 두고 있는 필국과 영희
영희 : 할배, 한 수만 물리자!
필국 : 일수불퇴다!
영희 : 할배!
필국 : 택도 없다. 내기바둑에 물리는 게 어디 있노?
바둑판을 노려보며 고뇌하는 영희.
그런 영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필국.
영희 : (여전히 고개 숙이고 바둑판만 바라보며) 할배!
필국 : 안된다니까.
영희 : 그 할매 예뿌더라.
필국 : 누구?
영희 : 아까 그 할매...
필국 : 아..그 할매...예뿌더나...
필국, 별 관심없다는 듯 다시 바둑판을 들여다보면,
영희, 필국의 속내를 살피듯 얼굴을 흘깃 훔쳐보고는 비장의 한점을 딱 둔다.
필국 : 어? 이런 수가 있었나?
영희 : 돌 던지라, 할배.
이때 밖에서 들리는 소리.
소리(중범의) : 형님 계세요.
반갑게 일어나 방문을 여는 영희
영희 : 중범이 아재!
필국 : 왔어. 형은 집에 있고?
힘없는 모습으로 방에 들어서는 중범,
중범 : 찬경이 아저씨하고 술 한잔한다고 나가셨어요.
영희 : 아재, 저녁은?
중범 : 응, 됐어.
영희 : 아재 와 그래 힘이 없는데?
중범 : 그래 보이나?
필국 : 형한테 또 혼났냐?
중범 : 아닙니다... 서울서 내려온 분이 내일 배 좀 빌릴 수 있냐던데...
필국 : 배? 그 양반이 배는 뭣하게?
중범 : 조도에 간다고 하시던데요
필국 : 조도? 거긴 왜?
36. 바닷가. 밤
순아네 횟집이 보이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 멀리, 달빛 비치는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인주.
소풍 전날밤의 아이 같은 설렘과 기대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37. 순아네 횟집
내부에 손님 서넛이 술을 마시는 모습이 창을 통해 보여지고,
순아는 한쪽 테이블에 앉아 중범이 쓰다 만 영수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38. 타조 농장(에서 바라보이는 진봉의 집)
농장 너머로, 막 귀가해 집안으로 들어가는 진봉의 모습이 보인다.
집안에 불이 켜진다. 아주 짧은 절대정적이 감도는가 싶더니, 일시에 적막을 깨는 울부짖음.
소리(진봉의) : 으아아아아아아
졸고 있던 타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날개를 푸득거린다.
39. 진봉의 집 밖.
비명소리 이어지며,
창문을 통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하는 진봉의 실루엣
비명소리 멀어지며, 보여지는 마을 전경.
화면, F.O 되면서 소리만 메아리친다.
“배애주웅다알, 이 쳐죽일 노오오오옴!
40. insert. 이른 아침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와 함께
F.I
이른 아침의 바다 풍경
찬경의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찬경의 스쿠터.
아무런 기척이 없는 진봉의 집.
41. 배 위. 이른 아침
통통통 물살을 가르는 필국의 배.
인주가 뱃전에 앉아 바람을 맞고 있다. 들떠있는 인주의 얼굴.
필국, 키를 잡은 채 인주의 얼굴을 흘끔 쳐다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인주, 방긋 웃어준다.
필국, 인주의 사연이 궁금하기도 하고, 단둘만의 공간이 어색하기도 한 듯 헛기침을 해본다.
인주 : 저요...배 처음 타봐요.
그러면서 또 빙긋 웃는 인주. 영 어색하지만 싫지는 않은 필국.
필국 : 아...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배의 속도를 높이는 필국.
42. 타조농장 주변
타조에게 사료를 주는 척하며 진봉 집 쪽을 살피는 중달.
중달은 진봉이 무척 신경 쓰이는 기색이다. 그러나 진봉의 집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다.
다만 진봉의 집 담벼락에 중달이 행패부린 흔적이 남아있다.
중달이 작살낸 박제들이 버려져 있고,
냉동실에 쳐박아 둔 탓에 서리가 낀 박제가 햇볕에 서서히 녹고 있다.
상한 음식들도 쓰레기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달은 좀더 진봉 집 쪽 가까이 다가가 보지만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고개를 갸웃하는 중달.
중달 : 거 별일이네. 짜식이 약 먹었나...
43. 순아의 횟집. 오전
순아, 테이블에 앉아 양념통에 초고추장, 겨자, 간장 등을 채우고 있다.
중달, 옆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중달 : 오늘 진봉이 못봤나...
순아 : 아뇨, 못봤는데... (미소를 띠며) 그 아저씬 왜 찾으세요?
중달 : 찾긴, 뭐...
중달, 순아를 슬쩍 본다.
중달 : 순아는 시집 안 가?
순아 : (피식 웃으며) 누가 저 같은 거 거들떠나 보나요?
중달 : (정색을 하며) 아니, 순아 니가 어디가 어때서? 건강하지, 음식 잘 하지, 싹싹하지... 내가 십년 만 젊었어도 가만 안 있었다.
순아, 웃는다.
중달, 그런 순아를 쳐다보면서 안타까운 듯 담배를 피워 문다.
순아, 흘깃 중달의 눈치를 살피며
순아 : 중범씨는 결혼 안 해요?
중달 : 우리 중범이...? 내가 그놈 때문에 잠이 안 온다, 잠이 안 와! (한숨을 내쉰다) 죽어서 조상님 뵐 면목도 없고...
사이
순아 : 아저씨는 중범씨 상대로 어떤 여자가 좋으세요?
중달 : 딴 거 다 필요 없어. 그저 우리 중범이 위할 줄 알고... 건강하고 그러면 되는 거지.
빙그레 웃는 순아.
중달 : 순아야...
순아 : 네?
중달 : 넌... 어떤 남자가 좋으냐?
얼굴이 붉어지는 순아.
순아 : 저야 뭐... 사람만 착하고... 진실되면...
중달 : 나이는?
순아 : 나이요?
사람만 좋다면 나이야 뭐...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중달.
44. 조도앞바다
오십 평 정도 될만한 작은 섬.
섬이라기 보다는 암초에 가깝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섬을 보고 있는 인주.
인주 : 이게 뭐예요?
필국 : 조도 가자고 하셨잖소?
인주, 혼란스런 얼굴로 필국을 쳐다본다.
인주 : 이게... 조도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필국
인주 : 이게 정말 섬이에요?
필국 : 섬이 아니면 산이요?
인주 : 정말 이 섬이 조도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필국.
인주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쳐지나간다.
인주 : 농담하시는 거죠? 여기 조도 아니죠? 그렇죠? 세상에 이렇게 쪼그만 섬이 어딨어요?
필국 : 그래서 이름이 조도예요. 좁쌀만 하다고.
인주,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린다.
필국 : 괜찮아요?
필국, 인주에게 손을 내민다.
인주, 눈을 감으며 손을 가로젓는다.
인주 : 아냐, 아냐...
인주, 어지러운 듯 자리에 주저앉다가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진다.
필국, 인주를 구하려 바다로 뛰어든다.
45. 순아의 횟집
순아와 영희가 실뜨기 같은 놀이를 하고 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는 풍경이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물에 흠뻑 젓은 필국이 들어온다.
뒤따라 중범이 인주를 업고 황급히 들어온다.
놀라는 순아와 영희.
순아 : 어머, 어머! 이게 왠일이야?
46. 순아의 방
순아가 수건으로 정신을 잃은 인주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다.
이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필국, 찬경, 영희.
순아 : 괜찮으시겠죠?
필국 : 응, 바로 건져냈으니까 별탈은 없을 거야.
순아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필국 : 낸들 아나..처음부터 거길 가자 그래서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찬경 : (그 와중에도) 참말로 곱네...
순아 : 아저씨!
찔끔하는 찬경.
필국 : 누구한테 사기를 당한 건지...거기서 뭘 하겠다고..
순아 : 어머,어머...아줌마 불쌍해서 어떡해. 달랑 그 섬 하나 바라보고 오신 것 같던데...
필국 : .......
찬경 : 그거 참......빨리 일어나야 될텐데...참...(하면서 인주의 손을 슬쩍 잡아본다.)
영희, 얼른 찬경의 손을 탁 친다.
47. 찬경의 방
밥을 먹고 있는 찬경과 처.
찬경, 게걸스레 한 그릇을 비운다.
찬경 : 밥 좀 더 줘.
처, 약간 이상하다는 듯 흘깃 보고는 말없이 한 그릇을 더 퍼준다.
찬경, 또 다 비운다.
찬경 : 한 그릇만 더 줘.
처, 입에 밥 든 채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찬경, 갑자기 눈빛이 변하더니 밥상을 한쪽으로 민다.
찬경 처 : 와 그러는데?
찬경,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처를 자빠뜨린다.
소리 (찬경 처의) : 이 영감쟁이가 미쳤나? 대낮부터.
소리 (찬경의) : 가만 좀 있어봐라!
밥상이 살짝 흔들린다.
48. 순아네 민박.
인주가 묵고 있는 방. 인주, 깨어났지만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구슬프게 울고 있다.
순아가 먹을 걸 들고 들어온다.
순아 : 아주머니,이거 좀 드세요. 전복죽 좀 끓여왔어요.
인주 :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미안해...
순아 : 미안하긴요.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기운 내세요.
인주, 대답이 없다. 그런 인주를 잠깐 쳐다보다 나가는 순아.
49. 타조 농장.
중달과 중범이 농장의 평상에 앉아 있다.
중달, 건너편 진봉의 집을 불안한듯 힐끔 살핀다.
중범 : 왜, 진봉이 형님이랑 또 한판 하셨어요?
중달 : 응? 아냐 임마.
중범 : 저한테 할말 있으시다면서요.
중달 : 응. 참.
담배를 피워무는 중달. 긴장하는 중범.
중달 : 너... 순아 어떻게 생각하냐?
중범 : 어떻게 생각하긴요? 고맙게 생각하죠.
중달 : 마, 그거 말고....거 있잖아...
중범 : 그냥 친구죠, 뭐.
중달 : 친구?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나는데 친구는 무슨... 임마! 그리고 원래 남자여자 사이엔 친구가 없는 거야.
사이
중달 : 순아... 정말 여자로는 생각해 본 적 없냐?
중범 : 순아씨... 여자잖아요.
중달 : 이놈이... (사이) 결혼상대로 말이다, 결혼상대!
중범 : 나 참, 내일 맞선 보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순아씨까지 끌어들여요?
중달 : 대답이나 해, 임마!
중범 :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요.
중달 : 한번도?
중범 : 예...
중달 : 단 한번도...
중범 : 예!
중달 : 앞으로도?
중범 : 예!
중달, 담배를 피우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중범 : 근데 왜 자꾸 물어보세요?
중달 : 아냐, 혹시나 니가 순아한테 마음이 있나해서 물어 본 거야.
중달, 일어선다.
중달 : 뒷정리 좀 하고 들어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
50. 타조농장. 저녁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중달이 진봉의 집을 살핀다.
여전히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떨칠수 없는 불안감....
울타리 문을 잘 단속한 다음, 또 한번 진봉의 집을 쳐다보고는 돌아서는 중달
51. 필국의 집. 밤
영희와 필국이 저녁을 먹는다. 조용한 음악....라디오에서 들린다.
영희 : 할배!
필국 : 와?
영희 : 사는 게 뭘까?
필국 : 와, 니 요새 고민 있나?
영희 : ....아이다.....
필국 : .....
영희 : 할배!
필국 : 또 와?
영희 : 서울 할매.....많이 아픈 것 같더라.
필국 : 다친데는 없으니까.....금방 나을끼다.
영희 : 마음이 많이 아픈 것 같더라....안됐재?
필국 : .......
영희 : 밥묵자, 할배.
필국 : 밥묵자.
필국, 먹다가 조금 흘린다.
영희 : 할배, 흘리지 말고 묵자.
필국 : 그러자.
달그락달그락 조용히 밥먹는 두 사람. 생각이 많아 보인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음악이 끝나고 멘트가 들린다.
‘다음은 경남 oo에서 이영희양이 신청한 곡입니다. 오늘이 영희양 어머니의 생일이라고 하네요. 생일을 맞은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랍니다......영희양, 효도하세요.’
밥먹던 필국, 숟가락을 놓는다. 영희는 못들은 척 계속 밥만 먹는다.
영희의 신청곡이 들린다.
52. 찬경의 방 / 밤
찬경과 처가 이부자리에 누워 있다.
잠을 청하는 분위긴데... 둘 다 눈이 말똥말똥하다. 오늘따라 이상스럽게 잠이 안 온다.
둘 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왜 이렇게 잠이 안 오는지 골똘히 생각하는 두 사람의 얼굴.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10점을 친다.
찬경 : 자나?
처 : 안 잔다.
찬경 : 와 안 자노?
처 : 잠이 안 온다.
찬경 : 와 잠이 안 오노?
처 : 모르겠다. 당신은 와 안 자노?
찬경 : 잠이 안 온다.
처 : 와 잠이 안 오노?
찬경 : 모르겠다.
처 : 자자.
찬경 : 자자.
시간 경과
다시 홍찬경의 방안.
아까와 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두 사람.
찬경 : 자나?
처 : 안 잔다.
찬경 : 잠 안 오나?
처 : 안 온다.
찬경 : 나도...
처 : 와 잠이 안 오노?
찬경 : 모르겠다. 니는?
처 : 나도...
찬경 : 자자.
53. 찬경의 집 마당 / 밤
찬경의 스쿠터가 보인다.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들.
멀리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
누군가의 손이 빨래를 들척거리며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한다.
54. 찬경의 방 / 밤
두 눈을 깜빡이고 있는 찬경과 처.
두 사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나 앉는다.
찬경 :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데...?
처 : 맞다! 어머님 제삿날!
찬경 : 아이고... 이런 불효 자석이 어딨노...
처 : 우짜면 좋노!
찬경 : 니도 며느리가! 빨리 달력 갖고 온나!
처, 불을 키고는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 온다. 숫자만 있고 그 밑에 음력 씌어진 그런 달력.
두 사람, 날자를 짚어 본다.
찬경 : 오늘이 며칠이고?
처 : 12일.
찬경 : 보자...
처 : ...
처를 멀뚱히 쳐다보는 찬경.
찬경 :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네...
처 : 거봐라. 내가 뭐라 카더노.
찬경 : 니가 뭐라 캤는데?
처 : ...내가 뭐라 캤더라?
55. 도로
첫 씬과 동일한 도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워이- 워이” 소리와 함께
어둠속에서 나타나 도로를 내달리는 타조. 작대기를 들고 뒤를 쫒는 진봉.
진봉, 가로등 밑에 멈춰 서서 숨을 헐떡인다.
멀어지는 타조를 바라보며, 보람찬 미소를 짓는 진봉, 근처 바위에 걸터 앉더니 허공을 향해 공기총을 쏜다.
진봉 : 멀리 가라. 멀리. 아주 가 버려라. 너거 고향 아프리카로 가버려라!
씩 웃는 진봉. 대단히 만족스럽다.
56. 인서트. 초등학교
제삿날이 밝아온다.
누군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쓰여진 이승복 동상의 글자를 고쳐놨다.
아이의 글씨, “나는 조진봉이 싫어요”
57. 순아네 민박. 이른 아침
순아가 인주를 불러도 기척이 없다. 인주의 방문을 열어보는 순아.
짐은 그대론데 인주는 보이지 않는다.
58. 바닷가
바닷가에 앉아있는 인주. 차분해진 모습이다.
순아가 다가온다.
순아 : 왜 나와계세요. 아침 드셔야죠.
인주, 대답없이 고개만 젓는다.
순아, 인주의 옆에 주저앉아 인주의 눈치를 살핀다.
순아 : 오늘은 비라도 올 모양이네요.
인주 : 비라도 좀 오면 좋겠다....모진 양반....
순아, 인주의 속내를 몰라 슬그머니 쳐다본다.
인주 : 아직 혼자 살아요?
순아 : 말씀 낮추세요. 한참 어린데....
인주 : 그럴까...
순아 : 예전에 결혼했었어요. 생각도 하기 싫지만...
인주, 순아를 바라본다.
순아 : 툭 하면 술 먹고 들어와서 차고 때리고...그러면서 사랑한다 그러고....다음 날 술 깨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 그러고....연속극이죠 뭐.
인주 : ...애는?
순아 : 없었어요. 그래서 도망나왔죠. 7년만에요.
인주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구나...
사이
순아 : 근데 그런 섬은 왜 사셨어요? ....사기전에 좀 자세히 알아보시지 않구.
인주 : 그 섬은... 영감한테 얻어낸 위자료야.
순아 : 예에? 그럼 이혼 하셨어요?
인주 : 응.
순아 : 와...대단하시네요.
인주 : 너무 늦었지.
순아 : 애들은요? 어머, 나좀 봐, 애들이래.
인주 : 다 지 애비 편만 들대. (사이) 모든 걸 그 섬하고 바꿨는데...
힘없이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인주.
59. 중달의 방 / 아침
아침을 먹고 있는 중달과 중범.
엄마의 사진. 중범을 격려하는 듯하다.
중달 :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어깨도 펴고, 허풍도 좀 치고...
여자는 임마 강한 남자한테 가는 법이야.
중범 : 엄마 제삿날 맞선보는 자식이 어딨어요?.
중달 : 이자식이 정말...
중범 : 알았어요. 나가면 될 거 아니예요.
중달 : 너 잘해, 오늘도 개판 치면 엄마 제삿날이 니 제삿날 될 줄 알아.
이때 울리는 전화벨. 전화를 받는 중범
전화를 받으며, 놀라는 중범
중범 : 예에? ... (사이) 예예..
중달 : 누군데?
중범 : 예, 금방 가겠습니다.
중범, 전화를 끊고 급히 옷을 걸쳐 입는다.
중범 : 금남리 파출손데 우리 타조가 거기 잡혀 있대요.
타조 땜에 차사고까지 났다는데요.
중달 : 뭐야?
중범 : 사람은 안 다쳤는데 차가 많이 부서졌나 봐요.
문을 나서는 중범.
갑자기 경련이 오는 듯 뒷목을 만지며 신음하는 중달.
중달 : 조오진...봉. 아으으으으!.
60. 찬경의 집 마당 / 아침
찬경, 마루에 앉아 원동기 면허시험 예상문제지를 들고는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천자문 외듯 중얼거리고 있다.
찬경처, 빨래를 걷고 있다.
찬경처 : 내 빤스 못 봤나?
찬경 : 중얼중얼중얼...
찬경처 : 이상하네?
찬경 : 중얼중얼중얼...
찬경처 : 내 빤스 못 봤나?
찬경 : 중얼중얼중얼...
찬경처, 예상문제지를 확 뺐는다.
찬경 : 이기 무슨 짓이고?
찬경처 :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 좀 해라!
찬경 : 뭐라고 했는데?
찬경처 : 내 빤스 못 봤나?
찬경 : 니 빤스?
찬경처 : 그 왜 꽃분홍색에 야들야들한 거 있잖나?
설에 작은 며늘아가 사 가지고 온 거!
사이
찬경 : 니 미쳤나? 니 빤스를 왜 나 한테 묻노? 내가 입었을까 봐?
심난한 표정의 찬경처.
소리(중범의) : (크랙션 소리와 함께) 아저씨! 안계세요
61. 찬경의 집 밖.
찬경이 나와보면 중범이 트럭에 타고 있다.
중범 : 저 지금 타조 데리러 금남리 파출소에 가는데 저 돌아올 때까지 우리 형님 좀 잡아두세요.
찬경 : 또 도망쳤나?
중범 : 진봉이 형님하고 큰 일 나기 전에 어서 좀 가보세요.
찬경 : 알았다. 중달인 나한테 맡기고 얼른 갔다 온나.
62. 타조농장 - 진봉의 집 사이
굳은 표정으로 타조농장을 거슬러 진봉의 집으로 향하는 중달. 몽둥이를 들고 있다.
낮은 언덕 위, 자신의 집 앞에 두 발을 벌리고 선 채, 중달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더 굳은 표정의 진봉.
진봉의 손엔 예의 공기총이 들려있다.
마치 서부영화의 대결 씬 마냥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흙먼지가 분다.
서서히 좁혀지는 두 사람 간의 거리. 공기총이 바르르 떨리고 몽둥이도 가늘게 떤다.
진봉 :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더 이상 접근하면 발포하겠다.
중달의 얼굴 근육이 작은 경련을 일으킨다. 이마에 땀 한 방울이 흐른다.
중달 : ...총 치워라.
진봉 : ...그 작대기부터 치워라.
중달 : 니놈이 아주 간뎅이가 부풀어올랐구나.
중달의 기세가 심상치않아 보인다. 진봉, 개머리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에 식은땀이 흐른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중달, 아무래도 총든 놈 앞에서 오버하기엔....좀 자신이 없다.
중달 : 음....오늘은 울 어머니 제삿날이라 참는다만...내일부터 내 눈에 띄었다간
니 머리통을 요절낼 테니 조심하는게 좋을거다.
하고는 최대한 스타일을 유지하려 애쓰며 돌아선다. 그제서야 멀리서 달려오는 찬경.
찬경 : 주웅..다알..아아아.....
63. 중달의 집
선보러 나갈 준비를 하듯 거울을 보며 옷을 입고 있는 중범.
옆에서 영희가 거들고 있다.
영희 : 어디서 만나는데?
중범 : 세시봉 다방...
영희 : 또 세시봉 다방. 와 맨날 거기서 만나는데?
중범 : 응.중매쟁이가 거기 마담 이모라카더라.
영희야!
영희 : 응?
중범 : 니는 전생을 믿나?
영희 : 아니. 아재는 믿나?
중범 :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선녀였던 것 같다.
영희 : 선녀? 아재하고 너무 안 어울린다.
중범 : 옛날 이야기 있잖아, 선녀와 나무꾼.
어렸을 때 그 책을 읽고 펑펑 울었던 생각이 난다.
영희 : 와? 나무꾼이 불쌍해서?
중범 : 아니, 선녀가 불쌍해서 울었다.
영희 : 선녀가 뭐가 불쌍하노? 자기 남편 버리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사이
중범 : 선녀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나? 선녀는 선녀이기 때문에 보통 여자처럼 땅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그랬을거다.
그런 중범을 빤히 쳐다보는 영희.
64. 읍내 목욕탕
필국, 중달, 찬경이 열탕에 들어앉아 얼굴만 내밀고 있다.
중달, 머리에 물수건을 얹은 채 아으으으으 하는 영감특유의 목욕탕 사운드를 발하고 있고,
필국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고,
찬경은 뜨거워서 약간 고통스런 얼굴이다.
찬경 : (중달 들으라고) 시끄럽다. 영감 티 내냐?
중달 : 아무도 없는데 어떻노? 아으으으으...
찬경 : (뜨거워서 참기 힘들다) 그만... 나가자... 으...
사이
필국 : 중달아!
중달 : 와?
사이
필국 : 이번에는 잘 될 것 같나?
중달 : 내가 정말 이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가를 보내고 말끼다!
사이
찬경 :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필국 : 뭐가?
찬경 : 내는 옛날에 장가가고 싶어서 열살 때부터 엄마한테 조르고 난리를 쳤는데...
(중달에게) 솔직히 말해봐라!
중달 : 뭘?
찬경 : 중범이, 고자재? 맞재?
중달 : 미친 놈! 남의 멀쩡한 동생을 가지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찬경 : 아니면 말고.
눈을 감고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달.
중달 : 한가지 캥기는 게 있기는 하다.
필국 : 뭐가 캥기는데?
중달 : (눈을 뜨며) 우리 중범이 고등학교 다닐 때였나? 내가 만땅으로 취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걷어찬 적이 있는데 그게 그만..붕알을 안 차삤나..
필국 : 붕알을?
찬경 : 그래서 우째 됐는데?
중달 : 우째 되기는...붕알이 터졌지!
필국 : 붕알이?
중달 : 그래도 다행히 한 쪽만 터졌다.
찬경 : 그러면..중범이가 짝붕알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중달.
찬경 : 맞네, 고자!
중달 : 아니라니까! 그때 의사선생님이 장가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캤다. 그때 엄마한테 죽도록 맞았다. 내가 그때 엄마한테 맹세를 안했나. 내 죽을 때까지 중범이 절대로 안때리고 내 자석같이 보살피주겠다꼬. 그런데 이노무 자석이....
사이
찬경 : 근데... 짝붕알도 꼬치가 서나?
중달 : 꼬치 서는거 하고 붕알하고 아무 상관없다!
찬경 : 니가 봤나?
자신 없는 표정의 중달.
66. 바닷가 숲
영희, 무슨 생각엔가 빠진듯 길에 널린 돌을 무심코 톡톡 차면서 걷고 있다.
돌 하나가 돌돌돌 굴러가 누군가의 발 앞에 멈춘다. 산책을 나온 인주다.
영희, 인주를 빤히 쳐다본다.
인주 : 너, 영희구나.
영희 : 어? 서울 할매다.
인주 : 철수는 어디 갔니?
영희 : 철수는 학교에 남아서 변소청소 하고 있어요.
인주 : 왜?
영희 : 또 숙제 안 해 왔거든요.
인주 : (웃는다.)그러니...머리 참 예쁘게 땋았네.
영희 : 우리 할배가 땋아줬어요.
인주 : 영희는 착한 할배 있어서 좋겠다.
근처의 바위에 나란히 앉은 인주와 영희, 함께 바다를 보고 있다.
영희 : 서울 할매...
인주 : 왜?
영희 : 선녀와 나무꾼 얘기 알아요?
인주 : 알지.
영희 : 우리 할배는 나무꾼이에요.
인주 : 왜?
영희 : 우리 할배만 남겨놓고 다 하늘나라로 가버렸거든요.
인주 : .....
영희 : 우리 할매, 아버지,삼촌...다 가버렸어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래요.
인주 : ....엄마는?
영희 : ....몰라요.
인주 : ....그래도 할아버지한테는 영희가 있잖아.
영희 : (주머니에서 뭘 꺼내준다.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다.) 이거...할매 줘도 돼요?
인주 : 어머, 너무 예쁘다. 정말 나 주는 거야?
영희 : 원래는 다른 사람 주려고 만들었는데...서울 할매 주고 싶어요.
인주 : .....고맙다.
인주,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쥐기만 한다.
그리곤 머리핀(혹은 다른 거)를 뽑아 영희 머리에 꽂아준다.
인주 : 나보다 너한테 더 잘 어울리네.
두 사람, 마주보고 빙긋 웃는다.
66. 순아네 횟집
갑작스런 단체손님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순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산책갔던 인주가 들어온다.
순아 : (손님에게 쯔기다시 접시 등을 안기며) 아줌마! 이것 좀 저 쪽에다!
하며 정신없이 주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인주,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테이블로 음식 접시를 나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뭐 갖다달라는 소리치는 손님들.
순아와 인주가 바쁘게 음식을 나른다.
67. 읍내 목욕탕 / 오후
나란히 앉아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중달, 찬경, 필국.
중달 : 찬경아...
찬경 : 와?
중달 : 니.. 요새도 하나?
찬경 : 뭐를?
중달 : 너거 마누라하고 말이다.
찬경 : ...응.
중달 : 진짜로?
찬경 : 응. 우짜다가 한번씩...........우짤때는.. 두번씩.
중달 : (신음을 삼킨다. 가벼운 신경질) 어따, 이거 물이 와이래 뜨겁노.
필국 : 제사 있는 날 그런 얘기하면 부정탄다.
중달 : 괜찮다.
우리 모친은 생전에 술 잡숫고 음담 나누는 거를 젤 좋아하셨다.
찬경 : 그래. 우리 엄마도 그랬다 아이가.
필국 : 두 양반이 그래 친하게 지내더마는 우째 죽는 것도
한날 한시에 그래 돌아가셨을꼬?
중달 : 지금도 저승에서 술 잡숫고 노닥거리고 계실끼다.
사이
중달 : 내가 그 얘기했나?
찬경 : 니가 안한 얘기를 내가 우째 아노.
필국 : 무슨 이야기?
중달 : ..우리 엄마 죽기 며칠 전에 꿈에 할매가 찾아 왔더란다.
찬경 : 너거 할매가?
중달 : 그래. 우리할매가 엄마한테 사흘 뒤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더란다. 그리고 나서 정말로 우리 엄마 사흘 뒤에 돌아가셨다 아이가.
필국 : 참말이냐?
중달 : 참말이다!
68. 순아의 횟집 앞 / 늦은 오후
손님들은 다 가버리고 테이블에는 빈 그릇들과 술병들이 가득하다.
그릇을 치우기 시작하는 인주와 순아.
순아가 든 쟁반 위에 쌓여있는 그릇이 쓰러지며 떨어지려는 순간 인주가 받아준다.
순아와 인주의 눈이 마주친다.
순아 : (씩 웃으며) 아줌마, 저보다 일 잘하시네요.
땀을 닦으며 미소짓는 인주.
69. 세시봉 다방 / 늦은 오후
수족관의 금붕어들.
벽시계가 3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가씨의 뒷모습,
그 앞에 앉아 시계와 입구 쪽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50대 초반의 중매쟁이.
이제야 뒤돌아 앉아 있던 아가씨의 얼굴 보이면, 순박하게 생긴 필리핀 여자다.
필리핀 여자, 쪽지를 보며 한국말 연습을 하고 있다.
필녀 : 나 한국 좋아요. 나 한국 남자 좋아요. 나 한국 시골 좋아요.
70. 중달의 집 / 밤
자신의 방을 정리하고 있는 중달.
순아가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있다.
필국이 정종 한 병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온다.
엄마의 초상화.
방에 앉아 있는 중달과 필국.
중달 : 임마 이거,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필국 : 지도 이번에는 나름대로 생각을 한 것 같더라...
중달 : 그래?
필국 : 얘기를 좀 해보니깐 눈치가 그렇더라...
사이
중달 : 필국아... 고맙다.
필국 : 고맙긴...
중달 : 그래도 우리 중범이 생각해 주는 건 나하고 너 밖엔 없다.
필국 : 또 있다!
중달 : 누구?
필국 : 순아!
중달 : 순아?
필국, 부엌 쪽을 힐긋 쳐다본 뒤 목소리를 낮추어,
필국 : 내 생각엔 중범이 배필로 순아가 딱이다 싶다.
사이
중달 : 순아는... (단호하게) 절대 안 된다!
필국 : 절대 안돼? 왜?
중달 : 우리 중범이가 싫어한다!
부엌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는 순아.
71. 찬경의 방 / 밤
찬경, 지방을 쓸 차비를 하고 있다.
72. 찬경네 부엌 / 밤
찬경 처가 철수 엄마랑 음식을 만들고 있다.
찬경처 : 철수 엄마, 찌짐은 내가 부칠테니까 철수 엄마는 떡이나 좀 썰어라.
철수엄마 : 떡이 어데 있는데요?
찬경처 : 거기 부뚜막 위에 안 있나?
철수엄마 : 부뚜막 위에 아무 것도 없는데..
찬경처 : 내가 떡을 어디다 뒀더라...? 영감한테 물어 봐야되겠다.
앞치마에 손을 닦고 부엌을 나서는 찬경처.
73. 찬경의 방안 / 밤
아직 지방을 쓰고 있는 찬경. 붓을 든 채로 갑자기 진도를 멈춘다.
그리곤 황당한 듯 고뇌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꼼짝도 않는다.
찬경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찬경처 : 보소. 떡...
하다, 붓을 들고 멍하니 있는 찬경을 보고는
찬경처 : 와 그라요?
찬경 : 큰일났다!
찬경처 : 와?
찬경 : 갑자기... 갑자기... 엄마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찬경처 : 이 양반이 벌써 노망 들라카나? 당신 엄마 이름 박! 끝! 순! 아인교.
찬경 : 맞다, 맞다! 박말순!
찬경, ‘박말순’을 정성스레 한자로 쓴다.
찬경처는 의기양양하다.
찬경처 : 영감쟁이... 정신을 엇다 팔고 다니길래 저거 엄마 이름도 까먹노? 그러니까 백날 천날 공부해도 면허시험하나 못 붙지.
찬경 : 칵! 니 또 내 면허시험 떨어졌다고 온 동네 소문내라!
소리(철수엄마의) : 아재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더.
찬경 처, 나가면서
찬경 처 : 세상사람 다 알고 지만 모르지
74. 찬경네 부엌 / 밤
찬경처,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짐을 부친다.
철수 엄마가 빤히 쳐다본다.
찬경처 : 와 쳐다 보노...?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철수엄마 : 떡은 예?
찬경처 : 무슨 떡?
철수 엄마, 기가 막혀 쳐다본다.
75. 찬경의 방 / 밤
제사상에 떡이 없다.
찬경이 제사상 앞에서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이다.
찬경 : (바깥에다 소리를 지른다) 떡 찾았나?
찬경처, 풀죽은 채 들어와 고개를 젓는다.
찬경 : 이 문둥이같은 여편네. 떡도 없이 제사를 우째 지내노.
그때 밖에서 누가 부른다.
소리 (남자의) : 계십니꺼!
찬경처가 나가보면, 웬 청년이 자전거 옆에 서 있다.
찬경도 따라 나온다.
찬경처 : 누구신데요?
청년 : 방앗간에서 떡 배달왔습니더.
우리 아저씨가 깜빡하는 바람에 인제 갖고 왔습니더.
자전거에서 떡시루를 내리는 청년.
멍해지는 찬경과 찬경처.
76. 순아네 횟집. 밖/안
간판불은 꺼진 체 홀에만 불이 켜져있다. 홀 안의 한쪽 테이블에 인주가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다.
문밖에서 누군가 내부를 살피며 망설이고 있다.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봉.
인주 : (테이블 위의 종이 따위를 치우며)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진봉 : 그냥 뭐... (꿀 상자를 내밀며) 송여사 좀 드시라고 가져왔는데
인주, 받아야할지 난처하다.
진봉 : 아, 받으세요. 이게 이래뵈도 굉장히 비싼 겁니다.
인주, 마지못해 받아든다.
진봉 : (반응을 살피며) 근데, 송여사님 바깥 분은 무슨 일을?
인주 : 그게...
진봉 : (혀를 차며) 사별하셨구랴?
인주 : (화제를 바꾸려) 다친 눈은 괜찮으세요?
진봉 : 뭐 이 까짓거 정도야.
인주 : 그분하곤 왜 싸우세요?
진봉 : 배중달 그놈이 아주 질이 안 좋은 놈입니다. 내가 늘 좋은 말로 타일러도 그놈이 꼭 먼저 욕을 해대고 행패를 부리니... 사실 생각해 보십쇼. 사람 사는 동네에 타조 농장이 뭡니까? 냄새나고, 털날리고, 보기에도 흉측하게 생겼잖아요? 그 타조란 놈 말 입니다.
인주 : 그렇다고 타조를 도시에서 키울 순 없잖아요.
진봉 : (말이 뜻대로 안 통한다. 음..) 이 타조껀 뿐이면 내가 말을 안합니다. 10년전부터 황소개구리다, 기러기다, 유황오리다, 하여간 온갖 요상한 짐승들을 갖다가 키운다고 법석을 떨다가 몽땅 망해먹은 놈 아닙니까, 이 배중달이란놈이.
인주 : 정말 열심히 사신 분이네요.
진봉 : (이게 아닌데..이상하다..) 그게 다면 또 내가 말을 안하지요.
잘 모르시겠지만, 배중달이 그놈은 사기꾼에다 범법잠니다.
인주 : 그 양반이 설마요?
진봉 : 진짜라니까요. 제가 어디 거짓말할 얼굴입니까?
인주 :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진봉 : ... 그게 (잠시 생각하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그놈이 선거 벽보를 찢었지 몹니까. 뭐 지말로만 선거 지나고 찢었다지만... 게다가 국경일이 돼도 당최 태극기 거는 걸 못봤습니다. 어디 그뿐인줄 아세요. 돌아가신 박정희 각하 있지 않습니까. 그놈이 박정희 각하를 꼭 박정희라고 부르지 몹니까.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수차례 주의를 줬는데도... 그놈이 완전 빨갱입니다.
어이없어하는 인주.
77. 중달의 방 / 밤
엄마의 사진.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준비가 끝난 제사상.
근심스런 얼굴로 중달을 보고 있는 필국.
중달 : 아니 이 놈이 지금이 몇 신데 전화 한 통화도 없이...
필국 : 선 본게 잘 된 모양이지. 이리 늦는 걸 보면....
중달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친다.
중달 : 필국아!
필국, 중달을 본다.
중달, 초조한 듯 담배를 피워 문다.
중달 : 이 놈, 이거 또 어디로 내뺀 거 아냐?
필국 : 설마...?
중달 : 안 그러면 왜 연락도 없고 들어오지도 않어?
필국 : 그랬으면 벌써 중매쟁이가 전화를 했겠지...
중달 : 하긴 그렇다...
순간 문이 확 열리며 중매쟁이가 들어온다.
중달, 벌떡 일어서며
중달 : 아니, 최 여사...
중매쟁이 : (삿대질에, 게거품을 물며) 배 사장님! 진짜 이럴 수 있어요! 한 두번도 아니고 두세번도 아니고... 내가 안된다 안된다 그래도 배사장님이 한번만 한번만 그래서 내 정말 속는셈치고 믿었는데... 어쩌구저쩌구...
황당한 표정으로 중매쟁이의 속사포 같은 항의를 받고 있는 중달.
78. 게이바 / 밤
조그만 테이블이 4개쯤 놓여있는 게이바. 세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모두 젊은 편이
다. 휴대용 노래방 기계에서 패티김의 ‘초우’ 반주가 흘러나온다.
만취한 중범, 반주에 맞춰 피를 토하듯 처절하게 노래 부른다.
‘고독이 몸부림 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제각각 나름대로 술마시고 놀던 손님들.
철지난 가요를 처절하게 부르는 중범의 등장에 왠 청승이냐는 듯 쳐다본다.
유독 30대 후반쯤 보이는 대머리만은 중범의 노래부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맥주를 마신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 ‘아우 왜 저래’, ‘구질구질하게 뭐야, 짜증나 정말’
중범, 노래를 끝맺지 못하고 휘청휘청 자신의 테이블로 걸어간다.
카페 주인은 중범이 노래를 중단하자 기다렸다는 듯 게이바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튼다.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는 중범.
앞서의 대머리, 중범의 테이블로 다가와 앉는다.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대머리를 바라보는 중범.
대머리 : 못보던 분인데 여기 처음인가봐요?
중범 : 일년에 두 번 정도 와요.
대머리 : 저도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추레해뵈는 두 남자.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79. 중달의 방 / 새벽
병째로 정종을 들이키다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는 중달.
분이 안 풀리는 지 씩씩 거린다.
걱정스런 눈으로 중달을 보고 있던 필국이 벽시계를 본다.
2시가 가까워오고 있다.
80. 찬경의 점방 앞 / 새벽
가게 문은 닫혀있고 걱정스런 얼굴로 평상에 앉아있는 순아.
어둠 속에서 중범이 발악하듯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아, 일어선다.
81. 중달의 집 마당 / 새벽
마루에 서있는 중달과 필국.
문이 열리며 중범이 들어온다. 순아가 불안한 기색으로 따라 들어온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중범.
중범 : 형님, 저 왔습니다. 잘난 동생 중범이가 왔습니다.
중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중달, 득달같이 달려나와 중범의 얼굴을 후려친다.
중범, 쓰러진다.
비명을 지르는 순아.
중달 : 이 망할 놈의 자식!
중달, 쓰러져있는 중범에게 발길질을 한다.
필국 : 중달아!
중달을 말리는 필국.
필국을 밀쳐버리고 한 구석에 놓여있던 쇠파이프를 집어드는 중달.
순아, 비명을 지르며 몸으로 중범을 감싼다.
울음을 터뜨리는 순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달.
중달 : 일어나! (악을 쓴다) 어서 일어나!
중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오늘은 만만히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필국, 중달에게서 파이프를 뻇는다.
필국 : 중범아, 형님한테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중달 : 너 사실대로 말해! 지금까지 어디서 뭐하다 왔어?
중범 : 저요? 놀다 왔어요,
중달 : 놀아?
중범 : 예. 놀았어요. 왜요? 저는 좀 놀면 안됩니까?
치솟는 분노를 어쩔 줄 몰라하는 중달.
필국 : 어서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중달 : 맞선 보러 나간 놈이 맞선은 안보고 술이나 쳐먹구 놀다와?
그 말에 당황한 듯 중달과 중범을 번갈아 쳐다보는 순아.
순아 : 중범씨 맞선 봤어요?
중범 : (뻗댄다.) 저 같은 놈이...술이나 쳐먹구 놀아야지...
맞선은 무슨 맞선이에요. 끅!
중달 : (중범의 멱살을 잡으며) 이 자식이 듣자듣자 하니까!
중범 : (내친김에 막나가기로 작정한 듯) 형님, 전 말이죠.여자하고는 결혼 못해요. 끅!
중달 : (악을 쓴다) 이 자식아, 그럼 결혼을 여자랑하지 남자랑 할래?
중범 : 예! (악을 쓰듯) 전요, 끅! 남자 냄새가 더 좋구요, 끅! 남자 가슴이 더 좋구요, 남자 입술이 더 좋아요...
경악스런 표정의 순아.
필국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충격을 받은 중달이 중범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힘없이 놓으며 휘청거린다.
중달, 혈압이 치솟는 듯 뒷머리를 잡으며 주저앉는다.
부축하는 필국.
망연자실, 땅바닥에 주저앉는 순아.
중범, 우물 옆으로 가 토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졌다.
82. 중달의 방 / 새벽
벽에 기대어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중달.
엄마 사진. 엄마는 중달이 측은하다는 표정이다.
필국이 이부자리를 펴준다.
필국 : 중달아....인제 그만 자거라.
83. 하늘
달.
먹구름이 서서히 달을 가리기 시작한다.
84. 중달의 방 / 꿈
중달의 꿈.
중달이 악몽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맡의 물을 마신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깊은 동굴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 중 - 달아달아달아달아아... 중 - 달아달아달아달아...
중달, 번쩍 눈을 뜬다.
소리 : 중 - 달아달아달아달아달아...
85. 중달의 집 마당 / 꿈
바닥에 깔린 안개.
중달, 문을 열고 나와 마당을 두리번거린다.
중달 : 누구요?
중달,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들어가려는데
우물의 뚜껑이 쾅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중달,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누군가의 손이 나와 우물 턱을 탁 잡는다.
중달,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비빈다.
소복을 입고 백발의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우물에서 기어 나온다.
휘둥그레지는 중달의 눈.
중달 : 누구..요?
여자, 고개를 치켜든다.
사진속에 늘 등장하던 중달의 엄마다. 무섭다기보다는, 장난스럽고 괴퍅스럽다 못해 귀엽기까지 한 얼굴.
순간 흠칫하는 중달.
중달 : 엄마, 이 밤중에 우짠 일입니까?
엄마 : ......
중달 : 엄마...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삿밥도 못 챙겨드리고..
엄마 : 가자..
중달 : 가기는.....어딜 가요, 엄마?
엄마 : 가자....
중달 : 엄마, 저... 데려 가실라고요?
엄마 : 가자...
중달 : (덜컥 겁이 난다.) 엄마, 진짜로 저 데려 가실라고요...
엄마, 고개만 끄덕인다.
중달 : 엄마, 엄마, 제가 잘못했다 안 캅니까. 엄마..엄마...
다가오는 엄마. 그때 어디선가 꼬끼오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화들짝 놀라 우물 안으로 들어간다.
엄마 : 오늘은 그냥 간다.
중달 : 엄마! 엄마! (에코)
86. 인서트. 아침
- 중달의 방에선 중달이 멍한 눈으로 벽에 걸려 있는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 순아네 횟집은 아직도 굳게 닫혀있다.
87. 필국의 집
영희가 필국에게 염색을 해주고 있다.
어색한 표정의 필국.
필국 : 갑자기 아침부터 염색은 와 하자 카노?
영희 : 할배, 좀 가만 있어봐라!
사이
필국 : 늙은이 머리가 너무 꺼머면 보기 흉하다.
영희 : 할배가 뭘 몰라서 그렇다. 남자는 머리가 시커매야 멋있다.
필국, 염색하는 영희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말없이 바라본다.
88. 진봉의 집.
거울 앞에서 다시 사냥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모양을 내는 진봉.
로션도 얼굴에 바르고 들뜬 모습이다.
공기총을 들어 어깨에 걸어보는 진봉.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흡족해한다.
그러다 공기총 개머리판에 묻은 얼룩을 발견하는 진봉.
수건을 꺼내어 닦기 시작한다.
89. 진봉의 집 앞.
진봉의 집 앞을 지나는 찬경.
갑작스런 총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뒤이어 들리는 진봉의 처절한 비명소리.
진봉 : 으아아아아.....
심상찮은 비명에 놀라 진봉의 집으로 뛰쳐 들어가는 찬경.
90. 읍내 병원.
침대 위에 누워 비명을 질러대는 진봉. 다리에 피가 흐른다.
안쓰러운 얼굴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찬경.
간호사가 진봉의 혁대를 푼다.
순간 진봉, 뭔가가 생각난 듯 간호사의 손을 뿌리친다.
진봉 : 안돼! 바지는 안돼!
어이없어 하는 간호사와 의사.
의사 : 할아버지! 바지를 벗으셔야 치료를 하죠.
이를 앙 다문 채 도리질을 치는 진봉.
찬경이 몸부림치는 진봉을 잡은 사이 의사와 간호사가 진봉의 바지를 벗긴다.
진봉이 입고 있던 찬경 처의 꽃분홍 빤스가 드러난다.
킥 웃음을 터뜨리는 간호사.
찬경 : 아니, 이 빤쓰는...?
찬경, 순간 눈이 뒤집힌다.
찬경 : 이 미친놈이!
찬경, 진봉을 때리기 시작한다.
찬경을 말리는 사람들.
91. 선착장.
필국의 배가 들어오면, 중범이 마중나와 있다.
중범, 필국과 시선을 못 맞추고 어색해 한다. 필국도 잠시 어색해한다.
필국 : 얼굴이 많이 상했다.
중범 : 죄송해요. 일 못나가서.
필국 : 니 형한테 맞은데는 괜찮냐?
중범 :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 결리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필국 : 며칠 푹 쉬어라...
중범 : 일 해야죠.
필국 : 니 형은?
중범 : 그냥 방에만 누워 계세요.
필국 : 형은 니가 이해해야 한다. 서운케 생각 말고.
중범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필국 : 니 형한텐 내가 가 볼께.
중범 : 형님,염색하셨네요.
필국 : (좀 쑥스럽다.) 응, 이거...영희가...
중범 : 좋은데요 뭐, 형님 옛날 모습 보는 것 같네요.
필국 : 그러냐...
멋적은 듯 머리를 만지며 씩 웃는 필국. 따라 웃는 중범.
92. 바닷가.
순아, 망연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다. 중범이 쓰다 버린 영수증을 손에 들고 있다.
“잘 먹었습니다. 순아씨는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순아, 다시 한번 읽어보고는 한참 쳐다본다. 감정이 복받쳐오는 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한다.
어느새 다가와 순아의 등을 어루만지는 인주. 인주가 달래자 더욱 서글피 울어댄다.
순아 : 엉엉, 난 이제 어떡하라구. 흑흑 중범씨 없이 어떡하라구!
인주 : 남자는 다 똑같다며...
순아 : 엉엉, 아니예요. 중범씬 달랐다구요. 엉엉, 세상에 중범씨 같은 남잔 없다구요...
순아의 손에서 쪽지가 빠져나가더니 바람에 흩날려 멀어진다.
93. 순아네 횟집
인주와 순아가 앉아 낮술을 하고 있다. 순아, 좀 전보단 훨씬 진정된 모습이다.
인주 : 37년을 참고 살았어. 37년. 나, 너무했지?
순아 : 너무하셨네요. 난 7년도 어떻게 살았었나 싶은데.
인주 : 정말 억울한 게 뭔지 알아?
순아 : 뭔데요?
인주 : 그 인간 속시원하게 한번 패주지 못하고 그냥 헤어진 거.
순아 : 에이 아깝다. 요담에 만나면 한번 패주세요.
인주 : 나, 정식으로 소송걸거야. 그 영감 재산의 반은 내 몫이니까. 안그래?
순아 : 나이스, 대단하세요. 전 기껏 몸만 도망나왔는데.
아주머니 우리, 원샷해요!
둘이 앙증맞게 원샷한다.
순아 : 아주머니, 새 출발하세요.
인주 : 이 나이에 무슨..
순아 : 아주머니 요즘은 평균수명이 90살이래요. 정말 좋은 분 만나서 행복하게 사셔야죠.
인주 : 세상에 좋은 사람이야 많겠지만...좋은 남자도 있을까?
순아 : 하긴 그래요. 그렇겠죠?
순아, 속이 쓰린듯 또다시 잔을 털어넣는다.
중범이 때마침 가게 앞을 지나다 안을 들여다본다. 잠시 망설이는 중범.
다시 가던 길을 가는 중범.
순아, 중범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순아 : (눈물이 글썽해지며) 중범씨...
94. 중달의 방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중달, 필국, 찬경.
중달은 오늘따라 침울한 얼굴로 묵묵히 술잔만 잡고 있다. 찬경, 그런 중달이 이상하다.
찬경 : 임마 이거 오늘 와 이라노?
필국 : ...중범이 장가 안 간단다.
찬경 : 내 그럴 줄 알았다. 아무래도 글마 그거 고자가 틀림없네.
중달, 그래도 반응이 없다.
필국 : (중달 눈치 보며 술만 마신다.) .....
찬경 : 고자가 아니면 그럴 리가 없다 아이가. 한창 나이에...안 그렇나?
필국 : 고마해라.
찬경 : 그러고 보니 한창 나이는 아니구나. 어쨌거나 병원이나 한번 데리고 가봐라.
중달,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찬경 : 어, 갑자기 와 이라노?
중달 : 필국아!
필국 : ....
중달 : 찬경아!
찬경 : 와?
중달 : 다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라!
찬경 : 뭐를 옹서해? 참말로 이상하네.
중달 : 내 지금까지 너거한테 잘못한 거 많다 아이가. 다 용서해라.
찬경 : 진짜 이상하네. (퍼뜩 생각이 미친다.) 중달이 니 혹시....우리 모르게 송여사 우째우째한 거 아이가?
중달 : 그기 아이다 일마.
찬경 : 아니면 갑자기 와 이라는데?
꺼이꺼이 우는 중달..
95. 필국의 집. 마당. 밤
평상에 누워 달을 보고 있는 중범. 천진함과 처연함이 함께 묻어 있는 표정.
중범의 배를 베고 잠들어 있는 영희.
중범은 가끔 손을 흔들어 영희에게 달려드는 모기를 쫒는다.
자는 줄 알았던 영희가 실눈을 뜬다.
영희 : 아재...
중범 : 안 잤나...?
영희 : 아재 배에서 소리가 난다.
중범 : 무슨 소리?
영희 :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아재, 배고프나?
중범 : 안 고프다.
영희야...
영희 : 응.
중범 : 니는 저 달 보면 무슨 생각나노?
영희 : 나는...아재 생각난다.
중범 : 내가? 와?
영희 : 슬프면서도 따뜻하니까.
중범 : 니는 참...말도 잘한다.
영희 : 아재는 달 보면서 뭐 생각하는데?
중범 : 나는....빈대떡이 생각난다.
영희 : 아재, 오늘 할배도 늦는다캤는데, 우리 빈대떡이나 부쳐 먹을까?
중범 : (눈을 반짝이며) 그럴까?
96. 중달의 집. 밤
중달과 필국의 술판이 이어진다. 낮부터 마셔댄 술병이 여기저기 쌓이고 구른다.
찬경은 이미 취한듯, 자리에 앉은 채 머리를 숙이고 졸고 있다. 그러면서 이따금 난데없이 고개를 쳐들고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중달도 술에 취해 목소리가 걸쭉해졌다.
중달 : 난 정말 죄 안 짓고 열심히 살아왔다. 마누라 죽은 뒤로 한눈 안 팔고 정혜, 정자, 정숙이 다 대학 보내고... 시집 다 보냈다...
필국 : ......
중달 : 내가 정말 죄가 있다면 우리 중범이 장가 못 보낸 거다.
필국 : 그게 왜 니 탓이냐.
중달 : 어쨌든... 나한테 죄가 있다면 그게 다다.
찬경 : (고개 벌떡 들며) 니 임마 옛날에 꽃다방 홍마담하고 바람 피운거는 우짜고? (다시 고개박는다.)
필국 : 중범이도 뭐 지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됐겠나...우짜겠노.
중달 : 우리 배씨 집안에 어떻게 그런 놈이 생겼는지...하이구 불쌍한 놈...
찬경 : (또 고개들고 횡설수설이다.) 야, 너거 배씨 집안, 머 별볼일 없잖아...조진봉이 그 자석, 우리 마누라 빤스를 그래 입고 싶었을까? 할마시 꽃빤스를.... 하...송여사...우째 그리 곱노..(고개 박는다.)
중달 : 필국아!
필국 : .....
중달 : 만일에 말이다, 만일에... 내가 먼저 죽거든... 우리 중범이 좀 부탁한다.
필국 : 언제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라며. 죽기는 와 죽어?
중달 : (떨리는 목소리) 우리 중범이..진짜로 불쌍한 놈 아이가...꺼이꺼이...
필국 : 아, 그렇다고 니가 왜 죽어?
중달 : (고개를 흔들며) 어제 밤 꿈에 우리 엄마가 나 데리러 왔더라.
필국 : (기막히다는 듯 쳐다보며) 그럼, 너 지금 꿈 때문에 이러는 거냐?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중달. 때맞춰 갑자기 고개를 쳐드는 찬경.
찬경 : 가자! 가자!
벌떡 일어서는 찬경.
필국 : 야, 어디가?
찬경 : 너거하고는 궁상맞아서 술 못먹겠다!
비틀거리며 나가는 찬경.
97. 순아네 횟집.
인주와 순아, 두 사람의 술자리도 무르익었다.
취기가 오른 두 사람.
난생 처음으로 과음하는 인주, 상당히 오버하지만, 밉지 않고 오히려 짠하면서 귀엽다.
순아 : 아줌마!
인주 :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안되니?
순아 : 히..내가 손해보는 거 아닌가...좋아요, 언니!
인주 : 왜!
순아 : 우리, 멍게 한마리 더 썰어먹을까요?
인주 : 알았어. 내가 썰어올께.
인주, 일어나면,
찬경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호기있게 인주를 부른다.
찬경 : 송여사!
놀라서 찬경을 쳐다보는 순아와 인주.
뒤이어 뻘쭘하게 따라들어오는 중달과 필국.
뭐라고 한마디 더 할 듯하더니 그 자리에서 픽 고꾸라지는 찬경.
잠시 후.
내실에서 혼자 곯아떨어진 찬경.
홀에는 중달과 필국이 인주, 순아와 함께 앉아 있다.
순아 : 와, 이렇게 모이니까 좋다! 우리 오늘 여기 있는 술 다 마셔버려요.
중달 : (안타깝다.) 너 그러면 속 버린다.
순아 : 제 속이요? 이미 버렸는데요 뭐. 자 우리 건배해요!
인주 : 위하여!
잔을 부딪치는 두 여자. 미적거리며 따라 마시는 중달과 필국.
만취한 두 여자와의 동석이 아무래도 약간 어색해 뵌다.
인주 : (필국에게) 어? 영희 할배는 다 안 마셨네?
필국 : 아..예....(마신다.)
순아 : 어머, 필국이 아저씨 수줍어하시는 거 좀 봐. 아저씨, 얼굴 빨개졌어요.
필국 : 나 그만 가야겠다. 영희 기다리겠다.
필국, 일어서려는데 인주, 갑자기 속이 불편한지 밖으로 뛰어 나간다.
98. 횟집 앞 해변.
인주, 구토가 나는지 바닷가에서 꺽꺽거리고 있다. 필국이 다가와 등을 토닥여준다.
대충 토한 인주, 고개를 돌려 필국을 가만히 쳐다본다.
인주 : 영희 할배....코가 너무 착하게 생겼다.
하면서 휘청인다. 얼른 부축하는 필국. 인주가 필국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내친김에 인주를 꼭 안아버리는 필국. 필국의 팔을 조용히 풀고는 다시 필국의 얼굴을 쳐다보는 인주.
인주 : 영희 할배.....
필국 : ......
인주 : 나, 물 마시고 싶어요...
99. 횟집안.
순아와 중달, 둘이 마주보고 앉았다.
중달 : 순아야...많이 힘들지...니 맘 내가 안다.
순아 : 거짓말, 아저씨가 내 맘을 어떻게 알아요?
중달 : ...내가 니 맘을 와 모르겠노?
순아 : 순 거짓말!
중달 : 순아야....(가슴이 탄다. 또 한잔 마신다.) 순아야.....니 정말....정말 내 마음을 모르겠나?
순아 : 알아요, 알아. 저도 아저씨 마음 안다구요. 그래요, 어쩌겠어요. 아저씨나 나나...중범씨나..
우리는 참 바보야, 모두다..그죠?
순아, 중달의 손을 잡아준다. 중달, 순아의 손을 더 꼭 쥐고는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다. 놀라서 쳐다보는 순아.
순아 : 아저씨.....
중달 : (에라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 나 도둑놈이다. 나 나쁜 놈이야. 나, 죽으면 지옥 갈 거야. 그래도 할 수 없다. 순아야, 나, 니가 정말 좋다.
순아, 여전히 멀뚱멀뚱 감을 못잡는다. .
중달 : 순아야! 내 죽더라도 이 말만은 꼭하고 죽을란다. 나, 너 사..
하는데 뒤에서 누가 중달의 머리를 툭 친다. 언제 나왔는지 찬경이 비틀거리고 서 있다.
찬경 : 야, 필국이 어디 갔냐?
100. 횟집 앞 해변
필국과 인주, 해변에 나란히 앉았다. 인주, 취기가 좀 누그러진 모습이다.
인주 : 저, 내일 올라가요.
필국 : 아.....예.......
인주 : 미안해요. 신세만 지고 가네요....
필국 : 별 말씀을......
인주 : 영희는...자고 있겠네요..
필국 : 예........
인주 : 참 예쁜 아이에요, 영희...
필국 : .....밤바람이 찹니다.
두 사람, 물끄러미 밤바다를 쳐다본다. 필국의 꺼먼 머리가 가련해 보인다.
101. 중달의 방
엄마의 사진.
중달이 코를 심하게 골며 자고 있다. 숨이 넘어갈 듯이 꺽꺽거린다. 누군가가 코를 잡아 비튼다. 중달, 답답함을 못 이겨 눈을 번쩍 뜨면, 중달 모친 또래의 할매가 앉아서 빙글빙글 웃고 있다. 작고한, 찬경의 모친이다. 중달 모친 못지 않게 귀엽고 장난스러운 얼굴이다.
중달 : 누구세요?
찬경모 : 나 모르겠나?
중달 : 어? 찬경이 어머니...어쩐 일이세요?
찬경모 : 너거 엄마 찾으러 왔다. 너거 엄마 못봤나?
중달 : 우리 엄마는 며칠전 꿈에 왔다 가셨는데...(덜컥 놀라서) 우리 엄마, 오늘 또 오신답니까?
찬경모 : 너거 형제 꼴 보기 싫어서 다시는 안갈거라 카더라.
중달 : (반색하며)진짜로요? 그런데 와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는데요?
찬경모 : 술먹다가 사라졌는데 기다려도 안오길래 혹시나 해서 와봤다.
또 어디서 디비져서 자는 모양이지 뭐. 갈란다. 잘 있거라.
중달 : 잠깐만요, 그러면 우리 엄마, 나 데리러 안오시는 거네요? 나 안 죽어도 되는 거지요?
찬경모 : 니? 죽는다.
중달 : (덜컥한다.) 죽어요, 언제요?
찬경모 : 한 삼십년은 있어야 될끼다. 간다...우리 찬경이하고 사이좋게 지내거라.
중달 : (기쁘다.)우리 엄마한테 안부 좀 전해주이소. 저하고 우리 중범이 잘 살끼라고...걱정말고 노시라고 좀 전해주이소...
휑하니 사라지는 찬경모. 벌떡 일어나는 중달.
때마침 중범이 아침상을 들고 들어온다,
중범 : (아직 좀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나셨어요?
중달 : (아직 비몽사몽이다.) 엄마는? 찬경이 엄마는?
중범 : 엄마가 왜요?
중달 :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감격이 복받치는듯) 중범아!
중범 : 형님...죄송해요, 정말..
중달 : 중범아...이 자식아....우리 잘 살자..응!
중범을 와락 껴안는 중달. 영문을 모른채 감격스러워하는 중범.
중범 : 형님..
두 형제,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엄마의 사진, 배시시 웃고 있다.
F.O
102. 필국의 집
몇개월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루에 앉은 영희와 필국. 필국이 영희 머리를 땋아주고 있다.
오늘따라 예쁜 옷을 입은 영희. 맘이 급한지, 보챈다.
영희 : 할배, 늦겠다! 빨리 좀 해라.
필국 : 가만 있어봐라. 인자 묶기만 하면 된다.
영희 : 할배 오늘 양복 입는 거 알재?
필국 : 응. 다 다려 놨다.
필국, 영희 머리 단장을 끝낸다.
필국 : 됐다. 예쁘다...시집 가도 되겠다.
영희 : 뭐하노 할배, 빨리 옷 갈아 입어라.
필국 : ...그래 좋나?
103. 마을 입구
택시에서 내리는 인주. 맨처음 마을에 올 때보다 짐이 더 많다.
쪼르르 달려가는 영희와 철수.
철수 : 서울 할매, 안녕하세요.
인주 : 응 철수구나.
철수 : 영희도 왔어요.
인주 : 영희야!
영희 : 할매!
인주, 제 가슴께를 가리킨다. 영희, 쳐다보면 언젠가 영희가 선물로 주었던 조개껍질목걸이를 걸고 있다.
쌕 웃는 영희.
인주, 한켠에서 미적미적 서 있는 필국을 본다. 깔끔한 양복차림. 인물이 달라보인다.
인주 :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필국 : 아...예...
인주 : 양복....단추가...
필국 : 예?
하고 쳐다보면 단추가 잘못 맞춰져 있다. 얼굴이 벌개지는 필국.
영희가 얼른 고쳐준다.
철수 : 어, 영희 할배 얼굴이 빨개졌다.
영희 : 시끄럽다 머시마야! 쪼끄만게 뭐 안다고...
스치듯 눈길을 마주치는 인주와 필국. 얼른 못 본 척한다.
104. 마을 회관 앞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다. 마을 사람들이 대거 몰려있다. 인주와 필국 일행이 도착한다. 역시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중범이 일행을 맞는다.
중범 : (필국에게) 형님!
필국 : 준비는 다 됐냐?
중범 : 예. 아주머니도 오셨네요.
인주 : 축하해요.
중범 : 고맙습니다.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은 순아가 인주를 보고 달려온다. 차림새로 보아 한눈에 신부같다.
순아 : 아주머니!
인주 : 축하해, 정말.
필국 : 근데 신랑은 어디 갔냐?
하면, 가까이서 들리는 공기총 소리.
뒷편 어딘가에서 찬경이 쪼르르 달려나오면서 다급하게 소리친다.
찬경 : 필국아! 야 큰일 났다. 빨리 좀 와봐!
105 마을 회관 뒷 마당
찬경과 필국, 중범, 인주, 순아, 영희와 철수,
달려와 보면, 양복에 꽃까지 꽂은 중달과 하객으로 온 듯한 조진봉이 말싸움을 하고 있다.
중달 : 야 이자식아, 남의 결혼식에 총을 왜 쏴! 하여간 개버릇 남 못준다고...미친 놈!
진봉 : 이런 무식한 놈 봤나? 이게 축포란 거야 축포, 알겠냐, 하여간 촌놈은 어쩔 수가 없어.
중달 : 촌놈? 그래 임마 너 잘났다. 너 오늘도 꽃빤스 입었냐?
진봉 : 뭐? 야 임마 내가 꽃빤스 입은 거 니가 봤냐, 봤어?
중달 : 봐야 아냐, 임마. 온동네 소문 다 난 거 너만 모르지? 미쳐도 좀 곱게 미쳐라 임마!
진봉 : 이런 타조대가리 같은 놈!
중달 : 뭐가 어째?
중달과 진봉, 다시 맞붙기 직전이다. 필국과 찬경, 중범이 달려들어 뜯어말린다.
벅적지근한 난장판으로 바뀌는 잔칫집. 아랑곳없이 여기저기서 먹고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동네 사람들.....그 풍경위로 영희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영희 (V.O) :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 넓은 우주에 고독하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꿀꿀해하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고, 죽었을 때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걸로 좋다고 생각한다.
....중달이 할배 타조들은 아직도 알을 못 낳고 있다. 그래도 문제될 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순아 아줌마 뱃속에 중범이 아재의 조카가 자라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찬경이 할배가 퍼뜨린 소문이니까....확실하지는 않다.
영희의 나레이션이 끝나가면, 잔칫집 앞으로 들어서는 택시 한대. 누군가가 내린다. 번쩍이는 대머리....가만히 보면, 중범이를 좋아한 게이바의 그 사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