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최광희 목사
처서(處暑)가 지나고 9월에 접어들자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제법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무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 또 있다. 지금 다들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삼복더위 내내 밤낮없이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사라져서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이제 잠시 후면 매미 대신에 귀뚜라미가 등장하여 가을이 왔음을 알리겠지만 요란한 매미 소리에 비하면 귀뚜라미 소리는 훨씬 정겨울 테지.
그런데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매미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매미는 종류에 따라 3~17년간(우리나라 매미는 주로 7년) 땅속에서 나무뿌리의 수액을 빨아 먹으며 유충으로 살다가 성충이 되어 지상에서 사는 것은 겨우 한 달 남짓이라고 한다. 그 한 달 동안 수컷 매미는 암컷을 불러들여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것이다. 그러다가 짝짓기를 하고 나면 수컷은 바로 죽고 암컷은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어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 매미는 다 사라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짝짓기를 끝낸 매미는 사명이 끝났으니 죽겠지만 새로 부화한 매미 애벌레는 땅속으로 내려가서 나무 진액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사라진 것은 암컷을 부르는 수컷 매미의 울음소리이지 매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땅속에 들어간 연차(年次)에 따라 내년 여름에는 또 다른 매미가 올라와서 부지런히 여름이 왔음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잠깐,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사실 매미의 울음소리도 마찬가지이다. 소리란 우리 귀에만 요란할 뿐 애초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볼 수 있는 것을 매우 제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에 ‘본다’라는 표현을 붙인다. ‘들어 본다’, ‘먹어 본다’, ‘느껴 본다’, ‘생각해 본다’에 이어 심지어 ‘두고 본다’까지 뭐든지 보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보려고 해도 소리와 맛과 생각이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개발한 최첨단의 전파들도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어제 뉴스에 의하면 지난 6월에 누리호를 타고 올라간 소형위성 2호가 선명한 지구의 사진을 찍어서 보내왔는데 이 사진은 가시광선을 카메라로 찍은 것이 아니라 마이크로파로 촬영한 것이어서 구름이 끼고 비가 와도 촬영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가시광선에 보이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하며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매우 많다.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극히 제한하신 하나님은 더 중요한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는’ 대신에 눈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느끼고 인식하고 깨닫도록 하셨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존재이다. 다른 모든 생물, 무생물들과는 달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은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기에 생각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하기에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헌신하거나 희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영혼이 있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영혼이 있기에 죽음 후에 부활과 영생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사람은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눈은 현재 시각에 존재하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단 1초라도 지나가면 보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먼저 죽은 부모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조상들, 성경과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관점에는 과거의 일이고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두 현재이고 여전히 존재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등장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몇 차례 보여주셨다. 그것을 참고하면 우리가 부활한 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데 사람이 시공을 초월하게 되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거울(1세기의 흐릿한 청동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했다. 우리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영혼으로 보면서 따라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