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짜 수치는 세상과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 수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34:1–31
우리는 생각보다 괜찮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읽기 불편하고 끔찍한 장면 하나를 접하고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4장, 야곱 가문의 '세겜 잔혹사'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나는 적어도 남에게 해는 안 끼치고 산다", "기본은 지킨다"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데 인생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우리를 툭 건드리면, 그 밑바닥에 숨어 있던 것들이 터져 나옵니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 잔인한 복수심, 그리고 나만 살겠다는 이기심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 민낯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수치스러운 구덩이 속으로 손을 뻗으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죄의 전염성 - 한 사람의 정욕이 공동체를 무너뜨릴 때(1-7)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에게 험한 일을 당합니다.
성경은 세겜의 행동을 세 단어로 묘사합니다.
"보고, 강제로 끌어들여, 욕보였다."
여기서 '욕보이다'(아나(עָנָה, Anah)’는 단순히 육체적인 범죄를 넘어 '짓밟다, 굴복시키다, 강제로 괴롭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는 폭력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이 죄가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세겜 한 사람의 욕망에서 시작된 불씨가 야곱의 아들들의 분노로, 그리고 한 성읍의 몰살로 번져나갑니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가벼운 험담이 공동체를 쪼개고, 한 사람의 부정이 가정의 근간을 흔들기도 합니다.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따라서 죄는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는 전염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락함이라는 덫 - 사명의 벧엘을 잊게 만드는 편안한 세겜(8-12)
디나가 고통받고 있을 때, 아버지 야곱은 무엇을 했습니까?
5절을 보면 그는 "잠잠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지금 세겜이라는 도시가 주는 풍요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야곱에게 "벧엘로 돌아가라(창 31:13)"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가기 전, '세겜'에 멈춰 섰습니다.
왜요? 거기가 장사하기 좋고, 살기 편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안전한 정착'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살기 좋은 자리"를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가 더 연봉이 높으니까", "이 관계가 나에게 이득이니까"라며 세겜에 텐트를 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 없는 편안함은 사실 가장 위험한 위기입니다.
세겜(Shechem, שְׁכֶם)은 '어깨'라는 뜻입니다.
짐을 지는 곳, 혹은 힘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팔이 아닌 세상의 어깨에 기대려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안락함은 죄에 대한 무감각을 낳게 됩니다.
다시말해, 세상이 주는 편안함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게 만드는 영적 함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의 위선 - 언약을 복수의 도구로 전락시킨 종교적 범죄(13-24)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나 악합니다.
그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거룩한 예식을 살인을 위한 '함정'으로 사용합니다.
성경은 이를 “속여서(מִרְמָה, Mirmah)” 대답했다고 고발합니다.
'속여서(미르마)'는 계획된 기만, 즉 아주 악의적인 사기를 뜻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를 이용하고, 내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증오, 거룩함으로 위장된 이기심...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아파하시는 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것이 가장 무서운 신성모독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노는 정의가 아닙니다 - 하나님의 공의를 사칭한 인간의 잔인한 혈(25-29)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들어가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그들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까?"라며 소리칩니다.
겉으로는 정의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자기 분노'였습니다.
그들은 세겜과 똑같이 폭력을 휘둘렀고,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죄를 죄로 갚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내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해."
그런데 여러분, 내 안에 있는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상대가 괴물이 되었다고 해서 나도 괴물이 될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혈기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룰 수 없으며 또 다른 죄를 낳을 뿐입니다.
진짜 수치는 무엇인가?(30-31)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학살의 현장이 아니라, 그 이후에 보여준 아버지 야곱의 태도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딸의 찢겨진 마음이나 아들들의 참혹한 범죄를 보며 울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자초하여... 내가 멸망하리로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가문의 '진짜 수치'를 목격합니다.
하나님 없는 '안전'을 구걸하는 수치
야곱의 걱정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변 족족들이 나를 공격하면 어쩌지? 내 재산, 내 목숨은 어쩌지?"
그는 지금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계산에서 완전히 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세상의 눈치를 더 보고, 세상의 위협 앞에 벌벌 떠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영적 무감각'의 수치
진짜 수치는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짓고도 '내 체면'과 '내 실익'만 따지는 뻔뻔함입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 가정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 중심적인 손익계산기만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값싼 이름'으로 만드는 수치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그런데 야곱 가문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잔인하고 더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욕심부리고, 똑같이 분노하고, 똑같이 비겁해질 때,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 때문에 수치를 당하십니다.
“여러분, 성도의 수치는 가난도, 질병도, 실패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세상과 똑같이 반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진짜 수치입니다.”
복음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설교의 끝이 "우리는 이렇게 나쁜 놈들입니다"로 끝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뒤에는 바로 35장 1절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은 야곱 가문의 더러움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살인 냄새가 진동하는 그 현장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하자. 벧엘로 돌아오렴.”
이것이 '거부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수치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큽니다.
그리고 이 수치스러운 야곱의 가문에서 결국 누가 오십니까?
우리의 모든 수치를 대신 짊어지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수치를 온몸으로 받으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더러운 세겜의 옷을 벗기고, 거룩한 벧엘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세겜'은 어디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십니까?
이제 그 비겁한 안락함에서 일어나십시오.
수치스러운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세상과 구별된 벧엘의 삶으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