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년 정인경(鄭仁卿) 준호구(准戶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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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002+KSMC+KSM-XD.1292.0000-20110430.ECD000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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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
발급: 개성부(開城府) /수취: 정인경(鄭仁卿) |
작성지역 |
개성부 / 황해북도 개성시 |
작성시기 |
1292년 / 임진 10월 일 |
형태사항 |
한자, 이두 |
소장정보 |
현소장처 : 합천 서산정씨 정인홍 후손가 |
비고 |
정서본 『瑞山鄭氏家乘』(1819년) 『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상)(노명호 외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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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년 정인경 호적
1292년개성부(開城府)에서 정인경(鄭仁卿)에게 내려준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문서의 서두에 왕명에 의해 등본을 발급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서산정씨 족보에 실려 전하는 문서이다.
정인경과 아내, 4남 2녀가 가족원으로 기록되었다.
52세의 남편 정인경에 비해 아내 진씨(陳氏)는 38세로 14세 연하이다. 후처로 보인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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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년(고려 충렬왕18)개성부에서 정인경에게 내려준 가족 현황과 그 조상을 기록한 문서로 서산정씨가승에 수록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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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특징『瑞山鄭氏家乘』( 1819년)에 「 鄭仁卿政案」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어 있는 문서이다.
정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별도의 자료였으나, 전래과정에서 정안과 섞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서산정씨 문중에서 이전 족보를 편찬할 때 누락된 上代의 기록을 수록한 것이다. 원문서는 전하지 않는다.
함께 수록된 錄券의 말미에 ‘정안과 녹권은 각 派의 家狀에 전해져 있으나 己巳譜에는 누락되었으므로
이제 세 본을 참고하여 싣는다’고 註記되어 있다.
원본 없이 세 가지 형태의 전사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본 准戶口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두로 기록된 “典議 部上星化一里辛卯戶口良中戶 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鄭仁卿乙准爲內敎” 구절을 통해 준호구를 발급해주라는 왕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준호구의 근거호적은 한해전인 辛卯(1291; 충렬왕17)년 戶口이다. 정인경과 아내 陳氏, 4남 2녀가 가족원으로 기록되었다.
“已下不準印”이라 하여 이하의 내용일 소유 노비에 관한 기록은 생략되었다.
정인경과 그 처는 四祖와 母를 밝혀 적었다. 52세의 정인경에 비해 그 아내는 38세로 14세 연하이다.
후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10세 미만의 어린 아들들은 모두 “巴只”에서 다른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 눈에 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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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代 武臣 鄭仁卿의 政案과 功臣錄券 硏究」, 남권희․여은영, 『고문서연구』7, 한국고문서학회,
1995『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 노명호 외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고려 政案의 양식과 기초 자료: ‘鄭仁卿政案’을 중심으로」, 박재우, 『고문서연구』28, 한국고문서학회, 2006 |
권오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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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議部上星化一里 辛卯戶口良中戶奉翊大夫同知密直司 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鄭仁卿乙准爲內敎 壬辰十月日部上星化一里 辛卯戶口準奉翊大夫同知密直 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鄭仁卿年五十二本富城郡 父追封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判禮賓事行尙書刑 部員外郞 臣保古名彪故祖追封尙書戶部員外郞行禮部承 同正 秀琚故曾祖追封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行儒林郞 檢校軍器監 儀故母高敞郡夫人 吳氏年七十二外祖衛尉 承同正 吳永老古名愈延故 妻楊州郡夫人 陳氏年三十八 本福州父衛尉尹致仕陳琇 1)古名平裕祖追封軍器監 明允故 曾祖掌治署令 仁光故母中原郡夫人 梁氏年六十本忠州父 檢校太子詹事太醫少監賜紫金魚袋梁{木+延}古名允壽故幷産 一男信忠年十七一女召史年十六二女召史年十三節付二 男巴只年九節付改名信英三男巴只年六節付改名信和五 男巴只年二節付改名信綏已下不準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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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1)妻楊州郡夫人 陳氏年三十八 本福州父衛尉尹致仕陳琇
본문내용> 처는 양주군부인 진씨(陳氏)이며 38세로,
'본은 복주(송나라)인' 아버지는 위위윤 진수陳琇(정인경의 장인)이다.
▣1. 여양진씨 대종회> 씨족사정립의 모순점.
▶1) 여양진씨 임신보 1권 51페이지 셋째줄~넷째줄.> '진씨 유래편에서'
우리 동방진씨는 중국으로부터 고려시대에 동래한것 같으며, 갑인보 사적편에 동방진씨선계는
송나라 복주(福州)사람이며 우윤벼슬에 있는 진수(陳琇)라는 분이 오랑케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국 여양현 덕양산아래 뜻을 높이고 숨어살았다.
그 후손이 휘 총후라 하였으나 그 사실은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기다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양진씨 시조 진총후 선계 송나라인 陳琇설의 陳琇와,
'1292년개성부(開城府)에서 정인경(鄭仁卿)에게 내려준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문서의, '瑞山 鄭仁卿의
장인:진수(陳琇)가> 복주인(송나라:福州人), 벼슬(윤:尹), 성명(이름:진수陳琇) 에서... 일치한다.
▶2) 임신대동보 1권 55페이지 여양진씨 시조 단비명-임신보 1권 59 페이지 넷째줄~8째줄을 인용하면,
"나와 친히 지내는 진태하교수가 문중어른들의 명(命)으로 그 시조단향비명을 와서 청하며,
소매속에서 그 세보2책(世譜二冊) 및 관계글을 꺼내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세상에 전하는바,
우리 진씨는 본래 중국 복주인(福州人)이다하며 북송시(北宋時) 우윤진수(右尹陳琇)가 있었는데
북노의 난을 피하여 가족을 솔령(率領)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의 여양현(驪陽縣)에 이르러 덕양산아래
복거(卜居)하니, '그 자손이 여양인(驪陽人)이 되었다고 한다.
▶1) 진씨 유래편에서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기다린다 하였는데,
▶2) 단비명에서는 우윤진수(陳琇)가 있었는데... 그 자손이 여양인이 되었다고 한다,
"라고 확정지어 말하고 있다.
서기 1986년(丙寅) 성균관대학교 교수 여주 이우성 근찬.
발행처: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여양진씨 대종회.
서기 1994년 3월 25일 편수부장:진광열(陳光烈) - 인쇄인:(주) 뿌리 출판사
▣2. 송나라 복주인(福州人) 진수(陳琇)는, 여양진씨 선계가 될 수 없는 이유!
▶1) 위의 기록을 고찰한바, 1292년당시 정인경이 52세이다. 그렇다면 1241년생이되며,
아내 진(陳)씨는 14세 연하이므로 1255년생이된다.
50세에 딸을 낳았다해도 아버지인 진수(陳琇) 출생년은-1206년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여양진씨 시조 진총후 여양군은 1126년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여 여양군이란 군호를 득봉하였다는
족보사적을 신뢰한다면, 여양진씨 시조공(진총후)은 최소한 1090년 전후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결론> 福州人 진수(陳琇)는, 시조 여양군(진총후)의 최소한 '110 여년 후대인물'이므로
선계가 될 수 없다.
☞ 자료검토자/ 25세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
첫댓글 어르신이 표시해놓은 토론이나 이런 내용은 사실 제가 그렇게 쓰라고 시켰읍니다ㅋㅋㅋ
그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