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가
-오성윤 글, 사진/도서출판 어떤책 2023년판
설렘 그리고 미혹들
1
그 나이 든 티벳승은 왜 넓은 2층 객실에서 지내지 않고 부엌 한 켠에 마련된 초라한 거처에서 지낼까. 그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다. 먹지도 않는 음식의 간을 기가 막히게 맞추어내며,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손님들 옆에서 겨우 요기나 때우는 식의 소식(小食)을 할 뿐이다.
그 동티벳의 여행지 숙소에는 그곳으로 여행을 온 그들 두 사람 외에는 손님이라곤 없이 황량하다. 그 여행지에서 작가는 도착한 이튿날 저녁부터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한밤중 내내 깨어 때로는 답답해하며 긴 시간을 보낸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잠을 못 이루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옆에서 잠에 빠져들었다고 믿었던 동행도 작가와 마찬가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빠져 역시 고통스럽게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먼 여정에 따르는 가중된 피로와 낯선 곳이 주는 기시적 불안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2
작가는 여행 작가다. 방문한 여행지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쓴 글을 잡지사에 기고한다. 그러다보니 지면상에 여러 제약이 있게 된다. 여기 ‘짧은 휴가’에는 여행을 하면서, 방문한 여행지마다에서 꼼꼼하게 적은 글들 중 지면상의 제약으로 올리지 못한 짧은 장면이나 소회들을 지나간 희미한 기억 속에서 되살려 엮어져 있다.
여행 중 느낀 짧은 단상(斷想)의 모음집이라고 할까. 각 장에 전개되는 소제목들이 그런 면을 잘 부각시켜준다. 책이 시작되는 첫 장인 ‘옥상 담배와 낯선 아침과 이국 도시에서의 달리기에 부쳐’에서 시작하여, ‘먼 곳에서’, ‘두바이라는 농담’, ‘아스타나라는 신탁’, ‘묘지의 러너’, ‘지구 끝의 구루와 안방의 신’, ‘언젠가는 모든 곳이 여행지가 될 것이다’ 등으로 이어지며 끝나는데, 소제목들만 보면 마치 잘 고르고 다듬은 한 권의 단편소설집 같은 인상을 준다.
3
여행은 일종의 환각과 같은 신비스러운 체험을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제공하는 삶이 주는 선물이다. 작가는 그런 여행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간접 체험을 시키며 다음 단계인 여행으로 마음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여행 안내자는 일상을 떠나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고픈 사람들에게 그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원하는 것을 여행(혹은 여행지)에서 만끽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건강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의무가 여행 안내자인 작가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하는 것이 뭘까.
그것은 이 책에서 펼쳐지는 각종 이채로운 경험을 작가만의 독특한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요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바닷마을에서 아직 바다를 보지 못한 채 담배를 피운 적이 있다. 일몰 즈음에야 도착한 싸구려 모텔의 옥상에서 0.6밀리그램 던힐 세 대를 태웠다. (본문 중에서)
-아침이야 늘 눈을 뜨면서 느닷없이 시작되지만, 언젠가 잠에서 깼을 때, 놀랍게도 그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부스럭거리는 흰색 면이불 위, 좁지만 커다란 창이 있는 방. 300년 전에는 빈과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를 오가는 우편마차의 정거장이었던 호텔이라고 했다. (본문 중에서)
-친구는 깜짝 놀랐다. 등 뒤에서 “헬로” 다정한 인사가 들릴 때서야 자신이 남의 집 앞마당의 타일과 바구니들을 찍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으므로. ...(중략)...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눈이 내려요?”
친구는 얼른 답하지 못했다. 질문을 하는 여인의 표정에 경이로움이 가득해서, 당연한 명제도 새삼 깐깐히 따져봐야 했던 것이다. 한국에 눈이 내리던가? 내린다. 아마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거나, 적어도 떠나올 때 내렸던 눈이 골목 여기저기에 쌓여 있을 것이다. 친구는 그렇다고, 눈이 내린다고, 가까스로 답해 주었다고 했다. (본문 중에서)
작가는 경험담을 마치 소설의 픽션처럼 전개하는 독특한 문체를 사용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 세계가 아닌 환상의 일부인 것처럼 달콤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렇다. 독자는 도시 생활의 각박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현실에서 벗어나 뭔가 비현실적인 것들을 달콤한 방식으로 여행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그 마중물로 담배, 와인바, 그리고 째즈 공연 관람 등을 자주 등장시킨다. 다소 몽환적인 여행 중 에피소드나 시적인 체험들도 곁들여서 일상의 거추장스러운 격식이나 습관들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는 듯한 경험들을 제공한다. 물론 이국적 풍경의 사진들도 함께.
4
어떤 여행자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이나 서적을 읽다 반해서 작품이나 책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훌쩍 떠난다고 한다. 그 배경이 되는 곳의 주변을 작가와 똑같이 느껴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 ‘짧은 휴가’를 읽다보면 작가의 감성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을 계속 접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여행’이라는 추상에 대해 막연히 동경이 일어나는 동시에 실제 떠나서 겪어보고픈 마음도 동하게 된다는 사실, ‘아! 나도 여행을 하고 싶다.’는 동요가 서서히 일어나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일상에서 좀처럼 얻기 힘든 ‘설렘’ 바로 그것인데, 당연히 모든 독자들이 정확하게 이런 유의 서적에서 원하는 바일 것이다.
(2024.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