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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불자들 그들은 누구인가?
글/윤시내
석가무니 부처님의 제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은 사리불 존자, 가섭 존자, 목갈라나 존자, 아난 존자 등 부처님의 십대 제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부처님 생존시 출가한 남자들로서,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수행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승가가 처음으로 조직되어 운영되는 것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승가가 사회에 정착되어 불법을 보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부처님 당시부터 승가는 4 종류의 구성원, 즉 비구, 비구니, 우바세 (재가 남성 불자), 우바이 (재가 여성 불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체제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렇다면 불교 최초의 비구니들은 누구일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비구니가 되었을까? 그들도 부처님의 제자가 아닐까. 어째서 그들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최초의 여성 불자들” (The First Buddhist Women by Susan Murcott)은 이러한 의아심에 대해 명쾌하고 자상하게 대답해 준다. 이 책의 부제(副題) “테리가타의 번역과 주석(註釋)”에서, “테리”는 나이가 많거나 지혜로운 여자에 대한 호칭이고, “가타”는 운률(韻律)를 가진 노래, 시의 구절, 게송 등을 일컷는 어휘이다. 따라서 “테리가타”는 “지혜로운 여성 불자들의 시집”이다. 머콧은 팔리 어(語)로 쓰여진 시를 번역하고 거기에 자세한 해설을 붙였는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여성불자들의 시도 감동을 주지만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그 여성불자들에 얽힌 이야기이다. 인도의 당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전통과 관습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그 여성불자들의 출가가 어떤 의미를 갖이며, 얼마나 큰 용기와 굳은 결심을 필요로하는 일이었는지를 알려준다. 국적을 막론하고 세계 여성불자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고 자긍심을 높이는데 이 책은 기여할 것이다.
당시 인도사회는 가부장 제도로서, 여자의 위치는 전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된 것이었다. 태어나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하면 남편에게, 자식을 낳으면 아들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했던 조선 여자들처럼) 남성 3대에 의지하며 보호와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독립된 생활과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파자파티는 석가 족의 왕비였지만, 아들 난다가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고, 남편인 숫도다나 왕도 세상을 떠나고나자, 자신을 돌봐주고 보호해주던 남자들을 다 잃어버렸다. 보호해주고 의지할 남성을 잃은 여자는 그러나 파자파티 혼자가 아니었다. 부처님이 젊은 왕자였던 시절에 부처님을 모시던 젊고 아리따운 궁녀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많은 석가족 남자들이 출가한 뒤에 집에 남겨진 여인들, 석가족과 콜리아족 (마야 부인과 파자파티의 종족) 의 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 남편, 오빠를 잃고 홀로 된 여자들. 삶의 중심에 있던 가장을 잃고 더불어 사회적 신분과 존재 이유마저 상실한 여인들은 파자파티를 찾아가 그녀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충고를 청했다. 많은 인도 여인들이 홀로 가난 속에서 멸시당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치지 않으려면 무언가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쿨라바가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을 적은 경전 - 역주)에는 파자파티의 출가 경위가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다.
“ 한 때 부처님은 석가족의 카필라 성 근처, 반얀 수도원에 머무셨다.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는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곳에 찾아가 인사드리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 여자들도 집을 버리고 나와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을 수행하는 출가자들의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그만하면 충분하다, 고타미여. 여자들에게 그것이 허락되리라고 마음 두어서는 안된다.”
[파자파티은 똑같은 말로 두번, 세번, 청을 하였지만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부처님이 여자들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파자파티는 부처님께 절하고 오른편 몸을 부처님께 향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세존이 웨살리로 향하여 뗘나자 파자파티는 머리를 깎고, 누런 색 방랑수행자의 옷을 걸치고 석가족 여인들과 함께 웨살리로 향했다. 그녀가 쿠타가라 강원(講院)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의 발은 퉁퉁 붓고 온 몸은 먼지로 뒤덮혔다. 울면서 그녀는 강원 밖에 서 있었다.
울고 서있는 파자파티를 본 아난 존자가, “어찌 울으십니까?”하고 물었다.
“아난 존자여, 석존께서는 여자들이 집을 버리고 나와 석존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출가자들의 무리에 속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 가서 절 한 뒤 한편에 앉았다. “파자파티가 지금 문밖에 있는데 발은 퉁퉁 붓고 먼지를 홀딱 뒤집어 쓰고 울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집을 나와 세존의 법과 가르침을 수행하는 출가자들 무리에 속하는 것을 허락치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아난이여, 그만하면 충분하다. 여자들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일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
[아난다는 똑같은 말로 두번, 세번, 청을 하였지만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그러자 아난은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을 듯 하니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아야 겠다, 고 생각했다.
“세존이시여, 여자들이 집없는 사람이 되어 수행하면, 수다원과 (須陀洹果), 사다함과 (斯陀含果), 아나함과( 阿那含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아난이여. 그들도 가능하다.”
“만약 여자들도 완성의 도를 성취할 수 있다면 여자들이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파자파티는 세존의 이모이자 의붓 어머니이고, 유모이고, 세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젖을 먹여 키웠으며, 세존께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난이여, 파자파티는 여덟가지 계율을 받아 지켜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계를 받은 것으로 인정하라.”
부처님이 여성들의 출가 수도를 허락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선명하고 강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한때는 석가족의 왕비였으나 이제는 힘없는 노인이 된 여인이, 무조건 순종의 제도적 틀을 벗어나 감히 세존에게 여성들의 출가를 요청하고, 요청이 세번 거절당하자 큰 무리를 이끌고 600리 길을 맨발로 걸어 세존의 뒤를 따라와서 묵묵히, 행동으로, 흔들리지 않는 출가의 결심을 보여주며, 여인들을 불쌍히 여긴 아난이 부처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지고, 부처님은 시자인 아난의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한 뒤 결국 이성(理性)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여성의 출가수행을 허락한다.
파자파티를 포함하여 출가를 원하는 여성들이 지켜야하는8가지 계율은 일견(一見)하여 여승과 여성승가를 남승과 남성승가 밑에 둠으로써 남승의 가르침과 보호와 지시를 받지 않고서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수행생활을 할 수 없게 하려는 제약으로 보인다. 특히 첫번 째 계율을 보면, 여승은 계를 받은지 100년이 되더라도 다만 하루 전에 계를 받은 남승 앞에서는 일어서서 공손히 절하고 필요한 모든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에서 아버지, 남편, 아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남성들의 지배를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머콧은 당시 인도의 사회와 가정이 절대적 남성우위의 가부장제도였음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여성승가를 허락함에 있어서 부처님이 감안했을 몇가지 현실적 제약을 지적하고 있다. 즉, 집을 떠나 방랑 수도하는 여자들을 타락한 여자나 창녀쯤으로 경시하는 사회, 약 5년 전에 조직된 남성승가가 여성승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일단 조직된 여성승가의 운영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등등. 부처님은 여성승가가 존속되고 번영하려면 기존의 사회질서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파괴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영적소질을 남자들과 똑같이 인정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여성을 남성의 보호와 지배하에 머무르게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얼마 뒤에 파자파티는 특히 성차별이 극심한 첫번째 계율에 대해 수정을 부처님께 요청했다. 비록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요청은 부처님 당시 승가가 시대를 훨씬 앞서서 진보적이며 민주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승가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해 파자파티는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천지만물 중 으뜸이신 부처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풀러준 부처님께
경의를 표하네.
고통을 이해하매
그 근원과 갈애는 사라졌네.
팔정도를 실행함에
모든 것이 멈추는 경지에 나는 도달했네.
나는,
어머니, 아들, 아버지, 오빠, 할머니의 생을 살았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러한 생을 살아왔네.
이제 세존을 뵈었으니
이것이 나의 마지막 받은 몸이네.
이제 다시는 태어남에서 태어남으로
되풀이되지 않겠네.
저 많은 제자들을 보라!
그들의 힘,
절실한 노력,
이것은 부처님게 바치는 경의라네.
마야 부인은 우리 모두를 위해
고타마를 낳으셨네.
마야부인은 우리의
아픔과 병듦과 죽음을 물리쳤네.
비구니 승가가 이룩되고 많은 여자들이 승가로 들어왔다. 부처님이 세속에 계실 때 부처님을 모시던 궁녀들과 전쟁으로 인해 미망인이 된 여자들이 “오백명”이나 승가로 들어와 마하파나파티를 따르는 무리가 되었는데, 오백이란 숫자는 정확한 사람 수를 말한다기보다는 아주 많다는 형용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가족 여인, 미타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 재가신도에서 비구니가 되는 수행과정을 그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신들 사이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나는 단식하고 또 단식했네.
두 주일에 한번씩,
매 달 8일, 14일, 15일,
그리고 또 특별한 날에.
이제 삭발하고
불자들의 옷을 입었네.
하루에 한끼 먹고
신들 속에 끼는 것을 바라지 않네.
내 마음 속에는 아무 두려움 없네.
파타카라와 제자들
마하 파자파티에 버금가는 덕과 지혜와 지도력을 가진 여성으로 테리가타에 수록된 시에 언급되고 칭송 받는 비구니는 파타카라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소설 못지않게 기구하다.
파타카라는 사바티의 은행가 집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자 그녀의 부모는 마땅한 남자를 찾아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집의 하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파타카라는 밤중에 둘이서 몰래 도망하여 먼 곳에서 숨어살았다. 세월이 흘러 첫째 아기를 갖었다. 해산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친정인 사바티에 가서 아기를 낳으려 했으나 남편이 미적거리며 떠나지 않자 혼자 길을 떠났다. 뒤늦게 따라온 남편과 함께 길을 가던 중 산기를 느껴 아기를 낳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둘째 아기가 생겨 출산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다시 사바티로 갈 것을 원했고 남편은 역시 머무적거림으로 그녀는 혼자 길을 떠났다. 뒤늦게 남편이 따라왔을 때 산통이 시작되었다. 밤이되고 비바람이 세게 몰아쳐서 남편은 바람막이라도 만들려고 나무를 베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파타카라는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혼자 아기를 낳은 뒤 자기 몸으로 어린 것들을 덮어 추위와 비바람을 밤새도록 막아주었다. 다음날, 죽은 남편을 발견한 파타카라는 슬픔으로 하루 낮, 하루 밤을 정신없이 보내고 다음날 사바티로 가던 중 전날 밤 비에 물이불어서 사납게 흘러가는 강가에 도달했다. 두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녀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우선 갖난 아기를 안고 강을 건너가 강언덕에 가랑잎을 긁어모아 푹신하게 한 뒤 아기를 거기에 눕히고 다시 강으로 내려갔다. 갖난아기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자꾸 뒤돌아 보며 강을 반 쯤 건넜을 때, 커다란 솔개가 와서 갖난아기를 물고 날라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리소리 지르고 팔을 허우적대었으나 솔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라가버리고, 엄마 목소리를 들은 첫째 녀석은 엄마가 자기를 부르는줄 알고 강으로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강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말았다. 졸지에 두 아이를 잃은 슬픔과 절망 속에 겨우겨우 사바티 근처에 도착한 그녀는 마을 사람에게 자기 부모의 안부를 물었다. “간 밤에 내린 비로 당신 부모의 집이 무너져내려 집안에 있던 사람들 위로 덮치고 당신 부모와 남자동생이 깔려 죽어서 지금 화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비보에 파타카라는 끝내 미쳐버렸다. 그녀는 시계바늘처럼 뱅뱅 돌면서 떠돌아다녔고 마을 사람들은 빗자루와 방맹이로 그녀를 쫓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고있는 기원정사로 흘러 들어갔다. 제자들은 그녀의 접근을 막았으나 부처님은 그녀의 앞에 가서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 퍼뜩 정신이 든 파타카라는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사람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하며 불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출가하기를 원했고 부처님은 그녀를 여성승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파타카라는 많은 제자들이 우러러보고 신임하고 따르는 비구니가 되었다. 승가라는 조직체를 통해 그녀는 타고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승가를 이끌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를 줄 수 있는 권위를 갖게되었다. 그녀는 뒤에 온 사람들에게 좋은 스승의 본보기가 되었다. 30여명의 제자들과 같이 지은 시의 처음 구절에서 우리는 그녀의 가르침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절구공이를 써서
부라만 (brahmans)들은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고
부인들과 아이들에거 먹이며
그곳에서 풍성함을 찾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라.
그대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발을 씻은 다음에는 재빨리
내 곁에 와서 앉으라.
오로지 마음의 평온에 집중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라.”
방랑자와 그 제자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마하 파자파티나 파타카라처럼 명성이나 지위나 수행이나 가르침이 높은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생각과 행동이 사회와 전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었다. 영적(靈的) 탐구를 위해 출가하여 수행하는 인도 전통은 기원 전 수백년으로 올라가며 그 정확한 기원을 알 수는 없다.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도 출가자들 (pabbajita tradition)이 있었음은 팔리어에 여성 출가자를 칭하는 어휘가 여러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이 가정생활의 안전과 보편성을 버리고 집과 가정의 틀을 깨고 영적 탐구를 위해 집을 떠났다는 것이다.
여성 수행 공동체는 불교 이전에 자인(Jain)교에 있었다. 자인교 창시자 마하비라 (Mahavira)가 여성들의 출가를 허용하여 삼만육천 여성 수행자들이 자인교 내에 있었다고 한다. 여성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있기를 요구한 당시의 사회에서 여성 출가자들은 흔히 아기를 낳지 못하거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오직 건강하고 신체적으로 정상적인 여성들만이 승가에 들어올 수 있다”는 규정을 세워 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방지하려 하였다. 출가자가 될 수 없는 조건 24개 중에서 8개가 여성의 성기가 정상인가 아닌가에 관한 것이라 한다.
받다 쿤다라케사 (Bhadda Kundalakesa)
받다 쿤다라케사의 이야기 또한 어느 소설보다도 굴곡이 심하고 흥미진진하다.
받다 쿤다라케사는 라자가하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느날 그녀는 창가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강도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 사형수을 구제해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의 청이니 들어주어야된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많은 금품을 주고 그 사형수를 구한 뒤 목욕재게 시켜서 집으로 데려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삿투가 (Satthuka)이며 지체 높은 집에서 태어났으나 못된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사형을 면한 뒤에도 마음을 고쳐먹지는 않고 받다의 패물을 어떻게하면 훔칠 수 있을가 고민 끝에 그는 거짓말을 꾸며댔다. 즉, 자기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절벽의 신에게 맹세하기를, 만약 살아난다면 많은 금품울 갖고와서 절벽의 신에게 바치겠노라고.
이 이야기를 들은 받다는 패물을 준비해서 절벽으로 갔다. 삿투가가 하인들에게, 절벽 끝에는 둘이만 갈테니 뒤에 남아 기다리도록 했다. 절벽 앞에 이른 삿투가는 받다에게, “당신은 내가 정말로 여기 와서 제물을 바치려고 하는줄 아오? 당신은 정말 바보요. 나는 당신 패물이 탐났던것 뿐이오!”하고 말했다. 그는 받다에게 옷을 벗고 그 옷으로 패물을 다 싸서 묶으라고 하였다.
그 명령을 받은 받다는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내 청을 한가지만 들어주세요,”하고 말한 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삿투가를 한번 안어보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가 허락하자 받다는 앞에서 먼저 그를 포옹하고 뒤로 돌아가 포옹하는척 하다가 그를 절벽에서 밀쳐 떨어트렸다.
집에 돌아가 아버지를 차마 대면할 수 없게된 받다는 자인교의 스베탐바라 (Svetambara Jains) 가 운영하는 여성 신도 공동체에 들어가 스승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으나 마음에 흡족치 않아 더 지혜로운 스승을 찾아 방랑하게 되었다.
방랑하다가 새 마을에 도착하면 그녀는 로즈애플 (rose apple) 나무가지를 꺽어 모래에 꽂으며, 나와 영적인 토론을 하고자 원하는 사람은 이 나뭇가지를 넘어뜨리라고 말했다. 마을 아이들은 누가 나뭇가지를 넘어뜨리나 지켜보고, 아무도 도전하는 사람이 없이 나뭇가지가 시들면 새 나뭇가지를 꺽어 모래에 꽂고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궁극의 진리를 만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사바티에 도착했고 로즈애플 나뭇가지를 모래에 꽂았다. 부처님의 수제자 사리풋타는 그때 사바티에서 살았는데 모래에 꽂힌 나뭇가지를 보고 아이들을 시켜 넘어뜨리게 했다. 사리풋타와 받다는 마주보고 앉았다. 받다가 먼저 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사리풋타가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이 대답하였다. 받다는 사리풋타의 스승이 누구인가 묻고 사리풋타는 그녀를 부처님에게 데리고 갔다. 부처님이 가르치심을 주자 그녀는 즉각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오라, 받다여,”하고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계를 주고 승단에 들어오게 하였다. 받다는 부처님이 시름을 부르고 손수 계를 준 유일한 사람이다.
받다의 시를 보자.
나는 머리를 자르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헌 옷을 걸치고 방랑하였네.
잘못이 없는데서 잘못을 찾고
잘못이 있는데서는 잘못을 찾지 못했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영축산에 갔네.
거기서 티없는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보았네.
나는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네.
두 손을 합장하고
우리는 마주 앉았네.
“오라, 밧다여,”하고 그가 말했네.
그것이 나에게 주는 계였네.
……………..
지혜로운 여성과 스승들
스승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가르기와 메이트레이야 두 사람이다. 요가 구루, 야주나발키야의 첫째 부인이었던 메이트레이야는 재산을 모두 부인들에게 주고 출가자의 삶을 찾아 숲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온 세상과 모든 재물이 내 것이라면 나는 그것들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듣자 그녀는, “그렇다면 죽음 저편으로 데려갈 수 없는 이런 것들을 내가 무엇에 쓴단 말입니까? 죽음 저편에 대해서 아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이 질문을 계기로 그녀는 야즈나발키야로부터 “자아”에 대한 가장 높은 지식의 가르침을 받는다.
케마는 빔비사라왕이 총애하는 궁녀였다. 그녀는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는 궁녀로서 자만심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체의 아름다움까지 포함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따라서 그녀에게는 반갑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정원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원을 보러 갔다가 부처님을 뵙게 되었다. 부처님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아릿다운 젊은 여인이 나이들어 늙고 허리는 굽고 이빨은 군데군데 빠지고 머리가 백발이 되어 죽음으로 이르는 형상을 케마의 눈 앞에 나타나게 하였다.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하고 충격을 받은 케마에게 부처님은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신체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얽매이지만 그것을 버린 사람은 자유롭게된다고 설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케마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는 빔비사라 왕궁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코살라국( 國)의 왕, 파세나디가 그녀를 찾아와, 사후에도 부처는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케마는 왕이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줬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행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답하는 것을 거부한 10개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이 어떻게 처리하였나, 하는 점을 참고하라고 했을 것 같다. 케마의 대답은 불경 속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대답에 깊은 인상을 받은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한 때 다른 나라 왕의 궁녀였던 여자를 찾아와 법에 대한 물음을 던졌으며, 그 대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삶 속의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의 열정과 순수함을 그린 한 편의 아름다운 시이다.
어머니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절망, 원망과 분노는 고금을 통해 종교와 예술 작품 속의 주제로 채택되어서 수많은 예숙작품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미켈란제로의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몸을 자신의 무릎 위에 눕히고 고요히 머리 숙으리고 애통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최초 여성 불자들 중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구도의 문으로 삼아 열고 들어간 여인이 있다.
키사고타미는 나이들어 부모가 골라준 은행가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시집에 들어가 살면 시집식구들의 박대를 받았다. 그러다가 첫 아들을 낳자 식구들은 그녀를 따듯하게 대하고 집안에서 그녀의 위상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행복하게 살던 중 아들이 병이 들었다. 키사고타미는 백방으로 의사를 알아보고 약을 구해 간호하였으나 지극정성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죽고 키사고타미는 미쳐버렸다. 그녀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이집 저집 뛰어다니며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약을 달라고 애원하였다. 한 노인이 그녀에게 부처님께 가보라고 했다.
“죽음이 한번도 없었던 집에 가서 흰 겨자씨를 얻어 오십시오,”하고 부처님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키사고타미는 희망에 넘쳐 흰 겨자씨만 구해오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동네 사람들을 붙들고 흰겨자씨를 달라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흰겨자씨는 많지만 그 집에도 벌써 죽음이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반드시 부처님이 가져오라고 한 겨자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는 이동네, 저동네 찾아다였다. 그러나 한번도 죽음이 없던 집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정신이 돌아왔다.
“아기야, 나는 죽음이 너한테만 온 줄 알았구나. 그런데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오는거였구나!”
죽은 아기를 숲에 내려놓고 그녀는 부처님께 가서 출가하여 계를 받았으며, 금욕으로 명성이 높은 비구니가 되었다. 키사고타미의 시 일부분은 아래와 같다.
나는 위대한 팔정도를
불사(不死)의 경지까지 수행했네.
깊은 평화를 얻었고
법의 거울속을 들여다보았네.
화살은 뽑히었네.
나는 짐을 내려놓았네.
해야만 할 일은 다 하였네.
아내
인도 여성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삶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한 남자의 아내, 여러 자식들, 특히 10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은 어머니로 사는 것이다. 가정에서 대우받고 사회에서 인정하는 어머니의 지위 - 그러나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이었는지는 비구니 이사다시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찬란한 도시 유제니에서
우리 아버지는 좋은 상인이었지.
나는 예쁜 외동딸이었고
사랑받았지.
(이웃 도시) 사케타의 부자 상인이
지체 높은 사람을 보내
청혼하였지.
아버지는 나를 그 상인의
며느리로 보냈지.
아침 저녁으로
나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발에
엎드려 절했지.
남편, 시동생, 시누이를 보면,
그리고 남편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까지,
나는 떨면서 자리를 양보하였지.
그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맛있는 음식, 향기로운 술을
적당한 양만큼 대접하였지.
나는 일찍 일어나 손과 발을 씻고
내 주인의 방으로 가서
문지방에 손을 모으고 섰었지.
머리빗, 거울, 비누, 장식품을 들고
마치 하녀처럼.
남편에게 옷을 입히고 내 손으로 치장해 주었지..
밥을 짓고
냄비를 씻고
마치 하나뿐인 아들을 어머니가 돌보듯이
남편을 돌보았지.
남편에게 헌신하고
겸손하며 다정하며
흠잡을데 없는 하인처럼
아침 일찍부터 남편을 돌보았지.
그러나 남편은 내게 아무런 정도 주지 않았지.
그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지.
“나는 떠나요.
이사다시랑 같이
한 지붕 밑에서는 살 수 없어요.”
불교에서는 남편과 부부의 관계가 훨씬 더 상호의존적이다. 부처님은 특별히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존중하는 관계에 대해 때때로 가르침을 주었다. 즉, 남편은 아내를 대할 때: 존중하고,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외도하지 않고), 집안 다스리는 일을 아내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아내에게 예쁜 장신구를 선물하는 것이다.
한편 아내는 남편에게: 아내의 의무를 다 하고, 일가친척들에게 친절하고, 성실하고 (외도하지 않고), 남편이 벌어오는 재물을 잘 관리하고, 맡은 일을 재치있고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창녀, 궁녀, 미녀
마하 파자파티가 세운 여성승가에는 많은 여인들이 들어왔고 거기에는 창녀, 궁녀, 미녀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하나 아다카시 여인은 전생에서 방랑구도자 여인을 창녀라고 무시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금생에 카시 (현재 바라나시)에서 태어나 창녀가 되었다. 카시는 강변의 항구도시로서 비단과 면(綿) 외에도 여러가지 공산품이 유통되는 중요 상업도시였다. 자연스럽게 카시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부유한 상인들이 늘면서 창녀들 몸값도 높아졌다. 아다카시의 몸값은 하루에 천. 카시에서 유통되는 물품 전체의 가치와 맞먹는 가격인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쿨라바가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을 적은 경전 -역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때 아다카시란 궁녀가 비구니들 밑에서 종교적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사바티에 가서 세존으로 부터 계를 받고 승가의 정식 멤버가 되기를 원했다. 남자 구도자들은 이 얘기를 듣고 길을 막았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들은 아다카시는 세존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서, “저는 정식으로 비구니가 되는 계를 받으려하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님은 메신저를 통해 계를 주는 것에 동의했다. 비구들은 먼저 비구승, 다음에 여자 학생, 남자 행자, 여자 행자, 그리고 무지하고 무능한 여승을 차례로 보냈다. 매번 부처님은 그들을 반대하다가 끝에 가서]
“비구들이여, 지식이 높고 유능한 여승을 메신저로 보내서 수계식을 하는 것을 허락하노라”하셨다.
아다카시의 수계를 계기로 비구니들이 계를 줄 수 있다는 전례가 만들어졌고 비구니들의 권위 또한 향상되었다. 아다카시는 아래의 시에서 자신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 나는 값을 메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높았지.
내 값을 매겼을 때는
카시의 수입과
맞먹는 값이었지.
그런데 혐오스러워졌어.
나는 아름다운 내 몸둥이가
귀찮아졌어.
나는 돌고 도는 것을 멈추고
다시는 몸을 받아 낳고싶지 않았어.
세 가지 지식은 실현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루었네.
핸드폰을 항상 손에 들고 분초를 다투어가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2,600여년 전 최초 여성 불자들의 삶과 시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초 여성 불자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은 무엇인가.
머콧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 유산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결론짓건데, 최초여성불자들의 유산은 우리가 각자 자신의 등불이 되는 것이다. 이들 창의력 높은 여성들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아 물질주의, 소비주의, 파괴적인 도전이 감추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최고의 진리를 실현시킬 수 있으며 우리 삶에서 이 진리를 명백하게 나타낼 의무가 있다. 만일 우리가 이 목표를 지극히 성실하게 이행한다면 테리가타의 여승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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