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바다를 만나기까지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산티아고의 ‘바닥’은 ‘바다’
사회사업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환경과 따로 보지 않습니다.
이를 ‘환경 속 인간’이라 합니다.
네모난 바퀴 자전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자전거를 굴러가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바퀴’를 둥글게 깎아 내거나,
아니면 자전거가 달리는 ‘바닥’을 울퉁불퉁한 요철 모양으로 바꾸어 네모 바퀴와 맞물리게 하는 일입니다.
이제 달라진 바닥에서 네모 바퀴 자전거는 바퀴를 바꾸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환경 속 인간’의 의미는 문제가 바퀴에만 있지 않고 네모 바퀴를 굴러가지 못하게 하는 환경,
즉 바닥에도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처럼 사회사업가는 문제를 어느 한쪽에만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개인체계와 환경체계, 둘 사이 상호작용의 결과로 문제가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사회사업가는 이 두 체계 (바퀴와 바닥) 모두를 도우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개인이 환경에 잘 적응하게 돕고, 아울러 환경도 개인과 어울리게 거듭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보며 ‘환경 속 인간’을 떠올렸습니다.
사회사업은 인간을 환경과 분리해 이해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어려움은 오직 개인의 결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개인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제가 만들어집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육지(네모 바퀴가 안 굴러가는 길)에서 생활할 때는
동네 아이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연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다(네모 바퀴도 굴러갈 수 있는 특수한 길 혹은 본연의 길)로 나간 순간,
그는 바람을 읽고 별자리를 외우며 바다의 흐름을 알아챕니다.
결국 작은 배로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올립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가 발 딛고 선 환경이 바뀌자 전혀 다른 역량이 드러납니다.
육지에서 그는 이웃 아이 마놀린의 도움 없이는 식사조차 어려워 보이지만,
바다에서는 노련한 어부로서 자기 역량을 온전히 발휘합니다.
평생 살아온 ‘바다’라는 환경에 놓인 순간, 그는 다시 자기 자신이 됩니다.
네모 바퀴 자전거 산티아고의 삶을 나아가게 하는 ‘바닥’은 결국 ‘바다’였습니다.
끝까지 ‘나의 삶’으로
게다가 어부로서 물고기를 잡는 일은 반드시 돈을 벌기 위한 행위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고 잘해왔던 일을 이어가는 일,
그 자체가 삶이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싶어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 지역사회에서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사회사업가가 만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왔을까.
명절에 선물을 드리고, 겨울에 김치를 나누고, 봄에 나들이를 다녀왔다면 잘 도운 것일까.
정성스런 돌봄으로 그의 일상은 편안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지원만으로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강점과 매력과 열망과 가능성이 살아났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산티아고에게 필요한 건 ‘보호받는 노인’으로 머무는 생존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유능한 어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노인과 바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주인공 알란 할아버지 역시,
안락한 스웨덴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를 거부하고 100세 생일을 맞아 세상으로 도망칩니다.
보호만 받는 삶이 처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모습으로 살다 죽고 싶었습니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두 주인공 또한 병원 침대 위가 아닌,
그리운 바다를 향해 달려가 그 곁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환자로 분류되어 연명하기보다 끝까지 ‘나’이고 싶었던 이들에게,
길 위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자기 증명이었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 당사자를 잘 거드는 건,
이처럼 당사자가 끝까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당사자의 삶이 홀로 고립되지 않도록,
둘레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다양한 관계와 연결하는 일입니다.
나를 이해하는 그 한 사람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거드는 아이는 ‘마놀린’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운이 없는 어부라고 무시해도 마놀린은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릅니다.
나를 믿고 응원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다시 바다로 나가게 합니다.
우리 일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은 아니지만, 지지해주는 사람 하나 없다면 다시 힘을 내기 어렵습니다.
당사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쩌면 사회사업가의 역할은 당사자 곁에 직접 서 있는 게 아니라,
그 곁에 있어줄 ‘한 사람’이 생기도록 주선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청새치를 낚은 뒤 지친 몸으로 돌아와 잠든 할아버지를 찾아온 마놀린.
수척해진 할아버지 모습에 엉엉 울고 맙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도 바다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볼 때마다 마놀린을 떠올리며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가난 고통 질병 아픔 따위가 있어도 그런 애정 우정 인정이 사람을 살아가게 합니다.
당사자 모습과 삶이 어떠하든, 그를 조건 없이 응원하는 마놀린이 있고,
아침에 눈 뜨면 나갈 바다가 있고, 맞서 싸울 청새치가 있다면, 삶은 활기차게 이어집니다.
사회사업가는 당사자가 활약할 ‘바다’를 만나게 해주고, 그 여정을 함께할 ‘마놀린’을 세우는 주선자입니다.
실패는 과정, 다음을 위한 경험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85일째 되는 날,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마주합니다.
이는 단순한 운이 아닙니다.
지난 84일 동안 묵묵한 성실함이 있었기에 노인은 85일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도 항상 일이 잘 풀리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아 낙심할 때, 노인의 뒷모습에서 배운 ‘기다림’을 떠올립니다.
당사자와 지역사회를 향해 묵묵히 내디딘 발걸음 끝에 마침내 일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지난 인고의 시간은 ‘미달성’이 아닌 결정적 순간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기록됩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그때’를 맞이하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사투 끝에 낚은 청새치를 상어 떼에게 빼앗기고 뼈만 남겨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 뼈의 크기를 보며 노인의 투쟁을 인정합니다.
사회사업가에게 이는 결과(살점)보다 과정(뼈의 크기)을 알아봐 주는 동료와 지역사회의 지지로 다가옵니다.
안타깝게도 당사자의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남겨진 노력의 흔적을 발견하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
이것이 바로 사회사업가가 잃지 말아야 할 시선입니다.
사회사업가는 당사자의 삶에서 뜯겨 나간 살점을 애석해하지만은 않습니다.
그가 남긴 거대한 뼈란 자부심을 응원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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