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38장 24-30절
설교제목 : 새시대를 연 여인
메를린의 외침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사순절의 첫 주를 맞이했습니다. 미국 TV 뉴스에서 미국의 한 장관은 이례적으로 성회수요일에 하는 재를 이마에 바르고 출연하여, 트럼프가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대통령으로 선택된 것을 칭송하였습니다. 트럼프가 평화를 가져오는 구원자라도 된냥 추켜세웠습니다. TV에 나와 이마에 재로 십자 표시하는 모습에 신앙이 좋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였습니다.
C.G. 융은 그의 만년의 글인 “현재와 미래”에서 오늘날 독재국가들이 심지어 종교적인 관심사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형국을 이렇게 말합니다. “국가는 신 대신에 출현했다. 그러므로 이 측면에서 볼 때 사회주의 독재, 각종 종교, 국가 노예제는 일종의 신의 예배의식이다. ... 자유로운 생각을 만드는 일은 질식되고 도덕적 결단은 잔인하게 말살된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조차 거룩하게 만든다. ... 오직 국가권력을 수중에 가진 자만이 국법을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고, 이를 그의 비위대로 행사한다. ... 개별적 인간의 도덕적 결단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우롱당한 대중의 맹목적 운동뿐이다. 그리고 거짓말은 정치 고유의 행동 원리가 되었다.”[C.G. Jung, CW 10, para.511, 515] “조직화된 집단에 대한 저항은 오직 그의 개성이 집단의 경우처럼 조직화된 자만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CW 10, para.540.]
우리의 세계와 사회현실이 국가와 집단, 대중 운동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거짓말과 선동, 혐오스러운 것이 마치 거룩한 것으로 둔갑한 형국입니다. 70년 전에 외쳤던 융의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제기를 합니다. 좌우로 분열된 신경증적 해리상태는 여전히 진행형에 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 자신의 그림자의 만족을 모르는 권력충동이 들어 있는 우리의 적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ML 폰 프란츠, 이부영옮김, 《C.G.융, 우리 시대 그의 신화》, p285.]
며칠 전에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차에 시진핑을 태우고 어딘가로 갔는데, 나중에 보니 긴 자전거였습니다. 시장에 들러 잠시 무언가를 사려했는데, 아내는 아이들의 자전거를 가지고 와서는 실고 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긴 자전거에는 실을 수 없기 때문에 다음에 와서 실고 가야한다는 얘기했습니다.” 저의 내면에도 독재권력을 추동하는 시진핑이 있으며, 그와 어떤 협상을 위해 함께 가고 있음을 꿈은 제시합니다. 또한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아이들의 자전거를 권력의 상을 실고 가기 때문에 실고 갈 수 없다고 피력합니다. 여전히 개인의 감정과 영혼의 가치가 만들어낼 미래의 측면을 실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배의 전설에서 메를린은 말합니다. “지구보다 자신의 혼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 메를린이 이 세상의 권력을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간 것처럼 권력욕구를 행사하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모든이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나는 땅을 차지하기 보다 차라리 내 영혼을 구하겠다”는 이 메를린의 외침을 다시금 깊이 새겨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한 잠복기
다말은 유다의 아들인 에르와 결혼했지만, 그 남편이 죽자, 당시 관습대로 동생 오난 과 다시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형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않기 위해 땅바닥에 정액을 쏟아 버려, 결국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과 내면의 법칙을 어기고 살면, 정신적 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막대 셀라가 다 클 때까지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과부로 살게 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다는 며느리에게 막내 아들까지 주었다가는 그마저도 죽어 대가 끊길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쫓아내었습니다.
그 뒤에 오랜 세월이 지나고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자기 양들의 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갔습니다. 다말은 “너의 시아버지가 양털을 깍으러 딤나로 올라간다”는 어떤 사람의 말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쓰고 딤나로 올라갔습니다(38:12-14).
다말은 당시 지배원리였던 남성 사회에서 내쫓기는 수동적 내향화의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채 퇴행의 상태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말에게 이 기간은 일종의 잠복기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묵묵히 견디며 때를 기다리며 변환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나비로 변환하기 위해 기다리는 잠복기는 변환을 위한 정지상태입니다. 이를 건강한 잠복기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만일 이 기간에 시아버지를 저주하며 원망하며 인생을 비관하며 살게 되면, 병적 잠복기가 되어 잠복기가 끝나면 오히려 파괴적인 병증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마치 병원체가 침투한 잠복기는 병증을 폭발시키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울증의 상태를 건강하게 잠복기로 보내면, 새로운 삶의 태도와 적응력을 가지고 인격의 성숙과 변환을 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잠복기를 부정적으로 보내고, 오염괴고 악화되면, 조울증과 조현병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침체를 경험하는 분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밥맛이 없어도, 밥을 드시고, 걸으시라고 자주 이야기하곤 합니다. 기본 생활리듬을 잃지 않는 것이 병증으로 가지 않는 길이고, 그 시간을 충분히 겪어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정체와 정지, 방향상실을 경험할 때 적극적으로 잠복기를 보내면 새로운 변환의 때가 찾아옴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의복 갈아입기
다말은 적극적으로 건강한 잠복기를 보내던 중, 이제 허물을 벗고 나설 때가 이르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떤 낯선 것이 개입하려는 신호이며 새로운 변환을 위한 소식입니다. 그때 다말은 준비가 되어 있었고, 과부의 옷을 벗고 다시 너울을 씁니다. 과부의 옷은 집단과 사회가 부여한 기존의 삶의 방식과 태도, 새로운 남성상을 만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품고 나을 수 없도록 규정화된 방식이자 옛 삶에 고착되도록 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말은 과감히 과부의 정체성을 벗습니다. 그리고 너울로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너울은 여인들의 얼굴을 덮는 베일을 가리킵니다. 고대 근동의 신부들이 결혼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현재에도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들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톨릭 미사에서도 여성들은 면사포를 씁니다. 여성은 너울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남성들의 성적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고, 순수한 처녀성과 여성성의 신비를 보존합니다. 너울을 쓰는 것은 여성적 신비와 순수한 처녀성을 간직한 새로운 여성상으로 자신을 주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우리는 주도적으로 집단이 부여한 기존의 페르조나를 벗고 다시 순수성으로 변환을 시도하기 위해 옷을 갈아 입어야할 때, 다말처럼 주도적으로 그런 갈아입기 과정을 잘 해냈으면 좋겠습니다.
유다의 담보물 : 도장, 허리띠, 지팡이
다말은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에나임 어귀로 갑니다. 에나임 문이란 뜻은 샘들 또는 눈들의 문이라 뜻도 되고, 두 시냇물로 나뉘는 샘이란 뜻도 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광장이란 뜻도 지닙니다. 이런 샘과 눈의 이미지는 생명의 근원과 다시 접촉하는 곳이며, 새로운 통찰로 진입하는 곳이 이 장소가 지닌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유다가 다말을 보고 창녀인줄 알았다는 것은, 이곳이 성전 창기(21절, 22절에 사용한 창녀, 히브리어 ‘케데솨’는 일반 창녀가 아니라 ‘성별된 창녀’란 뜻이다)들이 있었던 광장임을 시사합니다. 유다는 얼굴을 가린 다말에게 끌려서 그와 동침하려 합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그 아내의 죽음은 기존의 집단정신의 감정과 정서원리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과 활력을 잃은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신 생활에서 기존의 감정과 정서가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여성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내적 갈증과 정서적 메마름, 감정의 소실은 생명의 근원인 에나임 샘 곁에서 다말을 통해서 채워져야 했던 것입니다. 상스럽고 천박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원형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가 자신과 동침하는 것을 위해 담보물을 요청합니다. 유다의 도장, 허리띠(끈), 지팡이를 요구하였습니다. 다말이 요구한 도장과 허리띠, 지팡이는 남성원리의 전형적인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장(반지형태나 양쪽에 인각된 형태)은 그 사람의 신원을 보증하며 정체성과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이며, 허리띠는 서약과 약속, 연결의 원리로 에로스의 특성을 대변합니다. 지팡이는 권위와 지시, 로고스원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에게 있는 남성적 힘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함으로 동화시키려 시도한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와 견줄 만큼 새로운 여성원리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말에게 필수적인 남성적 기능인 것입니다. 여성의 발달에는 이런 대극에 있는 남성적 로고스를 건강하게 동화시킬 수 있을 때 전체성의 입장에서 더 높은 발달을 취할 수 있습니다.
쌍둥이의 출생
다말은 유다에게 받은 세가지 담보물을 받고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소문에 다말이 창녀짓을 하고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려서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 다말은 도장과 허리띠와 지팡이를 보여주며, 이것이 누구 것인지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유다는 그 물건들을 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그 뒤로 다말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쌍둥이를 출산하였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죽은 두 아버지를 대체하듯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쌍둥이의 중 첫째는 베레스였습니다. “먼저 터트리고 나왔다” 하여 베레스(‘파레츠’는 ‘깨뜨리다’, ‘터트리다’, ‘break’)로 지었고, 둘째는 “진홍색 실을 묶고 나왔다”고 하여 ‘세라’라고 지었습니다. 세라는 홍색, 또는 밝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쌍둥이의 탄생에는 모든 존재의 이중적 본성과 대극의 이원적 경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레스는 태중의 둘째가 첫째로 태어나며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역동적인 측면을 드러내며, 세라는 붉은색 또는 밝음이란 온화하고 정서적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두가지 본성을 함께 아우르며 담아낸 것입니다. 다말은 두가지 이원성을 담아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다말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가치로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기 위해 이원성을 담아낸 그릇입니다. 그리고 풍요와 부활, 생명력을 상징하는 그 다말에게서 먼 미래에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전체성을 담을 육화의 그릇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말처럼 새로운 시대을 열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