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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의 美學
최 화 웅
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과 인생을 본다. 나의 영화학교는 영화의 전당이고 강의실은 시네마태크다. 시네마태크(cinematheque)라는 말은 영화창고라는 프랑스어다. 시네마는 영화, 태크는 창고나 보관소 또는 박물관이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에서 ‘시네마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앙리 랑글루아가 시네마태크운동을 시작한 것은 발성영화시대인1936년이다. 20세기의 문화유산인 영화가 소실되는 것을 우려해 필름을 입수하고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네마태크 프랑세즈’를 설립한 것이 시네마태크운동의 시초였다. 일반적으로 흘러간 영화를 수집, 보관하고 상영하는 극장이다. 미국에서는 영화클럽이나 연구소 등이 운영하는 극장을 일컫고 영국에서는 소규모 예술극장을 뜻한다. 부산에서는 2011년 9월 영화의 전당이 개관하면서 212석 규모의 시네마태크를 갖추고 낡고 오래된 독립영화와 고전영화, 예술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태크에서는 해마다 계절 따라 나라별, 시대별, 장르별, 연출가별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2017년에는 6월 13일부터 7월 9일까지 무성영화의 마지막 시대를 빛낸 위대한 걸작들을 소개하는 ‘마지막 침묵(The Last Silence)’이라는 ‘1928년의 기적, 위대한 무성영화의 기억’이라는 부제의 기획전을 개최했다.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1928년도에 제작한 무성영화 20편을 상영 중이다. 무성영화는 1889년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를 발명하여 최초의 영화인〈기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à la Ciotat)〉을 발표한 이래 미국에서는 영화산업의 발전으로 최초의 발성 영화〈재즈 싱어(Jazz Singer, 1927)〉가 나온 이후까지도 몇 년 동안 존속하였다. 1910년대로부터 1920년대 초에 걸쳐서는 세계 각국의 영화가 표현의 기법을 모색·연구하여 제재나 표현양식이 크게 발전했다. 무성 영화 시대에는 영화 예술의 본질이 영상에 있다고 보고 독자적인 미학을 개척해 나가던 시기였다.
무성영화는 말이 없는 대신 빛과 그림자로 표현하는 표정과 동작, 카메라의 빅클로즈업 기법과 음악이 관객의 상상력을 파고들었다. 영상의 시각적 특성에 기반을 둔 독일의 표현주의,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 전위 영화가 무성 영화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 시기에 성행했던 영화 장르는 스펙터클, 멜로드라마, 코미디 등이었는데, 특히 코미디가 가장 보편적인 장르였다. 코미디는 언어의 도움 없이 모든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창조해 냈다. 무성 영화는 1889년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를 발명하면서 1920년대 들어 절정기를 이루었다. 무성영화의 시대를 "은막의 시대"(Age of the Silver Screen)라고도 불린다. 최초의 무성영화는 1888년 루이스 르 프린스(Louis Le Prince)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오크우드 농장 공원(Oakwood Grange garden)을 산책하는 모습을 담은 2초가량의 러닝타임에 ‘Roundhay Garden Scene’이라는 제목이었다.
무성 영화(無聲映畫)는 녹음된 소리, 대사가 없는 영화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영화의 탄생으로부터 토키(talkie)가 출현(1927)할 무렵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무성영화는 1930년대 초부터 서서히 사라졌다. 영화와 녹음된 소리를 합치려는 생각은 영화의 초기부터 있어 왔으나, 동기화라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1920년대 후반까지 무성 영화가 판을 쳤고, 필요한 대사는 장면 중간 중간에 자막을 삽입했다. 무성영화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대신 해주는 해설자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변사다. 우리가 어렸던 6.25 직후까지도 변사가 활동해 연극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들은 이미지에 연속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가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곁들였기 때문에 사실상 소리 없는 무성 영화라고 할 수 없다. 또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스크린 옆에서 대사를 넣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황홀한 개그는 발성 영화의 세계에서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전당이 기획한 1928년의 기적, 위대한 무성영화의 기적 <마지막 침묵(The Last Silence)에서 상영하는 1928년의 걸작 무성영화 20편 중 에릭 폰 스트로하임 감독의 ‘웨딩 마치’와 킹 비더 감독의 ‘군중’, 그리고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이 연출한 ‘뉴욕의 선창’과 프랭크 보제지 감독의 ‘거리의 천사’, 그리고 킹 비더 감독의 '팻시' 등 다섯 편의 흑백무성영화를 보았다. 6월 25일 저녁 7시에 상영된 ‘웨딩마치’에 이어 영화평론가 정한석씨의 특별강연이 좋았고 6월 30일 저녁 7시 30분의 ‘군중’에 이어 영화평론가 박인호씨의 시네도슨트로 무성영화의 해설이 유익한 시간이었다. 지난날 영화예술의 보수주의자 찰리 채플린은 “사운드가 침묵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파괴했다.‘고 사운드의 도입을 개탄했다고 한다. 영화 예술은 무성 영화가 발성 영화로 대체되는 1920년대 후반 이전, "무성 영화 시대"가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많은 영화 학자와 애호가들은 감독과 배우, 제작 스탭들이 새로운 "발성 영화(talkies)"에 적응하기까지는 몇 년 동안 영화의 미적 질이 떨어졌다.”는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운드 테크놀로지에 편승한 영화산업은 침묵의 벽을 깨고 말하는 발성영화 제작으로 줄달음쳐 갔다.
소리를 사용하지 않는 영화의 역사적 맥락과 특수성을 고려할 때 무성 영화를 단순히 발성 영화 이전의 역사적 배경은 무성 영화라는 장르의 독립성과 독자적인 예술적 성취에 주목할 만하다. 무성 영화 시대에는 영화예술의 본질이 영상에 있다고 보고 독자적 미학을 맹렬히 개척했다. 그리하여 영상의 시각적 특성에 기반을 둔 독일의 표현주의,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 전위 영화 등이 무성영화 시대를 장식했다. 이 시기에 성행했던 영화 장르는 스펙터클, 멜로드라마, 코미디 등이었으며 그중 특히 코미디가 보편적인 장르였다. 코미디는 언어의 도움 없이 모든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양식을 창조할 수 있었다. 무성 영화는 사라졌지만 뮤직비디오와 단편 영화, 광고 등에 무성 영화의 형식·미학적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광고 카피가 없는 순수 시각적 광고는 만국 공통어로서 영상언어의 본질을 추구했던 무성 영화의 유산으로 평가할 만하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하여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을 발표하면서 무성영화의 시대가 1920년대 초반까지 무성영화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1927년 미국에서 첫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무성영화 후기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영화 예술이 본격적으로 탐구되어 뛰어난 개성을 가진 작가가 나타나 화려한 영화 예술을 발전시켰다. 이미지와 만난 사운드가 영화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순간 무성영화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성영화가 종언을 고하던 1928년, 무성영화의 남겨진 미학적 잠재력을 남김없이 구현하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위대한 걸작 무성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D. W. 그리피스(D.W. Griffith)의 영향을 받은 레프쿨레쇼프(Lev Kuleshov),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 등이 편집의 개념을 몽타주로까지 진화시켰고 독일에서는 로베르트 비네(Robert Wiene), 프리츠 랑(Fritz Lang), F. W. 무르나우(F.W. Murnau) 등이 표현주의 영화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또한 위의 형식주의에 반해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 지가 베르토프(Dziga Bertov) 등의 기록 영화와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장 르누아르(Jean Renoir) 등의 영화가 40년대 사실주의 전성시대의 전조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발성영화(talkie)의 출현으로 인간의 입을 통해 소통의 수단이자 인류의 지혜가 응집된 문화적 도구인 언어가 출연자의 입을 통해 나오기 시작하자 효율적인 마이크 사용이 문제가 되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제3차 산업혁명에 이어 인공 지능,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 올 제4차 산업혁명이 쉼 없이 밀려오듯 영화도 ‘움직이는 영상(motion picture)에서 ’말하는 영상(talking picture)으로 큰 변화의 물결을 겪었던 것이다. 이로써 대사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를 넘어 영화에서 언어가 시각적인 것과 대등해지거나 혹은 우위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성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말하게 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넘어가는 눈부신 변혁기에 당대의 많은 영화인들 중에는 사운드의 도입을 개탄하는 반동적인 움직임도 많았다. 그 중에 찰리 채플린은 “사운드가 침묵의 위대한 이름다움을 파괴했다.”고 개탄한 1928년을 기점으로 무성영화로부터 발성영화의 등장이야말로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무성영화의 그 풍부한 상상의 세계와 흑백의 미학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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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성영화에 대한 친절한 안내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