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학>-돼지국밥 한 그릇 외 4편 / 정이랑
돼지국밥 한 그릇
정 이 랑
태어나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드리지 못했다
올해 칠순의 늙은 아버지와 마주 앉아 먹는 국밥
눈동자 한 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할 말이 없다
“고기가 많네요, 아버지.”
아직도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으로 고기 건네고
“이것만 해도 많다, 너나 많이 먹어.”
갔던 고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여전히 김은 모락모락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왔다
서른이 넘어 자식 낳고 살면서 그 흔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감사하다>는 마음 표현하지 못했다
덜컹덜컹 유리문 밖으로는 바람만 불고
비라도 오려는지 플라타너스 잎들이 손바닥 펴들고 있다
넘어가지 않는 국밥 꾸역꾸역 밀어 넣기만 하는데
푹 파인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이제 구슬구슬 빗방울도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국밥 한 그릇 뚝딱 비우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며 527번 버스를 타셨다
그저 버스의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렇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언제 다시 대접할 수 있을까
시간의 기둥을 잡고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
비는 그치지 않고 발가락 사이로 침범하며 걸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도 우산없이 걸어 가봐야겠다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정 이 랑
나는 남편과 말다툼 끝에 그곳을 나왔다
여자란 결혼하고 나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버스정류소 앉아 나뭇잎 한 장 주워 잎맥을 살핀다
손바닥의 손금과 흡사한 길들이 선명하다
지나가는 저 사람 또 스쳐가는 이 사람의 길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작 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갈 것인가 724번 버스 타고
관음동에 닿으면 가야할 길이 보일 것인가
나뭇잎들도 가야할 길 따라 떠나는 10월,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나는
잠시 결혼한 것을, 아이 낳은 것을, 십년의 세월을
원망하고 억눌러 보지만 소용없이 넘쳐나는 눈물방울들
꺼이꺼이 나를 보고 울고 있는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하다
나는 안다, 골목길 구석구석 그가 찾고 있을 것이란 걸
애타게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보인다,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앉아 있는 나를, 그가 발견해 준다면 좋겠다
인적이 끊기고 버스도 잠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곳
전봇대와 나란히 서서 열어놓고 잠들어버린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정 이 랑
눈을 떠 보니 선인장 하나가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왜일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도대체 왜?
사람의 곁에서 훌쩍 떠나버린 것일까
무슨 잘못을 내가 저지른 것일까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는 걸까
며칠 째 답답한 가슴만 움켜잡고 있다
아프면 병원으로 가듯 꽃집을 찾아갔다
“햇볕과 놀게 하셨나요? 물은 주셨습니까?”
이제야 알았다, 나의 무식함 때문임을
나는, 나도 모르게 가해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나에게로 온 이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
선인장에게 물은 주지 않는다는 편견으로
꿋꿋하게 나만 지금껏 잘 살아온 것이다
아아, 이를 어쩌나!
그래, 또 누군가에게 잘못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가시 없는 말이 그대에게는 비수일 수도 있었겠지
아아, 참 미안하다 그대여!
한동안 선인장 앞에서 성호를 긋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눈을 감아본다
오래된 구두를 위하여
정 이 랑
몇 년 전 발에게 선물한 검은 구두
입술이 벌어져서 바람이 새어든다
피곤하면 집에서 푹 쉬라고 타일러도
따라나서며 육신과 함께 했던 나날
구불구불한 길들을 이끌어 소풍도 가고
흐르는 물가의 이편과 저편에서
얼굴을 묻어보기도 하던
구두가 아프다, 아파도 아프다 소리하지 않는
결혼을 하고 오랜만에 찾아가는 집
윤기 흐르는 새 구두로 동행한다
허리 늘씬하고 입술도 뾰족한, 그래서 눈부신 발
엄지발가락 새끼발가락 뒤꿈치 온통 물집 투성이다
누워 있는 대청마루 밑의 복실이와
빨래처럼 조용히 잠드는 대낮 어머닌 부채질하고
오래된 구두와 헤어져보고 나서야
오래된 구두의 편안함 얘기할 수 있듯이
집을 떠나와서 살고 보니 느낄 수 있는 어머니
나는 오늘 오래된 구두와 다시 외출을 한다
돼지저금통
정 이 랑
아이는 돼지 한 마리를 슈퍼마켓에서 잡아 왔다
십원 백원 오백원 천원 닥치는대로 집어넣는다
무엇을 얻기 위함인지 과자도 아이스크림도 싫다고 한다
아이도 돼지저금통도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않는다
어제는 연이율 5%라면서 은행에서 직원이 나왔다
먹고 살기도 힘들다 아우성인데 적금을 넣으라고 한다
전기요금 전화요금 휴대폰요금 가스요금 집세 가게세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여기저기 수납하는 돈이 넘 많다
오늘은 복권 한 장을 사고 싶어진다
1등이라도 되면 집세도 내지 않고
가게세도 밀리지 않게 건물 하나만 장만하고 싶다
돼지꿈이라도 꾸고 싶은 밤이다
나는 퇴근길 돼지 한 마리 잡으러 슈퍼마켓에 간다
한 푼 두 푼 모아 돼지 배가 가득 차오르면
연이율 5%라고 하는 은행으로 아이와 함께
돼지 두 마리 몰고 행복을 부금하러 갈 것이다

정 이 랑
<약력>
▲1969년 경북 의성 출생.
▲1997년『문학사상』신인발굴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8년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수혜시인으로 선정됨.
▲2005년 첫시집,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황금알)』발간.
▲2010년 현재, 대구시인학교 <사림시>및 <시원> 동인으로 활동.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
*주소: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서문시장 2지구 지하 2층 674호 헬로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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