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8:00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볼로냐로 가야지요. 하루 동안의 ‘찐한’ 시칠리아 유랑을 마치고 팔레르모 공항에 유유히 도착했습니다. 저녁요? 못 먹었습니다. 이 친구들 어찌나 저녁식사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지, 6~7시에 저녁영업을 하는 식당이 없습니다. 기차역 근처 맥도널드라도 갈까 하다가 시칠리아에서 왠 맥도널드냐는 생각이 들어 포기합니다. 낮에 시장통에서 산 사과를 우적거리며 씹어봅니다. 창 밖을 보니 공항의 초저녁 풍경이 또한 인상적입니다.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야트막한 바위산을 끼고 있는 팔레르모 공항의 경치는 참으로 절묘합니다. 바다 쪽은 유명한 리조트 해안이구요, 뒤쪽에 바싹 붙어있는 바위산은 육지쪽 그러니까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결코 보기 힘든 묘한 풍광입니다. 이국의 땅 이탈리아에 와서 거듭 이국적인 경치를 만난 순간이지요. 짧은 감탄사를 뱉어내게 됩니다. 자, 그나저나 이제 빨리 볼로냐로 돌아가야 할 텐데요.
PM 9:10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팔레르모 특산 과자를 우물거리며 출발준비를 해봅니다. 이쯤이면 보딩사인이 떠야하는데, 어?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뭔가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스물스물 올라옵니다. 그래도 기다려봅니다. 다행히 통밀과자는 꽤 맛있습니다.
갑자기 탑승구역으로 항공사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뭔가 분주히 구두 안내를 합니다. 이 친구들은 왜 항상 이렇게 1:1식 ‘구두’로 안내를 할까요. 방송으로 공지하거나 모니터에 띄워주는 법이 잘 없습니다. 여튼 연착이랍니다. 볼로냐 공항에 눈이 오니까 밤 11시까지 기다리라고. 아, 밤 11시 넘어 출발이면 볼로냐엔 새벽 1시쯤인데 호텔까진 또 뭘 타고 가냐구요...
PM 11:00 기어이 사단이 났습니다. 비행기 결항확정입니다. 볼로냐 마르코니 공항이 폐쇄되어 월요일에나 비행기가 뜬다고 하네요. 지금요? 토요일 밤입니다. 팔레르모에서 뭔 수로 주말을 버팁니까. 사람들이 막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니까, 다른 도시(가령 베네치아, 베르가모, 로마 등)로 도착하는 비행기 표는 있다고 그걸 타고 우선 육지로 날아간 후 기차 갈아타고 볼로냐로 가라는 겁니다. 저는 유레일이 있으니 사실 딱히 상관이 없는데, 다른 승객들은 분노모드 그 자체입니다. 여튼 승객들을 탑승구역에서 빼내 기어이 체크인 카운터에 다시 세웁니다. 거긴 쇼파도 없는데...
PM 11:00 - AM 02:30 자, 여기서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약 100여명의 승객들에게 볼로냐 대신 다른 도시로 가는 항공권을 바꿔준다고 합니다. 하루 스테이할 호텔도 수배해주구요. 우리나라 같으면 성질이 급해서라도 빨리 표를 바꾼 후에 호텔로 직행할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 그룹1 = 분노파 : 일단 승객들 중의 한 그룹은 크게 화가 나 있습니다. 눈이 내려 비행기가 못 뜨는 불가피한 상황인데, 그런 설명은 이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화가 난다는 거죠. 크게 뿔이 돋은 이 그룹의 대부분은 사실 여성입니다. 이탈리아 여성이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일단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핏대 높여 삿대질을 합니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 지(역시나 오페라의 본고장...). 분위기만 보면 엉겨 붙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데, 그렇다고 신체접촉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지요. 나름 묘한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여튼 너무 소리들을 질러서 공항이 들썩거릴 정도입니다. 놀란 공항경찰들이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고 나왔다가 여자들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뒷걸음질 칩니다. 주름을 완벽하게 편, 쫙 빠진 바지와 몸에 착 붙는 제복을 멋스럽게 챙겨 입은 잘 생긴 이탈리아 남자경찰들이 여자들의 기세에 눌려 하나 둘씩 자기들 사무실로 표표히 사라져가는 그 광경이란...영화가 따로 없어요. 물론 당사자인 제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지긴 합니다만.
“내 고향이 볼로냐인데 왜 딴 데로 가라고 그래!!” (저는 한국에서 왔는데도 꾹 참고 있어요.)
“베를루스코니 나오라고 그래?!” (눈 오는게 베를루스코니와 뭔 상관이래. 게다가 지금은 총리도 아닌데...)
카운터의 여성 직원이 참다 못해 드디어 폭발합니다. 아, 이것도 정말 영화의 한 장면.
“바아아아아스타!! Basta!" (이제 그만. 아니, 사실은 ‘닥쳐요’라는 말.)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더니 분노파 그룹들에게 격한 맞삿대질을 놓으며 또 한바탕이 펼쳐집니다. 옆에서 훌쩍 거리는 우시는 할아버지, 저 뒤에서 큰 눈망울로 방관하는 경찰, 거기에 닳아 없어져가는 핸드폰 배터리를 불안해하며 충전기 꽂을 장소를 찾아 해메는 유일한 동양인(물론 접니다.) 순간 친구 프란체스코의 한 마디가 오버랩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여자들? 세계에서 제일 드센 종족들이야.”
- 그룹2 = 현실파 : 다행히(?) 이태리 남자들은 좀 순한 편입니다. 뭔가 용기가 없지요. 현실파들은 카운터에 조신하게 모여들어 표를 바꿔갑니다. 문제는 또 여기에 있는데, 일단 한 줄로 줄을 서는 법이 없고 빙 둘러서서 서로 자기가 먼저라고 신경전이 뜨겁습니다. 게다가 차례가 와도 1인당 상담시간이 20분이 넘어요. 뭐 그리도 구구절절 사연이 많은지. 제 앞의 남자 세 명은 직원을 붙들고 아예 반시간 째 실랑이입니다. 저 뒤에서는 삿대질 싸움이 서라운드로 터지는데, 이 남자놈들은 베네치아로 갈지 로마로 갈지 지들끼리 토론했다가 직원한테 물어봤다가, 분노했다가, 웃었다가...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 같았으면 1인 1분씩 제깍제깍 결정해서 30분 안에 끝날 일을 얘들은 어찌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게다가 제 옆에 서 있다 새치기한 할아버지는 더 압권입니다.
“어느 도시로 가시게요?”
“손자들이 보고 싶어...우리 귀여운 손자...”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우니까 그걸 또 직원이 다독여주며 다 들어줍니다. 저녁식사를 세 시간씩 즐기는 저 대책없는 남유럽식 느긋함, 꼭 여기서까지 제가 겪어야 하나요?
겨우 제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사실 벌써 혼이 반쯤은 빠진 상태입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핸드폰 충전기와 변압어댑터까지 꼼꼼히 챙겨왔지만 나름 국제공항인데도 전기 꽂을 데가 없습니다. 핸드폰 전원이 나갔습니다. 제 정신도 이미 반쯤....흑흑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직원에게 통사정을 합니다. 로마 제국의 후예들에게 대한국인의 빠르고 직설적인 문제해결능력을 보여주는 중입니다.
“아, 저는 도시는 상관없고 내일 아침 제일 빠른 비행기면 됩니다. 무조건 빠른 걸로”
“음...빠른 비행기라면 베네치아도 있고, 로마도 괜찮고, 베르가모도 있고...”
“아 됐고, 9시 이전에 뜨는 걸로요. 무조건!”
남들이 30분씩 잡아먹는 상담시간을 저는 가벼이 3분 안에 패스, 베르가모 공항 티켓을 일단 예약합니다. 베르가모에 떨어져서 밀라노 중앙역까지 가는 셔틀버스로 이동한 후, 밀라노에서 볼로냐행 기차를 탄다는 뭐 그런 계획. 그런데 저혼자 빨라야 뭐하겠어요. 아직 남은 그룹들은 싸우느라 표 바꿀 생각도 안하는데. 저치들이 다 끝나야 호텔을 배정해준다고 합니다. ‘잠시’ 옆에서 기다리라고 하네요.
뭐 별 수 있나요. ‘잠시’ 기다렸습니다. 이 난장판 소동이 다 끝나는 새벽 두 시 반까지 무려 다섯 시간을. 아휴...
- 그룹3 = 관망파 : 내일 지구가 망해도 나는 웃으련다. 뭐 이런 태도죠. 뭐가 걱정이냐는 듯, 시종 같이 온 커플끼리, 일행끼리 신나게 낄낄 거리며 웃고, mp3로 음악 듣고, 수다 떠는 그룹입니다. 팔자도 좋아요. 일부는 아예 팔레르모 시내로 다시 들어가더군요. 섬에서 어떻게 나갈 건지 별 걱정도 없는 모양입니다.
여튼 이 모든 난장판이 일단락된 건 새벽 3시쯤입니다. 싸우던 인간들도 지쳤는지 2시쯤부터 슬금슬금 표를 바꿉니다. 이게 또 한 시간이 걸립니다(야 이 화상들아, 진즉에 표부터 바꾸지.) 이제 호텔로 가야하는데, 또 호텔 셔틀버스가 연착. 아아, 뼈가 녹은 스트레스란 이런 걸까요.
“저희 어디로 가요? (제발)” 나름 유창한 이태리어로 제가 물어봅니다.
“마가기야리(magaggiari) 호텔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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