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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사울믿음, 요나단믿음
삼상14:16~23
<안데르센 동화 ‘썩은 사과’>
안데르센이 쓴 동화 중에 ‘썩은 사과’가 있어요!
옛날 시골에 노부부가 있었어요! 이들의 재산은 말 한 마리가 전부였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저 말을 끌고 나가서 더 유익한 것으로 바꿔 왔으면 좋겠소!’
할머니는, ‘그렇게 하시구랴!’ 말을 끌고 시장을 갑니다.
가다 보니 한 사람이 소를 끌고 가고 있어요! ‘옳다! 저 소와 바꿔서 농사를 짓자!’
바꿔 달라고 하니까, 얼른 바꿔줍니다. 할아버지는 소로 바꾸고 길을 갑니다.
가다보니, 이번에는 아주 훌륭하게 생긴 암양을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요!
‘암양으로 바꾸면 젖을 많이 짤 수 있겠다!’ 바꿉시다! 해서 바꿨어요!
암양 고삐를 잡고 한 참을 가는데, 마침 거위를 한 마리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요!
‘저 거위라면, 매일 알을 낳을 터이고, 집을 지켜 주겠다!’ 바꿉시다! 또 바꿨어요!
한 참을 가는데, 이번에는 암탉 한 마리를 봤어요! ‘암탉이 알을 낳으면 나중에 부화시켜야지!’
‘바꿉시다!’ 바꿔주지요! 가격 차이가 현저하니까요! 할아버지는 암탉을 안고 갑니다.
암탉을 안고 한 여관을 지나는데, 여관 앞에 썩은 사과 한 상자를 내놓고 팔고 있어요!
‘옳거니, 저 사과를 가져가면 아내가 쨈을 만들어 주겠지?’ 바꿨어요!
그리고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하룻밤 묵으면서 같이 투숙한 사람들에게 할아버지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참 기막힌 이야기지요? 아주 튼실한 말 한 마리가 썩은 사과 한 상자로 바뀌었어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당신은 이제 아내에게 쫓겨날 거요!’ 조롱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천만에요, 우리 집 할멈은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말을 썩은 사과로 바꿨는데, 안 쫓겨나요?’ ‘물론입지요!’ 이러다가 내기를 하게 되었어요!
내일 영감님과 함께 가봅시다! 정말 할머니가 칭찬하면, 여기 있는 금화를 모두 주겠소!
그러나 할머니가 영감을 비난하면, 당신은 집을 팔아서 나를 줘야 하오!
그리고 다음날, 썩은 사과 한 상자를 가지고 집으로 갔어요!
할아버지는 차례차례 바꾼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잘 했다고 맞장구를 쳐요!
맨 나중에 썩은 사과로 바꿨다고 했어요! 할머니가 뭐라고 합니까?
영감! 참 잘 했어요! 어제 옆집에 믹서기를 빌리러 갔는데, 그 집 여자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집안에 썩은 사과 한 개도 없으면서 믹서기는 왜 빌려달라고 하냐?’ 아, 이래요!
이제 썩은 사과가 한 상자나 있으니까, 얼른 빌려다가, 안 썩은 부분을 잘라 ‘잼을 만듭시다!’
이 광경을 보고, 내기를 한 사람들이 감탄을 했어요! ‘세상에 이런 부부도 있구나!’
이 금화 다 주어도 안 아깝다! 말 열 마리 값이나 되는 금화를 받았어요! ‘놀랠루야!’
<사울과 요나단의 믿음>
오늘 설교 제목이, “사울믿음! 요나단믿음!”
사울은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곰곰 생각하다가 ‘썩은 사과’ 안데르센의 동화가 생각났어요!
썩은 사과 할아버지는 단순하게 ‘유익하다!’ 싶으면 주저 없이 바꿨어요!
이렇게 바꾸면 내가 손해인지, 이익인지 따지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할머니의 칭찬’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하는 일에 모두 찬성! 맞장구 치고 칭찬! 그러니까 이렇게 할 수 있었어요!
만약 이 할아버지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신자였다면 어땠을까요?
할머니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일! 그 일이 뭘까? 생각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칭찬하는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사람이 칭찬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이 칭찬하는 일을 우선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거들떠도 안 봅니다! ‘하나님 뜻에 맞아야지!’
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칭찬해 주실 거야!
“하나님 뜻에 맞는 일을 하면서 삽시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사람을 봅니다.
사울과 요나단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부자간입니다. 사울이 아버지이고, 요나단은 아들이에요!
사울과 요나단은 요즘말로 하면 ‘대박 난’ 집안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 열두 지파 중에서도 가장 비리비리한 지파입니다.
그 지파 출신으로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 됐어요! 이건 대박 정도가 아니지요! 대박 중에서도 왕대박 슈퍼대박!
왕이 된 아버지 사울! 그 아들 요나단! 요나단은 왕자가 되었어요!
아버지 사울을 이어서 왕이 될 수 있는 2인자가 되었어요!
어제까지 별 볼일 없던 시골 농부가 왕이 되고 왕자가 되었어요! 신분이 급격히 상승되었어요!
그런데 이들 부자가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상당히 다른 행보를 보여줍니다!
아주 판이한 모습이 드러나요! 아버지와 아들인데도 그게 아니에요!
<사울의 행보>
사울이 왕이 되었는데, 첫 번째 ‘암몬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울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왕의 길이 순조롭게 출발해요!
그런데, 두 번째 전쟁이 터졌어요! 이 전쟁 이름은 ‘믹마스 전쟁’
믹마스 전쟁은 암몬 전쟁과 상황이 또 달라요!
암몬 전쟁 때는 이스라엘 장정들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군대를 이뤘어요!
그래서 전쟁에 이기고 흩어졌는데, 다시 전쟁이 터졌어요!
사울이 다시 흩어진 군사를 소집했는데, 이번에는 저번과 같이 사기가 다 떨어졌어요!
전쟁이라고 해서 판판이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아닙니다. 좋을 때도, 아닐 때도 있어요!
병사들이 슬슬 다 달아나버렸어요! 사울 왕 주변에는 600명 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런 위기에서 사울 왕이 취한 태도가 아까 말씀드린 ‘썩은 사과’ 할아버지 비슷해요!
그때그때 유리하다싶으면, 유리한 쪽으로 처신을 합니다.
사울 왕이 첫 번째 한 행동은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린 일입니다.
믹마스 전쟁에서 적군이 곧 쳐들어올 듯 하니까, 마음이 급해졌어요!
아무리 왕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자기가 집전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했어요!
엄청난 실수를 한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 마음을 거두어가십니다!
그 이후에 사울은 군사 600명으로 뭘 하겠습니까? 동굴 속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어요!
숨어서 적군의 동태를 살펴보니 심상치 않아요!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어요!
(16절)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17절)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아들 요나단이 없어요! 요나단이 자기 부관과 함께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이 없어졌으니, 가슴이 철렁했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18절)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이 대목에서 또 사울이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아히야’는 제사장입니다. 사울 왕이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나님의 궤’ 언약궤, 법궤입니다! 그때 마침 언약궤가 자기 곁에 있었어요!
‘언약궤를 이리 가져와라!’ 뭐하겠다는 겁니까? ~ 하나님의 뜻을 묻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다행스런 태도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세상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마치 제사장 ‘아히야’도 불렀어요! 이제 정식으로, 제대로 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횝니다!
사울 왕이 지난 번에는 실수했어요!
지난 번에는 사무엘이 제사장 역할을 하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사무엘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약속된 시간이 뽀작뽀작 다가오는데, 사무엘이 아직 안 나타나요!
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참을성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실수 했어요!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한 번 저지른 실수 두 번 하지 않겠지요? 19절을 보겠습니다!
(19절)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제사장을 부르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시켰어요!
전쟁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묻겠다! 왜요?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깥 정세를 이렇게 보니,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상대방, 적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요!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 같아요!
그냥 놔둬도 자중지란으로 망할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상황이 이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① 번, 그래도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린다!
② 번, 제사는 미루고, 전쟁부터 한다!
하나님께 예배가 먼저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사울은 이렇게 보니까, 자기 생각에, 자기 판단에,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예배 안 드려도 될 거 같아요! 블레셋! 저것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중입니다!
가서, ‘젓가락만 올려놓으면’ 될 거 같아요!
아까, 썩은 사과 할아버지 같이, 말을 몰고 가다가 소를 보니까, 소가 좋아보여요!
사실 말 값하고, 소 값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말이 두 배 이상 비싸요!
그런데 얼른 보기에 눈앞에 있는 소가 탐나요! 그래서 ‘이 말하고 바꿉시다!’
할머니는 찬성하고, 칭찬하겠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블레셋이 자기끼리 싸우든 어쩌든, 계획된 예배는 드려야지요!
그런데, 사울이 뭐라고 합니까?
19절 끝에,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야, 제사 안 드려도 되겠다! 저것들부터 가서 확 쓸어버리자!”
하나님께 예배! 드리려다가, 그만 거두어버리고, 600명 데리고 전쟁터로 갑니다!
사실 다 이겨놓은 전쟁이에요!
블레셋 군대에 자중지란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내전이 벌어졌어요!
(20절)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블레셋 군대 속에는 히브리 사람들이 섞여있어요! 왜요? 옛날 고대 전쟁은 용병을 씁니다.
전쟁을 할 때, 군사를 모집하는데, 국적을 안 가리고 군사로 기용해요!
전쟁에 나가면 모 아니면 도입니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에요!
확률은 50%입니다. 만일 이기기만 하면, 일거에 대박 납니다.
그래서 전쟁이 난다 하면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요!
블레셋이 용병을 모집할 때, 이스라엘 젊은이들도 끼어들었어요!
고대 시대는 나라 개념이 요즘 갖지 않아요! 국적이 불분명합니다.
블레셋 용병 중에 있던 히브리 사람들이 내전이 일어났을 때, 자기네 동족 편으로 돌아섰어요!
(21~22절)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21절, 22절이 그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끝났어요! 블레셋은 내란으로 퇴패했어요!
얼른 보면, 왕 사울이 상황 판단을 대단히 잘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사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이긴 원인이 있어요!
(23절)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사울이 예배도 취소시켜 버리고, 재빠르게 나와서 쓰러져 가는 블레셋을 물리친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그게 아니에요!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할렐루야!
이 전쟁 하나님이 주관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주관하시는 데, 들어 쓴 사람이 있어요! 사울이 아닙니다!
<요나단의 믿음>
(6절)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요나단의 믿음입니다.
요나단은 적의 동태를 살피고 판단하지 않아요!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니 세상 바라볼 것 없어요! 적군의 동태에 따라 겁 먹을 필요없어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갑니다! 할렐루야!
“세상이나 사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보고 앞으로 나갑시다!”
엄청난 블레셋 대군 앞에, 달랑 600명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쪼그라들었어요! 동굴 속으로 숨었어요! 그런데, 아들 요나단! 담대합니다.
자기의 무기를 들고 따라다니는 부관! 한 사람 데리고 적진으로 뛰어듭니다.
무대포로 뛰어들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나갑니다. 이런 것을 신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시냐, 그걸 알아보자! 이것이 신탁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부관에게 말합니다. 우리 둘이 블레셋 군대 진영 앞까지 나가자!
그때 블레셋 군인들이, ‘게 섰거라! 이놈들! 우리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겠다!’
이렇게 나오면, 그건 하나님이 블레셋을 우리 손에 붙여주시지 않은 결과다!
그러나 만약, “이리로 올라오라!” 그러면, 그때는 하나님이 저들을 우리 손에 붙여주신 증표다!
이것을 신탁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신탁을 구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일까?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런 때는 집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금식 기도, 작정 기도! 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알게 된 것을 신탁!
기드온을 보면, 대표적인 신탁이 나와요!
기드온은, 정말 내가 나가서 이 민족을 이끌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물었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긴가민가해요!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루 밤에는 마당 가운데, 양털 한 줌을 놓고 기도하잖아요?
내일 아침, 마당은 뽀송뽀송하고, 양털만 이슬을 머금고 있으면, 저를 쓰시는 줄 알겠습니다!
자고 나서 보니 참말로 마당은 이슬이 하나도 없고, 양털만 흠뻑 이슬을 머금고 있어요!
‘한 번으로는 부족해!’ 다시 한 번 하지요?
이번은 반대로, 마당에만 이슬이 내리고 양털은 뽀송뽀송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응답해 주셨어요! 신탁을 주셨어요!
그래서 기드온은 300용사를 데리고 미디안을 쳐부숩니다! 할렐루야!
요나단도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께 신탁을 구했어요!
그리고 블레셋 앞에 나섰는데, 뭐라고 합니까? “이리로 올라와 봐라!” 뜻밖의 대답이 나와요!
전쟁하는데, 적군이 앞에 나타났어요! 그러면 무조건 화살을 쏘아야지요! 그게 아니에요!
“이리로 올라와 보라!” 하나님이 신탁을 주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둘이 올라갔습니다! 적군 코앞까지 가보니, 멀리서 볼 때와 달라요! 속으로 썩었어요!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이 적군을 죽였어요! 이때부터 블레셋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멀리서, 아버지 사울이 적진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본 거예요!
<맺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사울은 못 봤습니다.
그러나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 바라보고 나갑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옵니까? 두 사람의 믿음의 차입니다.
사울은 왕의로 발탁되기 이전에 나름대로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어요!
겸손하고, 풍채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었어요!
왕의 직무를 감당할 만한 믿음이 뒷받침 되지 못했어요!
믿음도 큰 믿음이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큰 그릇으로 쓰일만한 믿음이 있어요! 작은 그릇으로 쓰이기에 알맞은 믿음이 있어요!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보였어요!
그런데 왕으로 쓰임 받을 때, 그의 부족한 믿음이 드러나요!
요나단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요나단은 이제, 가만히 있으면, 장차 아버지를 뒤이어 왕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요나단은 세상의 왕, 왕자!
이것이 풀의 꽃이다. 아침에 잠깐 영롱하게 빛나다 사라지지는 이슬방울이다! 알았어요!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실까? 하나님이 쓰신다면, 주저없이 달려나갑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겠습니까?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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