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학자 류성준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의 한시집 『동헌(東軒), 한시(漢詩)와 노닐다』(푸른사상 교양총서 17). 2022년 6월 22일 간행.
흘러가는 계절과 일상을 노래한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자작 한시들을 실었다. 각 시마다 주석과 해설을 달아 한시에 대한 이해를 도왔으며, 제재와 흥취에 어울리는 한국과 중국 문인들의 한시를 함께 수록하여 한문학의 멋과 진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 저자 소개
서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중문과에서 문학석사, 국립타이완사범대학 국문연구소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중국학연구소장, 미국 하버드대학교 방문학자,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학대학 학장, 중국 베이징대학 객좌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원장, 국제동방시화학회 회장, 중국 지린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와 역서로 『들판에 불을 놓아』 『낙타상자』 『중국 현대 대표시집』 『중국 현대 단편선』 『북경의 아침』 『초사』 『당시논고』 『중국 시가 연구』 『중국 당시 연구』 『청시화 연구』 『왕유시 비교연구』 『초당시와 성당시 연구』 『당대 후기시 연구』 『중국 시학의 이해』 『중한 시학 연구적 교융』 『중국 현당대 시가론』 『중국 시가론의 전개』 『신라와 발해 한시의 당시론적 고찰』 『회록당시화』 『한국 한시와 당시의 비교』 『청시화와 조선시화의 당시론』 『중국 시가와 기독교적 이해』 『중국 당송시화 해제』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봄꽃을 읊다(吟春花)
봄 추위에 나비 아직 안 보이는데
꽃이 붉게 피니 자못 놀라워
이제 알겠다 연못 가의 버들이
언덕 가에 온 봄을 응당 샘낼 줄을
春寒蝴未見 춘한호미견
紅色已驚人 홍색이경인
今覺池邊柳 금각지변류
應嫉岸上春 응질안상춘 (2021. 3)
蝴(호):나비
驚人(경인):사람을 놀라게 하다. 여기서 인(人)은 꽃을 보는 사람, 시인이다
覺(각):느끼다. 깨닫다. 생각하다
應嫉(응질):응당 질투하다. 시샘하다
전원에 은거하는 삶이어서 보이는 건 풀, 나무, 꽃들이다. 집 뒷동산에 3월이면 벌써 들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름도 모를 보라색, 흰색, 노란색의 풀꽃이 보인다. 장끼가 ‘꾸꺼’ 하며 울고 새들이 지저귄다. 집 근처에 신휴지(新休池)라는 비교적 큰 전답 용수로 쓰이는 저수지가 있어서,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일 지팡이 들고, 그 저수지 주위를 몇 바퀴씩 돌면서 산책한다. 주변에는 배밭이 둘러 있고 논도 있다. 평생 도시 생활만 해온 사람의 눈엔, 시골의 자연현상이 새삼 신비하고 감탄스럽다. 작은 풀꽃 한 송이라도 범상치 않게 보인다.
초봄의 정경을 노래한 송대(宋代) 진여의(陳與義), 1090~1139)의 「봄 추위(春寒)」(『진간재집(陳簡齋集)』)를 떠올려본다.
2월 파릉은 날마다 바람이 불어
봄 추위 가지 않아 초가의 이 몸 떤다
해당화는 연짓빛 붉은 꽃 아깝지 않은지
외로이 보슬보슬 가랑비에 서 있구나
二月巴陵日日風 이월파릉일일풍
春寒未了怯園公 춘한미료겁원공
海棠不惜臙脂花 해당불석연지화
獨立濛濛細雨中 독립몽몽세우중
진여의는 당대 두보의 시를 높이 받들어서 이른바 송대의 두보라고 칭찬받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을 살피는 시심을 지니고 있어서, 송대의 유극장(劉克莊)은 『후촌시화(後村詩話)』에서,
진여의가 나오면서 비로소 두보를 스승으로 삼았다. 간결하며 엄정한 것으로 번다하고 꾸민 것을 쓸어내고, 웅혼한 것으로 지나친 기교를 바꾸었으니, 그 품격을 매기면 당연히 여러 작가 중에 으뜸이다. (及簡齋出, 始以老杜爲師. 以簡嚴掃繁縟, 以雄渾代尖巧, 第其品格, 當在諸家之上.)
라고 평가하였다. 진여의는 고종(高宗) 건염(建炎) 3년(1129) 2월에 이 시를 지었는데, 그 당시에 남송(南宋)의 조정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놓여 있었다. 금병(金兵)이 청주(靑州), 서주(徐州)를 연파하고 초주(楚州)까지 진격하여 장강(長江) 이북을 장악하니, 고종은 양주(揚州)에서 진강(鎭江)으로, 그리고 다시 항주(杭州)로 피난을 갔다. 이때 시인은 악주(岳州,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에 피난 중으로 시에 나오는 파릉(巴陵)도 이곳에 있다. 봄꽃을 즐겁게 보고 느낄 마음의 여유와 화평을 누릴 수 있는 현실을 기대한다. (18~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