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pin Piano Concerto No.1 in E minor op.11
19세기 초 파리 오로르 뒤 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글 쓰는 일에 재능이 있었지만 이 당시 유럽은 여성이 작가가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본인의 이름을 버리고 남자 이름으로 몰래 작가로 활동합니다.
그 남자 이름이 훗날 쇼팽의 연인으로 더 유명해진 '조르주 상드'입니다.
1800년대 파리는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넘치는 시대 였습니다.
수많은 문학가, 철학가,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살롱에 모여 토론하고 그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조르주 상드는 그 중에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페미니스트 였으며 드레스 대신 항상 남자 옷을 입고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살롱,
술집 등을 거침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1836년 전 남편과 이혼으로 두 명의 아이까지 있던 32살의 조르주 상드는 드디어 자유를
찾아 고향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온 26살의 청년 쇼팽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였습니다.
당시 쇼팽은 마리아 보진스키라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쇼팽은 그녀에게 청혼까지 한 상태였지만, 조르주 상드에게는 아무 거침이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쇼팽의 예술혼을 찾아줄 수 있다면 내가 쇼팽을 포기하겠지만, 반대로 그녀가
쇼핑의 예술혼을 파괴한다면 내가 그를 빼앗아 올것이야!!"라고 늘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너무 강했고, 쇼팽은 강한 그녀가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늘 쇼팽에게 구애했습니다.
어느덧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나고...... 쇼팽은 자신에게 무심한 마리아 보진스키와 이별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신을 지켜줄꺼 같고 때로는 엄마같은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는 6살의 연상
조르주 상드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드디어 쇼팽의 예술혼이 불타는 시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저 남자는 너무 계집아이 같아"
조르주 상드가 쇼팽을 처음 봤을 때 한 말입니다.
강인하고 독립적인 기질의 그녀지만, 오히려 유익하고 모성 본능을 느끼게 하는 남자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쇼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린 감성을 지닌 쇼팽은 처음엔 조르주 상드가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지못한 성향들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었고, 서로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면서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1세기에나 있을 법한 두 아이가 있는 이혼녀, 6살 연상 연하 커플에게 당시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이곳 저곳 이사하였고, 결국에 쇼팽은
결핵에 걸리고 맙니다.
그녀는 타인들의 시선을 피하고 쇼팽의 요양을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태양이 잘 드는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둘에 대한
주변 시선은 곱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마요르카 섬의 북쪽 끝 카르투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병약한 쇼팽을 위해 그녀는 전폭적으로 헌신하였고, 그 덕분에 이 시절 쇼팽의 수많은
명곡 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조르주 상드는 쇼팽을 마치 아이를 품에 안듯이 꼭 껴안고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쇼팽은 점점 지쳐갔고 그들도 9년만에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파리로 돌아간 쇼팽은 그녀와
이별 후 점점 더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후인 1849년 10월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맞이 했다고 말했으나, 상드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쇼팽과의 사랑 그 자체가 그녀 삶의 큰 의미였습니다.
훗날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 글 한상욱 마제스틱필하모니오케스트라 감독 지휘자, ‘너클리’ 콘서트 프로그램에서
https://youtu.be/614oSsDS734?si=r0xIr3fIcPh5_Dg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