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입력 2014.09.29 15:45 조선일보 단언컨대 이것은 ‘전기(傳奇)’같은 경험담입니다. 여름밤에는 납량물(納凉物)이 될 수도, 찬바람부는 초가을의 문턱에선 삶과 운명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시작은 고 안현필(安賢弼) 선생의 일갈(一喝)에서 시작됩니다. 문법과 독해를 전부로 알던 50대에게 옥스포드 체류는 공포을 자아냈습니다. ‘어떻게 듣고 말할 것인가’, 어릴적부터 리스닝(Listening)에 능한 세대와 달리 ‘히어링(Hearing)’에 약한 세대의 공통된 고민이겠지요. 이때 생각난 것이 안 선생이 영어실력기초에 쓴 구절입니다. 이게 떠오른건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식 공부에 따른, 40년을 버티는 암기력입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한걸로 기억합니다. “같은 영화를 백번 보라!” 5월12일 옥스포드에 도착하자마자 고른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입니다. 어린 시절 여러 번 읽으려다 몇장 못 넘기고 포기한 적이 있기에 이번엔 드라마 CD를 택했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정평난 BBC드라마입니다. 처음엔 지루하더니 되풀이하니 발음이 들려옵니다. 못 알아듣는 단어를 사전 뒤적여 찾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옥스포드 레터 4편 제인 오스틴의 생가(生家)를 찾는 계기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오호?’하는 기분에 두번째 택한 것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였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당시 젊은이들의 사랑과 세태(世態)에 관한 것이라면 ‘폭풍의 언덕’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광기(狂氣) 어린 사랑, 그리고 그 무대가 되는 영국 중부지방의 황무지, 그 황량한 땅에 몰아치는 미친듯한 바람…. 흔히 영국 소설에 등장하는 무어 하우스(Moore House)란 바로 이런 외딴 곳에 있는 주택을 말합니다. 에밀리의 언니 샬롯 브론테가 지은 ‘제인 에어(Jane Ayre)’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놀랐습니다. 현대의 영화며 드라마가 다 고전을 변주(變奏)한게 아닌가, 위대한 소설은 세월을 초월한다는걸 다시 깨달은 거지요. 개인적으론 ‘폭풍의 언덕’보다 추리소설처럼 끝까지 흥미진진한 ‘제인 에어’에 더 점수를 줬습니다. 이것은 기자생활의 절반 이상을 사건 현장에서 지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자연스레 욕망이 생겼습니다. 기이한 인간의 삶을 그려낼 수 있는 그들이 살았던 곳을 보고 싶어진 겁니다. 제가 첫줄에 전기를 ‘傳奇’라고 표현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7월 리버풀에서 브리티시오픈 골프대회가 열린 거지요. 리버풀~하워드~윈더미어~에딘버러로 이어지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하워드(Haworth)는 꽤 큰 도시축에 드는 브래드포드(Bradford) 근처에 있습니다. 훤히 브래드포드가 내려다 보이는데 계속 오르막 길입니다. 인간에겐 신(神)이 있다면 예지(豫知)랄까, 경고랄까 뭔가를 암시하는게 있습니다. 사실 브래드포드부터 기분이 좋지않은 도시입니다. 꽤 큰 산업도시인데 거리 전체가 우중충한 분위기에 골목은 을씨년스럽습니다. 몇몇 영국인들이 삼성전자의 로고가 적힌 붉은 티셔츠를 입고있는 것으로 봐서, 삼성전자의 현지 시설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일부러는 찾고 싶지않은 낡은 공단(工團)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지요. 마침내 하워드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9시 무렵, 늦은 영국의 일몰(日沒)이 막바지에 달한 시각이었습니다. 관목들로 덮인 광대한 고원(高原)에 듣던대로 미친듯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전환됩니다. “빨리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를 보자”며 자동차를 몰아가는데 웬걸, 네비게이션이 계속 엉뚱한 곳을 가리킵니다. 할 수 없이 한밤중 주택가 창문에 비친 할머니 모습을 발견하고 “워더링 하이츠가 어디냐”고 물을 수 밖에 없었지요. 여기서 묻고 저기서 물어도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시골도로에서 개(犬) 두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아가씨를 발견했지요. 그에게 "익스큐즈 미"라고 하는데 개들이 와락 달려듭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바스커빌의 개'에 나올법한, 덩치 크고 사나운 개였습니다. 그가 어느 곳을 가리키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이곳은 밤에 위험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사실인가봅니다. 그때부터 길바닥에 써놓은 험악한 문구들이 보이고 한밤중 고원의 실루엣은 악마(惡魔)같은 형상으로 바뀐 것입니다. 밤 11시가 다 돼 도착한 숙소는 편안함을 주긴 커녕 가뜩이나 스멀대는 공포를 더욱 자극합니다. 한번 제대로 다룰 생각이지만 ‘호텔닷컴’이니 ‘부킹닷컴’이니 하는 숙소 예약 사이트들의 정보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숙고 끝에 골랐는데 안내인은 없고 바로 옆에 붙은 롯지 바텐더가 문을 따주는 것입니다. 롯지 이름이 하필 ‘독 앤 건(Dog and Gun)’, 몇분전 본 검은 개가 생각났습니다. 거기서 그친게 아닙니다. 그 숙소에 묵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이 들더니 방문도 밖에서 잠그면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배려라고 생각했는지 난방을 최고로 틀어놓았는데 조절밸브도 없고 창문은 열리지 않는 찜질방식이어서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목을 축이기 위해 ‘독 앤 건’에 갔더니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말을 걸어옵니다. "어디서 왔느냐" "한국에서 왔다" "오? 그래 내 휴대폰 볼래? 내 친구가 한국인이야"…. 보통 영국인들은 아시아인을 보면 중국 혹은 일본인으로 아는데 이런 사례는 흔치 않은 것입니다. 용기를 내 그에게 물었지요. "2시간 넘게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를 찾다 실패했다." 그가 말했습니다. 현지에서는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보다 '탑 위덴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껄껄 웃더니 자기가 그 근처에서 목장을 하는데 아주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에서 ‘워더링(Wuthering)’은 ‘바람이 쌩쌩 분다’는 사투리이며 ‘하이츠(Heights)’는 집을 말하지요. 그렇다면 정확히 ‘바람부는 언덕 위의 집’으로 번역해야 할텐데 왜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으로 했을까 하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다음날, 전날 헤매던 곳이 ‘탑 위덴스’ 근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찾지 못했을까, 제대로 된 팻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워더링 하이츠’라는 작은 호텔 빼고는 주변에 ‘워더링’이란 말조차 없었으니까요. 첫번째 도전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다음에는 처음 갔을 때 헤매던 탑 위덴스 표지판 앞에서 시작합니다. 직선으로 올라가는 코스지요. 탑 위덴스는 사유지입니다.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올라가면 바리게이트가 나옵니다. 차량통행이 안된다는 뜻이지요.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 한참 땀흘리면 천지에 깔린 보랏빛 히스꽃이 바람에 고개 숙인 황무지가 나타납니다. 한참을 걷다보면 나무 한그루가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집이 바로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다. 브론테 소사이어티가 1964년 지었는데 안을 들여다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정상을 향해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가 왼쪽으로 보인다.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거기서부터 다시 20여 분을 걸으면 마침내 1964년 브론테 소사이어티라는 단체에서 세웠다는 집이 나옵니다. 영화의 세트로 쓰였던 곳이어서 천정은 없고 건물도 조악하기 그지없습니다. 등산의 이정표 역할이라 할까요. 집 주변에도 커다른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벤치도 하나 있지요. 잠시 땀을 식힌 뒤 다시 정상을 향해 갑니다. 봉우리가 아닌, 해발 440여m 평평한 꼭대기입니다. 거기선 사방이 훤히 눈에 들어옵니다. 집 바로 아래로 계곡이 보입니다. ‘브론테 폭포’라고 불린다는데 우리 식의 본격적인 폭포가 아니고 작은 개울에 다리가 걸쳐진 풍경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올라오려면 경사가 급해 땀깨나 흘려야할 코스로 보입니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영국 전체를 통튼다해도 세상과 이렇게 동떨어져 있는 집은 찾기 어려우리라. 그런 뜻에서 본다면 히스클리프와 나는 외로움을 나누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고원에는 히스(Heath)꽃과 잡초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동양에서 온 사람들은 고전의 무대를 순례(巡禮)하는 기쁨에 들떠있지만 영국인에게 이곳은 산책코스 정도지요. 무(無)의 세계, ‘고~’하는 바람소리만이 존재하는 곳. 히스(Heath)꽃은 고원의 상징이다. 험한 기후를 견디고 늦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고원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계곡이 브론테 폭포 가는 길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헬리콥터 한대가 등장합니다. 아마 산불이 가끔 나는 모양인지 헬리콥터는 공중을 선회하며 주위를 샅샅이 살피다 사라집니다. 다시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바람소리가 주인행세를 하는 고요의 세계로 빠집니다. 정상 바로 밑에는 우거진 풀 사이로 짜개진 돌무더기 몇개가 보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합니다. 거기서 소설속 주인공들이 사랑을 속삭이지 않았는지, 허구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으스스한 풍경. 브론테 자매가 살던 곳, 정확히는 자매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가 요크셔주 하워스의 종신직 부사제(副司祭)로 있던 교회와 브론테 자매 기념관은 거기서 승용차로 10분거리에 있습니다만 그 지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들이 머물렀던 목사관과 그 옆의 무덤들, 그리고 주변의 공동묘지와 황무지는 샬롯과 에밀리 브론트의 작품 곳곳에 나타납니다. 요크셔 지방에는 말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 여성이 말을 타고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 목사관에서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로 막 나서자마자 서있는 연립주택의 명칭이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속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이름인 히스클리프(Heathcliff)다. 여기서 잠시 브론테 일가를 살펴봅니다. 아버지 패트릭이 손턴에서 이곳으로 온 것은 1820년, 그 1년 후부터 이 가족에겐 비극이 닥칩니다. 맨 먼저 어머니 마리아 브론테가 1821년 여섯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마리아, 엘리자베스, 샬롯, 에밀리, 브란웰(아들), 앤 브론테지요. 1824년 네자매들은 막내 앤만을 남겨두고 클러지 도터스 기숙학교에 들어가는데 여기 경험을 샬롯은 소설 ‘제인 에어’ 속 로우드 기숙학교로 살려냅니다. 하지만 학창생활은 짧게 끝납니다. 1년만에 마리아와 엘리자베스가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오지만 곧 숨지고 샬롯과 에밀리 역시 뒤따라 귀향하지요. 에밀리 일가는 아버지를 제외하고 운명의 장난처럼 모두 요절합니다. 1848년 9월 외아들 브란웰, 같은해 12월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이듬해인 1849년 5월엔 앤이 세상을 뜹니다. 그에 앞서 1842년에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이를 보살피던 이모 엘리자베스 브란웰이 사망합니다. 하워드 목사관은 지금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패트릭 브론테의 아내와 여섯아이들이 나이 40도 되기 전에 모두 숨졌다. 아내를 대신해 가족들을 보살피던 처제도 여기서 사망했다. 대낮인데도 교회 옆 무덤에는 그늘이 져 있다. 여기 어딘가 샬롯과 에밀리 브론테의 무덤이 있다. 마지막까지 남은 샬롯과 아버지는 하워스 사제관에 머물지만 샬롯 역시 1855년 서른 아홉 나이로 형제의 뒤를 따르지요. 얄궃게도 아버지는 1861년까지 생존하는데 왜 그들은 하워드를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살펴본바에 따르면 척박한 지형은 당시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괴질-아마 폐결핵이 아닐까 하는-의 온상이 됐을 겁니다. 잠시 브론테 일가가 묻힌 사제관 옆 공동묘지를 살피는 동안에도 음습한 공포가 내습했습니다. 불운(不運)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운명속에서 자매는 ‘제인 에어’(샬롯), ‘푹풍의 언덕’(에밀리), ‘애그니스 그레이’(앤)같은 명작을 남기는데 처음엔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이라는 가명(假名)을 쓰지요. 처음 ‘교수’라는 원고가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받은 후 ‘제인 에어’를 낸 샬롯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자 두달 후 에밀리와 앤의 작품도 출판되지만 세인 사이에서는 ‘세명이 다 한 작가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민주주의는 피(血)를 마시며 자란다’는 옛 80년대 운동권의 주장이 있지만 하워드에서, 자매들이 남긴 작품에서 다시 한번 섬뜩한 운명같은 것을 느낍니다. 단 한번의, 단 한명(‘폭풍의 언덕’ 속 캐디)에 대한 사랑을 위해 히스클리프(Heathcliff)는 광기와 복수로 인생을 살다갑니다. 브론테 박물관 뒷 정원에 샬롯-에밀리-앤 브론테 자매의 동상이 있다. 직원에게 누가 샬롯이고 에밀리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제인 에어’는 이모의 학대와 기숙학교에서의 차별을 딛고 사랑을 얻는 듯 하지만 결혼서약하는 자리에서 로체스터에게 숨겨진 ‘미친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해 광야의 무어 하우스 앞에서 죽을 고비를 맞지요. 이어지는 거액의 유산상속, 이복사촌 오빠의 결혼요청과 인도행(行)을 놓고 벌이는 고민, 다시 눈먼 로체스터로 향하는 결말은 황야가 그들의 삶을 빼앗아가는 대신 영원한 ‘축복’을 준 것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곳을 찾은 이문열은 “폭풍우 내리치는 하워드에서 끝모를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섰을 때처럼, 높은 바위산 한가운데서 갑자기 뚫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인간으로부터의 한없는 격리를 느꼈다….”고 썼습니다. 절대고독은 뭔가를 낳는 모양입니다. 하워드의 황량한 고원을 보며 2003년 1월 이라크 전쟁 종군취재를 마치고 요르단쪽에서 내려다본, 저절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유대광야(曠野)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유대광야의 절대고독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기독교라는 종교를 낳듯, 사막의 절대고독이 이슬람을 낳듯 자매들도 그것을 자양분삼아, 가족의 불행을 호곡(號哭)하며 영원히 변치않을 고전을 낳은 것 같습니다. 공식 명칭은 브론테 목사관 기념관이다. 앞에 브론테 일가의 가계도가 걸려 있다. 고원에는 외길뿐이다. 브론테 자매가 걸었던 이 길을 많은 사람이 걸었다. 그들의 머릿 속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