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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세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혼자는 외롭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국가 통계 포털을 살펴보면 대구의 1인 가구는 2015년 23만9천517가구에서 2020년 30만4천543가구, 2021년 32만6천566가구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의 비율은 대구 32.7%, 경북 36.0%에 이릅니다. 특히 대구 서구의 경우에는 무려 44%를 돌파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율 자체만 따지면, 유럽 국가 중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가 40%를 넘은지 오래입니다. 영국, 스웨덴,오스트리아의 1인 가구 비율은 원래 높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져서 외로움이 큰 문제가 된 영국은 지난 2018년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정부 부처로 신설하고 장관을 임명해 대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 또 대구·경북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노령화와 1인 가구 증가 같은 사회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어 대책을 세우기가 벅차다는 것이지요. 또한 1인 가구의 증가가 청년층의 자립과 주택 사정이 개선된 결과가 아니라 이혼 같은 아픈 사연 끝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도 우려할 만합니다.
대구는 2020년 기준 40세 이상 69세 미만 인구가 전체 1인 가구의 47.85%를 차지하는데, 그중에서도 상당수가 이혼 때문에 혼자 사는 경우였습니다. 70?80대에서는 성별간 평균 수명 차이 때문에 사별의 아픔을 겪고 혼자 사는 여성 들이 많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누구 돌보지 않는 가운데 홀로 죽음을 맞는 ‘고독사’가 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21년 대구에서 고독사로 숨진 사람은 124명이었고 2017년 85명, 2018년 117명, 2019년 105명, 2020년 125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대구의 5년간 연평균 고독사 증가율은 9.9%로 전국 평균 8.8% 보다 높습니다. 고독사(孤獨死)는 고독생(孤獨生)의 결과이니, 혼자서 외롭게 사는 이들이 늘어나는 만큼 고독사도 늘어 가겠지요.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
혼자 살다가 외롭게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해서 과거처럼 대가족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늘그막까지 시부모를 봉양하고 살던 며느리의 효행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젊은 세대에게 효자 효부를 바라기에는 그들 각자가 지는 삶의 무게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어른 모시는 것은 고사하고 제 앞가림만이라도 잘 하고 살기를 바라는 게 대다수의 정서일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개인이나 가족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관심과 대책을 세우는 것이 수순입니다. 공공의 힘,정책적 지원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가 등장하고, 사회교리가 개입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를 위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회적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을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 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금을 어떻게 걷어서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것이 정치의 구체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이 결정과 배분의 과정이 윤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윤리입니다. 더 나아가 사회윤리 입장 가운데 교회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사회교리입니다. 따라서 사회교리는 우리 사회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한 분이신 하느님 아래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실천하는데 목적을 둡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사회교리에 관련해서 활동했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공동의 일을 걱정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정치를 지향한다는 이들이 모였을 때도 갈등과 반목 끝에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혼자는 외롭지만 함께는 더 괴로워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가 공동체를 깨뜨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사회교리를 배우고 실천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묘미를 깨닫기는커녕 격한 정치 논쟁 끝에 연을 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미사 때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이들끼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교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흔드는 삐딱한 사람들, 늘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완고한 사람들이라는 편견까지 세간에 생겨날 지경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념과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현 교황님께서 사회교리를 그토록 강조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이 지지부진하고, 교회 안에서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그런데 영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난맥상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사회교리에 관심을 두고 실천하려는 이들이 성령께 귀를 기울이는 대신 개개인이 가지고 있던 이상과 이념에 맞춰서 자기만의 하느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하느님의 이미지가 절대적인 것인 양 강요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기 관점 밖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도 자기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씌우고, 자기가 믿고 싶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예컨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흠뻑 젖은 사람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한울타리에 정렬시켜 놓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사회 교리를 두고도 권위적인 태도로 주위를 강압합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법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자기가 내린 결론에 모두가 따르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다 뜻대로 안되면 자신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인인 것처럼 불의에 상처받은 고독한 예언자처럼 공동체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자기가 만든 하느님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내가 그려놓은 행복을 훨씬 뛰어넘는 길을 가도록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벗어났을 때를 보십시오. 그들은 자유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익숙했던 노예생활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5) 이런 관성과 타성을 벗어나서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광야를 함께 걷는 길이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친교의 해를 사는 가운데 각자의 이상과 이념에 끼워 맞춘 하느님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만의 하느님 이미지를 깨뜨리시는 하느님께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친교와 친목이 왜 다른지, 친교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면, 먼저 새로운 현실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봅시다.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면 친교를 알 수 없고, 친교를 모르면 사회교리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연재하는 사회교리 이야기가 교우 여러분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사형제 폐지와 사회교리 I
나의 양심, 남의 양심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사제가 이렇게 권고하면, 미사에 참석한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양심성찰에 걸맞은 다소곳한 모습입니다. 교회가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교우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생각과 다른 면이 있더라도 일단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침묵을 지키지요.
그런데 사회윤리가 주제가 되면 양상이 달라집니다. 사회윤리는 자기 양심을 넘어서 남의 양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함께 바뀌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히 남의 양심을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의 양심을 다루는 태도와 방식은 자기 양심을 다룰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내가 한 짓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고, 남이 한 실수나 잘못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짓이 됩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거나 처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곧잘 냉혹한 시선으로 ‘가차 없이 벌하고’,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곤 합니다. 죄인이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장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라는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교회와 사형제 폐지
교회는 죄인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는 여론에 관계없이 사형제 폐지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267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랫동안 합법적인 권위(국가)가 통상적인 재판 절차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비록 극단적이지만 일부 범죄의 중대성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자 공동선 수호를 위해 용납되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매우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존엄성이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국가가 시행하는 형벌 제재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확산되는 한편 시민들에게 합당한 보호를 보장하고 동시에 범죄자에게서 그 죄에 대한 속죄의 가능성을 앗아 가지 않는 더욱 효과적인 수감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에 비추어 ‘사형은 개인의 불가침과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고 가르치며 단호히 전 세계의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하여 노력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 제7장도 사형 제도를 국가가 범하는 ‘살인’으로 보고 폐지를 촉구합니다. 한국 교회도 이러한 가르침에 발맞추어 지난 3월 13일 현직 주교단 25명 전원과 전국 16개 교구 7만 5843명이 참여해 ‘사형 폐지/대체 형벌 입법화를 위한 입법 청원’을 국회에 공식 제출한 바 있습니다.
사형제 존속을 바라는 입장
이런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사형제를 과연 폐지해야 하는지 의구심을 갖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교회는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사람의 인권까지 챙겨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통해 전체 사회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면 이 제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신중하게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교회 내에서도 사형제에 찬성하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탁월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만 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범죄로 사회를 힘들게 한다든지, 누를 끼치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죽이는 것은 현명하고 유익한 것”(『신학대전』 제2권 2부, 64문, 답변 2)이라고 전제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형은 하느님의 법에 의거하여 규정된 것이며, 범죄자의 처형은 전체 사회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악의 근본적인 근절은 선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사회의 안전과 안녕, 그리고 발생 가능성이 있는 범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신학대전』에 실려 있는 이런 논리는 오늘날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형에 찬성하는 이들이 그저 복수심이라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폄훼할 일은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고의로 침해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공존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침해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가해자에게 자신의 생명도 침해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사형제의 존재 의의이며 목적입니다. 이 효과가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는 자에 대해서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도 소중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사형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형제 폐지에 대해 교회가 지금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느냐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이래 더 이상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어 2007년부터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논란을 불러일으킬 '사형제 폐지’를 들고 나오지 않아도 당장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 논란거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솔기 없는 옷
1983년 전 시카고대교구장 조셉 버나딘 추기경은 ‘일관성 있는 생명윤리’(Consistent ethic of life) 개념을 제시합니다. 낙태, 사형, 전쟁, 빈곤 등에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공통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폭력에 대항해서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어느 하나를 반대하는 동시에 다른 것을 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은 옷이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요한 19,23)이었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제비를 뽑아 누가 차지할지 결정했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처럼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은 서로 이어져 일관성 있게 선포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솔기 없는 옷’의 개념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사회교리를 현실에 적용할 때 교회 논리의 내적인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한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사회교리의 저변에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안을 일관된 입장에서 관찰하고 판단하게 하는 내적 논리가 깔려있습니다. 이 내적 논리를 이해하지 않고서 교회의 윤리적 판단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호에는 사회교리가 전제하고 있는 생명 수호의 논리를 소개하면서 왜 교회가 사형제 폐지에 앞장서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월간빛, 2023년 5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사형제 폐지와 사회교리 II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교회가 사형제 폐지, 낙태 반대와 같은 주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면 진퇴양난의 난처함을 토로하는 분들도 늘어납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대해 신자로서 반대할 수도, 그렇다고 찬성하자니 주위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사형제가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낙태를 왜 반대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교회가 ‘인권 존중’과 ‘생명 존중’이라고 하면 너무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반론이라고 듣습니다. 인권과 생명을 우습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이 너무 미묘해서 소중한 가치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니까요.
예를 들어 에크모(ECMO) 인공 심폐 보조장치가 하나밖에 없는 응급실에 에크모 적용을 필요로 하는 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은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이 힘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인권이나 생명 존중을 몰라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사형제나 인공임신중절 같은 문제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원칙을 아는 것과 그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철 지난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학문적인 설명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그리스도교 윤리와 근대 윤리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법 사상을 들어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는 하느님의 법, 근대 이후로는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 입각한 자연법이 모든 법의 근본으로 자리매김되었던 바 있습니다. 그 기초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요즘에는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하느님의 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의 입장일 뿐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입니다.
보편적인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요즘은 그 ‘보편적인 이성’ 자체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법이란, 각각 다른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일종의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초등학생과 대학생을 같은 링에 올려 권투시합을 시키는 것이 폭력이듯 상황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보편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게 잘못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적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전반을 전체주의의 소용돌이에서 헤맸던 경험, 그리고 제국주의의 횡포에 시달린 경험이 있어 나오는 지적이지요. 독일의 나치즘과 독재자 히틀러만 해도 독일 정신을 내세우며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었습니다. 현대 인류는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강요하는 가운데 실제로는 법을 통해 강자의 이익만을 챙긴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다원화된 사회와 상대주의
최근에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온갖 주장이 불관용과 폭력의 원천일 수 있으며, 오직 상대주의만이 다원적 가치들과 민주주의를 지켜 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서구 위주, 가부장적 남성 위주, 기득권 위주의 윤리와 법을 강요하지 말라는 입장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근본적인 가치와 법이 있다는 교회도 덩달아 미심쩍게 보입니다.
담론 윤리학과 그 한계
한편으로 세상에 보편적인 것은 없고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상대주의는 사회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보는 흐름이 있습니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널리 인정되는 가치들에 대해 말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현재 상황에서, 그럼에도 일반적 윤리적 결정에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서 모두가 따를 윤리 기준을 정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나 자연법 같은 전통적인 기준은 포기하더라도 대화를 통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해 따르게 하면 합리적으로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담론윤리학(discourse ethics)’이라고 합니다. 상호 존중과 소통, 그리고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현대에 담론 윤리학이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통해서 모두가 따를 윤리 기준을 정하자는 이 주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절충주의에 빠질 수 있고,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는 윤리와 도덕의 목적을 잊어버릴 위험이 따릅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 그러나…
상대주의적 윤리관이든 담론 윤리학이든 보다 윤리적인 삶과 사회를 바라는 선한 뜻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교회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유일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인권, 평화와 정의, 부의 공평한 분배나 환경에 대한 존중을 증진하려 노력하고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좋은 뜻을 가진 이들이 모여도,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각자의 노력이 모두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적 가치를 증진하려는 이런 공동 노력에 동참(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보편 윤리를 찾아서」, 3항 참조)하면서 복음의 빛 아래 인내와 존경으로 선의의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를 호소하는 교회의 목소리 저변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선과 가치의 확고한 토대를 알리고 인식을 증진함으로써 더 인간적인 세상의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뜻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호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솔기없는 옷
솔기없는 옷
1983년 시카고대교구장 조셉 버나딘 추기경의 ‘일관성 있는 생명윤리(Consistent ethic of life)’ 개념에 대해 지난 5월호에 간략히 소개했었습니다. 낙태, 사형, 전쟁, 빈곤 등에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공통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폭력에 대항해서 생명을 지키고자 할 때 반대를 하면서 동시에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속옷”(요한 19,23)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그처럼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 실천도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학계에서는 버나딘 추기경의 논지를 ‘솔기 없는 옷(Seamless Cloth)’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 배경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회교리를 알고 실천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 사형을 반대하는 사람
솔기없는 옷 개념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 그리고 좌우의 갈등 속에서 모든 이들이 함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왔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이들과 낙태 반대를 외치는 이들은 확연히 구별됩니다. 단순히 구별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극인 경우도 많지요. 그래서 양쪽 나름대로 일리 있고 좋은 목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먼저 낙태 반대를 외치는 이들은 전통적인 윤리 가치와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국가의 역할을 신뢰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 윤리에 민감하고 동성애라든가 혼전 성관계 같은 주제에 엄격합니다. 또 강대한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국가의 부를 늘리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며, 때에 따라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한마디로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입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인간은 감시와 견제와 처벌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 교육은 엄격해야 하고, 법은 엄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가정의 틀을 허무는 동성 결혼 같은 문제에도 엄격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들에게는 권리보다 의무가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반대로 사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라든가 다른 권력의 간섭을 가능한 배제하려고 합니다. 사형제도는 그런 면에서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인 생존권을 박탈하는 일이고, 교화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에게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의무보다 권리가 더 중요합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인 사람들에게 의무가 강요된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권력과 기득권의 횡포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성, 성적 소수자 같은 이들은 대표적으로 의무를 강요당하고 억압받는 이들로 조명됩니다. 이들은 낙태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짓눌린 이들을 돕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데 도움 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진영 간의 갈등 속에서 교회의 자리 찾기
미국의 경우에는 보수주의자요 공화당 지지자들이 낙태를 반대하는 편에 서 있고, 민주당 지지자와 진보주의자들이 사형제도 반대쪽에 서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 신자라고 해도 각자 진영의 관점에서 상대 진영의 주장을 깨뜨리기 위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먼저 보수주의자들은 낙태되는 태아의 생명은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나 국제 사회에서 힘의 논리에 희생당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명과 권리에는 무관심합니다. 내 가정, 내 국가는 중요하지만 자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내치는 것이지요.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억압받는 이들을 옹호하면서 아무 책임 없이 희생되는 태아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무 저항할 힘이 없는 태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자가당착의 모순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영 간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를 모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서로가 상대를 주저앉힐 때까지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소모적인 논쟁이 그 결과로 나타납니다. 교회가 낙태를 반대하면 보수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형을 반대하면 진보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상황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일관된 윤리와 태도
이런 가운데 버나딘 추기경의 ‘솔기없는 옷’은 진영 논리를 뛰어넘어 현대의 윤리 문제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살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 속하든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상기시키고, 그 공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두 지혜를 모으자고 초대하는 것이지요.
버나딘 추기경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첫 회칙 『구원의 교황』을 비롯한 교도권의 여러 문헌을 언급하면서 지적한 현대의 근본문제는 생명을 위협하는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생명의 탄생부터 쇠퇴에 이르기까지,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기술은 돌봄의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동시에 생명의 신성함을 위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포담대학교 개넌 강연 중에서, 1983년 12월 6일) 인간의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하고, 그 대답으로서 일관된 생명 윤리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중심에 놓으면 정치적으로 어떤 진영에 속하느냐에 관계없이 함께 논의하고 해법을 찾을 공론의 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버나딘 추기경의 ‘솔기없는 옷’은 자궁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전 과정에서 일관된 삶의 윤리를 확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생명 수호에 대한 사회의 태도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처럼 모든 태어날 권리가 민법에 의해 보호되고 시민적 합의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책임은 태어나는 순간에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중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명권을 수호하는 사람들은 노인과 젊은이, 굶주린 사람과 노숙자, 불법 이민자와 고용된 사람 등 힘없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지원하는 데에도 똑같이 가시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질에 대한 자세는 세금 정책, 고용 창출, 복지 정책, 영양 및 급식 프로그램, 건강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적, 경제적 입장으로 이어집니다.”
솔기없는 옷과 친교
어느덧 우리 교회 내에서 사회교리나 사회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덧없는 일처럼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많이들 경험해 보셨지요? 여러 공동체에서 ‘사회’라는 말은 친교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거론하자마자 양쪽 진영논리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에서 ‘솔기없는 옷’이 담고 있는 일관된 윤리의 태도를 주목하는 것이 참된 친교로 나아가는데 있어 의미있는 일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 수호의 태도와 실천을 어떻게 증진시킬 수 있는가 - 여기에 지혜와 뜻을 모으는 것이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친교의 공동체에 마땅한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화해와 용서의 언어, 혐오와 배제의 언어
1. 피해자 폴란드, 가해자 독일에 먼저 손을 내밀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가장 큰 희생자였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구소련의 희생자 2,900만 명보다 적지만 희생자 비율을 보면 폴란드 희생자 600여만 명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해 구소련의 희생자 비율을 넘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받은 피해도 컸습니다. 다섯 명의 주교와 이천 명에 이르는 사제들이 강제수용소 등에서 살해됐습니다. 전체 성직자의 약 25%가 희생된 것입니다.
게다가 독일은 종전 20년이 지났지만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구 서독은 오늘날의 이미지와 달리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보다는 스스로를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이자 마지막 희생자’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이들의 기억 속에 나치의 잔혹 행위나 홀로코스트는 히틀러를 위시한 소수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역사적 정의는 이미 완결된 것이었습니다. 구 동독은 구 동독대로 나치에 저항해서 싸운 반파시스트 투쟁의 적통을 이어받았기에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이렇듯 이웃나라 독일과 폴란드는 각각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와 사과 받지 못한 피해자로서 팽팽한 대치 국면을 이어갔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새롭게 그어진 국경 문제도 갈등의 소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1965년 11월 18일, 폴란드 주교단이 독일 주교단에 아주 특별한 사목서한을 보냅니다.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그대의 용서를 청합니다.” (Wir vergeben und bitten um Vergebung)이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이 서한에서, 나치 독일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폴란드 가톨릭교회는 독일의 형제자매들을 용서한다고 먼저 손을 내밀며 전쟁 중에 희생당한 독일인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뜻을 밝혔습니다. 가해자의 철저한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피해자가 용서를 베푼다는 세간의 상식을 뒤엎는 서한이었지요. 당연히 이 서한은 큰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서한을 주도한 비쉰스키 추기경을 민족 배반자로 몰아붙이며 국외로 추방하라는 구호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과반수의 사제들도 이 사목서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폴란드가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민 이 서한은 역사 화해에 미온적이었던 전후 독일의 사과를 이끌어 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서로에게 들리지 않는 주장만 되풀이하던 상황에서 대화의 물꼬를 튼 이 서한 이후로 양국의 국교 정상화, 독일 통일, 폴란드의 유럽 연합 가입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서한은 뒤늦게 격찬을 받게 되지요. 국가 간에 풀기 어려웠던 증오와 대결의 문제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게 한 이 사례는 2005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상호 용서, 2013년 폴란드 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상호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는 공동의 화해 선언을 발표하는 데까지 그 외연을 넓혔습니다.
2. 가톨릭교회가 학살의 현장이 되다
신앙의 힘으로 화해와 용서를 이끌어 낸 폴란드와 독일과는 반대로 혐오와 대결의 상황을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다가 비극을 맞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이야기입니다.
르완다 학살은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겨우 100일 남짓한 기간 동안 극단주의 후투족이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등 8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애초에 후투족과 투치족은 다를 것 없는 이웃이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지배를 쉽게 하려는 이유로 서구 열강들이 이들을 후투족과 투치족으로 분류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투치족에게 특권을 몰아준 결과 두 부족 간에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축적된 증오와 분노를 임계점까지 끌어올린 것은 만연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발언)였고, 교회 안에서 조차 공공연히 혐오 발언들이 나돌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결국 1994년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 암살을 기화로 촉발 된 학살극은 르완다와 이웃나라 부룬디를 휩쓸었습니다. ‘인종 청소’라 불리는 학살은 르완다 외에도 많이 일어났지만 르완다 학살의 잔인함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존경받던 선생님과 목사님이었던 이들이 학생과 신도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칼로 베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대량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난 곳은 종교 시설들이었습니다. 이웃들에게 쫓겨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피신한 성당과 교회에서 목숨을 잃기 부지기수였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후투족 아타나세 세롬바 신부의 경우는 참으로 어이없는 사례입니다. 목숨을 구하고자 본당에 도망쳐 온 투치족 2천여 명의 신자가 그에게 기도를 청했을 때 “투치족의 하느님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말인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성당 문을 잠근 후 불도저로 밀어 떼죽음을 당하게 합니다.
그 외에도 1994년 8월 15일 대략 오천 명이 살해당한 느타라마 성당은 오늘날 학살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방관하고 참여까지 한 르완다 교회의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셨습니다.
3. 화해와 용서의 씨앗인 교회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를 먼 나라의 이야기까지 꺼낸 까닭은 신앙인의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화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지난 몇 년간 유난히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거친 말과 맥락 없는 공격적인 태도들을 자주 접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화해와 용서라는 그리스도교 본래의 어휘들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극단적인 언사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논리로 이겼다’며 의기양양해 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특히 사회교리의 영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혐오와 배척의 언어를 달고 사는 이의 마음이 자기가 뱉는 말 만큼이나 흉하게 일그러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화해와 용서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와 배척의 언어를 말할 때 영성생활 자체가 무너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나와 다르다고 낙인찍고,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그를 공격하고 배제하는 것이 마치 정의의 실현이고 선을 추구하는 것인 양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 간에도 그렇습니다. 해방되고 일흔여덟 해가 지났고, 정전 70주년이 되었지만 아직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는 요원한 분위기입니다. 여전히 증오와 혐오의 발산을 정의의 실천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진지한 토론과 협력은 사라지고, 반일 증오심을 부추기며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과 대중 혐오감을 부추기는 이들이 벌이는 소모적인 논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 따라오는 결과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질 것인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언사를 갖추는 것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1)
인간은 처음부터 외로운 것이 아니다
경희대 김만권 교수의 논문 「한나 아렌트와 외로움, 그리고 ‘대화형’ 인공지능」(2022)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외로움의 문제를 성찰합니다. 논문에 따르면 ‘외롭다’(Lonely)라는 말은 적어도 영어문화권에서 16세기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없던 표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 당시만 해도 유럽 사람들은 홀로 있음을 표현하는 ‘홀로됨’(oneliness)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하느님을 더 가깝게 여기고 마주하는 기회로 여겼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묘사하는 ‘외로움’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주변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를 뜻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외로움은 17세기까지도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 타인, 세상의 상실
그런데 18세기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유럽에서 외로움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계기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산업 혁명에서 비롯된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화라고 주장합니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인구가 약 2.5배 이상 불어나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늘어난 인구만큼 일자리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잃고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했으며 대규모 실업 위기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바닥을 칩니다. ‘당신이 아니어도 이 돈을 받고 일할 사람 많으니 잔말 말고 일하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식의 윽박지름은 오늘날에도 낯선 것이 아니지요.
하여간 한나 아렌트는 이 ‘뿌리뽑힘’(uprootedness)과 ‘쓸모없음’(superfluousness)의 경험이 유럽에서 있었던 온전히 새로운 현상이라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고 보장해 주는 장소가 없는 상태, 그리하여 세상에 속할 곳이 없어진 상태는 먼저 자신의 삶 자체를 회의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리 없고, 그렇게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 사람에게 세상은 의미 있는 곳일 수가 없지요.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 삶은 왜 이리 외롭고 고통스러울까’ 하며 고민하던 사람들은 자기혐오의 화살을 견디다 못해 더 나쁜 선택을 합니다. 자기혐오에서 타인에 대한 혐오로 옮겨 가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혐오 현상, 그러니까 빌미만 잡았다 싶으면 마구 분노와 증오를 쏟아 붓는 현상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인 외로움에 대처하는 해외 사례
이렇게 외로움이 그저 한 사람의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사회 변동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해결책 또한 혼자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함께 고민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눈에 띄는 것이 지난 2018년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를 임명해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영국의 사례입니다.
외로움부를 신설한 계기가 되었던 2017년 ‘조 콕스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약 14%에 달하는 9백 만 명이 외로움을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며, 17~25세 청년층 43%, 장애인 50%, 아이를 기르는 부모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립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38%는 불면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고, 3분의 1가량은 참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합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힘들어집니다. 외로움을 겪을수록 사망 위험과 심혈관 질환, 우울감, 인지 능력 저하, 치매 등을 겪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이 몸에 해롭다고 합니다. 외로움 때문에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만 해도 한 해 약 50조 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렇게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먼저 세 단계의 계획을 실행합니다. 첫째,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객관적인 실태 조사와 척도 구축. 둘째, 펀드 조성. 셋째, 범정부적 민관 합동의 대응 전략 수립의 과정을 거쳐 종합대책을 수립했습니다. 이 대책의 골자는 개개인 사이의 사회관계망을 강화하고, 특히 생애주기에 따라 고립되어 외로워하는 취약계층을 포용하고 지지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습니다. 공공과 민간을 가릴 것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수단들을 동원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영국의 이런 움직임과 흡사하게 유럽 연합과 미국에서도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며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로움
우리나라도 외로움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18년 4월 한국리서치가 외로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한 결과, 한국 사회의 외로움 문제도 심각하다는 결과를 얻습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20~30대가 가장 외로운 세대이고, 1인 가구일수록 외로움을 느끼며, 일정 소득 이하(가구 소득 200만 원 미만)일 경우 더 외롭다는 것입니다. 2017년 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 )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OECD 41개국 가운데 눈에 띄는 꼴찌를 차지한 것도 유심히 볼 만합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1인 가구 고독사 방지 사업, 홀몸어르신 살피미 서비스, AI 생활관리 서비스, 반려 동물 추천 및 돌봄 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사업을 벌입니다. 또한 우리 교구도 사회복지회를 통해 한몫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사업들이 과연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는지는 따져 볼 일입니다. 여러 사업과 활동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바로잡는 일이 함께 따르지 않으면 사업은 사업으로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많은 대책은 어르신들을 돌보기에도 급급해 다양한 계층과 성별, 세대를 아우르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청년들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기댈 곳 없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많은 20~30대 청년들이 겪을 외로움의 깊이는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요? 대구 서구만 해도 1인 가구의 비중이 46%를 차지하고, 그중에서 중장년이 46%입니다. 나름의 사정으로 가족과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많은 이들은 어디서 그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뿌리뽑힘’과 ‘쓸모없음’의 어려움을 덜어 낼 수 있을까요?
교회의 자리
그런 면에서 작년 11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바티칸 커뮤니케이션 부서 총회 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교황님은 이날 연설에서 교회의 임무가 ‘마지막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는 세상의 ‘실존적 주변부’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실존적 주변부란 인간이 ‘경제적 이유로 사회 변두리에 놓여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빵은 풍부하지만 의미가 없는 곳, 가족의 실패, 또는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개인적인 사건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소회된 상황에서 살아가는 곳’을 말합니다. 세상이 삭막하고 각박하여 외롭기 그지 없을 때 삼위일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친교의 삶으로 초대된 교회가 그 외로움을 달랠 곳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올 9월은 한가위 명절이 있는 달입니다. 어쩌면 외로운 이들을 더 외롭게 하는 날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명절을 홀로 맞아야 하는 이들을 생각하고 마음과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외로움의 문제를 두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다음 달에는 외로운 시대에 친교를 증언해야 할 우리가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실존적 주변부’를 포용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월간빛, 2023년 9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2)
우울과 외로움
2020년 기준 OECD 회원국 가운데 우울증 유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였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울증 환자는 해마다 평균 6.8%씩 증가하고 있지요.
우울증은 일상에서 흔히 외로움의 감정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최근 한 연구는 50대 이상 성인 4,211명을 대상으로 12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우울증 환자의 18%가 외로움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보고합니다. 역으로 외로움이 우울증을 키웁니다. 외로움 때문에 우울한 것인지, 우울증 때문에 외로운 것인지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논쟁과 비슷하겠지요. 문제는 어떻게 외롭고 우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의학과에서 받는 정신 치료와 약물 치료입니다. 선입견과 달리 요즘 항우울제들은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부작용들을 상당 부분 낮추었고 효과도 좋습니다. 이제 정신의학과 방문을 마냥 꺼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접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외롭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환경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증상이 호전되도 언젠가는 다시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의학적 접근 방법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예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덜 수 있는 공동체가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느슨한 인간관계
사람이 혼자 산다고 모두 외로움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나타난 수많은 은수자들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신비에 몰입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보여줍니다. 역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상처, 배신감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니까요.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마음의 문을 닫은 나머지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연세 있는 분들이 어릴 적부터 형제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또 집안 대소사를 통해 여러 가지 의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나이가 적을수록 그런 경험이 줄어듭니다. 이제 사람들은 많은 의무와 끊임없는 비교,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관과 입장이 존중되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필요할 때만 모임에 참여하는 ‘느슨한 인간관계’가 대세가 된지 오래입니다. 성당이나 기관에서도 한 번씩 모이는 일회적 행사나 봉사에는 참여자가 모이지만 정기적이며 장기간 해야 하는 일에는 손을 빌리기가 어려운 것이 그런 현실을 방증합니다.
접촉 포비아
최근에는 느슨한 인간관계에서 더 나아가 ‘접촉 포비아’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포비아(phobia)’는 공포증을 말합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2020년 연구 「비대면 사회의 변질: 접촉 포비아 사회, 기회와 위협」은 사람들이 비대면 접촉을 통해 편리함을 추구하던 단계에서 아예 접촉을 회피하는 접촉 포비아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원래 이 보고서가 말하는 접촉 포비아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한 대인 접촉을 기피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감염병 사태가 3년을 넘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사회 변동의 한 흐름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를 지원해 주던 여러 가지 기술이 이제는 인간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라서 외롭지만 사람들과 얽히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피하고 싶은 요구에 맞추어 이른바 SNS라고 불리는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고, 사람이 대면으로 하던 많은 일을 무인화 기기가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보고서는 이런 변화가 통상/수출 및 일자리 등 경제 위축, 시장의 집중 및 산업생태계 교란, 식량 및 의료 안보, 격차/소외 및 배달노동자 등 사회문제, 알고리즘의 일자리 대체와 플랫폼 노동자 양성 등의 위협을 동반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달이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까요? 적어도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 간을 원격으로 연결하는 여러 가지 서비스가 실제 인간관계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는 점은 외로움 지수만 봐도 드러납니다. 김용섭의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20』에 실린 한 조사에 따르면, 외로움의 지수가 Z세대(18-22세) 48.3%, 밀레니얼세대(23-47세) 45.3%, X세대(38-51세) 45.1%, 노인층(72세 이상) 38.6%으로 SNS를 잘 이용하는 Z세대가 전 연령층에서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주시하면서 누군가와 소통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대화 대신 서로 독백만 주고받는 뒤틀린 관계의 실상입니다.
인간관계의 단물과 쓴물
사정이 이럴진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친교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 동안 교회 공동체를 떠났던 많은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은 덜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공동체’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상상 속의 공동체를 막연히 동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상상 속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실제 공동체에 참여할 때 느끼는 실망감과 좌절도 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 공동체에는 인간 관계가 동반된 갈등과 상처가 존재합니다. 애당초 인간관계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회피하면서 오직 단물만 빨아 먹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 어려움 안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함께 의미를 읽어가는 공동체
교회 공동체는 처음부터 인생의 여러 불안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여드는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고달픈 일을 겪더라도 교회에만 오면 그 고달픔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공호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오랜 기간 박해라는 외적 위협과 함께 교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분열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서간들, 예컨대 코린토 1서가 교회 내의 갈등 속에서 일치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친교의 공동체는 ‘외로움도 덜고, 스트레스도 없는 꿈의 공동체’를 찾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공동체라고 해도 갈등과 상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친교의 공동체는 그 갈등과 상처의 의미를 제대로 읽고 함께 대처하며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함께 의미를 읽어가는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 가야 할지는 다음 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월간빛, 2023년 10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3) 누구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는 공동체
히키코모리에서 8050 문제까지
은둔형 외톨이는 일본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의 ‘이지메’와 등교 거부 현상이 문제가 되고, 1990년대 중반 이른바 ‘취업 빙하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히키코모리’, 즉 장기간에 걸쳐 집안에만 틀어박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젊은이 문제가 관심을 끕니다.
히키코모리 현상이 본격화된지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일본 사회는 40세에서 64세까지 중고령 히키코모리가 등장하면서 이른바 ‘8050’ 현상이 목도되고 있습니다. 8050 현상은 80대 부모가 50대 비혼 자녀와 동거하며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생활 형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사정입니다. 연로한 부모가 언제까지 장성한 자녀를 돌볼 수는 없으니까요. 일본 후생성은 8050 문제가 악화되어 조만간 9060 문제까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고독사가 늘어나고, 부모의 연금과 생활보조비를 계속 받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유기하는 등의 극단적인 사례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비교, 경쟁, 기대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일본만의 현상으로 그칠까요? 일본의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우리나라에도 시차를 두고 나타난 선례가 많습니다. 은둔형 외톨이 현상도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일본이 먼저 겪었던 저성장과 고령화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대두되는 가운데,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사회적 관계를 단절한 은둔형 외톨이, 자기 뜻과 관계없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독거노인, 그리고 사회관계가 없는 1인 가구 같은 ‘사회적 고립인’ 경우까지 더하면, 외롭게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갈수록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초부터 은둔형 외톨이에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대처 방법을 제안하는 논문들도 많습니다. 그 많은 논문을 읽다 보면 공통적인 단어가 몇 개 있는데 ‘비교’, ‘경쟁’, ‘기대’ 같은 말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은둔형 외톨이나 일본의 히키코모리 중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고, 또 형제 가운데 맏이인 경우가 많은 인구학적 특성을 보입니다. 아무래도 남성의 경우 여성에 비해 사회적인 지위나 성취욕 면에서 심한 경쟁에 몰리고, 비교를 당하며 높은 기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만큼 세상으로 나아가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크게 느끼는 것이지요.
비교와 경쟁, 과도한 기대 같은 심리적 압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도 많습니다. 고신대 연구팀의 2019년 연구를 보면,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의 등교 거부 이유가 학교에 가기 싫고, 밖에 나가기 싫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학교에 가고 싶고, 나가고 싶고, 혼자 있기 싫지만 사회 속에서의 고통이 집안에서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에 은둔을 택했다고 합니다. 부모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좋은 조건 속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두려워 집 밖을 못 나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비교와 경쟁의 부작용이 큰 것이지요.
2021년 광주광역시 조사 결과 청년들의 은둔 생활의 주된 계기가 취업 실패로 나타났고, 대부분은 대인 관계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주위의 높은 기대를 채울 자신이 없고, 끊임없는 경쟁에 지치며 늘 비교 당하느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젊은이들이 차라리 안전한 ‘내 방’ 속에 칩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자리를 잃어버린 이들, 남들의 비교 속에서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입증해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있어 이웃은 경쟁 상대요 비판자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심리적 위기 속으로 아이들을 몰아왔고, 이제 그 댓가를 치르기 시작합니다. 비교와 경쟁에서 뒤떨어질까 두려워 급기야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하는 이들이 앞으로 늘면 늘지, 줄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옛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교의 외적인 표현, 환대
교회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로마 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요 계급 사회였습니다. 소수의 사회적 엘리트와 서민들, 그리고 노예들 사이의 간격은 지금 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교회 또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박해 때문에 성당을 가지 못하고 교우들의 가정을 전전하며 미사를 드렸던 가정 교회 시대에는 갈등의 소지가 컸습니다. 미사 장소와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집주인 신자와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신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갈등과 알력이 있었겠지요. 사람 사는데가 다 그렇듯 말이죠.
하지만 교회는 세상이 알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가 서로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친교(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믿고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친교를 친목이나 사교적인 마음가짐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외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를 ‘환대’라고 부릅니다. 로마 시대, 특히 박해 시기 동안 그리스도교 환대의 전통은 다섯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선교사들과 이방인들을 대접하고 둘째, 죽은 이의 매장을 도우며 셋째, 박해 중에 신앙을 고백한 이들을 돌보는 한편 넷째, 죄수들과 포로들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하고 다섯째, 병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정성이 모여야 하고, 다음으로 환대를 베풀면서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사들과 이방인, 죽은 이, 박해 받는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병자들은 하나 같이 환대의 댓가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지나가면 그만일 뜨내기손님들과 죽어도 자기 몸을 뉘일 무덤 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수인과 포로의 신분을 전전하거나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무슨 보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미사와 더불어 사랑의 잔치, 곧 아가페를 실천했습니다. 아가페 잔치를 위해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가진 바를 기꺼이 내놓았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은 미사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교회가 다른 자선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는 물질적 나눔 이외에도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가페 식사에 초대받은 가난한 이들이 축복의 기도를 바치게 함으로써 누구든 각자 형편대로 이웃과 공동체, 나아가 하느님께 봉사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거룩한 교환’의 전통 덕에, 교회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한푼의 정성도 낼 수 없는 가난한 형제자매들도 거리낌 없이 미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신다며 그들의 기도에 의지하는 교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대하는 공동체
오늘날 교회가 하던 많은 일이 사회 복지의 영역으로 넘어 갔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풀고, 약한 이들을 돕는 일은 이제 국가와 다른 기관들도 함께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든 부유하든 차별하지 않고 각자 형편대로 공동체에 기여하던, 그리하여 누구라도 공동체 안에서 자기 역할과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또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이해받으며 환대를 베푸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누구나 어떤 처지에서든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공동체, 그것이 친교의 공동체 교회여야 합니다.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친교의 재발견
교구 장기사목계획에 따라 ‘친교의 해’를 맞이하면서 쓰기 시작한 글을 마무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외롭고 삭막한 사회에서 친교를 살아가는 공동체인 교회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또 교회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이제 연재를 마치면서 남은 ‘친교의 해’를 더 잘 보내기 위해 한가지 말씀을 보태려고 합니다.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
몇 년 전 사이먼 시넥이라는 젊은 미국 작가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 못한다.”라는 인터넷 강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생각이 나니까 ‘하지 말라’ 보다는 ‘•••하라’는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라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비만 때문에 문제가 많으니 야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군살을 빼서 건강해진 모습을 떠올리며 노력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지요.
이 강의는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히긴스는 인간의 동기가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접근 동기는 뭔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그러니까 얻고자 하는 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는 반면 회피 동기는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동기가 다르면 결과에 대한 반응도 달라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 사람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기쁨을 얻지만 안 좋은 일을 피하려고 한 사람은 안도감을 얻는 데 그칩니다. 실패했을 경우 접근 동기 때문에 노력한 사람은 슬픔을 느끼지만 회피 동기 때문에 노력한 사람은 불안감에 시달리지요. 기쁨과 슬픔의 차원에서 사는 사람과 안도감과 불안의 차원에 사는 사람 중 누가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지금껏 우리 사회가 치달아 온 모습을 보면 그 답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런 신세 된다.”, “열심히 벌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추하게 지낸다.” 여태 우리 사회는 이런 회피 동기 중심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최악의 출산율과 세계 최저 수준의 행복 지수, 매사에 돈 타령을 하는 저속함으로 돌아왔지요. 회피 동기가 아니라 접근 동기, 부정적 관점이 아니라 긍정적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입니다.
교회는 다르겠지
교회의 친교도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인간관계의 마찰과 갈등을 겪다가 도피하듯 찾게 되는 것이 교회요 친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사람들한테 치이고 상처를 입으면서 ‘교회는 다르겠지’, ‘성당 사람들은 안 그러겠지’라는 기대를 하고 교회 단체에 이름을 올리는 분들이 많지요. 하지만 성당이라고 해서 무골호인들만 모인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내 편 들어주고 내 편리 봐주는 사람들만 모인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갈등과 마찰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니던 열두 사도도 누가 더 높은지 다투었다지요.(루카 9,46-48 참조) 이런 모습에 상처를 입고 쓸쓸히 공동체를 떠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세상 마지막 날까지 지상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인간에게 갈등과 상처가 없는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과 상처는 완덕에로 나아가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갈등과 상처라는 기회
2017년 6월, 미국 대법원장 존 로버츠는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에 초청을 받아 연설합니다. “저는 오늘로 이 학교를 졸업하는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나가며 때로는 부당한 일을 당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요. 나는 여러분이 쓰라린 배신의 경험을 겪고 아파해 보기도 바랍니다. 그 속에서 충성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이따금 외로움도 느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 곁에 있어 주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지요. 또 때로는 여러분에게 운도 지긋지긋하게 따라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기회라는 것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렷이 인식하고, 내 성공도, 남의 실패도 다 당연한 일이거니 여기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이 무시도 당해 봤으면 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압니다. 자비가 무언지 확실히 배울 만큼의 고통도 겪어 보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내가 굳이 바라지 않아도 여러분들에게 분명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에서 여러분이 무언가를 얻고 못 얻고는, 여러분에게 닥친 그 불행 속에서 여러분 자신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 주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가운데 성령께서 어떤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증언하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뿌리를 두고 있는 친교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친교로부터 시작되고 그 친교를 세상에 증거하는 교회는 십자가를 멀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겪는 배신과 외로움과 무시 같은 십자가의 상처들을 통해 더 큰 의미를 읽어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세상의 모순과 갈등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곳이 아니라 모순과 갈등 속에 더불어 살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를 향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이상과 꿈은 교회의 삶 속에서 이미 실현되어 왔고 지금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실현되고 있는 친교 공동체
교회가 이미 친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제가 만난 분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봉쇄 수녀원에 들렀습니다. 수녀님들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분들이지요. 화려하고 높은 곳을 향하는 대신 좁은 담장 안에 머물며 소박하고 단순한 삶 가운데 기도에 전념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터입니다. 더 많은 업적과 성과를 낼수록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세태 속에 세상과 교회를 위해 오로지 기도로 힘을 보태는 수녀님들, 그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북돋우며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기만 한 삶이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며 하느님 사랑을 바라보게 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인정해 주는 교회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수녀님들의 기도가 교회의 다른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며 모든 활동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준다는 것을 믿고 후원해 주는 교회 덕분에 수녀님들도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초기부터 ‘고아와 과부’로 대표 되는 약한 이들을 돕고, 이 약한 이들은 기도로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이른바 ‘거룩한 교환’이 오늘 우리 안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헐벗은 이’, ‘목마른 이’, ‘굶주린 이’를 돌보는 카리타스,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돕는 교정사목부, ‘병든 이들’ 옆에는 여러 병원과 병원사목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교육과 해외 선교를 담당하는 많은 분들도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소리 없이 떠받치는 164개의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안에서도 다른 신자들이 불편없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받는 이 친교의 흐름은 교회의 첫날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끊이지 않는 성령의 작용을 증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친교의 삶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친교를 재발견하고 감사하며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는 것이 ‘친교의 해’를 사는 의미입니다.
모든 형제들의 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회교리 회칙 「모든 형제들」을 통해 친교를 증거하는 교회에로 모두를 초대합니다. “꿈을 꾸게 하는, 우리 삶을 멋진 모험이 되게 하는 아름다운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아무도 혼자서는 삶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도와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앞을 바라보도록 서로 도움을 줍니다. 함께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이 꿈이 백일몽이나 막연한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친교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 선포합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3) 그러니 ‘친교의 해’를 살면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으로 ‘친교의 해’를 아름답게 채워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