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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상을 보는 자와 전능자의 경책을 받는 자.
(욥 4:1-5:27)
온 국민을 경악과 실의에 빠뜨린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사건에 대하여 온갖 어처구니없는 궤변들과 정신 빠진 실언들이 사태를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일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라고 어느 목사가 했다는 말입니다.
그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이며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나 있는 생각입니까?
정말이지 무슨 말로 위로해 주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끔찍한 비극을 당한 학부모들의 상심한 마음을 명색이 목사라는 사람이 그런 무분별한 실언으로 더 아프게 만든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이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의 친구들도 그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앞 장에 나오는 대로 욥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모든 자녀들을 다 잃고 자신의 몸마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재앙을 당한 욥에게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왔는데, 물론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욥 2:11).
하지만 막상 직접 자기네 눈으로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고서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무려 "칠일 칠야" 동안이나 욥을 마주보고 "함께 땅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그 세 친구들 중에 한 명이 말을 꺼내었는데, 그가 바로 그들 중에 가장 연장자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엘리바스'였습니다.
그가 욥에게 했던 첫마디는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 4:2)라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누가 네게 무슨 말을 하면 너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참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네.'라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이전에는 네가 넘어져 가는 자나 무릎이 약한 자들을 교훈하여 강하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네가 그저 답답해하고 놀라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즉 욥이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는 좋은 말로 교훈해 주었었는데 막상 본인이 환난을 당하게 되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고 은근히 비난하면서, 그러니 자기라도 '조언'과 '충고'를 해 주어야겠다고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엘리바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떤 '조문'이나 '위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말, 오히려 지금 그 엄청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욥을 더욱 괴롭히는 말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성도 사이에서도 흔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성도가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 주변 성도들과 본인이 각각 꼭 명심하고 지켜야 할 올바른 대응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다른 성도가 당한 환난을 두고 '하나님의 벌'이라고 함부로 정죄하는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4장 7절부터 11절에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엘리바스의 '1차 변론'은 4장 1절부터 시작해서 5장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 변론의 요지는 바로 이 문단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는 말은 바꾸어 하자면 '사람이 망하면 죄 때문이고, 일찍 죽는 것도 무언가 불의하게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악으로 밭을 갈고 독을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그대로 거두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 기운"과 "그 콧김"으로 훅 불어버리시는 "멸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그런 하나님의 '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두고 "사자"를 들어 비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시게 되면 그 전에는 마치 '사자'처럼 힘을 떨치며 인생을 종횡무진하던 사람도 그 으르렁거리며 "우는 소리"가 당장 "그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마치 "늙은 사자"가 "움킨 것이 없어 죽듯이" 노년에 빈털터리가 되어 굶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가 "흩어지듯이" 자식들도 다 망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요지는, 바로 사람이 당하는 모든 환난은 반드시 '죄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그런 끔찍한 환난을 당하게 된 것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곧 욥 자신이 무언가 '죄'를 짓고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엘리바스는 아예 단정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의 5장 1절부터 7절에서도 엘리바스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반복강조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분노"나 "어리석은 자"의 "시기"와 같은 '죄' 또한 "멸망"과 "재앙"이라는 '벌'을 초래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런 사람의 "자식들"은 사형선고를 받는 지경에 처해도 "구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고, 그의 "재산" 역시 다 "빼앗기고" 다른 사람이 "먹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욥이 당한 곤경을 그대로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6-7)고, 욥이 당한 재앙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불티는 절로 위로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욥 자신의 죄가 그런 고난을 필연적으로 불러들인 원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엘리바스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자기 친구 욥에게 그런 '정죄' 일변도의 말을 '충고'랍시고 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까?
그 배경은 바로 4장 12절부터 16절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 보면 "12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15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16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엘리바스가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덧붙인 말입니다.
그는 어느 날 "밤"에 한 "이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이상 중에 "형상을 분변하기" 어려운 한 "영"을 만났고 그 영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지금 자기가 욥에게 하고 있는 말은 자기가 그날 밤에 "두려움과 떨림" 중에서 받게 되었던 어떤 '특별계시'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바스가 그 '영'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그 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엘리바스처럼 선지자나 사도가 아닌 사람이 자기만의 어떤 신비적 체험을 두고 '하나님의 직접계시'라고 속단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특히 오늘날처럼 신구약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모든 직접계시가 다 종결된 시점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그처럼 어떤 신비적인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처럼 착각하는 교만에 빠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엘리바스 역시 지금 자기가 욥을 '정죄'하려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상을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욥에게 전달하는 것일 뿐이라고 은근히 스스로 권위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나중에 5장 제일 마지막 절에서도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고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변론을 끝내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 딴에는 욥의 상황을 '신학적으로 잘 분석해 본' 결과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으니 '욥 너는 내가 해 주는 말을 명심하는 것이 네게 좋을 것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의 말이 욥에게 '유익된' 것이었겠습니까?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단 한마디의 위로는커녕 오히려 욥을 추궁하듯이 정죄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좋은 말'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환난과 재앙'이 '항상 하나님의 벌'은 아닙니다.
욥의 경우도 그러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에게 '벌'이 아니라 '연단'의 과정으로서 환난을 주시는 경우도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 본인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벌을 받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서서 그 죄를 인정하라고 강요하거나 추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유일하신 재판장이시요 궁극적인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에 불과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떻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교회 안에서는 그런 '엘리바스'들이 수두룩합니다.
최근에 우리 교단에 속한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중병에 걸리셨는데, 그것을 두고 '천벌을 받았다.'고 조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진짜 저주 받을 망언'을 자기 멋대로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다른 교인에게 무언가 잘못되는 일이 벌어지면 무조건 '하나님한테서 벌을 받고 있다.'고 함부로 정죄하는 사람은 곧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자나 다름없습니다.
영어로 그런 행위를 'playing God'(하나님처럼 연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가 당하는 환난이 '벌'인지 '연단'인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자기한테만 무슨 특별계시를 전해 주어서 자기만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놀고' 있으니 그 얼마나 지독한 신성모독이겠습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다른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에 결코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진짜 악한 교만의 죄에 빠지지 말고 오직 '위로와 조문'으로 어루만지고 격려해 주는 따뜻한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신이 당한 환난은 오직 '하나님의 연단'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시험 뒤에 예비된 은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장 17절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7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18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20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21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일반적 진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특히 욥이 단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 그가 큰 죄를 저질렀다고 속단을 한 것은 매우 중대한 잘못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변론에는 욥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른 일반적 경우에는 잘 적용될 수 있는 옳은 말도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방금 읽은 본문도 그런 내용 중의 하나로서 그 요지는 곧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신 까닭에 그 어떤 경우에도 '불의'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창조주이시며, 반면에 피조물인 사람은 바로 이 사실, 즉 자신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근에서 모시는 "그 종"과 "그 사자" 즉 하늘의 천사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허물 많고 불완전한 존재일 뿐인데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는" 즉 아침에 살아 있다가 저녁에 죽는 세상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는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욥 5:8) 신앙을 발휘하게 되는데, 바로 5장 17절 이하 26절에 "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21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22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23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고 기록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는 엘리바스의 말은 적어도 욥에게는 직접 적용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지금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신자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써 그 '징계'를 받게 되는 경우에 이 말은 정말 100퍼센트 옳은 말입니다.
불신자에게 환난이라는 것은 그저 '인과응보로 받는 형벌'이나 혹은 '운수가 나빠서 벌어진 악재' 따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징계가 무슨 우연이나 재수가 나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떤 경우에도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니 그처럼 징계를 내리실 경우에도 그것이 결코 '나쁜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당하는 환난이 복이 될 수 있는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징계를 통하여 결국은 당신의 자녀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런 고난을 통하여 성도로 하여금 더 겸손한 인격을 갖추게 하고 더욱 연단된 믿음을 얻게 하는 등, 그야말로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도록' 섭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18절과 19절에 나오는 대로 실로 하나님께서는 "아프게 하시다가도 결국에는 싸매어" 주시며, 때리실 때에는 일견 "상하게" 하시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손으로" 반드시 "고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그 징계의 기간이 길어져서 "여섯 가지 환난"으로 이어질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너를 구원하시며", 그보다 더한 "일곱 가지 환난"이 닥치게 된다 하더라도 그 끝은 반드시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는" 완벽한 해피엔딩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징계 후에 따라오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꼭 지켜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신앙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징계와 경책을 내리신다고 해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거나 그 하나님의 처사가 불의하다고 원망하거나 반항을 하게 되면, 그 징계는 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영원한 형벌로 이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실로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는"(욥 5:9) 전지전능자이십니다.
그런 기이한 일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당신의 자녀를 '징계'하심으로써 끝내 '복'을 받게 하시며 '경책'을 통해 훨씬 더 큰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내리시는 '징계와 경책'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실로 오묘한 뜻과 계획이 내포되어 있는 '연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단 즉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하기만 하면 정말 놀라운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기근" 때에도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기적적인 구원을 받게 되는 복입니다.
그뿐 아니라 "혀의 채찍" 즉 원수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저주들을 가볍게 물리치게 되며, 무생물인 "밭의 돌"과 미물인 "들짐승"조차 자신의 생업활동이 잘되도록 도와주는 온갖 형태의 만사형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구약 곳곳에서 '성도의 연단'이야말로 오히려 특별한 축복의 길이 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단 12:10상)라고 한 대로, 연단은 성도를 점점 더 거룩한 '성화'의 완성으로 이끌어 줍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라는 말씀대로, 연단은 성도가 붙잡고 따라가는 '소망'이 성취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과정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는 말씀대로, 연단이야말로 재림하실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해 줄 성도의 '믿음'을 최상급의 수준까지 끌어올려 주는 최고 수준의 훈련인 것입니다.
작년 여름부터 연말까지 우리 교회가 당했던 시험을 통해서도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런 체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환난을 하나님께서 각자 자신에게 주시는 '징계'와 '경책'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또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많은 회개기도를 뜨겁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프게 하시다가도 결국에는 싸매어 주시고', '여섯 가지 환난'이 연이어 괴롭혀 왔지만 결국 '일곱 번째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기적적인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교회적으로나 교단적으로나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잘되어 가고 있는 '기이한 일'들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셀 수 없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자'께서 교회와 성도에게 시련을 주실 때에는 실로 사람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은 뜻이 다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책하실 때에 절대로 그것을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실지라도 오히려 더욱 겸손한 자세로만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그 전능자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따라 예비되어 있는 '위로'와 '소생'과 '구원'의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남이 환난을 당했을 때에는 당연히 '위로'를 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오히려 '정죄'만 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세상 사회에서보다도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것도 특히 '신앙이 깊다는 교인'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잘못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무슨 은사를 입었다는 사람, 스스로 신학과 교리에 밝다고 자처하는 사람, 자기는 남들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영'을 받았다는 사람이 바로 자기 혼자만의 무슨 '밤의 이상'을 보았다는 오늘의 '엘리바스'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자신이 환난을 당했을 때에도 그런 주위 사람들의 무책임하고도 무분별한 비난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직 '전능자의 경책'만 절대로 업신여기지 않고 겸손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그 환난을 당하게 하신 근본적인 원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는 그렇게 섭리하신 이유와 목적이 또한 분명히 있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바로 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고' '곤경을 돌이키신 후에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더해 주시는' 해피엔딩이 반드시 따라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환난은 생길 수 있으며 교회 안에도 크고 작은 환난이 늘 닥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환난에 대한 대응자세나 대처방법에 따라 그것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든지 혹은 전화위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른 성도'가 환난을 당했을 때와 '나 자신'이 환난을 당했을 때 각각 그 '환난 극복의 매뉴얼'을 따라야만 합니다.
환난 중에 있는 교우를 '자기가 보았다는 밤의 이상'으로써 정죄하여 더 괴롭게 만드는 악을 결코 범하지 말고 오직 '위로와 권면'으로 서로 일으켜 주며, 자신이 환난을 당했을 때에는 저 '의로우신 전능자께서 선한 뜻을 품고 내리시는 경책'을 달게 받음으로써 그 뒤에 예비되어 있는 '여호와이레'의 놀라운 유종지미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