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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기도-갑절의 응답 / 이규왕 목사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중에 하나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몸이 아픈 곳이 있기 때문에 치료를 받기 위함이거나, 뚜렷이 아픈 곳은 없지만 혹시 어디가 문제가 있는가 하고 건강 진단을 받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건강하지만 아픈 사람을 문병하기 위해서 병원을 찾는 경우입니다.
이 중에서 누가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건강한 사람일까요? 물론 그 답은 세 번째 사람 일 것입니다. 질병 때문에 병원을 찾는 사람은 기쁨이 없을 것이고,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진단을 받기 위해 병원 찾는 사람보다 환자를 위문하고 병원을 나오는 사람의 마음이 훨씬 더 기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찾는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육간에 문제를 가지고 나아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 볼 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중에 어느 편에 속한 사람이며, 이제부터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언제 기도하는가?
오늘 말씀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의해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 하가랴의 아들로서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에게 신임을 받고 수산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느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다른 동족들처럼 먹고 입고 마실 것을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아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느헤미야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만약에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면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을까요?
만일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의 처지라면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고 기도를 한다면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와 같은 처지였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부귀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며, 남달리 자신만이 누리고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와 그것을 오래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와 소원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의 관심과 기도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현재 눈에 보이는 페르샤 왕국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고국 땅과 그곳에 있는 동족들에게 있었습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형제 하나니의 일행이 고국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상세하게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고국에 있는 동포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느 1: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느헤미야는 지금 페르샤의 수산궁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는 것과 달리 성을 불타버리고 고향에 남아있는 동포들은 헐벗고 주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마치 그 처지가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처지처럼 생각하고 걱정만 한 것이 아니라 동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무런 문제가 없이 평안하기만 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고 선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달리 나에게 평안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다 평안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그런 가운데서 오늘 내가 평안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보다 잘먹고 잘사는 사람과 비교를 하면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눈을 들어 주변을 보고 북녘 동포들의 소식을 들어보면 너무나 비참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만강 일대 중국의 국경지역 주민들은 북한에서 온 떼강도를 막느라 모닥불을 지피고 횃불을 밝힌 체 밤새 무리를 지어 지킵니다. 배고픔에 지친 여자아이들은 국경을 넘어와 인신매매 하는 자들에게 스스로 팔려가기를 간청합니다.
이런 참상을 감추고 거짓된 선전만을 일삼는 북한 당국이나 이들이 제공하는 선전물을 그대로 가져다가 방영하는 한국의 TV 방송이나 언론사들도 참 가관입니다.
지금 북한은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존하는 지옥입니다.
풀뿌리가 아니고 좁쌀이나 옥수수 같은 낱 알갱이만 먹을 수가 있다면 이들은 행복해합니다. 또 이런 자들은 특권층입니다. 청진시 수남역 전에는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어린아이들과 창녀, 길거리에는 죽은 시체, 바람에 휩쓸리는 쓰레기들, 굶주림에 지쳐 붓고 누렇게 뜬 얼굴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 세상에 이런 지옥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런 곳에 지금 주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기 종들을 앞세워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가 지시던 십자가를 자기 종들에게 지우시고 청진시를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 지옥 같은 북한 땅에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주라고 종들에게 명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주님은 다시 자기 종들에게 명하십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주님은 그 종들의 입을 통해 가만 가만 속삭이십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주 예수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종들은 거지에게, 창녀에게, 굶주린 자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고 한 장의 지폐를 손에 쥐어 줍니다. 그러다가 그 종들은 총살도 당하고, 때로는 붙잡혀 감옥에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정말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소중한 일이 있음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누가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과 이웃과 세계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것은 세상을 보되 하나님의 시각과 청각으로 보고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이나 교회 소식이나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화제나 동정거리가 아니라 기도거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고난받고 있는 북한 동포와 아프칸 난민들과 노숙자들과 환자들과 이역 만리에 타국 땅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느헤미야와 같이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인 것입니다.
2. 어떻게 기도하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며,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대상 29: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삼상 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렇다면 마음만 먹으면 되고 우리의 행동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막 7: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그러나 우리의 언행심사를 저울질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삶에 닮아 기도와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오늘 성경에서 느헤미야의 가슴에 뜨겁게 불타오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동족애가 마음으로만 아니라 간절한 기도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신전의식(神前意識)의 기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믿음은 요나 선지자와 같이 여호와는 유대 땅만을 통치하시는 민족신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지금 고국을 떠나 성전도, 기도를 명하는 제사장도 없는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지금 내 앞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는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이 나름대로 다 기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만이 교회서는 물론 어디서든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느 1: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러한 느헤미야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항상 신전의식(神前意識)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 회개의 기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의 해방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나라와 민족을 멸망하게 만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먼저 하였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느헤미야 이전 시대에 조상들이 범한 죄악이지 자기가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상들은 그 죄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회개하지 않고 결국 나라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상들은 이미 죽었지만 그 후손들이 지금 그 조상들의 죄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상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여전히 그 후손들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자신은 그 조상들의 죄값으로 인해 지금 남보다 비참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수산 궁에서 평안히 살고 있지만 고국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동포들을 비참하게 만든 조상들의 죄를 조상들에게만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에게로 돌리고 금식하며 철저하게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느 1: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 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느 1: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은 갈수록 더욱 어려워만 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만 예수 믿고, 나만 죄 안 짓고, 나만 의로우면 다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셨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고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그 기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3) 믿음의 기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또한 느헤미야의 기도는 한 두시간, 하루 이틀, 한 두 주간으로 끝난 단거리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무려 3-4개월 동안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였습니다.
(느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느 2:1)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 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밖에 없는 까닭은 이교도들처럼 간절히 오래 기도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고 불쌍한 생각이 드셔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그와 같은 외형적인 형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매어 달리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느 1: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느 1: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밖에 없는 기도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매어 달리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 중심의 기도라는 말입니다.
3. 얼마나 응답을 받는가?
몸이 아픈 사람이 병을 고치기 위해 집을 팔아 수개월 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병은 낫지 않고 더해만 간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한 일입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그 응답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도 재미가 없고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얼마 못 가서 기도를 중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는 기도에 대한 명령과 약속은 물론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사람들의 신앙 간증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문제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변함 없이 응답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기도하는 자마다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 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 91: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느헤미야의 기도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주세요 하는 식의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한 중보의 기도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기도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귀환을 하였으나 힘이 없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느헤미야가 잘 알면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누가, 어떻게 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기도하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 계심과 신실하심을 그 만큼 믿었기 때문에 기도한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한 것입니다.
1) 점진적인 응답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살아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실 뿐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도 주장하신다고 하신 말씀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술관원이 되었다는 말은 그 당시에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왕이 마시는 술시중을 책임지는 술관원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느헤미야는 식민지 포로인 주제에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자주 왕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왕의 측근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뜻합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이 자신의 선행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라고 주저 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느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인간적으로 보면 느헤미야는 기도하여 마침내 출세와 성공의 지름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느헤미야가 본래 기도하던 응답이 아니라 그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설령 왕의 술관원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왕이 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얼굴이 수척하도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므로 마침내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느 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느 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열심히 해 놓고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 주고 계시는데 마치 그것이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줄 아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집을 산 것도, 진급이 된 것도, 빚을 안진 것도, 건강한 것도,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해서 내 믿음의 분량을 따라 점진적으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적은 응답을 통해서 큰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2) 구한 것 이상의 응답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수척한 얼굴로 자기를 섬긴다고 진노하여 벌을 내리거나 죽여야 하는데도 오히려 마음에 감동을 받아 느헤미야의 소원을 물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기도해온 고국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 소원임을 아뢰었습니다.
(느 2:5)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아닥사스다 왕은 그와 같은 느헤미야의 엄청난 요구를 듣고서 화를 내는 대신 흔쾌히 허락하였을 뿐 아니라 느헤미야가 구한 것 이상으로 다 들어 주었습니다.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이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후광을 힘입고 주변 나라들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 재건에 필요한 재목까지 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치 왕이 행하차하는 것처럼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고국을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 론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여전히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하되 믿음이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하되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응답을 받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 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고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크게 믿고 기도하면 크게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엘리야는 하나님께 비가 오기를 기도할 때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일곱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큰 홍수가 날 것이라고 아합 왕에게 피하라고 간청한 것이 미미한 응답이었습니다.
(왕상 18: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믿음으로 기도할 때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엘리야처럼 기도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수일, 수주일, 수개월, 수 년 내 응답하실 것입니다.
비록 그 응답이 손 만한 작은 구름이라고 하찮게 생각하지 마시고 빙산처럼 그 이면에 큰 응답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배가의 기도를 하시면 마침내 갑절의 응답을 오늘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심정으로 민족의 통일과 북한 동포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 나라의 정치 경제의 안정과 교회 부흥을 위해서, 개인의 필요와 소원을 위해서 기도하되 먼저 신전의식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응답이 있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오늘의 느헤미야, 오늘의 엘리야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