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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4-17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 안효관 목사
사도행전 2: 37-42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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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라고 해서 ‘불가사의’라는 말을 씁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로마의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 영국의 솔즈버리 평원에 있는 엄청나게 큰 돌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즈, 무려 55.9m나 되는 거대한 석탑이 5m정도 기울어져 있는데도 무너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터키 이스탄블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가사의한 것들이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일지라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상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의 구원일 것입니다. 또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역사의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앙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의 때는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략 주전 850년 경 북 이스라엘에 여호람 왕이 통치하던 때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큰 세력은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던 ‘아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불가사의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범하기 위해서 작전을 짜서 공격을 감행하면,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아람의 작전을 다 알고서 오히려 역공을 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은 전쟁을 하기만 하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쯤 되자, 아람 왕이 군대의 최고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가 전략을 세우기만 하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미리 알고서 역공을 해오는가? 혹 우리 가운데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비밀첩자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결론은 의외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엘리사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귓속말로 하는 것까지도 다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사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작전을 짜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공격을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제거하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급파했습니다. 엘리사만 제거하면 이스라엘을 공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도단이라는 성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아람 군대는 밤중에 몰래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도단 성에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군사들로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 보니, 아람 군대와 병거들이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란 게하시가 엘리사에게 뛰어 들어가서 “우리는 이제 죽게 되었다”고 소리쳤습니다.
상황을 보고 받은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먼저는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와 병거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볼 때에 게하시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꼼짝 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육신의 눈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서 게하시는 영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영의 눈으로 바라보니, 도단 성을 둘러쌓고 있는 아람 군대와 병거들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지켜주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눈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게하시처럼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 영의 눈이 어두워서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눈이 밝은 것도 큰 축복입니다.
우리 교우님들 가운데도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작은 글씨까지 읽으실 수 있는 좋은 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아서 큰 불편을 겪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연세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눈이 좋지 않아서 성경을 읽고 싶은데도 읽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일예배 때에 찬송가 가사나 성경말씀을 OHP를 통해서 큼직하게 비춰주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없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신의 눈이 나빠지면 우리는 많은 불편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밝게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기도 하고, 수술을 통해서 시력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눈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적인 눈을 다른 말로 ‘믿음의 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은 믿음을 통해서만 열려질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능력을 ‘시력(視力)’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을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아예 사물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을 ‘소경/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그걸 우리는 영력(靈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영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영력이 뛰어난 사람입니까?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영력은 무언가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의 영적인 시각이 - 믿음을 통해서 바라보는 능력이 뛰어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영력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우리 앞에 당한 현상만을 보지 않습니다. 현상 배후에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당한 현상만을 볼 때에는 절망하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당한 현실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압력으로 우리를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현실만을 보는 육적인 눈만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갖고 살아갑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눈을 갖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게하시를 보세요. 영적인 눈이 열리기 전에는 아람 군대가 자기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게하시는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육적인 눈으로만 볼 때에 그건 사실입니다. 아무런 군사력도 갖추진 못한 엘리사가 어떻게 그 막강한 아람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육적인 눈만으로 보고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하시를 위해서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육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영적인 눈으로 오늘의 사태를 보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대로 게하시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세 가지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실존을 보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충고해 주려도 해도 “나는 내가 잘 알아” 그러면서 충고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에는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럽고 추한 모습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눈은 우리의 겉모습만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인격이나 사람됨보다는 얼굴이나 겉치레를 보고서 사람을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의 눈은 우리를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보게 합니다. 작아서 육의 눈으로는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게 합니다. 감추어진 죄악들까지 보여 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영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의 눈이 열리자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모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습이 비쳐지는데,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여러분, 이게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나만 홀로 고고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영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의 눈은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현미경처럼 너무 작아 감추어지고 숨겨진 허물들까지도 낱낱이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부정한 사람이로다”하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읽은 말씀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자신들이지만 예수님이 자기 죄로 인해서 처형을 당한 것일 뿐, 자기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일을 행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죄인 하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다. 너희가 못 박은 그 예수는 메시야다. 너희는 메시야를 죽인 죄를 범하고 말았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렇게 설교한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들은 유대인에게 영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피 흘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니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일차적으로 보인 반응은 “어찌할꼬”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안이 열리게 되면 첫 번째로 보여야 할 반응도 같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봄으로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나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내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러분, 영안이 열려 나 자신을 깊이 있게 성찰하며 나를 바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려 자기 실존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영안이 열려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거나 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영안이 열리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육신의 눈을 갖고 세상을 보는 것과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기준이 다릅니다. 보여지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때에는 기준이 ‘나’이고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출세와 성공이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돈이 더 많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제 한 달 반만 지나면 국회의원 선거를 하게 됩니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기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비리와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당한 게 오늘날 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정과 비리를 동원해서라도 국회의원의 자리에 오르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세상적인 방법을 기준으로 해서 살기 때문에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해서 불량식품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돈 앞에서는 자신의 정조까지도 팔아먹고 맙니다. 그게 육의 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열려진 사람들은 세상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에서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영원한 가치를 두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눈이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살아왔습니다.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당시 누구나가 갖고 싶었던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길은 고속도로와 같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재물과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까지도 다 보장받은 앞길이 활짝 열린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부터는 그런 세상적인 가치들을 다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바울은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다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의 삶에 해(害)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사도 바울을 더 유명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세상적인 출세와 성공의 길을 포기한 것이 사도 바울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세상
적인 출세와 성공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갔을 때 더 유명해졌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손에 들려진 세상적인 것이 가치를 두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만드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세상에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영안이 열리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영안이 열린 게하시는 엘리사를 둘러선 하나님의 군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임재하신 주님의 임재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큼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비록 삶은 가난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부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주위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전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를 보세요. 그의 종 게하시는 성을 둘러쌓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엘리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불안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안이 열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셔서 자신을 지켜주고 계심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산다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은 잔뜩 화난 무리들이 돌맹이를 들어 자신을 향해 던질 때에도 그의 영안이 열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향하여 두 팔 벌리고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첫 번째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보는 영안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도우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앞을 보지 못한 맹인들입니다. 그러나 맹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우리 모든 교우님들은 영적인 소경으로 살지 마시고, 영안이 열려 엘리야처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우리를 버리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바라보면서 그 손에 이끌림 받은 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