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2] 최봉춘(崔奉春) - 일본 개척의 감회 2. 입교 후 일본 전도 결정 - 2
11 그 다음 해인 1957년 7월 20일, 하계 전도 시에 경남 충무에 나가 교회를 개척했다.
12 나는 종말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종말론에는 머지않은 장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하였기에 때가 되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많은 고생을 하고 싶었다.
13 그래서 선생님께 “저를 일본 선교사로 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드렸다. 그 후 1년이 지나자 선생님께서 나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너 일본에 가라’ 하셨다.
14 유효원(劉孝元) 선생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믿음이 있고 꿋꿋하냐 하는 물음이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 말에 ‘예스’ 하면 비양심적이고 ‘노’라 하면 비신앙적이기에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15 그러나 내가 비양심적인 인간이 되더라도 비신앙적인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아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유 선생님은 ‘됐다. 봉춘씨’ 하시면서 손을 힘차게 잡고 기뻐하셨다.
16 나는 선생님을 갑사(甲寺)에서 마지막으로 만나 뵙게 됐다. 선생님께 “출발하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드리자 “그럼 봉춘이 갔다 오라”라고 하셨다.
17 다시 나는 “선생님,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지만 응답이 없으셔서 내 말을 못 들으셨는 줄 알고 또다시 말씀을 드렸다.
18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기도를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싶지만 내가 만일 가지 못하면 나 자신이 탕감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문제 없습니다. 괜찮으니 해주십시오” 하고 매달리자 선생님도 할 수 없으신 듯 기도해 주셨다.
19 나는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서 ‘부름받은 몸’이란 성가를 부르면서 산을 내려왔다.
20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따르리다” “이 몸이 죽고 또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도 한번 결심한 길 꼭 이루고 말리라” 마음속으로 많은 다짐을 했다. 이 당시 상황은 선생님과 유 협회장, 나, 세 명만이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