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말한다. 나는 좀 비틀어보고 싶다. “성질 더러우면 혼자되고, 성질 죽이면 함께 산다.” 아픈 소식을 들었다. 신학교 동기 목사가 수년 전 이혼했다는 것이다. 같은 교회에서 사역했었다. 성격이 독특하긴 했지만 나름 결혼생활이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보이기만 했었나보다. 누구라도 이혼할 수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니 아내가 도끼눈으로 쳐다본다. 급하게 사과했다. ‘나에겐 그런 복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관계는 함께이다. 그러나 삶은 혼자다. 사람은 함께도 혼자도 포기해선 안 된다. 어쩌면 신앙생활은 ‘혼자 또 여럿이’가 아닐까? 젓가락은 두 개가 한 짝이다. 하나로는 제 기능을 못한다. 그렇다고 키가 맞지 않아도 어색하다. 함께하기 위해선 함께하는 사람과 높이를 맞춰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기에 우리도 거룩하라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인간은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없다. 거룩해져서 구원받으려는 건 태생이 불가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질 수 없으니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인카네이션’이란 용어는 여기서 태어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젓가락 짝을 맞추기 위해서다. 사람은 예수님과 짝해야 제 기능을 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이웃과도 짝을 이룬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모두 관계와 연결된다. 고로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천사처럼 되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 관계하기에 편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충만해야 좋은 교회다.
‘여럿이’가 젓가락이라면 ‘혼자’는 숟가락이다. 머리와 몸통으로 이루어진 숟가락은 집어내기 보다 퍼준다. 헌신도 지칠 때가 있다.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목사도 때론 짜증난다. 퍼주기만 하면 말이다. 퍼주기 위해선 채워야 한다. 여럿이 가기 위해선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진다. 퍼주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열심보다 골방이다. 거기서 다시 씻겨져야 재사용이 가능하다. 말씀과 기도를 외면한 열심은 언젠간 퍼진다. 퍼지기 전에 충전해야 한결은 유지된다.
신앙생활은 젓가락과 숟가락의 함께가 아닐까? 홀로서기와 여럿이 함께는 신앙의 젓가락과 숟가락이다. 젓가락은 오른쪽에 있어야 편하고 숟가락은 왼쪽에 있어야 편하다. 만약 이게 바뀌면 제사상이다. 죽은자가 받는 제사상은 산자의 상과 젓가락 숟가락 위치가 다르다. 단순히 위치만 바뀐 게 아니라 입장이 바뀌는 것이다. 성도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쓰기 편하다. 젓가락은 함께, 숟가락은 홀로. 밥상엔 항상 왼쪽과 오른쪽. 삶은 혼자와 여럿이. 이 작은 예법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지면 신앙의 품격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