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174, 동방교 린치사건 리뷰 & 기절초풍證言
자칭 좁은길=세칭 동방교라는 희대의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벌어졌던 1970년초 신도 린치사건의 주인공 김병구(동방교名 마태)목사가 세상을 떠난지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가 1938년 戊寅生이니 세상을 떠난 작년이 壽86세에 이른 해이다. 필자는 '이단의 추억' 기록 여러곳에서 그와 얽힌 몇가지 이바구들을 퓰어 놓았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그즈음에 한시절 세칭 동방교의 거액 도난사건에 얽혀들어 곤욕을 치루었고 세칭 동방교가 발행한 '주간 기독교' 신문의 사장을 지냈던 권병찬(일명 국찬, 동방교名 아마샤)씨의 별세 소식도 함께 들었다.
장례식도 한참 지난 뒤의 일이라 두 분 다 문상은 가지 못했다. 그리고는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가 드디어 올년말은 넘기지 말아야겠다는 초조함에 K씨와 연락하여 며칠전에 만나게 되었다. 아마샤 권병찬씨와 김병구 마태목사의 소식과 추억담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아브넬 노영구와는 동갑이요 辛巳生 뱀띠인 K씨는 나와는 인연깊은 세칭 동방교=자칭 좁은길 사상8교회의 동향 출신이기도 하다. 또한 김병구 마태목사와 그는 3살 아래 年下이지만 절친이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집단합숙소)에 들어가 껌팔이 연단사 생활을 거친 이후 세칭 동방교의 여러 직역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흑석동의 대기처(집단합숙소) 향림정 뒤쪽 토굴을 직접 팠던 장본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1970년초 당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병구 마태목사의 린치사건은 다음과 같다.
동방교 일제수사
동아일보 1970.02.20 기사(뉴스)
신도고발, 이탈자 감금폭행
경찰은 20일 동방교란 이름으로 흔히 말썽을 빚어 온 대한기독교 개혁장로회가 교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을 불법감금, 폭행을 가하고 금품도 강요하고 있다는 피해자들의 고발에 따라 일제 수사에 착수, 우선 동교 총본부 전도사 이상래(33)씨와 황보동(33)씨를 불법감금및 특수폭행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의 이러한 수사는 48일동안 동방교 간부들에게 감금되어 심한 폭행을 당했다가 19일밤 탈출했다는 동교 부산 초량교회 부목사 김병구(29)씨의 고발로 착수된 것이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15년 전부터 동교를 믿어오다 싫증을 낸 김씨의 경우 작년 12월 31일 초량교회의 소위 교육자 방에서 잠자다 입건된 이씨등 5,6명에게 눈을 가리고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혀 심한 폭행을 당한 후 경기도 소사에 있는 동교 농장 골방에 10일동안 감금되어 계속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달 11일 신촌에 있는 동교회 골방으로 또 끌려 와 ‘너는 일백일이 되도 여기서 못 나간다’는 협박을 받았으며 지난 8일 서교동 교회로 옮겨진후 19일 간부들이 교주 무덤에 제사를 지내려 간 사이에 탈출했다고 폭로했다.(기사본문)
보도된 기사보다 실제의 상세내용은 [이단의 추억 # 26, 마태목사 탈출사건]을 참조해보면 더욱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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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만남에서 나는 K씨가 오랫동안 말못하고 숨겨왔던 다음과 같은 기절초풍할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를 약술한 것이다.
당시 세칭 동방교의 경주교회에서 서울로 올라와 숙대를 졸업하고 도동의 청해약국에서 약사를 하고 있는 동방교名 '기드온' 이라는 눈이 동그랗고 키 160cm 정도의 적당한 신장을 가진 美色이 도는 여자가 있었다.
비탈길 청해약국의 아래쪽, 서울역에서 도동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그 중간쯤 되는 곳에서 왼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윗채와 아랫채가 함께 있는 자그마한 가옥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 주변인 후암동 일대에는 '기도처'와 '청산루'라는 대기처(집단합숙소)가 있었지만 동방교에서 이곳에 이런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던 K씨는 교주 盧씨의 지시로 한때 레슬링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다 쓸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K씨가 命을 받아 이곳 아랫채에서 숙식하며 그집을 혼자 지키고 있었는데 밤이 되면 가끔씩 당시 20대말 정도의 청해약국 약사 '기드온"이 내려오고 당시 40대 후반의 교주 盧氏가 들어와서 하룻밤을 윗채에서 같이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뒷물을 버리고 세수를 하고 돌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기절초풍할 일이다.
당시 세칭 동방교의 실내 벽에는 '내가 깨끗하니 너희도 깨끗하라' 라는 문구를 써서 붙여놓고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니라 '남녀삼보밖!" 이라는 구호를 제창하곤 하던 시절이었는데 교주라는 자는 이런 개망나니 짓이나 하고 있었으니... 기가 차고 코가 맥힌다. 만일 K씨의 증언이 없었다면 까마득히 모르고 과거속에 묻혀버렸을 사건이다.
세칭 동방교의 도동 사무실과 청해약국이 있던 미로같았던 그 건물에서 약사 '기드온'은 혼자 독방을 차지하여 기거하고 있었다. 이는 동방교의 대기처(집단합숙소) 내에서는 감히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유일한 특별케이스었다. 야뇨증이 있다는 핑계로 혼자 독방에 기거하던 약사 '기드온'의 그 퍼즐이 풀리는 순간이다.
K씨가 군입대하기 이전이니 196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이후 1965년 김관수 베니끼 목사의 미심쩍은 대전 열차사고로 인해 교주 盧씨는 지명수배가 떨어졌고...
그는 상도동의 세칭 동방교 대기처名 '큰집' 이라는 곳에서 손자(?) 성민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은거하다가 지명수배로 인해 외부로의 신원노출이 어렵게 되므로 당뇨합병증의 병원진료를 받지 못한채 1967년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이곳에서 끝내게 된다. 그해 음력 6월 19일의 일이다. 동방교에서는 이날을 아주 특별한 날로 여기고 있다. 이후 얼마안가 이곳에서는 금괴 및 거액도난 사건이 터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