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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91)
第三十 一合理相分(한 덩어리의 이치)
오늘의 주제는 일합상(一合相)으로, 한 덩어리의 모습, 둘이 아닌 하나로 합쳐진 절대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로 세상이 존재하는 이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금강경】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로 碎爲微塵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이삼천대천세계 쇄위미진 어의운하 시미진중
寧爲多不아 甚多니다 世尊하
영위다부 심다 세존
<번역>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작은 먼지로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작은 먼지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해설> - 무각
천체물리학에서는 먼지가 모여서 우주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과정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하여, 이루어지는 성겁(成劫) 20소겁, 머무는 주겁(住劫) 20소겁, 무너지는 괴겁(壞劫) 20소겁, 없어져서 먼지로 존재하는 공겁(空劫) 20소겁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현대 우주론에서는 최초에 대폭발을 시작으로 우주가 팽창해 나간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점점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결국, 두 은하가 합쳐지는 순간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지고 폭발하면서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루어지는데, 그런 가운데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성주괴공’의 과정에서도 영향받지 않는 영원한 그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중생들의 마음으로 인해서 존재한다. 즉 일체를 마음이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작은 먼지로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했듯이 우리의 한생각생각(작은 먼지)이 삼천대천세계를 만들기에 모든게 마음의 나툼입니다. 즉 삼천대천세계가 일합상으로부터 나왔기에 일합상이란 모습 없는 참모습이고, 절대적인 한생각의 나툼입니다.
이와 같은 일합이상(一合理相)의 이치와 모두가 둘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다.
큰 전단 한 덩어리를 망치로 내리치면 만 조각으로 나누어지면서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뾰족한 것, 짧은 것 긴 것 등 천차만별의 조각이 나오는데, 그 각각의 것들이 남자 여자, 너 나,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는 모든 것이 한 덩어리로부터 출발했는데 그 만 가지 조각이 다 전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삼천대천세계가 일합상이라는 한 덩어리인데, 항상 분별해서 따로따로 보기에 둘 아닌 도리를 알아야 견성체험 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기에 이런 비유를 든 것입니다.
【금강경】
何以故오 若是微塵衆이 實有者인댄 佛이 則不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가 何오
하이고 약시미진중 실유자 불 즉불설시미진중 소이자 하
佛說微塵衆이 卽非微塵衆일새 是名微塵衆이니이다
불설미진중 즉비미진중 시명미진중
<번역>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이 작은 먼지들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곧 작은 먼지들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작은 먼지들은 곧 작은 먼지들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작은 먼지들입니다.
<해설> - 무각
이름이 작은 먼지일 뿐입니다.
【說誼】
前現如來之身이 非眞假無去來하시고 此擧微塵이 非微塵이며 世界가 非世界하사
현전여래지신 비진가무거래 차거미진 비미진 세계 비세계
以明法相이 卽非法相은 何也오 前則現佛眞體也라 所悟도 亦此也며 所證도 亦此也요
이명법상 즉비법상 하야 전즉현불진체야 소오 역차야 소증 역차야
此則現法眞體也라 收言拂迹하야 示返眞源也니라 佛身은 本無爲로되 隨機하야
차즉현법진체야 수언불적 시반진원야 불신 본무위 수기
有眞應去來요 法性은 本無生이로되 對機하야 有權實頓漸이니라 故로 於一身에
유진응거래 법성 본무생 대기 유권실돈점 고 어일신
現三身하고 於三身에 現微塵數身하시며 於一法에 演三乘하고 於三乘에
현삼신 어삼신 현미진수신 어일법 연삼승 어삼승
演微塵數法하시니 如實而觀컨댄 佛無眞應去來之殊요 法無權實頓漸之異어늘
연미진수법 여실이관 불무진응거래지수 법무권실돈점지리
不解義者는 以爲佛身이 實有如是差別하고 法門이 實有如是名數라하나니 如淨摩尼가
불해의자 이위불신 실유여시차별 법문 실유여시명수 여정마니
隨方各現하야 映於五色이어든 諸愚痴者는 說淨摩尼에 實有五色이니라 故로
수방각현 영어오색 제우치자 설정마니 실유오색 고
說佛則云호대 若以色見聲求하면 是行邪道라하시며 乃至云若言來去라하면
설불전운 약이색견성구 시행사도 내지운약언래거
是不解義라하시니 此는 現佛眞體也요 說法則云호대 若言佛說四見이라하면
시불해의 차 현불진체야 설법즉운 약언불설사견
是不解義라하시며 乃至云所言法相者는 卽非法相이라하시니 此는 現法眞體也니라
시불해의 내지운소언법상자 즉비법상 차 현법진체야
嘗觀說來之意컨댄 佛身은 無爲하야 卽二邊而離二邊이요 法性은 無生하야
상관설래지의 불신 무위 즉이변이이이변 법성 무생
卽名數而超名數라 今此二義가 上來에 亦有其文하니 所謂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며
즉명수이초명수 금차이의 상래 역유기문 소위불가이신상 득견여래
所謂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며 所謂佛은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소위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소위불 불응이구족색신 견
此等諸文은 現佛眞體也요 所謂無有定法如來可說이며 所謂如來는 無所說이며
차등제문 현불진체야 소위무유정법여래가설 소위여래 무소설
所謂汝가 勿謂如來가 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니 此等諸文은 現法眞體也니라
소위여 물위여래 작시념 아당유소설법 차등제문 현법진체야
佛之所以言此者는 皆爲廣闢人之邪見하사 大開佛之知見이시니 下文에
불지소이언차자 개위광벽입지사견 대개불지지견 하문
所謂如是知見信解者가 夫是之謂歟인저 世界를 碎爲微塵等者는 何也오 大千이
소위여시지견신해자 부시지위여 세계 쇄위미진등자 하야 대천
同爲一地로되 而有三千之異名하니 以比一心으로 開爲三智하며 一境으로
동위일지 이유삼천지이명 이비일심 개위삼지 일경
開爲三諦하며 一念으로 開爲三惑하며 一法으로 開爲三乘이라 體雖是一이나
개위삼제 일념 개위삼혹 일법 개위삼승 체수시일
開有三名하니라 復以三千으로 碎爲微塵等者는 以比三智로 開爲無邊觀智하며 三諦로
개유삼명 부이삼천 쇄위미진등자 이비삼지 개위무변관지 삼제
開爲無邊諦境하며 三惑으로 開爲無盡塵勞門하며 三乘으로 開爲無盡修多羅門이니
개위무변제경 삼혹 개위무진진노문 삼승 개위무진수다라문
本雖是三이나 開爲無量이니라 佛擧塵界問空生은 欲明諸法無體性이어시늘
본수시삼 개위무량 불거진계문공생 욕명제법무체성
果能答以非實有하시니 善知黃葉竟非錢이로다
과능답이비실유 선지황엽경비전
<번역>
앞에서는 여래의 몸이 眞과 假도 아니며 거래도 없음을 나타내시고, 여기서는 미진이 미진이 아니며 세계도 세계가 아님을 들으사 法相이 곧 法相 아님을 밝힌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는 부처님의 眞體를 나타냄이라. 깨달은 바도 또한 이것이며 증득한 바도 또한 이것이니, 이것인즉 法의 眞體를 나타냄이로다. 말을 거둬들이고 자취를 떨어버려서 眞源에 돌이킴을 보인 것이로다. 佛身은 본래 無爲로되 근기 따라 참으로 응하는 거래가 있음이요, 法性은 본래 生함이 없으나 근기에 대하여 權과 實과 頓과 漸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一身에서 三身을 나타내고 또 三身에서 미진수의 몸을 나타내시며 一法에서 三乘을 펴시고 三乘에서 미지수의 法을 펴시느니라. 사실대로 觀하건대 부처님은 眞身, 應身의 거래가 다름이 없고 法은 權과 實, 頓과 漸이 다름이 없거늘 이 뜻을 알지 못한 자는 佛身이 실로 이와 같은 차별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法門이 실로 이같은 名, 數(교리)가 있다고 여기니, 깨끗한 마니주는 그 방향에 따라 각각 나투어서 오색을 비추는 것이거늘 모든 어리석은 자들은 깨끗한 마니주에 실로 오색이 있다고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을 설하여 이르되 “만약 색으로 보거나 소리로 구하면 이는 邪道를 행함이라”하시며 내지“만약 오고 감이 있다고하면 이는 뜻을 알지 못한다”하시니라. 이것은 부처님의 眞體를 나타냄이요, 法을 설하여 이르되 만약 부처님이 四見을 설하였다 하면 이것도 뜻을 알지 못한다 하시며, 내지 말한 바 法相이란 것도 곧 법상이 아니라 하시니, 이것은 법의 眞體를 나타냄이니라. 일찍이 설해온 뜻을 관하건대 佛身은 無爲하여 二邊에 卽하여 있되 二邊을 떠났음이요, 法性은 생함이 없어서 名數에 卽하여 있되 名, 數를 떠났음이로다. 지금 이 두 가지 뜻은 위에 글이 있었으니 소위 “가히 몸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다”이며 “가히 三十二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하며, 이른바 “부처님은 응당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다”이니 이 같은 모든 글은 부처의 眞體를 나타냄이요, 소위 “정한 바 법을 여래가 가히 설함이 없으며” 이른바 “여래가 설한 바가 없음”이며 이른바 “너희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말하지 말지니”등 이런 모든 글은 法의 眞體를 나타냄이니라. 부처님이 이런 말을 한 까닭은 모두 사람들의 사견을 널리 헤치고 부처님의 지견을 크게 열기 위함이니 아래의 글에 소위 이와 같이 알고, 보고, 믿고, 이해한다 한 것은 대저 이를 말한 것임인 것을! 세계를 부수어 가는 먼지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천세계가 한 땅덩이로되 三千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으니 一心을 열어서 三智를 삼으며, 一境을 열어서 三諦를 삼으며 一念을 열어서 三惑을 삼으며 一法을 열어서 三乘을 삼음이니라. 그 體는 하나이나 열면 세 가지 이름이 있느니라. 또 三千세계를 부수어 작은 먼지를 만든 것 등은 이 三智로서 열어서 끝이 없는 觀智를 삼으며 三諦를 열어서 끝이 없는 諸境을 삼으며 三惑으로 열어서 다함없는 塵勞의 문을 삼으며 三乘을 열어서 다함없는 수다라 문을 삼음을 비교함이니 본래 셋이라고는 하나 열면 무량이 되는 것이로다. 부처님이 미진세계를 들어 空生에게 물은 것은 모든 법이 體性이 없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거늘, 과연 실로 있지 않은 것으로서 답하시니 黃葉이 끝내 돈이 아님을 잘 알았도다.
<해설> - 무각
“앞에서는 여래의 몸이 眞과 假도 아니며 거래도 없음을 나타내시고, 여기서는 미진이 미진이 아니며 세계도 세계가 아님을 들으사 法相이 곧 法相 아님을 밝힌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는 부처님의 眞體를 나타냄이라. 깨달은 바도 또한 이것이며 증득한 바도 또한 이것이니, 이것인즉 法의 眞體를 나타냄이로다. 말을 거둬들이고 자취를 떨어버려서 眞源에 돌이킴을 보인 것이로다.”
앞에서 부처님의 참 몸을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 하여 부처님의 眞體(참몸)을 나타내 보이셨고, 지금은 “깨달은 바도 또한 이것이며 증득한 바도 또한 이것이니, 이것인즉 法의 眞體를 나타냄이로다.” 하여 法의 眞體(참 몸)를 나타냄으로서 말을 거둬들이고 자취를 떨어버려서 眞源(참다운 근원)을 보이셨습니다.
“佛身은 본래 無爲로되 근기 따라 참으로 응하는 거래가 있음이요, 法性은 본래 生함이 없으나 근기에 대하여 權과 實, 頓과 漸이 있느니라.”
부처님 몸(佛身)은 본래 함이 없는 것으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 佛身을 아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을 형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러한 이치를 받아들이고 믿어지면 깨달은 것입니다.
佛身은 본래 無爲이지만 근기 따라 참으로 응하는 거래가 있으니 有爲로써 나타냅니다. 법의 성품은 본래 生함이 없기에 무생(무생로병사)입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이라 했습니다. ‘융’이란 하나 속에 전체가 포함되어있는 ‘융섭(融攝)’을 뜻합니다. 즉 하나가 있고 다른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를 들면 그 속에 일체가 포괄되어 있습니다. ‘원융’은 둥글게 융섭했다는 뜻입니다. 法性(법의 성품)은 본래 생함이 없으니 ‘무생법인(無生法忍)’입니다. 생사가 없는 법을 ‘인(忍 체험, 깨달음)한 것이 ‘무생법인’ 이고, 생사가 없는 법이란 法性으로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은 法性, 佛身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본래 면목은 법성이고, 내가 누구냐면 본래부처인데, 본래부처는 법의 성품으로 드러나기에 “生함이 없으나 근기에 대하여 權과 實, 頓과 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법성은 본래 生과 死, 生滅이 없지만, 근기에 따라서 權(방편)과 實(실체), 頓(몰록 깨달음)과 漸(점차 깨달아 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一身에서 三身을 나타내고 또 三身에서 미진수의 몸을 나타내시며 一法에서 三乘을 펴시고 三乘에서 미지수의 法을 펴시느니라.”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인데 당신을 지칭할 때 如來라 하여 法身을 말씀하시고, 보신에 대해서는 아미타부처님과 가지가지 정토를 이룬 부처님을 말씀하여 화신 하나(一身)로부터 三身(법신, 보신, 화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三身에서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 수처럼 많은 몸을 나타내셨습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깨닫고 나서 십신 법문은 보광명전에서 설하고, 십주 법문은 도리천에서 설하고, 십행 법문은 야마천에서 설하고, 십회향 법문은 도솔천에서 설하셨지만, 항상 깨달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 가서 설하셨으므로 여기 있으면서도 다 계신 겁니다.
이러한 능력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지옥 같은 마음으로 행하면 지옥에 있는 것이고, 축생과 같은 마음으로 행을 하면 축생계를 동시에 같이 사는 겁니다. 이 몸속에는 육도구류를 다 갖추고 있기에 그 마음과 행이 나올 때마다 그 세계를 동시에 사는 겁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축생의 업식을 많이 쓰면 다음 생에 축생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몸은 그대로 있으면서 그 세계에 가서 설법한 것은 진리가 본래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정되게 생각하므로 가슴에 와 닿지 않지만, 이런 법문을 계속 들으면서 그럴 수 있다고 긍정하게 되면서 오온(五蘊)에 갇혀있는 생각이 자유롭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잘 모르면 “一身에서 三身을 나타내고 또 三身에서 미진수의 몸을 나타내시며”라는 말이 공허할 뿐이므로 영화 같다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실제로 이렇습니다.
예전에 미장원 보살님이 권총 강도를 만났지만, 이 공부를 했기에 마음 가운데 있는 중생 업식이 대적하지 않고 그 업식이 보살로 화해서 권총을 든 사람의 반란세력을 진압했으므로 평화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一身이 곧 三身이 되고 三身이 곧 미진수의 몸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므로 관세음보살님 해준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는 관세음보살과 둘이 아니므로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어서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즉 예전에 관세음보살님이 세운 서원과 자기가 항상 관세음보살의 觀하는 마음을 썼다면, 그 순간 관세음의 원력이 자기와 한마음이 되었기에 내가 그 사람을 제압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로 응해준 것입니다.
불보살님은 중생들의 마음에 무조건 응하지만, 응해주려면 자기가 받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즉 그동안의 자기 수행으로 관세음의 원력을 받아 작용하여 그 사람을 제압하면 그 사람이 바뀌게 됩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있어야 확신을 갖고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자들은 여기저기 많이 하면 한 군데라도 응해줘서 원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면서 보시하는데, 그게 한 부처님이고 한 관세음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을 뿐,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므로 심성과학(마음 성품의 과학)입니다. 그래서 “ 一法에서 三乘을 펴시고 三乘에서 미지수의 法을 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대로 觀하건대 부처님은 眞身, 應身의 거래가 다름이 없고 法은 權과 實, 頓과 漸이 다름이 없거늘 이 뜻을 알지 못한 자는 佛身이 실로 이와 같은 차별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法門이 실로 이같은 名, 數(교리)가 있다고 여기니, 깨끗한 마니주는 그 방향에 따라 각각 나투어서 오색을 비추는 것이거늘 모든 어리석은 자들은 깨끗한 마니주에 실로 오색이 있다고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을 설하여 이르되 “만약 색으로 보거나 소리로 구하면 이는 邪道를 행함이라”하시며 내지“만약 오고 감이 있다고하면 이는 뜻을 알지 못한다”하시니라. 이것은 부처님의 眞體를 나타냄이요, 法을 설하여 이르되 만약 부처님이 四見을 설하였다 하면 이것도 뜻을 알지 못한다 하시며, 내지 말한 바 法相이란 것도 곧 법상이 아니라 하시니, 이것은 법의 眞體를 나타냄이니라.”
앞에서는 부처님의 참 몸을 나타냄이요. 지금은 법의 참 몸을 나타냄이라 했습니다.
“일찍이 설해온 뜻을 관하건대 佛身은 無爲하여 二邊에 卽하여 있되 二邊을 떠났음이요, 法性은 생함이 없어서 名數에 卽하여 있되 名, 數를 떠났음이로다.”
이것은 중도에 관해서 말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습니다.
中道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변(邊)이니라고 답했습니다.
양변을 떠난 것이 중도라 했는데 양변이라고 답했습니다. 왜 邊이냐면, 邊은 중간으로 인해서 邊이 있기 때문이고, 중도란 양변을 떠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이렇게 답한 것입니다. 즉 어느 곳에든지 중도에 집착해 있으면 이미 중도가 아니고 邊이므로 이 邊을 깨뜨리기 위해서 邊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佛身은 함이 없어 二邊(양변)에 卽하여(하나가 되어) 있되 양변을 떠났음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法性은 생함이 없어서 名數(이름과 이치)에 卽하여 있되 名, 數를 떠났습니다.
지금 말한 佛身과 法性의 뜻은 이미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소위 ‘가히 몸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다’이며 ‘가히 三十二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하며, 이른바 ‘부처님은 응당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다’이니 이 같은 모든 글은 부처의 眞體를 나타냄이니라.”
“소위 ‘정한 바 법을 여래가 가히 설함이 없으며’ 이른바 ‘여래가 설한 바가 없음’이며 이른바 ‘너희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말하지 말지니”
49년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설했는데 설한 바가 없다는 것은, 부처님은 마음이 쉬어져서 텅비어 고요하므로 거울같이 밝고 밝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울에 비추어진 諸法을 설한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이것이 누구의 마음이냐면 부처님이 설한 바가 없으므로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없으신 분으로 중생들의 마음을 밝게 비춰서 드러낼 뿐이기에 팔만대장경은 부처님 마음이 아니고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이 비추어오면 그것을 무심으로 밝게 드러낼 뿐이고, 그것이 팔만대장경(법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49년 동안 끝없이 설했지만, 그것이 중생들의 마음이기에 “‘정한 바 법을 여래가 가히 설함이 없으며’ 이른바 ‘여래가 설한 바가 없음’” 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런 모든 글은 法의 眞體를 나타냄이니라. 부처님이 이런 말을 한 까닭은 모두 사람들의 사견을 널리 헤치고 부처님의 지견을 크게 열기 위함이니 아래의 글에 소위 이와 같이 알고, 보고, 믿고, 이해한다 한 것은 대저 이를 말한 것임인 것을! 세계를 부수어 가는 먼지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천세계가 한 땅덩이로되 三千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으니 一心을 열어서 三智를 삼으며, 一境(하나의 경계)을 열어서 三諦를 삼으며 一念(한 생각)을 열어서 三惑을 삼으며 一法을 열어서 三乘을 삼음이니라. 그 體는 하나이나 열면 세 가지 이름이 있느니라. 또 三千세계를 부수어 작은 먼지를 만든 것 등은 이 三智를 열어서 끝이 없는 觀智를 삼으며 三諦를 열어서 끝이 없는 諸境을 삼으며 三惑을 열어서 다함없는 塵勞의 문을 삼으며 三乘을 열어서 다함없는 수다라 문을 삼음을 비교함이니 본래 셋이라고는 하나 열면 무량이 되는 것이로다.”
삼천대천세계의 삼천이라는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끔 팔각형의 형상을 가진 물건을 보여주면서 무슨 생각이 납니까? 라고 질문할 때, 팔정도! 이래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둥근 달을 보고 호떡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법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법으로 봐야 합니다. 부처님께 육법공양을 올리는데, 여기서 법이란 향·등·꽃·과일·차·쌀 등의 물건입니다.
이 각각의 물건에는 그에 맞는 법다운 이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경을 보고 어록을 보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부처님 법으로 보고자 공부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땐가 어떤 경계가 닥쳐도 부처님 법문으로 볼 줄 알고 성인의 길(성문의 이치)에 접어들어 있습니다.
공부는 어떤 모습이 내 앞에 닥치든, 그것을 법답게 볼 줄 아는 正見(바른 안목)을 세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항상 치우쳐 있기에 정견을 세워야 하므로 “一念(한 생각)을 열어서 三惑을 삼으며 一法을 열어서 三乘을 삼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體는 하나이나 열면 세 가지 이름이 있느니라. 또 三千세계를 부수어 작은 먼지를 만든 것 등은 이 三智를 열어서 끝이 없는 觀智를 삼으며 三諦를 열어서 끝이 없는 諸境을 삼으며 三惑을 열어서 다함없는 塵勞의 문을 삼으며 三乘을 열어서 다함없는 수다라 문을 삼음을 비교함이니 본래 셋이라고는 하나 열면 무량이 되는 것이로다.”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오려면 엄마의 난자, 아버지의 정자, 자기의 업식이라는 세 개가 하나로 합쳐져야 합니다. 죽어도 마찬가지로 그 혼이 집에 하나, 묻어 놓은 곳에 하나, 태어난 곳에 하나 있지만, 항상 서로 영향을 주기에 하나입니다.
三世(과거, 미래, 현재)도 지금 한생각 속에 있습니다. 즉 지금 한생각이 과거, 미래, 현재이면서 또 과거, 미래, 현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이렇습니다. 三身(법신, 보신, 화신)도 그렇고 三寶(불, 법, 승)도 그렇습니다. 왜 셋으로 연결되어 있느냐면 이 세상이 원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 그리고 너와 나의 근본, 이 셋을 하나로 합치면 너와 나는 소멸됩니다. 너와 나 이 둘은 상대성의 세계이고, 너와 나를 초월하려면 너와 나 그리고 너와 나의 근본, 이 셋을 합치면 하나가 되는 둘 아닌 도리(불이법)를 깨닫게 됩니다.
“본래 셋이라고는 하나 열면 무량이 되는 것이로다.”라고 한 뜻은,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어 펼치면 무량수가 됩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이 미진세계를 들어 空生에게 물은 것은 모든 법이 體性이 없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거늘, 과연 실로 있지 않은 것으로서 답하시니 黃葉(누런 잎)이 끝내 돈이 아님을 잘 알았도다.”
【六祖】
佛說三千大千世界는 以喩一一衆生性上에 妄念微塵之數가
불설삼천대천세계 이유일일중생성상 망념미진지수
如三千大千世界中所有微塵이요 一切衆生性上에 妄念微塵이 卽非微塵은
여삼천대천세계중소유미진 일체중생성상 망념미진 즉비미진
聞經悟道에 覺慧常照하야 趣向菩提일새 念念不住하야 常在淸淨이니 如是淸淨微塵을
문경오도 각혜상조 취향보리 념념부주 상재청정 여시청정미진
是名微塵衆也니라
시명미진중야
<번역>
부처님이 설한 삼천대천세계는 낱낱 중생들의 성품 위에 망령된 미진의 숫자가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미진과 같음을 비유함이요, 일체중생의 성품 위에 있는 망념인 미진은 곧 미진이 아니라고 한 것은 경을 듣고 도를 깨달으매 覺의 지혜가 항상 비춰서 菩提에 나아가므로 순간순간 머무름이 없어서 항상 청정함에 있음이니, 이와 같이 청정한 미진을 이름하여 작은 먼지들(微塵衆)이라 하느니라.
<해설> - 무각
중생들의 성품 위에 망령된 미진의 숫자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의 수와 같습니다.
일체중생의 성품 위에 있는 망념인 미진은 곧 미진이 아니라고 한 것은 경을 듣고 도를 닦으면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비춰서 菩提에 나아가므로, 생각생각에 머무름이 없어(念念不住)서 항상 청정함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청정한 미진을 이름하여 작은 먼지들(微塵衆)이라 합니다.
자신의 한생각 일어나는 망념을 도 닦는 입장에서 다시 놓고 쉬기만 하면 청정한 미진으로 바뀝니다. 청정한 미진이란 중생심이 보살심으로 바뀐 것으로, 미장원 보살과 같이 자기 속에 있는 미진(중생심)들이 청정한 미진으로 바꿔있다가 닥쳐온 경계에 나아가서 상대방을 제압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우리의 삶이고 막연한 관념 놀이가 아닙니다.
【冶父】
若不入水면 爭見長人이리오
약불입수 쟁견장인
<번역>
만일 물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어찌 큰 사람인 줄 알리오.
【說誼】
黃葉非錢이 是則固是나 理非言外라 卽言卽理니 何須拂去文字코 別求忘言之旨乎아
황엽비전 시즉고시 이비언외 즉언즉이 하수불거문자 별구망언지지호
敎海裏에 得大解脫하고 知解上에 建大法幢하야사 乃可謂寬腸沒量大人也니라
교해리 득대해설 지해상 건대법당 내가위관장몰량대인야
又今師가 直取塵界하야 以明衲僧의 不斷煩惱코 而入涅槃之義也니 伊麽則所謂微塵은
우금사 직취진계 이명납승 불이번뇌 이입열반지의야 이마즉소위미진
塵勞業用이 熾然競作之謂也니라 若向塵勞中하야 任性浮沈하야 而得自在하면
마로업용 치연경작지위야 약향진로중 임성부침 이득자재
則可謂寬腸沒量大人也니 須信道어다 霜天에 知勁草요 火裏에 見精金이니라
즉가위관장몰량대인야 수신도 상천 지경초 화이 견정금
<번역>
황엽이 돈이 아님은 옳기는 옳으나 이치는 말 밖의 것이 아니니라. 말에 卽하고 이치에 卽하니 어찌 모름지기 문자를 털어버리고 따로 말을 잊은 뜻을 구하겠는가. 가르침의 바다 속에서 대해탈을 얻고 알음알이 위에서 큰 법의 깃대를 세워야 이는 가히 속(腸)이 한량없이 넓은 大人이라 이를지니라. 또한 지금 야부 스님께서 바로미진세계를 취하여 이로써 납승의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뜻을 밝힘이니, 이러한즉 이른바 미진은 塵勞業用이 치연히 다투어 지음을 말함이니라. 만약 진로中을 향하여 성품에 맡겨 부침(浮沈)해서 自在를 얻으면 곧 가히 속(腸)이 한량없이 넓은 大人이라 이를지니 모름지기 믿을지어다. 서리 내린 날에야 굳센 풀을 알게 되고 불 속에서야 精金을 볼 수 있느니라.
<해설> - 무각
“황엽(누런 잎)이 돈이 아님은 옳기는 옳으나 이치는 말 밖의 것이 아니니라. 말에 卽하고 이치에 卽하니 어찌 모름지기 문자를 털어버리고 따로 말을 잊은 뜻을 구하겠는가. 가르침의 바다 속에서 대해탈을 얻고 알음알이 위에서 큰 법의 깃대를 세워야 이는 가히 속(腸 가슴 속)이 한량없이 넓은 大人이라 이를지니라.”
지금 있는 상황을 버리고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야부 스님께서 바로 미진세계를 취하여 이로써 납승의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뜻을 밝힘이니, 이러한즉 이른바 미진은 塵勞業用(티끌 번뇌의 업의 작용)이 치연히 다투어 지음을 말함이니라. 만약 진로中에(티끌 가운데) 향하여 성품에 맡겨 부침(浮沈)해서 自在를 얻으면 곧 가히 속(腸 가슴 속)이 한량없이 넓은 大人이라 이를지니 모름지기 믿을지어다. 서리 내린 날에야 굳센 풀을 알게 되고 불 속에서야 精金을 볼 수 있느니라.”
굳센 풀은 서리 내린 후 다 쓰러졌는데 오롯이 서 있기에 알 수 있습니다.
경계가 닥쳐봐야 나의 수행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경계는 자기 공부를 점검하는 좋은 잣대요 선지식이니 싫어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나의 그릇을 알게 됩니다. 작용이 없으면 본체도 깨닫기 어렵습니다. 본체가 있으므로 작용이 있고 작용이 있으므로 본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부처도 없습니다.
【冶父】
一塵纔起翳磨空하니 碎抹三千數莫窮이로다 野老는 不能收拾得하야
일진재기예마공 쇄말삼천수막궁 야노 불능수습득
任敎隨雨又隨風이로다
임교수우우수풍
<번역>
한 먼지가 막 일어나니 그 먼지들은 허공을 간 듯하고
삼천세계를 가루로 부수니 그 수를 다 셀 수 없도다.
野老는 능히 거두고 수습하지 못하여
가르침에 맡겨 비를 따르고 또한 바람을 따르도다.
<해설> - 무각
“한 먼지가 막 일어나니 그 먼지들은 허공을 간 듯하고
삼천세계를 가루로 부수니 그 수를 다 셀 수 없도다.”
한 먼지가 막 일어나니 그 먼지들은 허공을 가는 것과 같고
깨달은 사람은 부숴진 가루의 수를 세지 않습니다.
“野老(깨달은 사람, 야부스님)는 능히 거두고 수습하지 못하여
가르침에 맡겨 비를 따르고 또한 바람을 따르도다.”
법문에 의지해서 내려놓고 비와 바람을 따를 뿐입니다. 즉 파도가 올라오면 같이 올라가고 내려가면 같이 내려갑니다. 경계를 쫓아서 맡겨 놓으면 해결되는 법이 있습니다. 지금 해결하려 하지 말고 다 맡겨 놓으면 됩니다.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고 자성을 믿는 사람은 거기에 맡겨놓습니다.
無我와 空을 깨달은 사람(野老)은 자기가 하려 하지 않고 부처님께 맡기므로 거두고 수습하지 않습니다.
【說誼】
名數之於靈覺에 猶微塵之於太淸이니 微塵을 不勝數라 名數도 亦如然이로다
명수지어영각 유미진지어태청 미진 불승수 명수 역여연
衲僧은 自知無一字하야 從敎名數亂縱橫이로다 又箇裏에 從來無一物하니
납승 자지무일자 종교명수난종횡 우개이 종래무일물
瑩若淸空絶點霞라 一念纔起性空暗하니 諸妄이 競作浩無邊이로다 衲僧은
명약청공절점하 일념재기성공암 제망 경작호무변 납승
自知妄元無하야 無心除斷任浮沈이라 休笑此衲不斷妄하라 火裏生蓮終不壞로다
자지망원무 무심제단임부침 휴소차납부단망 화이생연종불괴
<번역>
名數(이론, 교리)는 靈覺(心性)에 있어서 마치 작은 먼지가 맑은 허공에 있음과 같아서 먼지를 다 셀 수 없음이라. 名數도 또한 그러함이로다. 衲僧은 스스로 한 글자도 없음을 알아서 저 名數가 어지럽게 종횡함에 맡기도다. 또 그 속엔 종래로 一物도 없어서 밝기가 맑은 하늘과 같이 한 점의 노을도 끊어짐이라. 한 생각이 막 일어나면 性品의 하늘을 어둡게하는 것이니, 온갖 망념이 다투어 일어나서 넓기가 가이없도다. 납승은 스스로 망념이 원래 없는 줄 알아서 없애고 끊음에 무심하여 일어나고 스러짐에 맡기도다. 이 납승이 妄을 끊지 않는다고 웃지 말라. 불 속에서 연꽃이 나와야 마침내 무너지지 않느니라.
【圭峰】
三은 不念方便으로 破世界라
삼 불념방편 파세계
<번역>
㉶三. 不念方便으로 世界를 破함이라.
【금강경】
世尊하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가 卽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
세존 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 즉비세계 시명세계
<번역>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圭峰】
本論에 破世界不實之義니 可知로다 無着이 云此破名身이니 世界者는 衆生世故라하니
본론 파세계불실지의 가지 무착 운차파명신 세계자 중생세고
四는 俱約塵界하야 破和合이라
사 구약진계 파화합
<번역>
본론에 세계가 實이 아닌 뜻을 破함이니 가히 알 만하도다. 무착이 이르되 이것은 名身을 파한 것이니 세계란 중생세계인 까닭이라 하다. ㉶四. 함께 塵界를 잡아서 和合을 破함이라.
【금강경】
何以故오 若世界가 實有者인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가 說一合相은 卽非一合相일새
하이고 약세계 실유자 즉시일합상 여래 설일합상 즉비일합상
是名一合相이니이다
시명일합상
<번역>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한 덩어리의 모양이니, 여래께서 설하신 한 덩어리의 모양도 한 덩어리의 모양이 아니고 그 이름이 한 덩어리의 모양입니다.”
【圭峰】
論에 云若實有一世界인댄 如來가 則不說三千界라하며 大雲이 云若實有一界인댄
논 운약실유일세계 여래 즉불설삼천계 대운 운약실유일계
冥然是一和合矣라 則不合有多差別이어니와 今旣三千인댄 明非冥然一矣라
명연시일화합의 즉불합유다차별 금기삼천 명비명연일의
故約三千하야 破一界也라하니 無着이 云爲並說若世界와 若微塵界일새
고약삼천 파일계야 무착 운위병설약세계 약미진계
故有二種摶取니 謂一摶取와 及差別摶取라하며 大雲이 云此明塵衆과 及衆生類를
고유삼종단취 위일단취 급차별단취 대운 운차명진중 급중생류
俱名世界라하다 一合相者는 摶取爲一일새 故云和合이라 此一和合이 有二摶取하니
구명세계 일합상 단취위일 고운화합 차일화합 유이단취
一者는 一摶取니 卽是世界가 和合爲一이요 二는 差別摶取니 卽是微塵이
일자 일단취 즉시세계 화합위일 이 차별단취 즉시미진
有衆多極微일새 名差別摶取니라 非一合者는 第一義中엔 二界無實故니라 五는
유중다극미 명차별단취 비일합자 제일의중 이계무실고 오
佛印無中妄執有라
불인무중망집유
<번역>
論에 이르되 만약 한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곧 삼천세계라 말하지 않았다 하며, 大雲이 이르되 만약 실로 한 세계가 있는 것이라면 명연히 한 덩어리인 것이라. 곧 합당히 많은 차별이 있지 않거니와 지금 이미 삼천이라 하면 명연히 하나가 아님을 밝힘이라. 그러므로 三千을 잡아서 一世界를 파한다 하니 무각이 이르되 세계와 미진계를 아울러 말함일새. 그러므로 二種의 뭉치(摶取)가 있음이니 一摶取와 差別摶取를 말함이라 하다.
大雲이 이르되 이는 먼지들과 衆生類를 함께 이름하여 世界라 함을 밝힌 것이라 하다. 하나로 뭉친 모양이란(一合相) 묶어서 하나가 됨일새. 그러므로 和合이라 한다. 이 一和合은 두 가지 摶취가 있으니 ㉠ 一摶取, 곧 이 세계는 화합하여 하나가 됨이요 ㉡. 差別摶取, 곧 미진은 많은 미진이 모였으므로 차별단취라 하도다. 一合相이 아니라 함은 第一義中엔 二界가 實이 없는 연고니라. ㉶五. 부처님께서는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게 있다고 집착함을 인정함이라.
【금강경】
須菩提야 一合相者는 卽是不可說이어늘 但凡夫之人이 貪着其事니라
수보리 일합상자 즉시불가설 단범부지인 탐착기사
<번역>
수보리야, 한 덩어리의 모양이란 곧 이를 말할 수 없거늘 다만 凡夫들이 그 일에 탐착할 뿐이니라.
【說誼】
微塵이 旣非實有인댄 三千도 亦非實有니 三千이 非實이로대 而有三千之名者는
미진 기비실유 삼천 역비실유 삼천 비실 이유삼천지명자
但假其名하야 以分其界而已라 而其實則豈有三千之異乎아 何以故然고 一地는
단가기명 이분기계이이 이기실즉기유삼천지이호 하이고연 일지
是實이요 三千은 是假니 一地가 是實故로 爲一合相也요 三千이 是假故로
시실 삼천 시가 일지 시실고 위일합상야 삼천 시가고
非一合相也니라 三千이 若實인댄 卽是一合相이요 而非異相이로대 但是異相이요
비일합상야 삼천 약실 즉시일합상 이비이상 단시이상
而非一合相일새 所以로 三千이 卽非實有니 三千이 旣非實有인댄 一地도
이비일합상 소이 삼천 즉비실유 삼천 기비실유 일지
亦非實有니라 何則고 三千이 不外乎一地하고 一地도 亦不外乎三千이니
역비실유 하즉 삼천 불외호일지 일지 역불외호삼천
是眞一合相이라 言詞相이 寂滅이어늘 但諸凡夫人이 不解其所以하야
시진일합상 언사상 적멸 단제범부인 불해기소이
語三千而取三千之名하고 語一地而生一地之解하나니 以明名數가 旣非實有인댄 三乘도
어삼천이취삼천지명 어일지이생일지지해 시명명수 기비실유 삼승
亦非實有니라 三乘이 非實이로대 而有三乘之名者는 但假其名하야 以接其根而已라
역비실유 삼승 비실 이유삼승지명자 단가기명 이접기근이이
而其實則豈有三乘之異乎아 何以故然고 一乘은 是實이요 三乘은 是權이라 一乘이
이기실즉기유삼승지이호 하이고연 일승 시실 삼승 시권 일승
是實故로 爲一合相也요 三乘이 是權故로 非一合相也니라 三乘이 若實인댄
시실고 위일합상야 삼승 시권고 비일합상야 삼승 약실
卽是一合相이요 而非異相이로대 但是異相이요 而非一合相일새 所以로 三乘이
즉시일합상 이비이상 단시이상 이비일합상 소이 삼승
卽非實有니 三乘이 旣非實有인댄 一乘도 亦非實有니라 何則고 三乘이
즉비실유 삼승 기비실유 일승 역비실유 하즉 삼승
不外乎一乘하고 一乘도 亦不外乎三乘이니 是眞一合相이라 言詞相이 寂滅이어늘
불외호일승 일승 역불외호삼승 시진일합상 언사상 적멸
但諸凡夫人이 不解其所以이하야 語三乘而取三乘之名하고 語一乘而生一乘之解하나니
단제범부인 불해기소이 어삼승이취삼승지명 어일승이생일승지해
所謂錯認何曾解方便者가 是已니라 只如一合相은 且作麽生道오 諦緣六度幷一乘이
소위착인하증해방편자 시이 지여일합상 차작마생도 제연육도병일승
混然一味難分析이로다 非一合相은 又作麽生道오 一河雖然不可分이나 象馬兎三이
혼연일미난분석 비일합상 우작마생도 일하수연불가분 상마토삼
爭奈異아 伊麽則非但異相不應執이라 一合相亦不可守니라
쟁내이 이마즉비단이상불응집 일합상역불가수
<번역>
미진이 이미 실로 있지 않다면 삼천세계도 또한 실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實이 아니로되 삼천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세계를 나눴을 뿐이니라. 그것이 실인즉 어찌 삼천의 다름이 있겠는가.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하나의 땅은 實이요 삼천은 거짓된 것이니 하나의 땅은 實인 故로 一合相이 되고 삼천이 거짓인 고로 一合相이 아니다. 삼천이 만약 實이라면 곧 일합상이요 다른 상이 아니로되 다만 이 다른 상이요, 일합상이 아닌 까닭에 삼천이 곧 실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실로 있지 않을진대 一地도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三千이 一地 밖의 것이 아니고 一地도 또한 三千 밖의 것이 아님이니 이는 참된 一合相이로다. 말(言詞相)이 적멸하거늘 다만 모든 범부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三千을 말하면 三千의 이름을 취하고 一地를 말하면 一地의 알음알이를 내나니 이로써 이미 名數가 실로 있지 않음인댄 三乘도 또한 실로 있지 않음을 밝힘이니라. 三乘이 실이 아니로되 삼승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근기들을 제접할 따름이니라. 그 사실인즉은 어찌 三乘의 다름이 있겠는가.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一乘은 實이요 三乘은 權이라 일승이 실인 고로 일합상이되고 삼승이 權인 고로 일합상이 아니다. 삼승이 만약 실이라면 곧 일합상이고 異相이 아니로되 다만 異相이고 일합상이 아닌 까닭에 삼승이 곧 實有가 아니니 三乘이 이미 實有가 아님인댄 一乘도 또한 實有가 아니니라. 왜 그런가. 삼승이 일승 밖의 것이 아니고 일승도 또한 삼승 밖의 것이 아니니 이는 참된 일합상이라. 말이 적멸하거늘 단지 모든 범부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삼승을 말하면 삼승의 이름을 취하고 일승을 말하면 일승의 알음알이를 내나니 이른바 잘못 안 것이로다. “어찌 일찍이 방편인 줄 알리오”한 것이 이것이니라. 다만 저 일합상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四諦, 12인연, 육도와 아울러 一乘이 혼연히 한 맛이라서 분석하지 못하겠도다. 一合相이 아님은 또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나의 강물은 비록 나누지 못하나 코끼리, 말, 토끼 셋이 다름은 어찌 하겠는가. 이러한즉 비단 異相이라 해서 응당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합상도 또한 가히 지킬 것이 아니니라.
<해설> - 무각
“미진이 이미 실로 있지 않다면 삼천세계도 또한 실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實이 아니로되 삼천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세계를 나눴을 뿐이니라.”
핵물리학에서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양성자와 중성자도 물질의 기본 입자인 쿼크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쿼크는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질의 상태에 있기도 하며 어떤 때는 질량이 없는 파동(에너지)으로 존재하므로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진이란 쿼크를 뜻합니다. “미진이 이미 실로 있지 않다면 삼천세계도 또한 실로 있지 않으니”라고 말한 것은 삼천세계를 이룬 미진이 파동의 성질을 가질 때는 삼천세계가 실로 있지 않은 것이기에 “三千이 實이 아니로되 삼천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세계를 나눴을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실인즉 어찌 삼천의 다름이 있겠는가.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하나의 땅은 實이요 삼천은 거짓된 것이니 하나의 땅은 實인 故로 一合相이 되고 삼천이 거짓인 고로 一合相이 아니다.”
一地(하나의 땅)는 空을 뜻하고 ‘一’이란 상대성을 떠난 절대성을 뜻합니다. 일좌(一座 한번 앉는 것), 일식(一食 한번 먹는 것)을 이야기하고, 말 없는 말(묵언)이 진짜 말이라 하여 일언(一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땅은 實”이라 한 것은 모습이 아닌 근본 바탕이므로 앞에서 말한 쿼크라 할 수 있습니다.
있기는 있는데 모습(相)이 없으니 사상(四相)이 없는 자리이므로 一地가 참이고, 삼천대천세계는 四相으로 잠시 이루어진 것이므로 “삼천이 거짓인 고로 一合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一地는 본바탕(本地), 공의 성품(空性), 공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삼천이 만약 實이라면 곧 일합상이요 다른 상이 아니로되 다만 이 다른 상이요, 일합상이 아닌 까닭에 삼천이 곧 실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실로 있지 않을진대 一地도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에 삼천이 참(實)이라면 이것이 일합상입니다. 사실 三千도 一地에서 나온 것이므로 참(實)과 다른 相일 뿐입니다.
“三千이 실로 있지 않을진대 一地도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한 것은 삼천은 일지를 의지해 있고 일지는 삼천을 의지해 있으므로 삼천이 참(實)이 아니라면 일지도 참(實)이 아니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有는 無를 의지해 있고 無는 有를 의지해 있기 때문입니다. 一地를 無라 하고 三千을 有라 한다면, 有가 있는 순간 無가 배대(配對)되어 있는 것이고, 無가 있는 순간 有가 없이는 무가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합상이 아닌 까닭에 삼천이 곧 실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실로 있지 않을진대 一地도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三千이 一地 밖의 것이 아니고 一地도 또한 三千 밖의 것이 아님이니 이는 참된 一合相이로다.”
三千이 一地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一地도 또한 三千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면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으므로 一地이고 나무는 三千으로 줄기, 가지, 잎, 열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보면 三千과 一地가 둘이 아닙니다. 즉 三千은 一地를 의지해 있고 一地는 三千을 의지해 있음을 알아야 이를 이름하여 一合相이라 합니다.
“말(言詞相)이 적멸하거늘 다만 모든 범부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三千을 말하면 三千의 이름을 취하고 一地를 말하면 一地의 알음알이를 내나니 이로써 이미 名數가 실로 있지 않음인댄 三乘도 또한 실로 있지 않음을 밝힘이니라.”
“三乘이 실이 아니로되 삼승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근기들을 제접할 따름이니라.”
三乘도 근기 따라 제접 하기에 三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인즉은 어찌 三乘의 다름이 있겠는가.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一乘은 實이요 三乘은 權(방편)이라 일승이 실인 고로 일합상이 되고 삼승이 權인 고로 일합상이 아니다. 삼승이 만약 실이라면 곧 일합상이고 異相이 아니로되 다만 異相이고 일합상이 아닌 까닭에 삼승이 곧 實有(실로 있음)가 아니니 三乘이 이미 實有가 아님인댄 一乘도 또한 實有가 아니니라.”
앞의【說誼】에서 한 말을 다시 반복하고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왜 그런가. 삼승이 일승 밖의 것이 아니고 일승도 또한 삼승 밖의 것이 아니니 이는 참된 일합상이라.”
이렇게 깨닫는 것이 참된 일합상이란 뜻입니다.
“말이 적멸하거늘 단지 모든 범부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삼승을 말하면 삼승의 이름을 취하고 일승을 말하면 일승의 알음알이를 내나니 이른바 잘못 안 것이로다. 어찌 일찍이 방편인 줄 알리오”한 것이 이것이니라. 다만 저 일합상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四諦, 12인연, 육도(육바라밀)와 아울러 一乘이 혼연히 한 맛이라서 분석하지 못하겠도다.”
“一合相이 아님은 또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나의 강물은 비록 나누지 못하나 코끼리, 말, 토끼 셋이 다름은 어찌 하겠는가. 이러한즉 비단 異相이라 해서 응당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합상도 또한 가히 지킬 것이 아니니라.”
강물은 나눌 수가 없는데 코끼리, 말, 토끼는 어떻게 건너가느냐는 겁니다.
토끼는 강을 건너갈 때 바닥을 딛지 못하고 건너고, 말은 가끔 바닥을 딛고 건너가고, 코끼리는 바닥을 다 딛고 건너갑니다. 연기법을 깨닫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깨달아도 근기에 따라 토끼처럼 알음알이로 겨우 깨달아가는 사람, 말처럼 가끔 연기법의 이치를 체험해 가면서 깨달아 가는 사람, 코끼리처럼 낱낱이 다 체험해가는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圭峰】
論에 云以彼聚集이 無物可取어늘 虛妄分別일새 故云妄取니 若實有者인댄
논 운이피취집 무물가취 허망분별 고운망취 약실유자
卽是正見이라하며 無着이 云世諦에 說摶取나 第一義엔 不可說이어늘 彼小兒凡夫가
즉시정견 무착 운세제 설단취 제일의 불가설 피소아범부
如言說取라하며 大雲이 云執見五蘊하야 取其和合이 是貪着事니 迷於事法하야
여언설취 대운 운집견오온 취기화합 시탐착사 미어사법
起煩惱矣라하다
기번뇌의
<번역>
論에 이르되 저 모인 것들(聚集)의 物은 가히 취할 게 없거늘 허망하게 분별함일새. 그러므로 妄取라고 하니 만약 실로 있는 것이라면 곧 正見이라 하다. 무착이 이르되 世諦에서는 摶取(덩어리)라고 하나 第一義엔 말할 수 없거늘 저 소아나 범부들은 말하는 대로 취한다 하다. 大雲이 이르되 오온을 집착하여 보면 그 화합을 취하는 것이 이 탐착하는 일이니 事法을 迷하여 번뇌를 일으킨다고 하다.
【六祖】
三千者는 約理而言컨댄 卽貪瞋癡妄念이 各具一千數也니라 心爲善惡之本이나
삼천자 약리이언 즉탐진치망념 각구일천수야 심위선악지본
能作凡作聖하야 動靜을 不可測度하야 廣大無邊일새 故名大千世界니라 心中明了가
능작범작성 동정 불가측도 광대무변 고명대천세계 심중명요
莫過悲智二法이니 由此二法하야 而得菩提니라 說一合相者는 心有所得故로
막과비지이법 유차이법 이득보리 설일합상자 심유소득고
卽非一合相이요 心無所得일새 是名一合相이니 一合相者는 不壞假名코
즉비일합상 심무소득 시명일합상 일합상자 불괴가명
而談實相이니라 由悲智二法하야 成就佛果菩提라 說不可盡이며 妙不可言이어늘
이담실상 유비지이법 성취불과보리 설불가진 묘불가언
凡夫之人이 貪着文字事業하야 不行悲智二法하고 而求無上菩提하나니 何由可得이리오
범부지인 탐착문자사업 불행비지이법 이구무상보리 하유가득
<번역>
三千이란 이치로써 말하건대 곧 탐진치의 망념이 각각 일천의 숫자를 갖춘 것이니라. 마음이 선악의 근본이 되어 능히 범부도 되고 성인도 되어서 動과 靜을 헤아릴 수 없어서 광대하고 무변하므로 大千世界라 이름한다. 심중에 명료한 것은 자비와 지혜, 두 법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 두 법으로 말미암아서 보리를 얻느니라. 一合相이라 말함은 마음에 얻은 바가 있는 고로 一合相이 아니요. 마음에 얻은 바가 없음일새 이를 一合相이라 하니, 一合相이란 거짓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고 實相을 말하는 것이니라. 자비와 지혜 두 법을 말미암아서 佛果인 菩提를 성취함이라. 설해도 다 설할 수 없으며 그 묘함은 말할 수 없거늘 범부들이 문자사업에 탐착하여 자비와 지혜 두 법을 행하지 않고 無上菩提를 구하노니 무슨 이유로 얻을 수 있으리오.
<해설> - 무각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법의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뜻(이치)으로 법문을 설하고 있습니다.
“三千이란 이치로써 말하건대 곧 탐진치의 망념이 각각 일천의 숫자를 갖춘 것이니.”
삼천대세계를 말하면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 세 개를 생각하는데, 탐진치의 망념이 각각 일천의 숫자를 갖추고 있습니다. 3 × 1000은 3000입니다. 여기서 왜 1000 곱했을까요? 100을 사용하기도 하고, 10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뜻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千手千眼)이라 하여 항상 千입니다. 지혜의 작용이 광대무변하여 삼천대천세계를 자유자재하게 다니므로 천수천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3에 1000이란 숫자를 갖추었기에 삼천입니다.
“마음이 선악의 근본이 되어 능히 범부도 되고 성인도 되어서 動과 靜을 헤아릴 수 없어서 광대하고 무변하므로 大千世界라 이름한다. 심중에 명료한 것은 자비와 지혜, 두 법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 두 법으로 말미암아서 보리를 얻느니라.”
마음이 선악의 근본이므로 악을 행하면 범부가 되고 선을 행하면 성인이 되어 動과 靜을 헤아릴 수 없기에 광대하고 무변하므로 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라고 한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가장 명료하고 분명한 것은 자비와 지혜고, 또한 가장 뛰어난 것이므로 이 두 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의 지혜를 얻습니다.
“一合相이라 말함은 마음에 얻은 바가 있는 고로 一合相이 아니요. 마음에 얻은 바가 없음일새 이를 一合相이라 하니, 一合相이란 거짓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고 實相을 말하는 것이니라.”
마음에 얻을 바가 없는 마음이 생기면 얻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一合相입니다. 그러므로 一合相은 진리의 本體, 空性, 法性이라 할 수 있습니다.
“一合相이란 거짓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고 實相을 말하는 것이니라.”고 했는데 거짓 이름이란 산과 계곡, 남자 여자, 잘살고 못사는 것 등 잠시 붙여진 이름이고,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 이름을 있는 그대로 놓고 實相(진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산을 밀고 계곡을 메워서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계곡은 계곡대로 산은 산대로 옳은 것이 평등이고 一合相입니다.
“자비와 지혜 두 법을 말미암아서 佛果인 菩提를 성취함이라. 설해도 다 설할 수 없으며 그 묘함은 말할 수 없거늘 범부들이 문자사업(알음알이)에 탐착하여 자비와 지혜 두 법을 행하지 않고 無上菩提를 구하노니 무슨 이유로 얻을 수 있으리오.”
【冶父】
捏聚放開여 兵隨印轉이로다
날취방개 병수인전
<번역>
집합시키고 해산시킴이여. 병사들은 印(깃발, 지휘)을 따라 움직이도다.
【說誼】
有時엔 開三하고 有時엔 合一하니 合一卽三이며 開三卽一이라 三一이 相離하고
유시 개삼 유시 합일 합일즉삼 개삼즉일 삼일 상이
三一이 相卽하니 非三而三이요 非一而一이라 三一이 俱非하고 三一이 俱是하니
삼일 상즉 비삼이삼 비일이일 삼일 구비 삼일 구시
伊麽則殺活이 臨時요 收放이 自由로다
이마즉살활 임시 수방 자유
<번역>
어떤 때는 셋으로 열고 어떤 때는 하나로 合하니 하나로 합한 것이 곧 셋이고 셋으로 연 것이 곧 하나로다. 三과 一이 서로 떠나고 三과 一이 서로 卽하니 三이 아니로되 三이요 一이 아니로되 一이라. 三과 一이 모두 틀리고 三과 一이 모두 옳으니 이러한즉 죽이고 살리는 것이 때에 따름이요 거두고 놓음이 자유롭도다.
【冶父】
渾成兩片이요 擘破劫團圓이라 細嚼莫咬破하야사 方知滋味全하리라
혼륜성양편 벽파겁단원 세작막교파 방지자미전
<번역>
한 덩어리(渾)가 두 조각을 이룸이요
쪼갠 것이 도리어 한 덩어리로다.
잘게 씹되 쪼개지는 말아야
바야흐로 그 맛이 온전함을 알리라.
<해설> - 무각
“한 덩어리(渾)가 두 조각을 이룸이요.”
세상은 한 덩어리(일합상)에서 三天이라는 상대성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쪼갠 것이 도리어 한 덩어리로다.”
낱낱이 만 조각이 났지만 한 덩어리에서 나왔으므로 원래가 하나입니다.
“잘게 씹되 쪼개지는 말아야
바야흐로 그 맛이 온전함을 알리라.“
잘게 씹으면 그 맛을 낱낱이 알아 지혜를 배우게 되지만, 분별하지 않아야 그 맛의 온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說誼】
咬破는 他本에 作空碎라
교파 타본 작공쇄
欲言非異나 爭奈異며 欲言非一이나 爭奈一이리오 欲空三一還三一이라 三一이
욕언비이 쟁내리 욕언비일 쟁내일 욕공삼일환삼일 삼일
方知本圓成이로다 又一本에 云細嚼莫空碎라하니 理之極致는 要須着意精詳이요
방지본원성 우일본 운세작막공쇄 이지극치 요수착의정상
不應偶爾念過니라 古人이 道호대 知有底人은 細嚼來嚥하고 不知有底人은
불응우이념과 고인 도 지유저인 세작래연 부지유저인
一似渾呑可棗라하시니 末後圓成處는 精詳하야사 始應知니라
일사혼륜탄가조 말후원성처 정상 시응지
<번역>
(쪼개다(咬破)는 다른 책에 완전히 부수다(作空碎)로 되어있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나 다른 것을 어찌할 것이며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나 하나임을 어찌하리오. 三과 一을 비우고자 하나 도리어 三과 一이라. 三과 一이 바야흐로 본래 원만히 이룬 것임을 알겠도다. 또 다른 책에 이르되 잘게 씹되 부수지는 말라고 하니 이치의 극치는 마음을 써서 자세하게 할 필요가 있음이요. 응당히 아무렇게나 생각으로 지나치지 말지니라. 옛사람이 이르되 有를 아는 사람은 가늘게 씹어 삼키고 有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대추를 통째 삼키는 것과 같다고 하시니 마지막에 원만히 이루는 곳은 자세히 살펴야 비로소 응당히 알지니라.
【종경】
以世界로 碎如微塵이여 慈尊이 喩巧而玄要요 立權名하야 談其實相이여 凡夫가
이세계 쇄여미진 자존 유교이현요 입권명 담기실상 범부
意絶於貪求로다 與麽會得하면 返本還源하야 背塵合覺이요 不與麽會하면
의절어탐구 여마회득 반본환원 배진합각 불여마회
智同諸佛하야 悲合衆生이어니와 總不與麽하면 巨靈이 擡手無多子하야
지동제불 비합중생 총불여마 거령 대수무다자
分破華山千萬重하리라
분파화산천만중
<번역>
세계를 부수어 미진과 같이 함이여, 慈尊의 비유가 교묘하여 玄要함이요. 方便(權)의 이름을 세워서 그 實相을 말함이여, 범부는 생각이 탐하고 구하는데서 끊어졌도다. 그렇게 알 것 같으면 근본에 돌이키고 근원에 돌아가서 塵을 등지고 覺에 合함이요, 그렇게 알지 못하면 지혜가 모든 부처님과 같아서 자비가 중생과 합하거니와 총히 그렇지 않으면 巨靈神이 손을 들면 별 어려움이 없어서 華山 깨뜨림을 천만 번이나 거듭하리라.
【說誼】
碎界爲塵이여 喩巧意玄이요 依權顯實이여 凡絶追求로다 顯實相則智境이 全彰이요
쇄계위진 유교의현 의권현실 범절추구 현실상즉지경 전창
絶追求則塵勞가 頓息이니 息塵勞則智日이 高懸에 昏衢大朗하야 上同諸佛이요
절추구즉마로 돈식 식진로즉지일 고현 혼구대랑 상동제불
順塵勞則慈雲이 廣布에 甘露普潤하야 下合衆生이어니와 亦不息塵勞하고
순진로즉자운 광포 감로보윤 하합중생 역불식진로
亦不順塵勞하면 巨靈이 擡手威動地하야 萬重山向一摑開리라
역불순마로 거령 대수위동지 만중산향일괵개
<번역>
세계를 부수어 먼지를 만듦이여. 그 비유가 교묘하고 뜻이 깊음이요, 權(방편)을 의지하여 實을 나타냄이여, 무릇 추구함을 끊음이로다. 실상을 나타내면 지혜의 경계가 온전히 드러나고 추구함을 끊으면 塵勞가 단번에 쉼이니 진로가 쉬면 지혜의 해가 높이 떠서 어둡던 거리가 크게 밝아져서 위로는 諸佛과 같음이요, 진로를 따른즉 자비의 구름을 널리 펴서 감로로 넓게 적시니 밑으로 중생과 합하려니와, 또한 진로를 쉬지도 않고 또한 진로를 따르지도 않으면 거령신이 손을 들어 위엄으로 땅을 움직여서 萬重山을 향하여 한번 쳐서 열으리라.
【종경】
一段生涯六不收하니(六은 當作本이라) 從前萬法이 盡非儔라 輕輕擘破三千界하니
일단생애육불수 육 당작본 종전만법 진비주 경경벽파삼천계
直得恒河水逆流로다
직득항하수역류
<번역>
일단의 생애를 본래 거두지 못하니(六은 마땅히 本이라.)
종전의 萬法이 모두 짝이 아님이라.
가볍고 가볍게 三千界를 쪼개어 깨뜨리니
바로 항하의 물이 거꾸로 흐르도다.
【說誼】
一法이 本有라 不可收요 萬法이 無根이라 總非眞이니 法法이 會來歸本源하야
일법 본유 불가수 만법 무근 총비진 법법 회래귀본원
免敎人人逐風波로다
면교인인축풍파
<번역>
一法은 본래 있음이라. 가히 거두지 못하고 만법은 뿌리가 없음이라, 모두 眞이 아니니 法과 法이 모여 本源에 돌아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풍파 따름을 면하게 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