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이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오 성 춘 교수
"은혜를 받을수록 양심의 가책이!"
내가 잘 아는 의사 한 분이 나에게 긴급히 상담을 요청하였다. 그분은 본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뇌성마비 아들을 낳고 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신앙을 얻게 되고, 새로 발견한 기독교 진리를 더 깊이 알기 위해 틈나는 대로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기도하여 온 분이다. 나는 나의 아내와 함께 그 분의 집으로 초청받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당혹스러워 하면서 자기 아내를 상담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들 부부는 강남에서도 은혜로운 교회라는 소문이 나 있는 B 교회에 2년간 출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아내가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기독교 주요 교단들이 이단이라고 정죄한 모 집단에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부부간에 신앙이 다르면 부부금슬도 좋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서 남편도 B교회를 그만 두고 그 집단에 함께 나가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그 아내가 남편에게 준
최후통첩(?)은 이번 주말까지라는 것이다. 그 의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와 함께 이 문제를 상담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분의 아내에게 그 집단에 나가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게 했다. 그런데 그녀의 첫 마디는 B 교회에 2년간 나가면서 너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B 교회 담임목사님은 대단히 설득력있게 설교하시는 분이어서 무슨 제목으로 설교하든지 교인들은 감동을 받아서 아멘으로 화답하고 설교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면, 그녀는 이제까지 전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집안 일에 바쁘고 세상살이에 바빠서 하나님께 약속한 전도는 한번도 못하고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간다. 그 주에 다시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라는 주제로 설교했으면 이 설교를 듣고 이제까지 덮어주지 못한 죄들, 비판하고 비난한 죄들, 정죄했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덮어주는 사람이 되어 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그러나 다시 일주일을 사는 동안에 덮어주기 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다가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간다. 그녀는 교회 나갈 때마다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러한 일을 2년동안 계속하는 동안에 이제는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자기 마음을 짓눌러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가까운 친구의 강권으로 이단이라고 정죄받은 집단에 처음 참석했는데 그 곳에 가니 "∼하라!" "∼살아라!"하고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 주고 하나님은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돌보고 지탱해주고 감싸주고 위로해 주는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곳에서 스트레스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초월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와 자기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사랑이 자기 속으로 가득채워져 오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녀는 이 집단에 참석할 때마다 평화와 기쁨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질문했다. "예수님이 정말로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집단이 예수님이 살아계신 곳이 아닙니까?"
I. 한국교회와 이단
1. 개인주의적인 신앙
이 여인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교회에는 나가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교회에 봉사하지도 않고, 교인들과 함께 활동하지도 않고
구역회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지탱해주고 그녀를 위해 기도해줄 믿음의 식구들이 없었다. 주일마다 양식을 받아먹지만 영적인 고아가 되어서 외톨이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가 은혜받았다는 것도 말씀에 도전을 받았다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음식을 맛있게 먹어도 외톨이의 삶은 언제나 쓸쓸하고 힘이 없고 넘어진다. 그런데 그녀가 친구와 함께
모집단에 참석하였을 때 친밀한 이웃을 발견한 것이다. 자기를 지탱해주는 이웃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꼈다. 십자가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는 수직의 측면을 잃어버리면 방향을 상실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직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녀처럼 수평의 측면, 즉 믿음의 이웃과 신앙 공동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신앙은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적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님의 사역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은 삼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문을 열어놓을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과 성령님의 은사와 교통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단이 등장하면 쉽게 그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문이 크게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나' 개인에게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 '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도하고 복을 주시기도 한다. '나'가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마음에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과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의 구원은 나의 믿음의 결단에 달린 것이다.' 이것이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개인들에게 믿음의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개인들이 열심을 내고, 개인들이 영성을 훈련하고, 개인들이 자기의 신앙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의 목회와 가르침도 개인들이 진리를 깨닫고 결단하여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은 자기의 열심이 자기의 신앙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하여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자기의 마음에 얼마나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얼마나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모델을 본받아 살려고 힘쓰고 있는가를 살핀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성도들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보다는 자기의 열심과 깨달음과 실천을 중시한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결국
인본주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결단과 실천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공동체적인 신앙의 바탕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개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기 보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대한 생명의 저수지로 비유한다면 개인의 신앙은 그 저수지의 생수를 받아서 자라나는 논의 벼에 비유할 수 있다. 저수지의 물이 논에 있는 벼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로라는 통로가 필요하다. 수로가 없이는 저수지의 물이 논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수로에 물이 흘러 간다고 할지라도 그 밭에 물고를 트지 않으면 물이 그 논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 저수지의 물이 논에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로와 물고가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가 개인에게 흘러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수로와 물고라는 개인의 결단이 꼭 필요한 것이다.
사도신조는 8가지 신앙을 고백한다. 처음 세가지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가지는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런데 중간의 두가지는 바로 삼위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가지 선물을 주시는 통로를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공회와 성도들 상호간의 교통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공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푸신다. 이것은 우리가 모일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조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이것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과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는 사울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그 사울에게 빛을 둘러 비취시고 말씀해 주시고 당황하며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섰는 사울에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지도하신다. 그러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땅에 꺼꾸러져야 했고 3일 밤낮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사울을 만났으나 사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며 하늘의 복을 선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일부러 다메섹에 가셔서 믿음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서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케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사도행전 9장 17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예수님은 드디어 사울의 어두운 눈을 치료해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셨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이렇게 말한다.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사울을 치료하고 사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은 분명하게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직접하시지 않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하신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치료와 성령충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저수지이지만 교회와 믿음의 사람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에 있어서 믿음의 사람들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에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셨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 즉 교회공동체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남이 없이는 진정한 신앙에 있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남은 교회를 만남이요,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함이다.
위에 언급한 성도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는 가지만 믿음의 공동체와 만남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순간으로 끝이 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를 통하여 실날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으로 신앙을 이해하여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공동체의 지원과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가 없는 신자들은 마치 고아와 같아서 그에게 약간만 따스한 정을 보내도 그곳으로 빠지고 만다.
2. 인본주의적 신앙
위의 사례의 B는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목사님은 매우 설득력 있게 설교하여 성도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면 이제까지 자기의 잘못 살아온 것을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앞으로 최선을 다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결심을 가지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하나님 없는 신앙이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깨우치고자 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으로 이 땅위에 의와 선을 이루려고 한다. 인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자기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자기의 결단과 실천에 먼저 관심을 집중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일깨워서 인간 스스로 결단하고 최선을 다하여 선을 이루어야 된다고 가르친다. B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자기의 영이 깨우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B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여 살고자 작정했으며, 자기가 결심한 대로 일주일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 목사님의 설교는 사람들의 영을 깨우쳐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말씀을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을 일으켰으며, 성도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정신이 일깨워지고 진정한 마음으로 결단하고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목사님은 사람의 영을 일깨우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교회의 거의 모든 설교와 가르침과 성도들의 의식 속에는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믿음이다. 인본주의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 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목회자 전문잡지 하나에 소개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각광받는 목회자 한 분의 설교를 예로 보자. 그는 곤고한 날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대지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곤고한 날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고 둘째는 '곤고한 날이 올 때에는 유익한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째는 '곤고한 날에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다. 그 목사님은 곤고한 날에 인간들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목사님의 의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하고자 설교하고 있다. 그 목사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곤고한 날을 넘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나 그것도 인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하는 인간중심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단집단들은 영적인 직접성을 신도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단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실재와 직접적이요, 신비적인 만남을 격려하고 그 방법들을 제시한다. 이단의 교사들은 신도들에게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과 감각을 뛰어넘는 신적인 실재들과의 만남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하여 직접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바로 이런한 영적 직접성, 또는 초월적인 실재와의 만남은 한국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현상이다. 예컨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필두로 하여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영적 직접성을 체험하도록 격려해 왔으며 실제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 직접성을 체험하였다고 고백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 수 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직접성을 잃고 지성주의,
도덕주의, 인본주의적 주장을 되풀이 하며 우리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기도원운동, 성령운동, 은사운동 등 뜨거운 체험주의를 이 땅에 불러 들였으며 여기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단집회에서 영적인 초월을 경험하고자 한다.
3. 공동체가 없는 신앙
하나님의 성령님은 위에서 언급한 바 대로 공동체와 믿음의 사람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사람들에게 임하시지만 동시에 그 성령님은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 성도들을 지탱하고 돌보신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들인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전달하신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위에 믿음의 공동체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가 없이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지탱을 받을 수 없다.
위의 B성도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친밀공동체가 없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그녀에게 합당한 가치를 인정해 주고 그녀를 지탱해주고 적극적으로 그녀를 돌보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친구를 따라 이단집단에 가자 그곳에서는 그녀가 맛보지 못했던 친밀한 관계를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자석이 쇠를 끌어 당기듯이 그녀를 그 집단 속으로 끌어 당긴 것이다.
친밀공동체는 1) 사람들의 속에 감추인 것들과 쌓인 것들을 털어놓아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 친밀공동체는 그들의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그들이 어떤 과거가 있든지 상관없이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한다. 3) 친밀공동체는 삶의 위기와 새로운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불안과 문제들을 카타르시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 친밀공동체는 소속감을 충족시켜주며 지탱하고 돌보는 일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친밀공동체를 갈망한다. 신자들은 적어도 교회가 이런 친밀공동체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도 이런 공동체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B성도는 이단집단에 가는 바로 그날 이런 친밀공동체가 거기 있음을 발견하고 감격한다. 그녀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나기 전에 사랑으로 감싸주고 돌보아주는 인간들의 공동체를 만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교회가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지만 실제로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친밀공동체를 경험하고 거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II. 어떻게 이단에 대처할 것인가?
1. 성경의 신앙을 회복하자.
한국출신으로 미국 장로교회 총회장이 되었던 이승만 목사는 취임감사예배에서 "back to the
basic" 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기가 미국 장로교회 총회장이 된 것은 자기를 통하여 미국교회에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하나님은 지금 타락한 세상의 고난을 경험한 사람,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체험한 사람을 통하여 미국교회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교회는 학문적으로 실천적으로 앞서 가는 교회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에게는 지금 복음의 본질, 즉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라져 가고 있다. 미국교회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세워서 복음의 본질을 이야기하게 하려고 계획하셨다."
미국의 한 목사가 한국교회에 와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배우기 위하여 한달을 보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는 곧 쇠퇴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한국교회의 설교, 교육, 행정, 목회, 상담, 전도 등등을 점검하면서 그 목사의 말의 진위를 찾기 위하여 조사하였다. 결론은 그 목사가 한국교회를 제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승만 목사가 주장하는 대로 "back to the basic", 즉 복음의 본질로 되돌아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단들은 복음의 본질을 상실해 가는 한국교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이단을 대처하는 첫 번째 길이다.
1) 성경은 삼위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수 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인간들이 마땅히 따라 살아야할 윤리와 도덕적인 교훈들을 듣기도 하고, 저주에 빠진 인간들이 기도와 헌신의 삶을 살므로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읽는다. 우리는 또한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보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마땅한 인간의 도리를 이야기하는 진리들을 깨닫기도 하고, 인생의 길과 목표와 삶의 구체적인 지침과 지식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것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성경이 증거하고자 하는 중심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변두리에 불과하다.
성경말씀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증거한다.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 그외의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한 아름답고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향하여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우리들을 향하신 아름답고 멋진 계획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전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이요, 사역자들을 세우신 뜻이다.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의 언어와 가르침과 설교와 목회와 모든 활동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사랑의 계획들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성경은 칼빈이 말씀한 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을 증거한다. 칼빈의 지적대로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창조된 세상이 타락으로 사탄의 세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피조물을 향하신 사랑의 계획이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과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좌절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랑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성경은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 머무는 곳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만나는 사람들마다 사탄과 세상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단번에 성취하셨다. 성경은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와 설교와 가르침과 활동 속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의 성령님을 통하여 성취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하신다. 성령님이 오시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분을 따라 살고자 한다. 성령님은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깨닫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나가신다. 성경을 이런 일을 하시는 성령님을 증거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중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목회활동 속에 삼위 하나님이 증거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사탄은 그 틈새를 노리고 이단들을 침투시킬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실 것인가?"를 전달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이다. 삼위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에 어떻게 사탄이 틈을 노릴 수 있겠는가?
2) 성경의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종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여러 선지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기의 사랑과 계획을 전달하셨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성육신하여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
옛적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서 종을 삼으시고 그들을 직접 대면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종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오셨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향하신 사랑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계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여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 어간에 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기간 동안에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몸이 있는 곳에 그 인격이 존재하며, 지체가 하는 일은 그 인격을 대변하여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성령님의 전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만남의 수단들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적으로 배운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들 가운데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고 들음이 없이 예수님을 알고 배우고 믿은 사람이 있는가? 우리들 가운데 교회가 세례를 통하여 받아주지 않았는데 세상의 다른 어떤 다른 단체나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된 사람이 있는가? 우리들 가운데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의 양육과 가르침과 훈련과 격려와 기도와 지탱이 없이 신앙에 성장하신 분들이 있는가? 우리들 가운데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지 않고 믿음의 깊이에 들어가신 분들이 있는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들, 우리가 깨달은 진리들, 우리가 힘쓰는 헌신의 삶들, 우리가 전도하는 전도의 증거들, 우리의 신앙의 삶들 모두는 어디서 배우고 어디서 동기를 부여받고 어디에서 계속하여 활력을 공급 받아 왔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지체인 믿음의 사람들을 거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단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주장한다. 이단들은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무시하고 능욕한다. 그들은 교회를 통하여 신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찌그러진 물통도 사용하여 물을 길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완벽한 물통만이 물을 길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자들이다. 우리가 보는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이 인격과 신앙에서 찌그러진 물통과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물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생수를 공급하실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고 자기들과 같은 완벽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계신 성령님의 전이요,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구원과 사랑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분명한 성경적인 교회론이 정립되어 있는 곳에 이단은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3) 성경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의 생각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시작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이 말씀은 합리적인 이성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말씀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합리 이전의 이야기요, 이것은 과학 이전의 실제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하늘의 하나님의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사셨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재판하고 사형집행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미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이야기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들에게 임하였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은 '오늘과 같이 전기불을 이용하는 과학시대에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것인지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이야기들 가운데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비신화화를 통하여 성경을 진정한 성경이 되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성경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 많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비신화화시켜야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버려야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학적인 주장들은 오늘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성경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을 부인하거나 의심하게 만들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인간의 의지의 결단으로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설교, 교육, 목회, 성도의 삶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결단과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헌신과 인간의 성취등을 조장하고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추방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와 역사를 만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목회와 가르침에서는 과학적이요, 합리적이요, 인간 중심의 깨달음과 결단과 실천만을 만나고 있다. 성도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혼란에 빠져있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서 초월적인 존재의 직접 개입과 역사를 강조하고 자기들은 살아계신 초월자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도 한국교회가 그런 이단들에 그렇게 많이 빠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믿고 가르쳐야한다. 하나님은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학적인 검증과 합리적인 이성의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초월적으로 임재하여 하늘의 신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누구든지 영의 눈을 열고 보면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여 신비한 하늘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한국교회가 지금 우리들 가운데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 은혜와 신비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구원을 끊임없이 받는다면 이단은 발을 붙일 곳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2. 균형있는 영성목회를 실천하라.
영성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 가운데 임재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영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우리들 가운데서 무엇을 행하시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묻는다. 영성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 우리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하늘의 신비를 베푸시고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영성의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분을 만나며, 그분의 은혜를 받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러한 영성은 역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차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리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경험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사랑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으며, 우리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이것은 영성의 수평적 차원이다. 영성의 영적인 차원은 지금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 가운데 오시며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성경과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만 역사하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오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성의 수직적인 차원이다.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의 만남이다. 그러나 그 핵심은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성은 인간의 가능성이나 능력이나 노력이나 헌신을 묻기전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묻는다. 영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초점을 모은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이가 더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갈망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더 많이 경험한다. 영성의 사람은 바울과 같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하늘의 신비를 이 땅위에 이루어 가시는 것을 경험한다. 영성의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드라도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의 역사임을 고백한다.
한국교회는 사람이 무엇을 행하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모든 성도들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모든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그 교회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야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인간이 무엇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무엇을 행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그대로 증거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다.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 한국교회의 영성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영성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단들은 발 붙일 곳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3. 전인목회를 실천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장애인들을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정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고행하여야할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성육신하여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요, 그 몸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보이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몸을 사용하여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우리의 인간과계, 가정, 직업, 더 나아가서는 자연세계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구원하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전인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을 관심
가지시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차원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인간 전인에 관심을 가지시기 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신자로 만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을 낳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애기들이 양육과 성장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엄마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획에 들어오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의 몸과 정신,정서와 인간관계와 가정과 직업과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와 자연환경에까지 꼭 같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지금 성도들을 전인적으로 돌보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전인목회를 위임받은 공동체이다.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이런 전인 목회를 위임 받은 자이다.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전인에 관심을 기울여 목회하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이라는 관심 때문에 사람들의 전인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때에 이단들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 와 사람들의 전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단에 빠졌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전인목회에 힘을 기울이고 헌신한다면 이단들은 설곳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단의 침입을 받고 있다. 한국교회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단들에게 성도들을 빼앗기고 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잃어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게 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찾아 이단에게 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공동체적인 신앙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고자 애쓰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중심의 영성을 상실하고 인본주의 영성을 가르치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찾아서 이단들에 빠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인간 전인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영혼구원, 교회성장이라는 부분적인 목회에 힘을 쓰기 때문에 갈급한 사람들은 이단을 찾아 거기에서 안위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이단을 물리치고 이단의 유혹에서 성도들을 지키는 길은 성경을 성경 되게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며, 목회를 목회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단들은 설곳을 잃고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성경에 분명한 기초를 세우고, 초월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며,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와 구원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여 인격적인 존중과 전인적인 돌봄의 목회를 하고 있는 교회에 어떻게 사탄이 틈을 타고 들어 올 수 있겠는가?
이단이란? 정동섭 교수
먼저 어원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단이란 원래 '당파' '종파'를 뜻하는 의미의 헬라어‘하이레시스’에서 온 말이며, '이단'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heresy'(벧후2:1- 'Heresies')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는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참고 갈5:20, 딛3:10, 요21:10-11). 즉 이교, 이설, 반대론, 분리, 당파, 선택된 의견, 종파, 부조화, 불화, 논쟁, 이단 등의 뜻이다. 영-영 사전에는 "superstition(미신,사교) - all teaching that not conform to confucianism" <미신 - 전통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 모든 가르침>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이교(異敎), 사교(邪敎)라는 뜻의 'cult(ic)'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웹스터의 사전에는 "이단이란 비정통, 혹은 사이비로 간주된 신조를 붙잡고 있는 적은 무리의 종교단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문의 뜻을 보면 이단(異端)이란 "시작은 같은데 끝은 다르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단이라는 말은 사이비종교(또는 종파)와는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사이비란 (似而非)란 이단으로 정죄되지는 않았지만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잘못된 신앙운동을 말하는데 엄격히 말한다면 기독교를 빙자한 유사한 종교집단으로 기독교 같지만 기독교가 아닌 집단을 말합니다. 그 집단의 대표되는 개인이나 무리가 종교에 대한 신앙 자체를 추구하지 않고,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추종자들을 속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집단일 경우가 많습니다.
유명한 월터 마틴(Walter Martin)은 말하기를 “이단은 어떤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 해석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사실 사이비종교·이단·유사종교의 교주들을 보면 거의가 정상적인 신학을 하지 않은 자들로 저들의 성경해석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선택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 레위기 22:18, 21절을 보면 그들이 택한 대로 예물을 드리는 것 즉, 낙헌제를 이단이란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2) 선택된 의견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 조금 전에 인용한 베드로후서 2:1에서는 선택된 의견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멸망케 할 의견들이라고 하였다.
3) 어떤 의견을 고집하는 분파나 분당의 뜻으로 사용한 경우: 고전11:10, 갈5:20, 롬18:17, 행5:17)
따라서 성경에서 이단이란 특정주의나 교리를 공표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깊은 성경공부가 없이는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삼대 시험의 경우를 보아도 이단의 괴수인 사탄은 성경을 인용하여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단이란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갈1:7).
그러나 사이비는 좀 다르다. 중간사 시대를 중심으로 (위경)이라는 것들이 많이 쓰여졌다. 유명한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으로 쓴 책들인데 그러나 사실은 위조 지폐처럼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또 그의 사상이 기록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단과 사이비는 구별되는 것이 옳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단이란 잘못된 교리를 주장할 뿐 아니라, 단순히 틀린 교리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교리이다. 이것을 위해 전통적인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지만 사이비는 기성 교회 안에 속해 있으면서 그릇된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이단의 유형을 보면 크게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정하거나 세속적 계시를 주장하는 경우이다(계22:18-19).
②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믿는다는(롬1:7) 교리를 부인하고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경우가 있다.
③ 골로새서에 나타난 이단으로서 금욕주의자들이 있었다(골2:8-10). 이들은 영지주의자들로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육은 악하므로 묶어 두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금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④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도 근원적으로는 영지주의자들로서 육은 악하니 쾌락을 누리면서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사상이었다.
⑤ 가현설. 이들도 신학적으로 보면 영지주의자들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육은 악하니 어떻게 주님께서 육으로 오실 수 있겠느냐 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예수지 그리스도(신성)가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포함으로써 이 가현설을 비판하였고 요한일서 4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단들과 또 그들의 공격이 있어 왔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들만이 올바른 성경해석을 내리고 있다면서 정통 기독교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와 섭리 가운데 기독교는 위기와 극복, 그리고 발전을 거듭하며 20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정통 기독교 교리 속에는 2000년의 섭리의 역사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이단들 역시 제각기 자신들만이 말씀의 올바른 해석자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역사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물결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끊어짐 없이 면면히 흐를 것이며 구석구석에서 생겨나는 이물질들을 집어삼키고 정화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왜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느냐, 이단의 기준이 무엇이냐"하는 항의성 질문들을 해 옵니다. 그러나 그 '이단 판정'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의 교단들이 충분한 자료 수집과 기도하며 연구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서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개 영적, 정신적, 사회적 악영향을 끼치는 위험한 어떤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됩니다.
이단 사이비 문제 이해를 위한 기초 자료
사이비 이단들의 특성 - 기독교의 진리인 구원의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런데 요사이 한국교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사이비 신앙운동이나 기독교이단들은 성경이나 교리를 왜곡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전통진리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산 이단들의 특성
1. 혼합현상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특히 무속과의 혼합현상이 뚜렷하다. 작금 한국 기독인을 혼란케 하는 귀신론을 예로 든다면 저들은 귀신을 제 명에 못 죽은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샤머니즘적인 사상이요 표현이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의하면 "귀(鬼)는 음영이고 신(神)은 양영으로 차이는 조화에서 오고 두 기(氣)의 양면에 불과하다. 살아 있으면 사람, 사물이고 죽으면 귀신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죽은 영혼이 원귀가 되어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주장은 비 성서적이다.
2. 귀신들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질병이나 사고나 실패나 재난이 모두 귀신에서 온다고 말한다. 감기만 들려도 곳불 마귀가 붙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마귀를 쫓는 일이었고, 인간구원은 마귀로부터의 해방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귀를 알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알려면 마귀를 알아야 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들은 귀신을 위협용으로 사용하여 인간을 귀신에게 예속시키고 있으며, 귀신세력에서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축사법을 사용하여 귀신을 쫓는 자가 능력 있고 신령한 목사로 부각시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3.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한다.
근래에 극성을 부렸던 '시한부 종말론'을 주목해 보자. 이단집단들 중에는 종말들을 앞에 내세우는 집단이 21개 정도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 중에도 다미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을 단언했었다. 이들은 시한부종말론으로 신도를 미혹하고 헌금을 강요하는 위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상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요. 우리 신도는 믿고 소망하며 준비할 것뿐이다. 칼빈은 "누구도 감히 그 날이 언제 임할런지 물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기에 대해 주님 이상으로 관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그런데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년 월 일 시 분까지 단언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닌가?
다미선교회 발행 「예수 공중재림과 휴거를 준비한다」라는 책자에 보면은 "적그리스도는 짐승의 666표를 찍어 자기 백성으로 만들고자 갖가지 린치를 가하며 갖은 고문을 참혹하게 가한다. 눈을 뺀다든가 코 귀를 짤라내는 고통, 손발을 짤라내는 고통...."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환난시대의 광경을 계시로 받았다고 하면서 "표(666)를 거부하는 여자들을 모두 옷을 벗겨 목욕탕 안에 밀어 넣고 적그리스도 요원 남자들을 보내서 욕을 보이게 하며 표를 받게 했습니다." 등으로 환란시대의 광경을 말함으로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묵시는 초대교회의 네로와 같은 폭군이 나와 기독교인들을 박멸하고 핍박하는 상황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최후로 승리할 것을 보여 주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와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보여 주신 것이다.
4. 열광적 신비체험을 특성으로 한다.
사이비 이단들은 인간의 호기심과 신비추구 의욕을 최대 한도로 이용하여 입신, 방언, 안찰, 진동, 접신, 환상 등의 신비하고 격렬한 체험으로 유도하고 이것이 신앙생활의 최고 경지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깊숙히 뿌리내려 있는 무속신앙의 기능으로 엑스타시(황홀경)와 기복심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여간 광신적 신비주의는 모든 이단의 온상이 된다. 허황된 이적을 추구하고 잘못된 신비체험을 따르다 보면 주술적이고 미신적이며 의존적인 신앙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반면 비윤리적이며 탈사회적 혹은 탈역사적인 인간관을 갖게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이 와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고 하시면서 자신의 대속적 죽음과 이로 인한 인간구속의 역사가 참된 기적임을 말씀하고 있다.
한국산 이단의 특성은 무속신앙이나 여타 종교와의 혼합현상을 이루고 있으며 신도들을 공포와 불안으로 유도하여 의존적이고 미신적이며 주술신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단을 척결하고 복음적 신앙과 성숙한 교회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거짓 계시운동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이단, 이단적 개인과 집단들은 하나의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새 예언 새 계시'를 통해 거짓진리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거짓 계시는 주로 종말론에 집중돼 있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과 계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실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대한 관심은 교회사의 모든 세대에 있어서 가장 호기심을 주는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므로 이때를 산정해 보려는 거듭된 노력이 있어 왔고 신적 계시를 빙자한 새 예언 혹은 새 계시가 신적 권위를 빙자하여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교회는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고전 4:6 계22:18). 그러나 2세기 이후 교회사 특히 근년에 와서 한국교회에는 종말론, 미래적 사건, 무분별한 예언과 사적 계시가 범람하고 있다. 많은 이단들은 「새 예언」은 보다 높은 영적 은사이며 이것은 종말의 때를 위한 발전적 계시로서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에 대한 해명과 성경계시에 대한 보충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마 24:36, 행 1:7, 살후 2:1-3 등에서는 재림과 종말에 대한 거짓계시와 거짓예언을 경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에서는 기록된 계시의 가감을 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권위의 궁극성을 부인하는 것은 거짓계시일 따름이다. 장래사에 대한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의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거짓계시운동은 범람하게 된다. 교회사는 「위경운동」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과 이단성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으나 거짓계시는 신적 권위를 가진 정경이라는 미명 하에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성경만이 유일한 규범이며 정경임을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한국교회사에서 1930년대는 보기 드물게 신비주의적 혹은 신령주의적 신앙운동이 전개된 시기였다. 그것은 경제적 시련과 일제의 정치적 압제가 빚어낸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설이나 이단에 대한 분별력을 갖춘 신앙성숙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신비적 열광주의와 거짓 계시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중 황국주는 백일간의 기도를 마친 후 묵시를 받았다고 주장, 자신을 신언(神言)의 대변자로 자처했다. 또 자신의 주장을 계시화하고 추종자를 얻음으로 열광적인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황국주는 후일 삼각산에 기도원을 세우고 소위 목가름, 피가름의 교리를 가르치고 실행했는데 이것은 영체교환이란 이름의 혼음이었다. 황국주 일파의 신비주의적 거짓계시운동은 윤리적 방종을 동반하였으므로 1933년 만주노회와 평서노회에 의해 '위험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황국주 일파는 이단적이라기 보다는 새 계시를 빙자한 사교적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
또 1930년대 함남 원산에서는 일종의 신비적 체험과 예언을 중시하는 신령파운동이 전개되었다. 유명화는 원산감리교회 여신자였는데 27년경 입신의 체험이 있은 후부터 예언활동을 시작했다. 예수가 자기에게 친림했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특수화시킴으로 원산지방에 큰 파문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형성하였다.
한준명 백남주 등도 이단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945년 이후에 나타난 이단을 살펴보면 이재명과 한에녹을 시발로 김백문 문선명 박태선 이뇌자 박명호 이장림과 다미선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는 새 예언 새 계시운동을 주도하고 조직화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과 단체가 이장림과 다미선교회이다.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재림하며 7년간의 대 환란이 있은 후 1999년에는 예수의 지상재림이 있다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시의 종국성을 부정하고 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한다. 그러기에 그는 계시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진군 하군 권양 등을 통해 계시가 계속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계시가 성경의 침묵하는 부분을 해명해줌으로 성경보다 더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정경의 집성과 더불어 종료되었다는 것이 사도시대 이후 기독교의 일관된 사상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장림집단의 새 예언 혹은 새 계시운동은 거짓계시임이 명백하다. 이점은 이장림의 저서 속에 나타난 내용의 불일치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다.
간단하게 살펴보았지만 거짓계시운동은 모든 이단운동의 핵심적문제임이 분명하다. 이단종파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역사적 기독교신앙을 왜곡시키거나 변경시키는 집단인데 일반적으로 이들은 신비주의적 환상이나 접신. 예언 등 사적 체험을 자기들의 교리로 합리화시키는 근거로 제시한다.
한국교회의 종말론적 이단들은 대체적으로 세대주의적 종말관을 따르고 있지만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① 계시의 종국성을 부인하고 새 계시를 주장하거나 위경사조를 지닌 거짓계시운동을 추구한다는 점
②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③ 자기집단을 특수화한다는 점이다. 자기들만이 구원의 대상이며 일반교회보다는 높은 차원의 영적은사 공동체임을 주장한다.
④ 윤리적 삶이나 도덕적 강조, 합당한 삶에 대한 고백이 없다. 그래서 오도된 도덕적 완전주의 혹은 도덕폐기론을 주장하기도 하며 혼음 재산 탈취 등 불의를 저들의 교리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거짓예언자들의 출현을 경고했고(마7:15-23) 사람들을 미혹할 것임을 예고했다(마24:11, 막13:22-2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2:1-2)고 말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바른 성경관, 정경관 정립을 통해 새로운 계시를 빙자한 거짓계시운동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이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단(異端)을 신학적으로 정의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파괴하거나 거부하는 가르침"이다. 즉 교리적 탈선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에서 이단을 언급할 때는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정통신앙에서 이탈한 그릇되고 거짓된 믿음과 가르침"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사회심리학적 측면을 함께 고려하여 이단을 정의하면 "어떤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신학적으로 분파나 배교(背敎) 그리고 이교는 구별돼야 한다. 통일된 교회로부터 의도적으로 분립되려는 것이 분파요 그것이 신앙보다 사랑에 거역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면 배교는 기독교를 버리고 불신앙을 택하는 입장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이단은 그릇된 교리를 주장함과 연관되는 성서신학적인 개념이다.
이단과 정통의 비판은 사회학적 심리학적 신학적인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이단은 신학적 정통의 기준에 비추어 분별되어야 한다. 그릇된 신학이 그릇된 행위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이단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어떤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가. 이것은 아주 복합적인 문제이다.
1. 이단의 배후에는 미혹하는 자 사단(마귀)의 역사가 있다.
2.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 때문이다. 구원파나 여호와의증인 안식교 다미선교회 통일교 등 대부분의 이단은 말세위기의식을 고조시켜 절망감을 안겨주고 자기네들을 통해서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피난처의 희망"을 주입시킴으로 기존 교인을 유혹한다.
3.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사회가 비인간화되고 있는 것이 이유이다.
이밖에도 이단은 보편적인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극단적인 자유주의 성향과 다원주의 △교회의 부패와 분열 △가정의 붕괴와 윤리적 타락 등도 이단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성경은 이단과 거짓선지자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도 거짓선지자들이 있었으며(렘5:31,23: 9 -18) 신약시대에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쾌락주의 금욕주의 율법주의를 비롯해 다양한 이단이 진리를 왜곡해 정통교회를 어지럽혔던 것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알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거짓선지자들의 출현을 예고했으며(마7:15, 마24:11,24)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능력을 행해 추종자를 거느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한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벧후2:5). 예수님은 과실(열매)을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우리는 거짓선지자들과 이단을 식별할 수 있는가.
1. 이단은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지도자에 의해 시작되며 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추종자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2. 대부분의 이단은 성경 이외의 다른 경전을 갖고 있으며 '성경외의 계시'에 의존하다. 통일교의 「원리강론」 몰몬교(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의 「몰몬경」 여호와의 증인의 [새 세계성경]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3. 이단들은 다른 집단이나 개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4. 이들은 이중적인 언어체계를 갖고 있으며 성경의 용어를 기존 교회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5. 거짓선지자들은 정욕적이며 호색적이며 탐욕적인 경우가 많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집요하게 목적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단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특히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거짓선지자가 많은지 어떤 지도자를 따르고 누구의 성경해석을 좇아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거짓선지자의 미혹에 넘어가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그리스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눅21: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정상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그대로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곧 오실 것처럼 떠들어대는 거짓선지자들에 대해 바울선생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서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는 때와 기한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 서둘러서 민족과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이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집단이 1만 2천개나 되고 있다. 둘째 우리는 성경을 옳게 분별함으로 말씀을 가까이 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가 하나 되어 분열되거나 교파 문제로 다투는 것이야말로 이단들이 활개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넷째 이단을 상대로 전도할 때는 비판만 하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을 존중해주며 진지하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지도자들을 순종하고 따르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여섯째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스트레스와 슬픔, 불안을 겪을 때 이단으로 넘어가기 쉽다. 따라서 가정을 대화가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경건을 연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보다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고 이단에 대처하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금식과 기도 말씀 봉사 교제 희생 정절 근검절약 찬양 예배 등의 영성훈련을 통해 주님을 향해 나아갈 때 이단은 결코 발을 붙이지 못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이단이 생겨지는 배경과 이단에 끌리는 이유
① 이단의 사회적 배경 - 무엇보다도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가 혼란할 때 사람들이 어디에 마음을 둘지 알지 못하여 방황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최근의 이단들이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회적 불안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② 기성교회가 건전할 때에는 절대로 이단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 해도 숨어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기성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할 때에 이단들이 춤을 추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교회는 참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급급한 심령들에게 영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고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고 교회는 삶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은 생겨지는 것이다. 오늘의 설교를 보면 만사형통, 소원성취, 만병통치, 사업성공, 건강장수, 행복 보장 등 기복적인데만 치중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③ 중요한 것은 성경적 무지에서 이단이 생겨난다. 사실 이단들만큼 성경을 많이 인용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므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④ 교회의 부정부패에서 이단이 생겨난다. 예를 들면 구원파의 경우 저들은 먼저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을 노출시킨 후에 구원에 대한 깨달음 자체를 구원이라고 하면서 기성 교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미리 아시니 기도가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유명한 사업을 돕는 게 기도라고 함. 장로, 집사제도를 부정하는 등) 마지막으로 자기들의 모임으로 끌어 들인다. 구원파가 대구에 있는 모 장로교에서 생겨진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틈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일단 구원 받으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하든 관계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대판 영지주의자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있고 집단 우월감과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지고 있다.
⑤ 기성 교회의 분열에서 이단이 생겨진다.
⑥ 신학의 부재와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바로 이단의 온상이 된다.
이단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무엇보다도 교회 지도자들이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가져야 한다. 신학교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성경에 정통해야 하며 계속적인 연구를 통한 지적, 영적 재 충전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목회자보다 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② 다음은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져야 이단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이단이란 독버섯은 사회적 혼란이 없이는 자리를 잡을 수 없고 또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③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 칼빈이 말한 계속적인 개혁이 있어서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될 때 이단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 이단은 어두움 속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단은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고 그 틈에서 자라기 때문이다.